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2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이명박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난다면 - 온두라스 쿠데타를 보며

이런 상상을 해보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상상’임을 확실히 못박아두는 바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제로는 그럴 만한 정치력이 없지만) 한나라당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 자신이 연임할 수 있게끔 헌법을 개정하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이미 겪어서 아는 바와 같이, 거리에서의 항의 시위나 시민단체 및 야당의 반발 따위로는 그의 의지를 가로막을 수 없다. 급기야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완성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 바로 ‘그 일’이 터져버리는 것이다.

온두라스의 상황이 바로 이렇다. 지난 토요일, 호세 마누엘 셀라야(Hose Manuel Zelaya) 온두라스 대통령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관저의 침실에 들어갔다. 비록 대법원은 대통령이 위법 행위를 했다고 두 차례에 걸쳐 선고한 바 있고, 육군과 해군에서도 직접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셀라야 대통령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복면을 쓴 군인들이 그를 깨우기 전까지 그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가 추진하던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예정된 날의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 체포되어 파자마 차림으로 코스타리카로 이송된 그는, 쿠데타에 굴하지 않고 세계 각국에 자신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셀라야 대통령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반미주의의 기수라 할 수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셀라야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유엔에서도 쿠데타를, 당연한 일이지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분위기이다. 온두라스 의회는 재빠르게 셀라야 대통령을 ‘전 대통령’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온두라스 국내의 정확한 반응을 알 수는 없지만, 쿠데타 세력이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 헤럴드경제 6월 29일자 14면.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적법’한 선거에 대한 의혹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이란 사태를 살펴보았다. 그 사건을 두고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를 운운하는 것은 상스러운 행동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국민투표를 한다면 개헌에 성공할 수 있고, 헌법을 바꾼다면 대통령직을 연장할 수 있는 ‘적법’한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나라의 실제 정치 상황만 놓고 보자면 쿠데타를 저지른 군부와 법원에게 어쩌면 더 정당성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일제히 셀라야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번에도 문제의 핵심은 ‘민주주의’에 달려있는 것이다.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자본주의/민주주의는 ‘외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는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북쪽에 위치한 세습왕정국가도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칭하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나라의 모든 정치가 다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 아닌 나라가 없다. 정치적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민주주의냐 민주주의가 아니냐’라는 질문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해졌다. 지금 온두라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바로 그렇다.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쿠데타는 반민주주의이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 수반 대통령의 통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헌법기관에서 반대하는 개헌을 강행하는 대통령의 통치도 과연 민주적인 것인가? 그따위 국민투표가 벌어지는 일이 과연 민주주의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민주주의의 ‘외부’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민주적인 절차 혹은 투표를 통해 헌법을 바꾸고 통치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민주주의의 보증수표가 된다면, 우리는 나치의 독일 지배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2009-06-1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이란 대선 시위, 남의 일이 아니다 - 절차적 민주주의는 절대적인가

6월 13일 선거 결과가 발표된 후, 이란은 폭풍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그 시위를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현 정부의 임기가 3년 반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선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이번 대선은 분명히 ‘합법적’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통, 비밀,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유세 과정에서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밝은 녹색을 상징으로 삼아 축제처럼 선거운동을 진행해 나갔다. 테헤란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지지 집회는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를 붙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랍권을 순방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은밀한 지원 사격도 눈에 띄었다. 바야흐로 이란에도 변화의 물결이 당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 경향신문 6월 15일자 8면.  
막상 투표함을 열고 보니 결과는 기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현임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에자드가 62.6%의 득표율을 올리며 상대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둔 것이다. 이란의 대선은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있기에, 한 후보자가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하면 결선투표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이 압도적인 수치에 무사비를 지지하던 이란 국민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사비에 대한 지지 열풍은 분명히 뜨거웠다. 그런데 이렇게 완패했다니? 선거 조작을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미국의 인권단체 Avaaz에 따르면, 대선 과정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개별적인 증거들은 아직 공식적인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없다. 만약 확실한 증거가 나온다면, 이란의 최고 결정기관인 혁명수호위원회는 무사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디에자드의 지도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7일 오후 7시 현재까지 시위 도중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총 12명. 이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나는 몇 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우선 테헤란을 뒤덮었던 밝은 녹색의 물결을 짚어보자. 무사비의 지지자들은 주로 여성, 도시에 거주하는 전문직 종사자, 고학력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선거 운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와도 같았다. 문제는 그러한 ‘축제와도 같은 선거’가 반드시 민주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논자들은 여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선거운동이 도리어 이슬람 원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고착되어 있는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논리 자체는 부당한 피해자 탓하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느냐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축제’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선거도 축제처럼 하고, 홍보도 유세도 축제처럼 하고, 심지어는 시위도 축제처럼 하고, 등등. 특히 촛불시위에 본격적인 사회 이슈를 접목시키려 들 때마다, ‘촛불시위의 자발성이 훼손된다’거나 ‘축제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의 반발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사태를 놓고 보면 그 축제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축제처럼 선거운동하다가 결국 목숨 걸고 데모하게 된 이란 국민들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무언가를 ‘축제처럼’ 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정치적 성격과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과 이란의 경우를 1대1로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질적으로 이란을 지배하는 집단은 혁명수호위원회이며,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입김에 의해 이번 정국의 방향이 좌우될 것이다. 말하자면 (어쨌건 절차적으로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시위로 인해 물러난다 해도, 이란이라는 나라의 안정성은 그리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반면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 대통령 위의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3년 반 뒤에 한국에서 지금 이란과 같은 시위가 벌어질 경우,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가져올 충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란의 시위를 보며 한국의 3년 반 뒤를 걱정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란이 처한 국제적 고립과 사회적 불평등 등을 놓고 볼 때, 현 국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은 비교적 덜 심각한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해 국민들의 반발을 힘으로 억누른다면 그것은 큰 비극이 될 터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도 그러한가? 우리가 가진 것은 87년 체제의 허약한 정통성 뿐이다. 다음 대선이 치러진 후 이란의 경우와 같은 시위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과연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당한 시위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혹여 그러한 행동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염치불구하고 독자 여러분께 이 질문을 남겨둔 채 이번 칼럼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2009-06-10

‘개혁’과 ‘진보’에게

[판]‘개혁’과 ‘진보’에게 부탁드린다

어느 쪽으로 머리를 두고도 숨을 쉴 수가 없다. 온 대기 중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그리고 중간 반환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2009년, 턱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서울시 용산구에서 장사를 하던 세입자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의 목숨이 화마에 휩싸였다. 건당 수임료 30원을 올려달라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대한통운 사측은 철저히 무시했다. 해고를 통지하는 똑같은 문자 메시지 78통이 전송되었을 때, 휴대폰에서는 서로 다른 통곡처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 도착 알람이 울려퍼졌을 것이다. 박종태씨의 생명이 스러졌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엉이바위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노무현 정권 5년을 지나면서, 이른바 ‘개혁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깊어만 갔다. 개혁은 진보를 일컬어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라고 칭했다. 진보는 개혁을 두고 그런 식이면 영원히 보수 정치의 맥락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고 다그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빛바랜 개혁에 실망하고 진보로 발길을 돌렸지만, 진보진영에서는 그들을 온전히 품어낼 수 없었다.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그래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가 행정부의 수반일 때 해악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반감뿐이었으리라.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이미 부관참시가 벌어지고 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언론이 ‘서거’가 아닌 ‘자살’로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일 00시 현재, 한나라당 홈페이지 게시물에는 한 가족이 웃고 있는 해맑은 화면을 배경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덕수궁 앞에서 시민들이 차린 분향소는 경찰에 의해 수 차례 철거·압수되고 말았다. 마치 용산에서도 그러했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듯이, 화물연대 박종태 지부장의 자살 또한 사회적 타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경찰은, 용산 참사 철거민들의 사체를 유족의 동의도 없이 부검하고, 분향소를 엎으며 영정을 짓밟은 바로 그 경찰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능멸하는 현 정부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야만의 왕국,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삶과 동등하게 존엄하다. 그래야만 한다. 그 지엄한 균형이 허물어질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고 김선일씨 사건 이후로 노무현 정부를 버렸다. 나는 진실로, ‘사람 하나 죽으면 파병 안 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인간의 삶이, 생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평등하게 존중받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개혁’과 ‘진보’ 모두에 너무도 가혹하다. 우리에게는 심지어 애도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단 말인가?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만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가? 시위로 변질될까 우려되는 추모 행사는 아예 하지도 말아야 한단 말인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냉동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언어폭력에 시달린다. 외람된 말이지만 ‘개혁’과 ‘진보’ 모두에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 모든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애도할 수는 없을까. 브레히트의 시구를 보자. “아 우리는/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후손들에게’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그런 세상을 맞거든/관용하는 마음으로/우리를 생각해 다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노정태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6월 8일 경향신문 칼럼입니다. 원래 5월 25일에에 실렸어야 했는데 워낙 기사가 넘쳐서 아예 두 주 뒤로 밀려났네요. 그때 발표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뭐 별 수 없죠.

시청 앞 광장에서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09-06-04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 태국의 노란 셔츠 시위대를 보며

우리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머리 속의 ‘세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가장 큰 나라인 미국이 있고, 그것보다 작지만 우리보다 ‘조금’ 큰 나라 일본이 있고, 그 옆에 한반도가 있으며 왼쪽으로는 큼지막하게 중국을 그려놓고 그 속에 상상의 동물과 식물, 미개인 따위를 잔뜩 그려놓는다(대륙의 …라는 이름이 붙는다). 마치 ‘판교 위에 분당, 분당 위에 천당’이라는 식의 농담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의 일부이며, 그 ‘아시아’란 한중일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1987년 민주화 투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버마의 8888 운동이나 중국의 천안문 사태 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아시아 국가들이 동시에 겪게 된 경제 성장과 서구식 민주 사상의 보급, 그것을 억누르고자 하는 통치 이념과의 갈등 등이 모두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치 우리가 벨기에를 바라보며 네덜란드와 그 근처 다른 나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듯, 한국을 바라보는 ‘색목인’들은 이 나라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전제로 놓고 최근 대한민국을 관통한 하나의 큰 사건을 돌이켜보자.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서 시민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 색종이를 뿌리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바 있다. 한국인들이야 내부 사정을 다 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서 이 노란색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그러나 국제 뉴스를 꾸준히 접하는 외국인이 이 광경을 바라볼 경우,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태국의 ‘국민 민주주의 연대(PAD)’일 것이다. 노란색 셔츠를 입고 공항을 점거하여 관광객들의 출입국을 가로막았던 바로 그 단체 말이다.

‘지금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러 나온 시민들을 대체 뭐에 비유하는 거냐’라고 흥분하기 전에, 일단 태국 시위의 전체적인 풍경도를 먼저 들어주셨으면 한다. 2001년 탁신이 태국 총리로 취임하고, 2006년 탈세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태국은 시위의 격량 속으로 빨려들게 되었다. 탁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빨간 티셔츠를 입고, 탁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노란 티셔츠를 입는다. 그 양 집단의 성향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빨간 티셔츠는 태국 북부의 서민들이 주를 이루고, 노란 티셔츠는 태국 남부의 중산층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빨간 티셔츠는 탁신 전 총리와 그의 일당들을 지지하는 반면, 노란 티셔츠는 푸미폰 국왕과 군부의 행동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서서히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태국의 중산층 시위대는 국왕과 군부로 대변되는 태국의 권위적 통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 물론 탁신 총리와 그의 정치적 동료들 또한 민주 투사는 아니지만, 태국의 중산층이 지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인 것이다.

   
  ▲ 중앙일보 2008년 12월 2일자 17면.  
 
본디 원론적으로는 중산층의 확대가 곧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객원 연구원인 조슈아 쿨란트치크(Joshua Kurlantzick)에 따르면, 정치적 변화가 결국 자신들에게 손해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중산층들은, 경제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민주주의는 지지하지만, 그 성장의 과실을 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나누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탁신이나 차베스같은 포퓰리스트 정치가가 출현하여, 이른바 ‘빈민 퍼주기’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후,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저소득층에게 경제 성장의 혜택을 안겨주게 될 경우 그 비용은 지금까지 성장의 과실을 누려온 중산층들이 지불할 수밖에 없다. 도시에 거주하는 (대부분이 화이트칼라인) 중산층들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당선된 총리 혹은 대통령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거듭 반복해서 시위를 하며, 결국 그를 쫓아낸다. 문제는 그렇게 누군가를 쫓아낸 다음이다. 이미 투표를 통해 단결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바 있는 저소득층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시위대를 구성하고, 투표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난리 끝에 결국 군부가 개입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사실상 그 효력을 다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단 복잡한 현대 사회와 경제 속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나라를 온전히 통치해내는 경우부터가 매우 드물다. 90년대를 지나며,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군부는 쿠데타로 집권한 후 다음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물러나거나 선거를 통해 추출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들어서는 민주정부라고 해도 기존의 권위를 회복하여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시위가 벌어질 것이고, 또 저차하면 군부가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태국이 바로 그 함정에 빠져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의 인권 탄압, 공권력 남용,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 등을 모두 ‘우리가 찍은 대통령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드러내는 것, 그 과정에서 닥쳐오는 정부의 부당한 탄압에 결연히 맞서는 것은 모두 훌륭한 미덕이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현 정부의 특정한 모습에 반대를 함에 있어서, 또한 현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하고, 그 범위를 기존의 것보다 더 넓게 사용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태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탁신이 총리가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남부의 중산층들이 경제 성장의 과실을 북부의 저소득층, 노동자들과 나누려 들지 않은 데 있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가 당선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저소득층에게 ‘떡고물’을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흘려 정권을 잡는 ‘민주독재’가 횡행하게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이니, ‘한반도 대운하’니 하는 것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은 흔히, ‘대체 국토를 작살낼 뿐인 그따위 공약을 진정 믿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라고 분개하곤 한다. 하지만 함바집 아줌마라면 국토가 어떻게 되건 말건, 당장 자신에게 떨어지는 게 있다는데, 그 공약을 내건 이명박 후보를 찍지 않을 도리가 없다. 뉴타운 개발이나 그린벨트 해제 등도 마찬가지이다. 비판자들은 ‘그런 식으로는 돈 가진 사람들만 1억 벌고, 못 가진 사람들은 100원도 못 받는다’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투표자들은 50원이라도 벌 수 있다면 그런 공약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결국, 이명박 정부 또한 한국 사회의 소득 양극화가 낳은 산물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교육받은 중산층들은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지 않은 반면, 서울 외 지역에 거주하는 저소득층들은 현 정부에 대해 그리 격렬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차베스처럼 저소득층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을 안겨주는 정책을 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생색도 제대로 못 내고 있다. 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를 숙청해버린 후 한국의 군대는 정치와 완전히 거리를 두게 되었다. ‘군사 독재’라는 단어가 욕설처럼 쓰이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민주주의가 혼돈에 빠지고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경제적 민주화’의 요구로까지 향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 큰 불안 속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다. ‘대운하 공약’을 듣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이명박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진 저소득층을 설득해낼 만한 그 무언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도리어 지금까지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그 무언가로 돌변할 수도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결국 ‘경제적 민주화’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2009-05-2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부엉이바위의 음모론을 경계하자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수사기관은 완결되지도 않은 수사 내용을 조금씩 조금씩 언론에 흘린다. 기자들은 그것을 받아 적고, 데스크에서는 가장 자극적인 제목을 골라 뽑는다. 그 뉴스를 읽고 독자들은 ‘진실’이 뭐냐, ‘○○설’의 팩트는 뭐냐, 왈가왈부 따지기 시작한다. 정작 제대로 밝혀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는 것은 그저, 피의자의 황폐해진 영혼뿐이다. 그는 설령 수사결과가 무죄로 나온다 해도, 사회가 자신을 평생 죄인 취급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은 선택은 결백을 주장하며 목숨을 던지는 것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타살설 따위를 놓고 벌어지는 인터넷상의 설왕설래를 보고 하는 말이다. 많은 이들은 쉽게 말한다. 조선일보가 문제야, 언론의 선정성이 문제야, 쯧쯧.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 사람부터가, 그 언론에서 흘리는 파편적인 정보를 놓고 누가 진범이네 아니네, ‘시나리오’가 이렇게 나오네 저렇게 나오네, 여론재판에 슬그머니 참여해버린다. 좋은 언론은 결국 좋은 독자가 만들고, 좆같은 언론은 좆같은 독자새끼들이 만드는 거다. 조중동뿐 아니라 모든 언론이 싸구려스럽다면, 그 언론을 소비하는 사람들, 특히 ‘○○설’에 혹하는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기 바란다.

   
  ▲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노 전 대통령이 투신했다고 알려진 봉화산 부엉이 바위가 사저 뒤로 보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유성호  
 
사람들아, 정신 좀 차려라. 이러다가 그 경호원 자살하겠다.

지금 똑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나가던 등산객의 증언, 번복되는 진술, 과연 진실은? 이게 지금이다. 일주일 전에는 이랬다. 박연차 회장의 증언, 번복되는 노무현의 진술, 과연 진실은? 타살설이니 뭐니 하는 떡밥을 덥석 무는 순간, 당신도 결국 조선일보 독자들과 다를 바 없는 팩트 골룸이 될 뿐이다.

안티조선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언론운동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조선일보의 공신력이야 떨어졌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성취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왜 조선일보를 욕하는지, 왜 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공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을 ‘진실 게임’으로 몰아가고, 한 개인의 공적 판단과 선택을 그의 신변잡기와 연루시키는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의 황색 저널리즘을 이겨내는 방법은, 언론의 소비자들이 그런 천박한 ‘팩트’에 관심을 끄고 오직 명백하게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담론을 쌓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모습은 찾아볼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안타깝게 여긴다면, 대체 그 죽음이 왜 닥쳐와야만 했는지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기 바란다. 검찰은 확인되지도 않은 범죄 사실을 언론에 계속 흘렸고, 언론은 그것을 확대재생산했다. 그러한 전방위적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노 전 대통령의 경호원에 대한 수사는, 경찰에서 조용히 하면 되고, 수사 결과 공개는 모든 사실이 확인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사안이 시급하다면, 경찰은 우선 완전히 확인된 사실부터 공개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도 최대한의 신중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어떤가? 이미 또 하나의 여론재판이 시작되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다며 그 여론재판에 끼어드는 사람들, 당신들도 이미 공범이다.

조중동이 어쩌고 저쩌고, 좆중동이네 마네 욕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조선일보 못 이기는 이유가 딴 게 아니다. 그놈의 달콤한 ‘팩트’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거 살살 흘리면서 애간장 타게 만드는 기술이라면 조선일보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 그래서 정작 지나고 보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피의자는 병신 되어 있고 정작 ‘진실’은 과도한 ‘팩트’의 무더기에 갇혀버리고, 환기되었어야 하는 여론의 방향은 오직 ‘진실 게임’에만 쏠려버리는 그런 것 말이다. 지금도 딱 그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그놈의 타살설 때문에 지금 묻혀진 이야기가 뭔지 잘 생각해보라.

서울시청 광장 봉쇄를 둘러싸고, 27일 수요일, 시민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져 가고 있었다. 타살설이 운위되기 전까지 그 문제를 둘러싼 담론이 형성되고 있기도 했다. 정부도 아닌 일개 지자체 서울시가, 국민들의 집회의 자유를 완벽하게 억압하고 있다. 사실상의 집회허가제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그런데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타살설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선량한 사람들 덕분에 완전히 묻혀버리게 되었다. 네, 진실 좋죠. 잘 찾아보세요. 이미 조선일보는 웃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확인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팩트 골룸’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지만, 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놓고 제 깜냥으로 시나리오 써가며 왈가왈부하느라, 정작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을 놓쳐버리는 어리석고 한심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조선일보가 문제라고? 부스러기 ‘팩트’를 주워먹는 당신 같은 독자가 있는 한, 조선일보는 망하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망한다 해도 어차피 같은 식으로 장사하는 다른 언론이 등장할 것이다. 그 품위 없는 언론은 결국 품위 없는 독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언론과 검찰의 수사가 노무현을 죽였다. 이제 그의 경호원도 칼날 위에 서게 되었다.

제발, 그만하자. 떡밥을 물지 말자. 당신들이 낚이는 한 저들은 영원히 낚게 되어 있다. 조선일보의 독자들이 노무현을 죽였듯이, 한겨레의 독자들이 노무현의 경호원을 죽이는 모습을 나는 정말 보고 싶지 않다. ‘사회적 타살’은 바로 그렇게 저질러진다. 떡밥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그것을 물고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 경찰의 수사와 언론의 호응이 다시 한 번 큰 죄를 저지르기 전에, 제발 그만 좀 하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