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작은 도시 힐 밸리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 마티 맥플라이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번 주 토요일 밤으로 예정된 댄스 파티에서 조지와 로레인이 키스하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티뿐 아니라 마티의 형과 누나의 목숨이, 아니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마티가 원래 살던 1985년이 아니라 1955년. 마티는 괴짜 과학자 브라운 박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왔다. 본의 아니게 조지와 로레인의 첫 만남을 방해해버렸다. 문제는 조지와 로레인이 마티의 부모님이라는 것. 게다가 로레인은 조지가 아닌 마티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마티는 로레인의 관심을 피하면서, 조지를 더 남자답게 만들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에서 키스를 하게 해야 한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내용이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이야기의 역사는 짧지 않다. 영국의 소설가 H G 웰스가 ‘타임머신’을 출간한 18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시간 여행 그 자체에 대한 물리학적, 철학적 고찰이 시작되려면 천재 두 명이 더 필요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불완전성의 원리’로 유명한 수학자이며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빠르게 움직이거나 강한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물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중 한 사람은 지구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이동하는 우주선에 탑승한 후 수십 년이 지나 지구로 돌아온다면, 지구에 남아있던 쌍둥이는 노인이 되겠지만 우주선을 탄 쌍둥이는 나이를 거의 먹지 않은 채 돌아올 것이다.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가령 인공위성의 시계는 중력의 영향을 덜 받지만 워낙 속도가 빨라서 지표면의 시계보다 느리게 작동한다. 인공위성은 미세하게나마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오차를 꾸준히 보정해주지 않으면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GPS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상대성이론 속에 살고 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두 유대인 천재는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연구소에서 만났고 곧 단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괴델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 “제가 일반 상대성이론을 이용해서 새로운 우주 모델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 우주에서는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한 장비 없이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죠.” 철학자이며 과학 저술가인 짐 홀트의 책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괴델 우주’를 검토하고 오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심란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괴델 우주가 출현하면서 시간 여행은 과학에 근거를 둔 논리 퍼즐이 되었다. 그것을 ‘타임 패러독스’라 부른다. ‘백 투 더 퓨처’도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작품이다. 스스로를 태어나지 못하게 만든다면? 아직 발표되지 않은 히트곡을 원작자에게 들려준다면? 어떤 스포츠팀이 이길지 결과를 미리 다 알아놓고 도박을 해서 돈을 번다면?
영화와 창작물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타임 패러독스를 피해간다. 그 퍼즐 게임을 보는 것이 시간 여행물의 재미 중 하나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논리적 분석은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괴델 우주에 살고 있지 않고,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소리다. 어떤 식으로건 과거에 영향을 준다면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없고,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면 시간 여행자의 존재가 부정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 위에 세워진 현재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김원웅 광복회장은 1945년 해방 정국에서 미군이 점령군이었고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 등 일부 지식인은 미국의 공식 포고령에서 ‘점령(occupy)’이라는 단어를 썼으니 그저 ‘팩트’를 말했을 뿐이라며 편을 들었다.
분명한 사실부터 이야기해보자. 미군이 스스로를 ‘점령군’이라 칭한 것은 공문서의 어휘다. 반면 소련군이 스스로를 ‘해방자’라 부른 건 선전용 문서에서 나온 말이다. 미군의 표현이 증명사진이라면 소련군의 표현은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해 필터를 잔뜩 먹인 셀카와 마찬가지다. 소련과 북한의 ‘쌩얼’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이들은 이승만이 단독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거나, 혹은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과 유엔군이 패배하는 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라는 망상을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낡은 역사책에 기반한 일종의 시간 여행 판타지에 푹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진정한 민족국가를 세울 수만 있다면!
1945년, 남과 북의 조건은 거의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미군에게 ‘점령’당한 반면, 북한은 소련을 통해 ‘해방’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76년이 흐른 지금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르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쌍둥이 실험을 보는 것만 같다. 미국이라는 로켓을 타고 넓은 우주로 나간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반면, 소련을 통해 ‘해방’되고 중국의 품에 안긴 북한은 세계 최악의 인권 탄압 독재 국가로 주저앉아버렸다. 우리는 미국에 ‘점령’되면서 자유를 얻었고, 북한 주민들은 소련을 통해 ‘해방’된 후 압제에 시달린다. 누가 점령군이고 누가 해방자인가.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마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처럼 묘사한다. 그들 소원대로 미군이 ‘점령’하지 못했다면 그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은 존재할 수도 없었다. 전형적인 타임 패러독스다. 다 큰 어른들이 그들만의 역사 판타지 속에 허우적거리며 ‘백 투 더 조선’을 외치고 있다. 사상의 자유는 존중하지만 본인들이 낡고 후지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를 바란다. 국민은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백 투 더 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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