우리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머리 속의 ‘세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가장 큰 나라인 미국이 있고, 그것보다 작지만 우리보다 ‘조금’ 큰 나라 일본이 있고, 그 옆에 한반도가 있으며 왼쪽으로는 큼지막하게 중국을 그려놓고 그 속에 상상의 동물과 식물, 미개인 따위를 잔뜩 그려놓는다(대륙의 …라는 이름이 붙는다). 마치 ‘판교 위에 분당, 분당 위에 천당’이라는 식의 농담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의 일부이며, 그 ‘아시아’란 한중일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1987년 민주화 투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버마의 8888 운동이나 중국의 천안문 사태 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아시아 국가들이 동시에 겪게 된 경제 성장과 서구식 민주 사상의 보급, 그것을 억누르고자 하는 통치 이념과의 갈등 등이 모두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치 우리가 벨기에를 바라보며 네덜란드와 그 근처 다른 나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듯, 한국을 바라보는 ‘색목인’들은 이 나라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전제로 놓고 최근 대한민국을 관통한 하나의 큰 사건을 돌이켜보자.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서 시민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 색종이를 뿌리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바 있다. 한국인들이야 내부 사정을 다 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서 이 노란색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그러나 국제 뉴스를 꾸준히 접하는 외국인이 이 광경을 바라볼 경우,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태국의 ‘국민 민주주의 연대(PAD)’일 것이다. 노란색 셔츠를 입고 공항을 점거하여 관광객들의 출입국을 가로막았던 바로 그 단체 말이다.
‘지금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러 나온 시민들을 대체 뭐에 비유하는 거냐’라고 흥분하기 전에, 일단 태국 시위의 전체적인 풍경도를 먼저 들어주셨으면 한다. 2001년 탁신이 태국 총리로 취임하고, 2006년 탈세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태국은 시위의 격량 속으로 빨려들게 되었다. 탁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빨간 티셔츠를 입고, 탁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노란 티셔츠를 입는다. 그 양 집단의 성향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빨간 티셔츠는 태국 북부의 서민들이 주를 이루고, 노란 티셔츠는 태국 남부의 중산층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빨간 티셔츠는 탁신 전 총리와 그의 일당들을 지지하는 반면, 노란 티셔츠는 푸미폰 국왕과 군부의 행동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서서히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태국의 중산층 시위대는 국왕과 군부로 대변되는 태국의 권위적 통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 물론 탁신 총리와 그의 정치적 동료들 또한 민주 투사는 아니지만, 태국의 중산층이 지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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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2008년 12월 2일자 1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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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원론적으로는 중산층의 확대가 곧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객원 연구원인 조슈아 쿨란트치크(Joshua Kurlantzick)에 따르면, 정치적 변화가 결국 자신들에게 손해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중산층들은, 경제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민주주의는 지지하지만, 그 성장의 과실을 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나누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탁신이나 차베스같은 포퓰리스트 정치가가 출현하여, 이른바 ‘빈민 퍼주기’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후,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저소득층에게 경제 성장의 혜택을 안겨주게 될 경우 그 비용은 지금까지 성장의 과실을 누려온 중산층들이 지불할 수밖에 없다. 도시에 거주하는 (대부분이 화이트칼라인) 중산층들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당선된 총리 혹은 대통령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거듭 반복해서 시위를 하며, 결국 그를 쫓아낸다. 문제는 그렇게 누군가를 쫓아낸 다음이다. 이미 투표를 통해 단결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바 있는 저소득층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시위대를 구성하고, 투표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난리 끝에 결국 군부가 개입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사실상 그 효력을 다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단 복잡한 현대 사회와 경제 속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나라를 온전히 통치해내는 경우부터가 매우 드물다. 90년대를 지나며,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군부는 쿠데타로 집권한 후 다음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물러나거나 선거를 통해 추출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들어서는 민주정부라고 해도 기존의 권위를 회복하여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시위가 벌어질 것이고, 또 저차하면 군부가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태국이 바로 그 함정에 빠져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의 인권 탄압, 공권력 남용,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 등을 모두 ‘우리가 찍은 대통령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드러내는 것, 그 과정에서 닥쳐오는 정부의 부당한 탄압에 결연히 맞서는 것은 모두 훌륭한 미덕이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현 정부의 특정한 모습에 반대를 함에 있어서, 또한 현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하고, 그 범위를 기존의 것보다 더 넓게 사용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태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탁신이 총리가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남부의 중산층들이 경제 성장의 과실을 북부의 저소득층, 노동자들과 나누려 들지 않은 데 있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가 당선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저소득층에게 ‘떡고물’을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흘려 정권을 잡는 ‘민주독재’가 횡행하게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이니, ‘한반도 대운하’니 하는 것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은 흔히, ‘대체 국토를 작살낼 뿐인 그따위 공약을 진정 믿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라고 분개하곤 한다. 하지만 함바집 아줌마라면 국토가 어떻게 되건 말건, 당장 자신에게 떨어지는 게 있다는데, 그 공약을 내건 이명박 후보를 찍지 않을 도리가 없다. 뉴타운 개발이나 그린벨트 해제 등도 마찬가지이다. 비판자들은 ‘그런 식으로는 돈 가진 사람들만 1억 벌고, 못 가진 사람들은 100원도 못 받는다’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투표자들은 50원이라도 벌 수 있다면 그런 공약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결국, 이명박 정부 또한 한국 사회의 소득 양극화가 낳은 산물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교육받은 중산층들은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지 않은 반면, 서울 외 지역에 거주하는 저소득층들은 현 정부에 대해 그리 격렬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차베스처럼 저소득층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을 안겨주는 정책을 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생색도 제대로 못 내고 있다. 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를 숙청해버린 후 한국의 군대는 정치와 완전히 거리를 두게 되었다. ‘군사 독재’라는 단어가 욕설처럼 쓰이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민주주의가 혼돈에 빠지고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경제적 민주화’의 요구로까지 향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 큰 불안 속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다. ‘대운하 공약’을 듣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이명박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진 저소득층을 설득해낼 만한 그 무언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도리어 지금까지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그 무언가로 돌변할 수도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결국 ‘경제적 민주화’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