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2

The physical amount of nuclear waste

Nuclear waste has, for many years, seemed an almost insoluble problem, at least politically in the United States. But when seen in relative terms, the problem of nuclear waste starts to look very different. The physical amount of nuclear waste that would have to be managed and injected underground with a mojor carbon-storage program. All the nuclear waste generated by the entire civilian nuclear program would fill no more than a single football field[인용자 주: 120 yards * 53.3 yards = 109.3m * 48.7m = 5322.9m^2]to the height of ten yards[인용자 주: 9.14m]. By comparison, the output of CO2 from a single coal plant, put into compressed form, would require about 600 football fields--and that would be just one year's output. 

Daniel Yergin, The Quest, Chapter 20, Kindle location 6792

2014-10-05

[별별시선]성역 없는 진상규명, 진상 없는 성역규명

세월호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하면서 이른바 ‘세월호 정국’이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건 초기부터 넓은 의미에서 야권과 적잖이 다른 입장을 표명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이 결말 앞에 한없이 착잡한 심정이다.

야권은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입장을 대변해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그로 인해 세월호특별법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그 중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가 논의의 쟁점이 되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다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의혹을 낱낱이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 야권의 설명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이미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검경 합동수사본부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성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역을 수사하고 기소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특검이 됐건 진상조사위원회가 됐건, 수사를 하고 기소를 하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많은 경우 공소가 기각될 가능성이 크다. 둘째, 그러므로 세월호특별법에 부여하고자 하는 수사권과 기소권은 ‘성역’을, 다시 말해 청와대를 겨냥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까지 왔으니 부디 아니라고 하지 말자. 굳이 범위를 더 넓히자면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정도가 기존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셋째, 그렇다면 야권은 세월호특별법을 통해, 청와대를 수사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청와대에 요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요구를 상대방이 받아줄 턱이 없다. 설령 야권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을 모두 압승했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선거에 졌기 때문에 세월호특별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다기보다는, 통과시킬 수 없는 법을 선거의 쟁점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에 선거에서 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전국 단위의 지방선거라 해도 지방선거는 어디까지나 지방의 살림을 책임질 사람들을 선출하는 선거다. 제아무리 규모가 커도 재·보선은 국회의 빈자리를 채워넣기 위한 선거다. 하지만 야권은 이 각각의 선거에 세월호특별법의 명운이 달려 있다는 뉘앙스를 한껏 깔았다.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세월호특별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앞서 말했듯 ‘성역’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대해서는 이미 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여권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하는 세월호특별법’을 ‘박근혜 특별법’쯤으로 받아들인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논의의 초점은 어느새 세월호에서 박근혜로 넘어가 버렸다. 닳고 닳은 표현을 빌리자면 ‘프레임’을 빼앗긴 셈이다. 경제학자 우석훈이 <내릴 수 없는 배>에서 말한 것처럼, 세월호가 침몰한 후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정작 사람들은 여객선이 아니라 박근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 27년 된 노후 선박 바캉스호가 세월호 참사 다음날 안전검사를 통과해 운항하고 있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특별법’에 정신이 팔려 ‘세월호’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의원을 포함해 야권의 주요 정치인들이 단식까지 해가며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진상 없는 성역 규명’뿐이다. 우리는 세월호라는 배에 대해, 그 배의 침몰 원인 등에 대해,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이번 세월호 정국을 통해, 박근혜라는 한 정치인이 한국 사회의 성역으로 올라섰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졌다.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인신공격과 비방을 삼가라고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해 직접 훈계하는 시대가 열리고 만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한, 스스로를 성역으로 규정하는 성역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권위주의적·구시대적 사고방식에 맞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과 시민들의 몫이다. 가족과 친지를 잃고 형언할 수 없는 비탄에 빠진 세월호 유족들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한 것부터가 큰 잘못이라는 말이다. 세월호 유족을 앞세웠던 야권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다. 통렬한 반성과 자기 비판을 요구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052105485&code=990100&s_code=ao122

2014-09-30

[북리뷰]진보면전에 내다꽂은 ‘도덕 이론’

[북리뷰]진보면전에 내다꽂은 ‘도덕 이론’


싸가지 없는 진보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1만3000원

지식인의 임무는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지성을 이용하여 그 어떤 감정적 반응을 내놓기에 앞서, 대상을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지식인의 역할이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실용적인 책이다. 진보 정당들뿐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까지를 포함해 넓은 의미의 ‘진보’라 부르는 강준만은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고 혐오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200쪽)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는 판단한다. 속된 말로 ‘싸가지 없는 진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진보가 ‘싸가지’를 상실하고 있는 한 정권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전체 유권자를 대략 보수 40%, 진보 40%, 중도파 20%로 나눈다면, 그 중 중도파 20%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싸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만이 이 책의 부제에 적혀 있는 것처럼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이라고 강준만은 주장한다. 그가 조너선 하이트, 조지 레이코프 같은 미국의 지식인들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논의 전개와 결론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연구는 분위기나 경제적 유인에 좌우되는 ‘중도층’이 아니라 자신들의 확고한 윤리 체계를 가진 사람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40%의 콘크리트 보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강준만은 이 책에서 보수가 아닌 진보의 ‘싸가지 없음’을 분석하고, 정권을 되찾기 위해 ‘싸가지’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는 그런 의미에서 ‘도덕 이론’을 한국에 적용했다기보다 한국의 진보세력의 면전에 ‘도덕 이론’을 내다 꽂은 책이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지난 8월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다. 워낙 제목이 강렬해서인지, 아니면 강준만이라는 ‘원조 논객’의 영향력이 살아 있어서인지, 즉각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진보의 문제는 싸가지가 아니라 콘텐츠가 없다는 것’이라는 반박을, 칼럼니스트 박권일은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수사법으로 인해 오히려 시민들이 정치 상품의 소비자로 전락한다’는 촌평을,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진보는 공감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문제’라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남겼다.

기사를 유심히 읽어본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세 사람 가운데 그 누구도 저 각각의 코멘트를 내놓을 시점에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읽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 명의 논객들은 각각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제목만을 두고 각자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장착되어 있던 논의를 하나씩 꺼내어 늘어놓았을 뿐이다. 결국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에 대한 토론은 온데간데 없고,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세 마디 어구에 대한 가벼운 설왕설래가 벌어진 후 사람들은 이내 관심을 잃어버린 듯하다.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과 그것을 둘러싼 논란이 보여주는 진보의 현실이 바로 그런 것이다. 미국의 도덕 이론을 원용하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유권자에 대한 심층 분석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책을 읽지도 않은 다른 지식인들은 그저 제목만을 놓고 입씨름을 벌인다. 특히 이 책에 대한 반응을 보면, 한국의 진보는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문제인 것 같다.

<노정태 ‘논객 시대’ 저자/ 번역가>
2014.09.30ㅣ주간경향 1094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9231101121&code=116&s_code=nm038

2014-09-22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훔쳐볼까봐 걱정된다면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훔쳐볼까봐 걱정된다면


요 며칠 사이 사람들 사이에 Telegram(https://telegram.org/)이라는 채팅 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고 있다. 아무래도 며칠 전인 9월 19일, 검찰에서 '인터넷 명예훼손 전담 소송팀'을 출범시켜서 포털, SNS, 카카오톡을 언제나 감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돈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인다.

한 가지 사례를 만들어보자. 당신이 구성지게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하는 대화 내용을, 단체 대화방에 있던 누군가가 캡쳐했고, 그 내용이 '짤방'으로 매우 흥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부주의하게도 당신의 대화명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 대화명이라는 게 딱 보고 누구라고 분간할 수 있을만큼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카카오톡의 협조가 없다면 감히 존엄하신 박근혜 대통령님을 모독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고 해보자.

이 경우 경찰이나 검찰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1.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온 후, 카카오 본사에 간다.
2.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받아오지 않고도, 카카오 본사에 간다.

당연히 어떤 시점까지는 2번이 정답이었다. 어떤 시점까지 그랬다는 것은,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는데, 천천히 보면 어렵지 않다.

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고 해보자. 여기서 우리는 '정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통화를 하는 '나'의 이름이나 주소 등의 신원 정보. (2) 내가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는 사실로부터 파생되는, 통화 시간, 상대방의 전화번호, 통화 위치 등의 기타 정보. (3) 통화 내용 그 자체.

통신비밀보호법은 여기서 (1)에 해당하는 내용을 '통신자료'라고 부르고, (2)는 '통신사실확인자료'라고 하여 따로 규정한다. (3)은 내용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떤 법적 호칭은 없다. 그런데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르면 (2)와 (3)은 영장을 받아와야 통신사로부터 수사기관이 자료를 넘겨받을 수 있는 반면 (1)은 그렇지 않다.

다시 우리의 카카오톡 단톡방 사례로 돌아가보자. 이 경우 (주)다음카카오는 설령 검찰이 와서 대뜸 '내놔'라고 하더라도, 통신사실확인자료에 해당하는 것, 즉 당신의 그 단톡방에 누가 있었고 당신이 그 드립을 언제 쳤는지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면 안 된다. 검찰이 영장을 가지고 오지 않는 한, 그런 자료를 제공하면 다음카카오라는 회사도 처벌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드립을 친 당신이 누구냐 하는 것, 즉 '통신자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영장을 받아와야만 하는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통신사업자는 수사기관에 그 정보를 임의제출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그 '통신자료', 즉 '카톡에 꼬끼요 라고 적은 애 이름하고 주소 불러'는, 수사의 기본이며 수사기관이 가장 필요로 할 가능성이 큰 정보라는 데 있다. 어디 사는 누군지 알면 수사의 반은 끝난 것이다. 게다가 영장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어떤 시점까지, 경찰과 검찰은 국내 통신사업자들에게 '통신자료'의 제출을 요구하고, 통신사업자들은 별 생각 없이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관행처럼 통용되어 왔다.

그 '어떤 시점'이란 그럼 무엇인가. 세 사람이 관련되어 있다. 김연아, 유인촌, 차 모씨. 2010년, 김연아 선수에게 유인촌 전 문화부장관이 포옹을 요청했는데, 김연아 선수의 표정은 썩 달갑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차 모씨는 영감을 얻어, GIF 파일의 프레임을 몇 개 빼는 방식으로, 김연아 선수가 유인촌 장관의 포옹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듯한 영상(처럼 보이는 이미지 파일)을 만들었다. 이른바 '회피 연아' 영상이다.

그 파일은 처음 어떤 네이버 까페에 올라갔다는데, 그리고 나서는 여기저기 퍼졌고, 유인촌은 이거 만든 놈 누군지 몰라도 경찰 수사를 의뢰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경찰은 동영상의 최초 유포자를 찾다가 결국 네이버 까페에 도달했고, 늘 그렇듯 (주)NHN을 향해 '아이디 뭐뭐뭐 쓰는 사람의 주소, 이름, 전화번호, 기타등등을 제공하라'며 임의제출을 요구했다. 당연히 당시의 NHN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고, 차 모씨는 난데없는 송사에 휘말렸지만, 유인촌이 고소를 취하하면서 일단 명예훼손 건은 마무리됐다.

문제는 차 모씨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는 NHN을 향해 소송을 걸었다. 당시의 기사를 인용해보자.

유 전 장관은 고소를 취하했지만 차씨는 NHN이 경찰에 자신의 인적사항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소송을 걸었다. 1심에선 차씨가 패소했고 지난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선 “약관상의 개인정보 보호 의무를 지키지 않고 인적사항을 경찰에 제공했다”며 원심을 깨고 NHN에 “50만원을 지급하라”는 일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서윤경, "‘회피 연아 동영상’ 이후 포털 업체들 “수사기관 통신자료 요청 제한적으로만 협조할 것”", 국민일보, 2012년 11월 1일.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6587774&code=11151100&sid1=eco&sid2=0001

2012년 연말 이후, 그래서, 한국의 통신사업자들은 기존의 관행을 바꿔, 수사기관에서 이용자의 '통신자료', 다시 말해 신상정보를 요구하더라도 잘 내주지 않는다. 올해 4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합동수사본부는 카카오톡 자료를 좀 보고 싶어했는데, 그 경우에도 압수수색을 해야만 했다. 이전처럼 '통신자료'를 그냥 제공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수사를 위해서는 '통신사실확인자료'도 필요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정리해보자. NHN이 됐건 카카오가 됐건, 국내의 통신 사업자는 만약 통신자료를 함부로 제공했다가 소송이 걸릴 경우, 물어줘야 하게 생겼다. 그러니 이전처럼 경찰에서 되는대로 이용자의 신원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과민한 일이다. 하지만 국내 법원의 영장을 받으면 그들은 상당히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바로 그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받을 경우, 아예 서버를 이용하지 않는 비트토렌트 챗(http://labs.bittorrent.com/experiments/bittorrent-chat.html)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다음에야(이것도 현재 알파 서비스 단계) 완벽하게 공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온라인'에 정보를 보내지만 그 '온라인'은 어딘가에 놓인 서버에 저장되는 디지털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의 법원이 발급한 영장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한국 수사기관의 협조 요구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이석기 일당을 때려잡아야 하는데 그런 온갖 절차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검찰의 심정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지메일은 구글 본사가 있는 미국에 서버를 두고 있는 데다 가입 시 개인정보를 기재할 필요가 없어 수사당국의 압수수색 및 추적이 어렵다. 구글은 우리 사법당국이 요청할 경우 내부 기준에 따라 일정 부분 이메일 내용 열람을 허용하고 있지만, 복잡한 사법 공조 절차 등으로 인해 실제로 압수수색이 이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의 법 집행력이 지메일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공안사범들은 실제로 2000년대 후반부터 국내 이메일보다 지메일을 사용하고 있다.

조선닷컴, "'이석기 R0 수사' 발목잡는 구글 지메일…美측 사법 공조에 불응 압수수색 못해", 2014년 6월 24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24/2014062402763.html

즉, 한국의 수사기관이 특히 지메일을 '종북메일'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의 입김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서버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스노든이 폭로한 바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을 해킹한 NSA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 경우에는 영장 없이 개인의 정보를 무작위로 도감청한 것이고, 이 경우에는 영장이 있어도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다. 반면 당신이 미국인이고, 미국에서 사건을 터뜨렸고, 미국 경찰에 의해 수사받고 있다면, 그 범죄가 무엇이냐에 따라 구글은 아주 흔쾌히 당신의 계정에 대한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출할 수 있는 것이다.


스노든이 폭로한 NSA의 구글 감청 프레젠테이션. 당시 구글의 클라우드 서버 사이에서는 암호화되지 않은 텍스트로 통신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한다).  GFE의 SSL을 뚫었다고 말하면서 웃고 있는 :-) 모습이 인상적이다. 출처는 http://www.washingtonpost.com/world/national-security/nsa-infiltrates-links-to-yahoo-google-data-centers-worldwide-snowden-documents-say/2013/10/30/e51d661e-4166-11e3-8b74-d89d714ca4dd_story.html

그러므로, 만약 국내의 수사기관의 힘이 미치지 않는 메시징 앱을 원한다면, 굳이 텔레그램을 쓸 필요도 없다. iOS 디바이스에 기본적으로 딸려오는 아이메시지를 쓰거나, 모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필수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구글 행아웃을 사용하면 된다. NSA는 어쩌면 그것들을 해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국의 경찰이나 검찰은 압수수색영장을 받아도 당신이 타인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적 거물'이 되지 않는 한 그 정도면 충분히 안전하다.

정리해보자. 정부가 당신의 카톡을 들여다볼까 걱정된다면, 일단 예전에 비해 국내의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들이 수사기관에 덜 협조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다면, 극소수만 사용하는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 후 아무도 없는 대화창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흘리다가 삭제하지 말고, 행아웃이나 아이메시지처럼 국내에 서버와 본사를 두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잘 알려진 방법을 사용해보자.

한국의 수사기관은 첨단 해킹 기술이 아니라 법치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를 동원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한 발짝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크게 어렵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과연 '카톡'으로 표상되는, 복잡한 한국식 소셜 네트워킹 그 자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이다. 카톡 뿐 아니라 싸이월드를 해본 적도 없고, 페이스북은 가입만 해둔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2014-09-13

21세기 번역

『21세기 자본』의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는데, 역시나, 책이 시중에 풀리기도 전에 그놈의 '번역 논란'이 한창이다. 프랑스어판으로 먼저 출간된 책인데 왜 영어판을 옮겼느냐는 것이다. 이미 출판사 글항아리는 '영어판과 프랑스어판을 일일이 대조했다'는 해명을 여러 차례 내놓은 바 있지만, 토마 피케티의 심오한 경제학을 온전히 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우리의 인문-소비자들의 원성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왜 번역한 책을 읽을까? '원문'이 아니라 번역한 책을 읽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 우리가 어떤 책의 원서를 읽는데 걸리는 시간을 T1이라고 해보자. 반면 그것을 번역으로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T2로 표기한다. 우리는 논의의 대상이 한국어 화자라고 전제하고 있으므로, T1은 T2보다 언제나 크다. 만약 T1과 T2가 같거나, 전자가 후자에 비해 작다면, 굳이 번역된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은, 그것을 U라고 표기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현된다.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1
U = (T1 - T2) * 독자가 단위 시간당 버는 돈

즉 우리는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원서를 읽느라 고생하는 만큼의 시간을 번다. 그리고 그 비용은 '번역 논란'을 벌이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가령 당신이 스티브 잡스 평전을 읽는다고 해보자. 한국어로는 24시간이 걸릴 책이 영어로는 100시간도 더 걸린다고 해보자. 2014년 기준으로 최저임금은 5210원인데, 그렇다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책을 읽을 때, 당신은 적어도 76시간을 더 쓰게 되며, 간단한 곱셈을 해보면 395960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스티브 잡스 전기를 읽으면, 책값의 차이를 논외로 했을 때, 약 40만원을 손해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어떤 분은 반박을 하실 것이다. 엉터리 번역, 날림 번역으로 책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읽은 그 책이, 저자가 쓴 그 책과 같은 책임을 대체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어떤 간단한 산수도 그렇거니와, 인식론적인 대답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연 언어가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내가 오랜 세월 인터넷에서 이런 저런 글을 쓰고 트위터도 열심히 해본 바에 따르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심지어 그의 모국어로 쓰여진 글을 읽고도, 그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어떤 책을 무슨 언어로 읽더라도, 독자가 저자의 '진짜 진짜 그 내면의 그 속마음' 같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어불성설이다.

'번역서의 오류로 인해 저자의 뜻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오늘날의 독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번역서에 오류가 없더라도, 심지어 한국말로 쓰여진 글을 읽더라도, 우리는 종종 저자의 뜻을 잘못 파악한다. 

번역 논쟁을 일으키는 당신이나, 그 책을 번역한 번역자나, 저자의 뜻을 오해할 수 있다. 문제는 당신이 직접 원서를 읽다가 저자의 의중을 잘못 짚을 경우, 당신의 오해를 지적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한 권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려면, 일단 번역자가 읽고, 그 내용을 한국어로 쓰고, 원문과 번역문을 놓고 편집자가 교정, 교열하는 과정이 추가된다. 

요컨대 독자와 번역자의 싸움은 1:1의 싸움이 아니다. 독자는 책을 혼자 읽고 오해를 교정받지 않지만, 번역자의 작업은 출판사의 검토를 거친 후 세상에 나온다.

고의로 내용을 빼거나 왜곡해서 번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그렇다는 것이다. 번역자가 오역을 저지를 수 있는 만큼, 원서를 직접 읽는 당신도 그 책을 잘못 읽을 수 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는 게 다 그렇다. 완벽한 이해를 추구해야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다소 무모한 발언이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두 개의 변수를 또 발견할 수 있다. E1은 원서를 직접 읽을 때 내 머리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총합이다. E2는 반면, 번역서를 읽는데, 번역자의 실수로 인해 발생하여 책으로 찍혀 나오는 오류의 총합이다. 당신이 해당 언어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E1과 E2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나는, 대부분의 경우 E2보다 E1이 클 수밖에 없다고 겸허하게 인정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그냥 재미로만 읽을 수 있는 독자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뭔가 재생산을 해야 하는 독자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E1과 E2의 관계에 대해 사실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번역서의 오류마저도 일종의 즐길거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지하게 책을 읽고 그에 기반해 뭔가 논의를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남들 앞에서 폼을 잡아야 할 때, 어떤 오역으로 인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는 일을 우리는 대체로 피하고 싶어한다.

가령 당신이 『이방인』을 읽었는데, 지금까지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뮈르소가 무어인을 쏘아 죽인 것이 정당방위임을 몰랐다고 해보자. 그래서 당신은 술자리에서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고, 빈정이 상해서, 술상을 엎고 울면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당신이 직접 『이방인』을 읽었다면 까뮈의 진정한 뜻을 알았을지 몰랐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하기 어렵다. 즉 E1과 E2 중 뭐가 더 큰지 확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경우 어쨌건 당신은 번역서를 읽었으므로,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E2일 것이다.

이 경우 앞서 등장한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은 변형을 겪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을 위해 앞서의 경우를 U1, 지금의 효용을 U2라고 한다면,

번역서의 독서 효용 공식 2
U2 = {(T1 - T2) * 독자가 단위 시간당 버는 돈} - E2

가 도출된다.

결론을 내보자. '번역에 대한 논란이 많네요, 저는 그냥 (나중에) 원서로 읽으려고요'는 과연 얼마나 타당한 표현인가?

T1이 T2보다 큰 사람, 다시 말해 원서를 읽는 속도가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빠른 사람은 굳이 그런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T1과 T2의 차이가 어느 정도 유의미하게 벌어진다. 그렇다면 원서를 읽거나 번역서를 읽음으로써 저자의 뜻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피해가, 그 책을 어쨌건 익숙한 언어로 빨리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보다 클 때에야, 우리는 번역서를 집어던지고 원서를 읽겠다고 머리를 싸매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정말 그런가? 오역, 혹은 오역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주는 '피해'가, 기꺼이 그 책을 읽겠다고 마음을 먹은 당신에게 그렇게나 심대한 타격을 주는가?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저 허접한 공식을 집어던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읽어도 저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 못할 가능성', 즉 E1은 고스란히 남는다. 그리고 당신의 실수는, 번역자의 것과 달리, 그 누구도 지적해줄 수가 없다. 술자리에서 '뽀록'이 나서 망신을 당하기 전까지 말이다.

'번역 논쟁'을 부추기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야 하겠고, 할 말이 많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번역된 책이 나오면, 적어도 읽어보기라도 하고, '논쟁'을 하던 말던 하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