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11

진보와 콧대

개인적 편견일 수 있겠지만, 품성 좋은 놈 치고 알맹이가 꽉 찬 놈을 본 적이 없다. 여기서 품성 좋다 함은 오옹 님이 "친서민정당 진보신당이라..." 에서 말한 것과 같은 바로 그런 덕목이다. 괜히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인사 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말 절대 하지 않고, 친목질에 능하고,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뚜렷한 자기 주관이 없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세를 잘 따른다.

알맹이가 꽉 찬 놈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방금 다 말했다. 자기 주관과 신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재오도 김문수도 민중당 할 때에는 콧대 높았다. 그들의 콧대가 낮아진 것은 그들이 한나라당에 투신한 다음부터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접어둔 채, 그저 권력을 얻겠다는 목적 의식이 그들의 삶을 지배할 때, 비로소 그들의 콧대는 낮아졌다.

즉 콧대와 권력 의지는 반비례하는 것이다. 정치집단이 권력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권력욕만 남은 정치집단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진보신당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전자가 문제겠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 전체를 놓고 본다면 후자가 더 문제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과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대부분의 보수정당들은, 오옹 님 같은 영세상인들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뒷구멍으로는 그들의 생존권을 말려죽이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진보신당이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은 자신들이 일종의 '소비자'라는 의식 하에서 성립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한 소비자로서의 요구가 과연 바람직한 결과를 낳고 있느냐이다. 가령 한국 소비자들은 '손님은 왕'이기 때문에 왕처럼 대접받고 싶어한다. 대형 마트에 가보면 그렇다. 1+1 행사가 난무하고, 마트 입구부터 출구까지 굽신거리는 점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저렴하고 안전한, 믿을 수 있는 쇼핑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들을 왕처럼 대접하는 그 비용은 결국 당신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굽신거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게 앞에서 데모 같은 것은 안 하고, 대신 찾아와서 인사드리고 부주 팍팍 꽂아넣는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오겠는가? 당신이 낸 세금, 당신이 누려야 할 복지가 정치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대접' 받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하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따위 대접 받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한 사람들이 '유권자=소비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형 마트가 소비자를 우롱하듯 한국의 정치판은 유권자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 자체만 놓고 본다면 좀 더 정치적으로 변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판이 더 '정치적'으로 닳고 닳아야 할 필요는 없다. 즉, 진보신당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방식 역시, 오옹 님이 갈구하는 그런 방향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국민과 정치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정직하게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방향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서로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욕하는, 그런 '친서민'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2010-08-02

2010 지산 락 페스티벌 회고(1)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서는 '나는 내가 루저라고 생각해'이다. 일종의 '루저-되기'인데,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음악의 생산자 및 수요자가 사전적 의미에서의 루저, 즉 사회적 낙오자는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장기하의 중얼거림과 칭얼거림의 경계는 한없이 좁아진다. 중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락 페스티벌에서 꼭 빠른 템포로만 노래 부르라는 법 있나요 어쩌구 저쩌구 칭얼거리는 멘트를 날리고, 숨이 턱까지 받쳐 헉헉거리며 돌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의 대변인. 하지만 정작 관객들은 '미미 안 나왔어? 미미 안 나와? 그 춤 안 춰?'라고 투덜거리고 있었으며, 그걸 짐작한 장기하도 '스페셜 게스트는 없습니다'라고 못을 박았지. 장기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모니터로 본 동영상 속의 그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은 밥 딜런이 일렉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왔을 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이런 음악'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 '저런 음악'을 들려주는 것과 '이런 동영상'을 '직관'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그냥 내 음악입니다'를 들려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일 수밖에 없다. 해상도도 다르고 화질도 다르고 음색도 다른 각자의 스크린을 머리 속에 넣고, 그 원본과 비교하여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관람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더워 죽을 것 같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10-07-29

[기고] 저 민주당과 무슨 연합을 할 것인가? - 이재오, 엄기영, 심상정

이재오는 은평구 토박이다. 문국현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하기 전까지 쭉 그곳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왔다. 지역 주민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다. 그런 이재오가 재보선에 출마했다. 이미 6·29 지방선거에서 정권심판론의 단물은 많이 빠진 상황. 이재오가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길 것인가?

민주당은 신경민 전 MBC 앵커를 영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민 본인이 고사했다. 민주당에게는 '다음 카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선된다면 70세의 초선 의원이 되는, 땅투기 의혹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장상이 후보로 나왔다. 국민참여당의 천호선 후보는 줄기차게 단일화 협상을 요구했지만 민주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곱게 뺨을 대준 민주노동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진보신당은 사회당의 금민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지만 그 결과는 458표. 은평을 재보선의 결과가 이렇다. 이재오를 뺀 모든 선거 참여자가 패배했다.

한편 신경민의 직장 상사였던 엄기영 전 MBC 사장은 선거를 앞두고 강원도에 출마한 한나라당 후보들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개인적인 친분에 따라 지지 방문을 하였을 뿐이라고,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인이 유죄 확정을 받으면 강원도지사 보궐선거가 치뤄질 것이므로, 그것을 노린 포석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정권의 외압으로 신경민 앵커가 마이크를 놓을 때, 그것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하던 엄기영이다. 그 엄기영이 한나라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 두 사례를 종합하여 볼 때 우리는 민주당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민주당과의 적극적인 선거 연대를 통해 진보정치의 외연을 확장한다거나, 심지어 진보정당이 민주당의 '진보 블록'이 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식의 이른바 '빅 텐트'론의 현실을 가감없이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주당은 애초에 빅 텐트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도 없다.

만약 민주당이 파격적인 후보 선택을 통해 은평을 선거에서 승리하고 싶었다면, 장상같은 '그냥 홀딱 깨는' 후보가 아니라, 한 장의 유의미하고 강력한 카드가 존재했다.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왔다가 후보 사퇴와 함께 유시민 후보 지지를 요청했던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를 영입하면 된다. 지역에 깊게 뿌리내린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완전히 신선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후보가 필요하다. 이미 그런 전략으로 이재오는 문국현에 의해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다.

만약 그런 제안이 실제로 심상정 측에 전달되었다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의 대표까지 역임한 간판 스타에게 진보신당 경기도당은 '1년 당직 정지'이라는 징계를 선언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주당이 은평을을 제시했다면 심상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지 민주당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런 적극적인 전략을 세우고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심상정의 의도에 대한 어떤 단정적 추론을 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떠나거나 버리려고 했다면 더 좋은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민주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심상정이라는 대중성과 인지도를 갖춘 진보 인사를 영입할 수 있었던 기회는, 오직 이번 재보선 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장상을 데려왔고, 국민참여당 측에서 끈질기게 요구한 단일화 요구를 결국 선거 직전에서야 수락하였으며, 참패하였다.

말하자면 '빅 텐트'를, 민주당의 입장에서 주도적으로 칠 수 있는 기회는 이번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재오를 꺾으면 '이명박 정부 심판'이라는 민주당의 기조를 꾸준히 유지할 수도 있고, 독자세력을 유지하려 하는 진보신당과 그 외 세력들의 기세를 완전히 허물어뜨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민주당이 진보정당이거나 진보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그들이 정치적 승리를 위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집단이냐 아니냐는 것을 문제삼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민주당은 철저히 몇몇 지도부의 손아귀에서 움직일 따름이다.

스스로의 영역을 더 개척할 능력을 잃어버린 지도부가 지휘하는 정당에서 공천을 받는 것은, 그래서, 특히 정치 신인으로 무대에 데뷔하고 싶은 누군가에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엄기영은 왜 본인의 이미지를 망쳐가면서까지 한나라당의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가? '진보 개혁'적 성향을 지닌 분들께는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민주당의 현실이다. 이념적으로는 사실 한나라당과 크게 다를 바 없고, 하지만 당선가능성은 형편없이 낮고. 그게 민주당이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진보진영 내에서 '빅 텐트' 같은 공상정치소설이 절판되기를 소망한다. 현재의 민주당은 과거의 민주당의 유산을 갉아먹으며 존속하는 이익결사체일 뿐이다. 정권심판론의 바람이 몰아치지 않는 한, 그들은 이재오같은 토박이 거물을 이길 능력이 없다. 그런 판세를 읽고 엄기영은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고 싶은 뉘앙스를 풍기며 바바리 코트를 여민다. 결국 남은 것은 심상정과 같은 진보정치인들의 선택과 결단이다. 썩은 기둥 밑에서 아직도 '빅 텐트'를 부여잡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남은 2년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를 시작할 것인가?

노정태 / 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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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5

그냥 몇 가지 의문

군대가 사람 죽이는 곳 아니면 대체 뭐 하는 곳이란 말인가? 특히 전략 전술의 결정에 참여하지 않는 사병들이 군대에서 배우는 것은, 질서를 유지하면서 타인의 무력 집단을 살해하는 법 아닌가? '대한민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결국 시험 보는 기술일 뿐이다'라는 말과 논리적으로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2010-07-17

김규항 - 진중권 논쟁

김규항은 진중권이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자유주의자로 지칭하고 있다. 애초에 이 '논쟁'이 시작되게 된 배경을 보면 그렇다. 문제가 된 칼럼 "오류와 희망"의 단락을 읽어보도록 하자.

그 에피소드는 대중성 강박에 빠진 진보신당이 보여 온 무수한 프레임 오류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①심지어 진보신당은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같은 그룹을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이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②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지만, ③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은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원문자 강조는 인용자.


굳이 원문자 강조를 해가면서까지 이 문단을 적시하는 이유는, 이 속에 등장하는 논리적 비약을 정확하게 잡아내기 위해서이다. 하나씩 따져보기로 한다.

김규항이 말하는 '자유주의자'의 개념 정의가 '전진'이라는 진보신당 내 정파와 입장을 달리하느냐 하지 않느냐라면, 진보신당은 촛불 이전에도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당내 정치에는 과문하지만, 적어도 전진이 촛불 이전부터 다수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①에 등장하는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같은 그룹"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진보신당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애매했고, 그 약점은 '진보신당연대회의'라는 공식 명칭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①과 같은 이유로 자유주의자로 규정된 진중권은 ②와 같이 촛불 현장에서 활약하여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고, 그 결과 정당의 인지도를 높이고 신규 당원들을 끌어모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유입된 당원들 중 상당수가, 굳이 말하자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실험이 실패한 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던 구 여당의 지지층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현재 진보신당의 당내 여론은 당내 과격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놓고 본다면 ③과 같은 비판은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문장만을 놓고 본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진보신당 내에서도 진보신당이 이른바 '빅 텐트'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심상정의 경기도지사 탈퇴를 그러한 차원에서의 사전 포석으로 해석할 여지가 존재하므로, 김규항의 비판은 그 말 자체로서는 충분히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③에 등장하는 '자유주의 정당'이라는 어구의 '자유주의'와, ①과 ②에서 진중권을 지칭할 때 쓰인 '자유주의자'의 '자유주의'가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냐이다. 그 지점에서 이 칼럼이 내재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논리적 비약을 관찰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중권이 자유주의자라고 비판받은 이유는 전진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전진과 나는 생각이 비슷한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지 않아서이다. 그러한 수준의 자유주의를 편의상 '자유주의 A'라고 부르기로 하자. 한편 진보신당의 정체성과 어긋난 정책 및 선거 전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심상정 뿐 아니라 노회찬도 선거 후보 때려치우고 '반 MB 전선'을 위해 투신해야 한다는 그런 소리 말이다. 김규항이 ③에서 비판하는 신규 유입 당원들 중 적잖은 수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자유주의 B'라고 해보자.

자유주의 A와 자유주의 B사이의 간극은 대단히 크다. 전자는 진보신당의 정체성 내에서 그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이견을 놓고 생기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진보신당의 존립 이유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규항은 '자유주의자' 진중권의 활약으로 인해 진보신당이 숫제 '자유주의 정당'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슬쩍 모른채 뒤섞어버린다.

문제는 김규항 식으로 정의된 자유주의 A에 나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다. 전진의 이념적 정체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진보신당에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규항이 자유주의 A를 지칭할 때처럼 말한다면 진보신당 내에 자유주의자가 아닐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게에서 심상정 자진탈당하라고 목소리 드높이는 그 20여 명?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심상정 노회찬 두 사람 모두 전진 소속이 아니니까 그 둘도 자유주의자일 테고, 흐음….

말하자면 김규항은 '자유주의'라는 테마에 대한 논쟁의 수준을 대단히 유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회주의 만세, 라고 선언하지 않으면 자유주의라는 식이다. 그런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김규항과 같은 식의 잣대를 누군가 들이밀 때, 울컥 하는 심정에 '그래, 나 자유주의자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에 휩싸이지 않을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 사회주의, 결국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걸까?

김규항 식 기준을 놓고 볼 때, 심지어 그 비난을 무릅쓰고 선거를 완주한 노회찬조차도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렵다." 실천이 아니라 선언에서 제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선거와 투표는 후보자와 유권자가 임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체성 시험의 장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실질적 정치적 지향성을 명확하게 판가름해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보신당 내에 존재하는 '자유주의 B'의 문제점이다. 그런데 김규항이 비판하는 '자유주의자' 진중권 및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려"운 노회찬만 해도, 그 '자유주의 B'와의 갈등을 뼈가 시리도록 겪어왔고 또 이번 선거에서도 겪지 않았던가.

선언의 대상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닌 정치적 목표로서의 사회주의를 상정한다면, 그것이 '자유주의 A'가 되어버리는 것은 현실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며 정치 세력 및 정치인으로서는 그것을 감내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그 어떤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존립 이유를 포기하는 결정과 혼동될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김규항의 '자유주의자'라는 비난은, 한 칼럼니스트로서 택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하고 게으른 선택일 뿐 아니라, 진보신당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화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심지어 최장집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재평가 흐름과도 무관한, 한낱 사변적 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