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Brazil started collecting data in the late 1990s by five different skin-colours, the gulf in infant mortality between indigenous and white babies became apparent. Public outrage led to serious efforts to start narrowing the gap. The Brazilian example shows that the data need to be granular. Catch-all terms such as “BAME” (Black, Asian or Minority Ethnic), used in Britain, are unhelpful. “Non-Western migrant” or “foreign born” contain even less information.
2020-11-23
코로나와 인종 문제, 혹은 정치적 올바름의 재구성
[신동아] 與부대변인이 진중권을 '예형'에 빗댄 건 협박
與부대변인이 진중권을 '예형'에 빗댄 건 협박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3. 10:01●새빨간 거짓에 희생당한 프랑스 교사 사뮈엘 파티
●표현의 자유는 원래 ‘불편한’ 것
●탈진실(post-truth) 용어, 사태의 본질 왜곡
●공산주의자가 공유한 나치, 파시스트 선동 화법
●敵 공격 위해 거짓과 폭력 거리낌 없이 동원
●與의원 “X자식들” “X탱이”… 국민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
●文정권의 진실 결여, 검찰총장을 대선후보 만들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한국 언론은 이 사건의 맥락을 온전히 보도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나쁜 백인'이 '선량한 유색인종'을 도발해 벌어진 일처럼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상은 그보다 복잡할 뿐 아니라 암울하다. 이 사건을 '표현의 자유 대 종교 감정'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표현의 자유 기능하려면 불편함 참아야
가장 먼저 지적할 점은 프랑스 정규 교육은 표현의 자유를 교과 과정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티는 어떤 식으로든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가르쳐야 했다. 표현의 자유를 논하려면 본질적으로 도덕 감정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미국 도색잡지 '허슬러' 발행인이던 래리 플린트의 인생을 떠올려보자. 영화 '래리 플린트'에 잘 묘사돼 있다시피, 그는 성(性)과 쾌락에 엄숙한 혹은 위선적인 미국 기독교인의 종교 감정을 건드렸다. 신앙인의 표를 노리는 보수적 정치인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 래리 플린트마저도 미국 연방대법원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보호해줬다.
즉 표현의 자유란 본래 '불편한' 것임에도 법과 제도 및 사회적 관용을 통해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자유가 침해당한다면 함께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명언이 뜻하는 바도 그런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하려면 불편함을 참아야 한다. 내 감정에 거슬리는 내용도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걸 배워야 한다. 그것이 공교육의 역할이다.
사뮈엘 파티는 학생들에게 "이 수업은 특히 무슬림 학생들에게 불편할 수 있으며, 내가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 싶지 않다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도 좋다"고 말한 후 수업을 진행해왔다. 종교적으로 예민한 소재를 다루고 있긴 했지만, 전문적인 자격과 경력을 지닌 교육자가 진행한 정상적인 수업이었다. 파티는 수년 동안 계속 '샤를리 엡도'의 풍자만화를 소재로 수업을 진행해 왔고 별 문제가 없었다.
2020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페이스북에서 사뮈엘 파티의 수업에 대한 반대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유명한 무슬림 선동가 압델카힘 세프리위(Abdelhakim Sefrioui)가 있었다. 그는 파티의 수업이 "무책임하고 공격적"이라는 취지의 영상을 올렸다. 세프리위에게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의 딸 자이나(Zaina)에 따르면, 파티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무슬림 학생들에게 이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손을 들어 표시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슬림 학생들은 종교 감정을 모욕당하고 프랑스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한, 즉 인종주의·국수주의 행태의 희생자가 됐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다. 자이나는 파티의 수업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번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슬람 혐오자라는 딱지가 붙은 파티는 교장에게 불려갔고 교육청의 감사도 받았다. 교육청은 그의 수업 내용과 방식을 보고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경찰 역시 같은 결정을 내렸다. 파티는 자신을 비방한 압델카힘 세프리위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파티를 향한 무슬림들의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이슬람 혐오자라는 온라인 폭로가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적개심이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자가발전하기 시작한 증오는 점점 더 커지더니 결국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향했다. 압둘라흐 아부예도비치 안조로프(Abdoullakh Abouyedovich Anzorov)라는 18세의 무슬림 난민 소년이 그 증오에 휩쓸렸고, 칼을 빼들었다.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아버지인 사뮈엘 파티는 2020년 10월 16일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됐다.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금기
여기서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금기가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런 금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지만, 한번 무너지고 나니 확실히 보이는 선이 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파티의 수업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그 수업을 실제로 듣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오직 진실에 근거해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압델카힘 세프리위와 자이나는 상식적이고 올바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을 기반으로 페이스북에 선동적 영상을 올렸다.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과 다르다는 게 드러났지만, 자신들이 들쑤셔놓은 사뮈엘 파티를 향한 증오와 분노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들의 증오 선동에 넘어가 범죄를 저지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이 사건을 두고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대립을 논하는 건 적절치 않다.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요소를 빠뜨리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사뮈엘 파티가 이슬람 혐오자이며 교실에서 무슬림 학생들을 모욕하고 쫓아냈다는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파티가 진행한 표현의 자유 수업은 프랑스의 정규 교과 과정 중 일부였다. 그는 그것을 교장과 감독관이 볼 때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증오할 거리를 찾고 있던 선동가인 압델카힘 세프라위는 딸의 거짓말을 믿었거나 딸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다. 거짓을 연료로 타오른 증오의 불길은 사뮈엘 파티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파티를 살해한 18세 소년 압둘라브 안조로프의 인생까지 망가뜨리고 말았다.
여기서 종교적 감정의 존엄성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에 대한 모욕 아닐까. 세상 그 어떤 종교도 '남에게 거짓말을 하고 네 이웃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니 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특히 거짓으로 남을 고발하고 선동하지 않는 것. 이것은 인간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 규칙이다. 그 어떤 대단한 이유와 핑계를 들이댄다 한들 거짓 선동과 폭언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사뮈엘 파티 피살 사건의 대립 구도는 표현의 자유 대 종교가 아니다. 진실 대 거짓이다.
레닌, 히틀러, 트럼프
요즘은 '탈진실'(post-truth)이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저런 고상한 표현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탈진실 같은 건 없다. 탈진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그리고 한국에서도 거짓말로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자들이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근간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의 등에 칼을 꽂고 있다.뉴욕타임스의 전설적인 서평 전문 기자 미치코 가쿠타니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에서 거짓을 근간으로 삼는 폭력적 언어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에 따르면 나치와 파시스트의 선동 화법을 공산주의자들도 공유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부터 미국의 좌파 학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주로 고학력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대중문화를 거점 삼아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1세기가 되자 오히려 우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문화주의에 편승해 진실을 부정하고 아무렇게나 내뱉으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탈진실'의 물결에 가담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트럼프 대통령 옹호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논의를 이용해 트럼프의 거짓말을 변명하고 싶어 하고, 우파는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기후변화의 현실을 부인하거나 대안사실(alternative fact)을 홍보하고 싶어 한다."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우파도 좌파도 아닌 거짓과 폭력의 승리였을 뿐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히틀러뿐 아니라 레닌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다시 가쿠타니의 설명을 들어보자.
"레닌은 언젠가 자신의 선동적인 언어가 증오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키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어법은 상대 계급을 납득시키는 게 아니라 깨부수려고, 적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아니라 적을 파괴하려고, 적의 조직을 지구상에서 전멸시키려고 의도한 것이었다. 이런 어법은 실로 적에 대한 최악의 생각, 최악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성격의 것이다. 이 모두가 트럼프와 지지자들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동안 힐러리 클린턴을 공격하면서 사용한 언어(‘힐러리 클린턴을 가둬라'), 영국 브렉시트 운동의 과격한 지지자들이 사용한 언어, 대서양 양쪽 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 운동이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언어의 원형처럼 들린다."
즉 선동의 언어는 좌우의 구분을 넘어선다. 서구냐 비(非)서구냐, 근대적 세속국가냐 종교냐 하는 대립과도 무관하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거짓말과 폭력을 거리낌없이 동원하고자 하는 태도의 문제다. 사뮈엘 파티를 향한 적개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이나가 거짓말을 했고 압델카힘 세프리위가 선동을 했던 것은 그 흐름 위에서 벌어진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종교의 신성함이나 신앙의 자유와는 상관이 없다.
말론 브란도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
하지만 이후 논란이 커지자 노 실장은 11월 13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국민에 대해 살인자라고 한 적 없다. 어디서 가짜뉴스가 나오나 했더니, 여기서 나온다. 속기록을 보라"고 했다. 탈진실, 아니 거짓말이다. 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국민을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 들어 가장 우려스러운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국민을 상대로 폭력과 증오의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공무원들을 상대로 'X자식들'이라는 폭언을 던지고,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국민에게 'X탱이'라고 문자를 보낸다. 언어 습관이 고상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웃고 넘길 일도 아니다. 그들은 국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당 상근부대변인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상대로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는 말을 한 일도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예형은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결국 처형당하고 마는 지식인이다. 집권 여당의 부대변인이 지식인을 향해 예형을 운운하는 건 문자 그대로 협박이다.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 어떤 점잖은 제안이 아닌 협박인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기억하는 한 민주화 이후 그 어느 정부도 이렇게 대놓고 국민에게 위협을 가한 적은 없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문재인 정권의 이런 행태는 어쩌면 일찌감치 예견됐을지도 모른다. 201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타 후보에게 문자폭탄을 보내고 18원의 후원금을 넣는 등의 방식으로 공격적 행동을 할 때 문재인 당시 후보의 반응을 떠올려보자.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는 친문세력뿐 아니라, 문 대통령 본인이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짓을 기반으로 한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진실의 결여에 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렵기에 '검찰개혁'이라는 양의 머리를 내걸고 증권범죄합동수사단 해체 같은 만행을 저지른 걸까.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독일에서는 전례가 없다. 일본에서는 1954년 법무대신이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하던 뇌물 정치인 사건을 불구속 지휘한 사례가 유일하다. 결국 법무대신은 여론의 비난에 사퇴했다. 수사지휘권을 남발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라도 해서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기가 어렵다. 이 거짓의 정권으로 인해, 민심은 급기야 퇴임하지도 않은 현직 검찰총장을 차기 대선후보로 바라보게 됐다.
설령 진실이 아프더라도
거짓말쟁이를 추궁하면 계속 거짓말을 한다. 그래도 끝까지 물어보면 나중에는 의심당하는 자신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피해자 행세를 하거나 되레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에서 쏟아지는 '막말'들은 그런 면에서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교양이 부족하고 품위가 없어 생기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폭언과 선동은 거짓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올바른 정치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양한 세력을 규합하고 의제를 파악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대중을 견인하는 등 여러 과정이 필요할 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진실이다. 설령 그 진실이 아프고, '우리 편'에게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택해야 한다. 너무 뻔하고 식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히틀러 최후의 14일>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다운폴>을 보았습니다
<히틀러 최후의 14일>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다운폴>을 보았습니다.
요아힘 페스트는
- 나치가 완전 미친놈들인 건 맞지만 거기에 장단 맞춘 평범한 독일인들도 못지 않았다. 피해자인 척만 하지 마라 좀.
- 히틀러를 '인간도 아닌 악마!'로 말하면 1 같은 자기 변명을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히틀러도 인간이긴 했다. 인간이 그렇게까지 사악해질 수도 있다.
- 나치는 애초에 근본 사상이 썩어서 망한 거다. 전쟁하면서 계속 멸망과 죽음을 예찬하는 미친놈들이었다. 일말의 미련을 갖지 마라.
와 같은 입장에서 나치 및 히틀러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한 독일의 언론인 출신 역사 저술가라고 하겠습니다.
영화는 그 책의 논지를 잘 따라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현'하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애도'가 되어버리는 예술의 내재적 한계 혹은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 히틀러'를 배우가 공들여 연기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추모 아니냐, 이런 비판이 가능하고 그런 방향에서 비판도 많이 받은 작품입니다.
아무튼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묵혀두고 있다가 봐서, 가볍게 기록을 남겨봅니다.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고, 회원가입하면 아마도 한달 무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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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출처: Show Random Posts with Thumbnails in Blogger
단, 이 코드를 그대로 붙여넣으면 1) 썸네일 이미지가 강제 표현되고 2) 게시물의 날짜가 연/월/일 이 아닌 일/월/연 순으로 표시됩니다. 그 문제의 해결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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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차원에서, 그리고 배운 적 없는 프로그래밍을 아주 조금이나마 해냈다는 뿌듯함을 표출하기 위해, 적어둡니다.
2020-11-20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1.
학자나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상인들과 부인들이 동석해 있는 사교 모임들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주의해 보면, 거기에는 이야기와 농담뿐만 아니라 또한 환담, 곧 수다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새로운 내용과 함께 흥미 있게 이끌어가려 하면 이내 소재가 고갈되고, 농담은 쉽게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모든 수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 이런 저런 행위의 윤리적 가치 에 관한 수다보다도 더 그 밖의 머리 쓰는 일에서는 이내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발하고 모임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없다. —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O273/V153
임마누엘 칸트는 사교계의 총아였다. 그는 키도 작고 얼굴도 과히 잘생긴 편이 아니었지만, 특유의 영민함과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밖으로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런던, 제노바, 베니스 등 세계의 주요 도시에 대한 '구라'를 풀어놓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많은 경우 그의 이야기는 실제로 해외를 다녀온 사람의 것보다 정확하고 세밀했다. 칸트는 당구를 매우 잘 쳤고, 학창시절에는 내기당구를 통해 학비를 벌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쾨니히스부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된 이후로 사교계에서 발을 끊고 이른바 '비판철학'의 구상과 완성에 돌입한다. 그 작업을 끝냈을 때, 이전까지 사람들이 알던 사교적이고 유쾌한 칸트 씨는 사라지고, 대신 우리가 아는 철학자 칸트가 탄생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지난 시절을 잊지 않았고, 도덕철학을 다루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위 인용구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윤리적 가치에 대해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한다고. 저 말은 칸트 자신의 사교계 경험에서 우러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아한다. 누군가가 진정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만큼은 그 누구라도 즐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것은 근본적인 '인간적 현상'이며,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왜 『정의란 무엇인가』가 40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내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하버드 명강의'라는 단어가 수많은 이들을 솔깃하게 했고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이 탁월한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윤리적 딜레마'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섬세한 독해를 할 필요가 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이 보수주의적 입장, 즉 공동체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책의 도입부에서 던져놓는 딜레마 자체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가 책에서 설명하는 공동체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와 맞닿아있기도 하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설령 그 책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도입부에서 제시하는 딜레마가 무엇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열차가 있고, 브레이크는 고장났다. 당신은 그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인데 이 철로를 쭉 달리다보면 공사중인 인부 다섯 명이 치여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편 선로를 바꾼다면 한 사람의 인부만 치여 죽는 것으로 사고를 마무리지을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딜레마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첫 번째와 유사한 듯 하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역시 폭주하는 기관차를 타고 달리고 있고, 다섯 명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런데 철로 위의 어딘가에, 열차를 멈출 수 있을만큼 뚱뚱한 사람을 선로 위로 떨어뜨리면 그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 당신이라면 그 뚱뚱한 사람의 등을 밀어서 그를 철로 위로 떨어뜨릴 것인가?
샌델은 말한다. 공리주의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편을 택한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 사조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 특히 칸트적 자유주의자라면 선로를 바꾸거나 뚱뚱한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오직 목적으로 예우하라'는 정언명법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자는 그와 같은 추상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나'의 삶의 맥락과 공동체의 가치 기준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샌델은 앞서 제시한 추상적인 비유를 현실 속으로 과감하게 옮겨놓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미군 척후병. 그들은 중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을 만났다. 미군들은 이 민간인들이 탈레반 협력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한다. 만약 그들이 협력자라면, 척후병 뿐 아니라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미군들의 위치가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들은 민간인들을 풀어주었고, 몇 시간 후 미군 전체가 탈레반에게 포위되었다. 세 사람의 목숨을 살린 댓가로 총 열아홉명의 미군이 죽어야 했다. 민간인들을 그냥 보내주겠다는 결정을 내린 미군은, 그 역시 전투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자신이 내린 판단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입부를 제시한 후 샌델은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개략적인 해설을 제시한다. 각각 3장씩, 그 내용들이 이 책의 나머지 9장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서평들을 살펴보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 듯 하다. 쉽고 재미있게 정의와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는 평가가 있고,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주의가 결국 보수주의적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나는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샌델이 말하는 내용, 공동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꺼내드는 사례가 이 책을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로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혹은 폭주하는 열차를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윤리적 토론을 위한 화두로 꺼내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다. 칸트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
2.
사례들이 판단력을 예리하게 해준다는 것은 사례들이 가진 유일하고도 큰 효용이다. 지성의 통찰력의 정확성과 정밀성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사례들은 보통 그런 것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니 말이다. 왜냐하면 사례들이 규칙의 조건들을 (限界의 境遇로서) 충전하게 만족시키는 일은 매우 드물고, 게다가 규칙들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경험의 특수한 상황과는 독립적으로, 충분하게 통찰하려는 지성의 노력을 흔히 약화시키며, 그리하여 종국에는 규칙들을 원칙이라기보다는 공식처럼 사용하는 버릇이 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로서,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판단력 일반에 관하여'에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이며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칸트 자신을 포함하여 위대한 철학자들 역시 까다로운 도덕적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끝없이 가설적 사례를 만들고 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례들은, 칸트의 비판처럼 "규칙의 조건들을 충전하게 만족"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불필요하지만 유의미한 어떤 '맥락'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답을 시도한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위대한 작품은 플라톤의 『국가』일 것이다. 플라톤의 대변자로 등장한 소크라테스는 먼저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따르는 것',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과 같은, 당대에 통용되고 있던 규정들을 하나씩 논파한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찾아내기 위해 개인의 삶이 아닌 공동체의 구성과 그 속에서의 삶으로 논의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의 도입부와 그 나머지를 가르는 기준선이다.
바로 그 도입부에서, 등장인물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당대의 통념에 맞서 한 가지 딜레마를 제시한다. 당신에게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성정을 이기지 못해 난폭한 행위를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일 때 당신에게 자신의 무기를 맡겨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상태가 안 좋아진 그가 나타나 자신의 무기를 돌려라고 한다. 당신은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순간 그가 그것을 들고 가서 어딘가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올바름이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개념에 따르자면 당신은 그 무기를 돌려줘야 한다. 무기의 주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 그게 바로 '올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러한 행동이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와 같은 딜레마를 몇 개 더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통념적인 정의관에 도전하고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펼쳐나갈 토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플라톤이 만들어낸 사례의 맥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이라는 것은, 전쟁이 나면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폴리스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맡겨놓은 무기'라는 말은 바로 그런 맥락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는, 우발적인 경우 흉기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은 있을지언정, 본격적인 '무기' 따위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시민들이 곧 군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무장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내가 책 한 권을 친구에게 맡기는 것과 완전히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내가 이 도시국가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가 가진 창과 방패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의 무장을 맡아놓고 있다가 돌려주지 않는 행위가 지니는 맥락 역시 결코 간단한 게 아니다. 친구에게 빌린 청바지를 돌려주지 않는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플라톤이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모두가 시민이고 전우이기도 한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서로가 서로를 시민으로서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혹은 어떤 경우에 우리는 누군가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을 것인가. 명시적으로 서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플라톤이 만들어낸 딜레마는 이와 같은 맥락을 추가적으로 머금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칸트 자신이 '사례'를 통한 접근을 '판단력의 부족을 매꾸기 위한 것'이라고 낮게 평가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상적인 사례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살인자에게 쫓기는 누군가를 집에 숨겨주고 있다. 그런데 그 살인자가 찾아와 당신에게 묻는다. '그 사람이 여기 있는가?' 칸트 자신이 말하는 정언명법에 따르면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므로 '그렇다'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저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딜레마가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샌델 본인이 곧장 그 예시를 현실 속의 것으로 치환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듯, 칸트가 말하는 저 '살인자'는 사실상 공권력에 해당하는 그 무언가에 가깝다. "우리는 나치 돌격대원에게 안네 프랑크의 가족이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말해줄 도덕적 의무는 분명 없다."(185쪽) 칸트가 말하는 '살인자'는 살인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저지르게 될 한 사람의 개인이라기보다는,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처형'하겠다고 나선 어떤 공권력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적어도 문맥상으로는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사례의 맥락은 독특한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칸트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에 의한 출판물의 검열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유를 논하면서도 계몽군주의 자비와 관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칸트는 동료 지식인들에게 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혹은 네가 사상 검열을 당하고 국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 때, 네가 나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일까?
즉 칸트가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국가 권력'을 상대로 하여 '시민'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윤리적일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플라톤의 경우와 달리 칸트는 국가 권력이 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 속에서 윤리적 행위의 문제를 검토하고자 했다. 반면 플라톤은 언제라도 다른 도시국가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분열된 정치 상황을 전제한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철학자 모두 어디까지나 '시민'의 눈높이에서 딜레마를 고안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또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을 만들어 적과 싸워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 혹은 왕의 검열을 피해 계몽주의를 설파하고 만들어나가야 할 18세기 프러시아의 시민. 이 딜레마를 만든 사람들과 그것을 듣고 고민한 사람들 모두, 시민의 눈높이에서 윤리를 고민했다.
샌델이 제시한 철도 기관사의 딜레마와 그것의 현실적 적용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그것이 왜 문제적인지 그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쏘아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샌델의 눈높이는 결코 시민들의 그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군의 시각으로, 자신과 비교했을 때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그들을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고민한다.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일지 아닐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3.
공법적 협약하에서의 비밀 조항은 객관적으로는—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는—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즉 비밀 조항을 명령하는 사람들의 인격의 자질에 따라 판단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확실히 비밀은 성립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비밀 조항의 초안자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인격적 존엄성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밀은 성립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조항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명제에 포함되어 있다. 공적인 평화의 실현 가능한 조건에 대한 철학자들의 준칙을 전쟁을 위해 무장한 여러 국가들은 충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 임마누엘 칸트, 『영구 평화론』(서울: 서광사, 2008), 개정판, 58쪽.
시민의 딜레마와 점령군의 딜레마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시민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딜레마를 통해 윤리적 문제를 숙고하는 것과, 점령군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딜레마를 검토하는 것 역시 완전히 다른 차원을 형성한다. 전자를 고민할 때 우리는 도덕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동료 시민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진실을 말하는 누군가, 혹은 전쟁에서 동고동락한 전우의 명예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그가 벌일 수 있는 위험한 사태를 막아내고자 하는 누군가가 된다. 반면 후자의 상황을 가정하며 토론할 때, 우리는 그저 '이 사람들이 탈레반 협력자일지도 모르니까 죽이자'라는 결론에 도달한 미군이 되어버릴 뿐이다. 전자에는 윤리와 가치가 이미 딜레마 속에 내재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이 더 '전략적'으로 타당한가 뿐이다. 윤리적 책임과 도의적 갈등은 그것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판단의 요인으로 전락한다.
샌델이 제시한 딜레마에서 행위의 주체는 곧 '초법적 주권자'이다. 재판 없이, 그 어떤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주체 말이다. 샌델은 독자로 하여금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그저 서류에 사인을 했을 뿐인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이 될 것을 권유한다. 구체적인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목숨을 직접 빼앗는 게 아니라 그냥 '결정'을 내릴 뿐인 상황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구경꾼인 당신은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를 직접 밀지 않고도 철로 아래로 떨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맨홀처럼 아래로 통하고, 당신은 핸들을 돌려 뚜껑을 열 수 있다고"(39쪽)까지 상상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기계적인 살인을 상상하는 행위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사고실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순간, 우리는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열차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비곗덩어리'를 죄책감 없이 철로에 처박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뿐이다.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그것을 어떤 더 큰 뜻, 대의에 따라 행사하는 초월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찾아 헤매이는 미군, 혹은 그 미국의 패권적 지배에 맞선다는 명분 하에 온 몸에 폭탄을 칭칭 감고 뛰어드는 자살 테러범. 양자의 논리는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당신이 이라크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라고 가정해보자. 나 한 사람의 목숨과 더불어 미국인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우리 편'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것일까? 샌델이 제시하는 논리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포함하여 몇 사람쯤 희생시키겠다는 자살테러범을 설득할 수가 없다. 미군들이 미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 있듯, 자살테러범은 이슬람 공동체를 위해 미국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살테러범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목숨을 바쳐 미국인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하버드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지 토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반대편에서 같은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안 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죄책감을 덜어주는 복잡한 장치를 이용해 열차를 막기 위해 뚱뚱한 사람을 철로에 떨어뜨리는 사람과 자살테러범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일 뿐이다. 전자의 경우 무슨 요절복통 기계처럼 생긴 장치 덕분에 살인의 주체가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한다면, 후자는 아예 폭탄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날려버림으로써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각자의 정의(正義)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대체 그들은 어떤 원칙과 논리에 따라 서로를 설득하여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각자의 이익과 도덕과 관습이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영원한 평화를 획득하기 위한 이성적인 방안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썼다. 그리고 그는 본문의 부록에 위 인용구와 같은 단서 조항을 덧붙여 놓았다. 국경과 문화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철학자의 말에 정치가들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바로 그렇게, 초월적 관점을 통한 보편성에의 추구가 결여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한 한국인 독자가 대단히 자의적으로 '공정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놓고 보면 상황은 훨씬 비관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