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2-22

타자의 언어와 한글의 덫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오륀지' 발언이 이후 온 인터넷이 시끌시끌했지만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한글 표기법을 이렇게 저렇게 뜯어 고치겠노라는 설레발이 판치는 것은, 정착 단계에 접어든지 고작 5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어린 언어'인 한국어가 감당해야 할 일종의 숙명(여대 전 총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연구하고 한글 표기를 뜯어고쳐서 '조국 근대화'에 일조하겠다는 발상의 역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은 것이다. 일제의 강점 당시 서구의 학문 체계를 흡수한 지식인들이 연구할 수 있고 또 연구해야 하는 제1의 대상은 당연히 한국어였다. 한국어를 연구하지 않으면 한국어로 문학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한 기본적인 정서였던 것이다. 충남의 천재 홍명희는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그 아들 홍기문은 국어 연구를 하다가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해낸다. 이것은 비단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의 유입을 겪는 사회의 지식인은 그 충격을 자국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선 흡수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독일 시절부터 스와힐리어 복권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한글 표기법을 영어 발음에 맞게 뜯어고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인터넷은 발칵 뒤집혔으며, 그에 대한 이러저러한 반론들이 덜컹덜컹 생산되었다. 그 내용들은 대체로 '외국어와 외래어는 다르다' 내지는, '오륀지라고 써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다' 정도로 형성되었고, 급기야는 '영어 발음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국가 경쟁력과 무관하다'라는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영어 교육에 대한 논의가 외국어와 자국어 사이의 갈등에 대한 문화적 고찰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그 내용들은 대체로 옳다. 하지만 그것은 이 상황과는 무관하게 원래 옳은 내용이기 때문에, 영어 교육을 위해 한글 외래어 표기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 되지도 못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경숙은 과연 '오륀지'를 발음한 것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되물어질 수 있다. 이경숙이 발음한 그것을 '오륀지'라고 표기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 표기를 통해 이경숙이 한 발음을 복원해낼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의의 90% 이상이 그 영상을 직접 보지 않았거나, 봤더라도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선 밑에 링크된 참고 영상을 보고 이후의 내용을 전개하도록 해보자.

"혼선의 주역?", MBC 뉴스투데이, 2008. 02. 01

나는 이경숙이 '오륀지'를 발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경숙이 발음한 것은 [ˈorӕndʒ]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전에 orange의 발음이 [ˈorindʒ]로 표기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이경숙의 발음은 표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아무튼 발화하는 내용을 유심히 들어보면, 모음의 변화가 아닌 강세의 부여가 영어 화자의 발음 이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 수 있다. 굳이 한글로 표기하자면 ['오린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세를 표시하는 어퍼스트로피에 유의하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경숙이 말하는 발음의 문제는 우리가 orange라는 단어를 읽을 때 각각의 모음을 어떤 음가로 소화하느냐가 아니라, 첫 번째 음절에 강세를 찍느냐 찍지 않느냐에 따라서 갈라지는 언어적 문제이다. 진짜 문제는 그 문제가 한글 표기가 아닌 영어 발음에서의 강세에 대한 인식과 적응이라는 것을, 심지어는 그 말을 하는 이경숙 본인도 철저하게 몰랐다는 데 있다.

오랜지를 '오린지' 혹은 '오륀지'로 써놓는다고 해서 이경숙이 말하는 바 '미국인이 알아듣는 발음'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 뉴스 영상 38초에서 40초 사이에 기자가 그 표기를 한국어 식으로 읽으면서 즉각 폭로된다. [ˈorindʒ]와 '오린지'의 간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모음 하나를 발음하기 위해 주둥이를 어떻게 옴쭉거리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다. 언어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에는 강세가 있다. 그것은 영어 화자들이 단어의 정확성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척도이기도 하다. 이경숙이 [ˈorindʒ]를 '어랭재'로 읽었다 하더라도, 첫 음절에 강세만 정확히 찍혀 있었다면, 눈 앞에 오랜지가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음 [r], [n], [dʒ]과 모음 [o], [i]의 발음이 완벽하다 해도 강세가 없다면 영어 화자가 그 단어를 이해하는데에는 곱절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 오랜 기간 체류하면서 '한국인이 하는 영어 발음'에 숙달된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대체 왜 신문과 방송에서는 '오린지'가 판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아까도 말했듯이 이경숙 본인부터가 자신이 무슨 발음을 했는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세를 표시하는 차원으로까지 한글 표기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되지도 않을 것을 다짜고짜 '오랜지라고 써 있으면 외국인이 못 알아듣는다'라고 넘겨버린 탓이 크다는 것이다. 둘째, 언어의 음성적인 차원과 문자적인 차원을 혼동하고 있는 발언을, 정말 곧이곧대로 '한글 표기법을 바꾸자'라는 내용으로 보도해버린 언론의 편의주의가 이 논의의 혼탁함에 한 몫을 더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이경숙 위원장이 자신의 그 애틋한 사연을 말하는 과정에서, 그가 발음한 내용이 어떻게 지지고 볶아도 한글로는 표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인수위원장은 영어 발음에 맞도록 한글 표기를 고치고 싶어하는구나'라고 곧이곧대로 이해한 다음, 영어 사전에서 [ˈorindʒ]를 찾아보고는 그것을 '오린지'라고 적었다. 말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받아 적는 사람에게도 교양이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ˈorӕndʒ]는 '오린지'로 다시 태어났다. 그 어디에도 [ˈorindʒ]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적 경향과 맞닥뜨릴 수 있다. [ˈorindʒ]를 발음하기 위해 '오랜지'라는 외래어 표기를 뜯어고치자는 이경숙이나, 그걸 또 사전 뒤져서 '오린지'라고 적어놓는 언론이나, 모두 영어를 한국어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로서 영어가 갖는 기본적인 성격, 즉 한글로는 절대 표기할 수 없는 강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는 것은 양자가 똑같다. 언론에서 써 놓은 신문 기사만 읽고 설레발치며 세월을 보낸 네티즌들도 마찬가지다. 이경숙의 '오린지' 사건의 본질은, 우리가 영어를 한국어와 완전히 별개의 것인 외국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 공교육이 실패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불어를 처음 가르칠 때 교사들이 악상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 것과 달리, 영어 교육 현장에서는 [θ], [ð], [r] 처럼 개별적인 음소의 발음을 다듬는 것에만 집중한다. 정작 중요한 개별 단어의 강세 표시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단어 사이의 연음, 즉 혀 굴리기를 연습하느라 혀 뿌리의 근육을 자르는데, 단어의 강세를 발음하지 않으면서 연음을 굴리는 것은 앉은뱅이가 달려가겠다고 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미련한 짓이다.

특히 영어에 환장하는 한국어 화자들은, 영어가 타자의 언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영어를 구성하는 방식은, 자음과 모음의 발음부터 단어마다 찍히는 강세, 그리고 문법에 이르기까지 한국어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영어에 대한 '정확한 한글 표기법'이라는 성배를 찾아 헤맨다. 영어를 '타자의 언어'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대신, 그들은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표시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숭고한 대상(이 표현 쓰는데 재미 들렸다)에 몰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어를 하는 도중에 영어 단어를 정확한 발음과 함께 섞어서 쓴다면, 그것은 한국어 문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애초에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 단어를 섞어 쓸 때마다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강세, 장-단 모음의 구분 등을 무시하고, 그것은 결국 그 단어를 한국어의 일종이 되게끔 한다. 영어로 말하다가 한국어 단어를 섞는 경우도 그와 유사하다.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던 와중에 한국어 단어 한 두 개를 매끄럽게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두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체계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를 타자의 언어로 인지할 수 있었던, 바꿔 말하자면 일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훨씬 영어를 잘 배웠고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사례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미국에서 의사로 잘 먹고 잘 산 서재필, 미국인들에게 하도 전화질을 해서 부아를 돋굴 정도였다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영어로 일기를 쓰다 한국말로 쓰다 한자로 쓰다 할 수 있었던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 등이 모두 그렇다. 그들은 모두 한학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책에 써 있는 내용을 입으로 옮겨 발음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고, 가령 '치킨나라' 같은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사전에 표시된 발음 기호 그대로 그 책의 내용들을 읽었다. 세 사람 모두 엄청난 속도로 영어를 배웠고 그 실력은 평생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개별적인 인자가 우수해서일 수도 있지만, 영어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가 지금 우리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해방 이후 맹꽁이 배처럼 부풀어오른 '한글에 대한 자부심'에 충만해 있다.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 언어인지 떠벌이는 떡밥은 요즘도 잊을만 하면 인터넷에 올라온다. 하지만 한글은 세종대왕에 의해 만들어지던 순간부터 불완전했다. 최세진이《훈몽자회》에서 한자의 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며 절감했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자음과 모음이 사용되었던 그 당시에도, 외국어인 중국어는 한글로 온전히 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언어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한문 고전과 함께 들어온 유교 계통의, 혹은 불교 계통의 한자 어휘들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섞어 쓰는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외국어로 쓰여진 외국의 고전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고전 한문을 타자의 언어로 인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은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다닐지언정 중국어로 대화를 할 능력은 갖추지 못했다. 지금이야 고전 한문과 만다린의 격차가 넘을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한자를 '외국어'로 받아들여 중국어의 4성조와 발음을 익히지 않았을 뿐이다. 한자 문화권의 커뮤니케이션은 그 덕분에 주로 필담에 의지하게 된다.

자신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언어를 타자의 언어로 인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선과 현재의 대한민국은 나름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글이라는 '숭고한 언어'(한글이 언어가 아닌 문자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도외시하고 있으니 그냥 이렇게 써놓도록 하자)가 끼어들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한글은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의 넋을 지켜낸 그릇이요, 우리가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영어를 표기해서 읽는다면 그 발음은 미국인의 귀에도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불완전한 외래어 표기법을 뜯어 고쳐야 한다. 한글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극도로 심각한 분열증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들은 한글을 숭배하면서 멸시하고, 칭송하면서 폄하한다. 그 이면에는 '영어'라는 언어가 타자의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혹은 영어를 쓰는 힘 센 미군 샘 아저씨와 똑같아지고 싶다는 달성 불가능한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글은 '완전한 문자 체제'가 되는데,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가 영어 학습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한글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너무도 우습게 아는 일본어도 한글로 완벽하게 표기될 수 없다. 한글에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분하는 음가 표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로 한국어를 완전하게 표기하는 것조차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숭고한 한글'에 대한 숭배에, 앞서 언급한 '국어를 통한 민족 개조'라는 전통적인 맥락이 더해지면서, 나라 걱정하는 애국지사 이경숙은 '영어 단어의 강세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을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로 치환하여 온 나라를 들쑤셔놓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한 기자들은, 앞서 말했듯이 사전에 등장하는 발음 기호를 강세 표시만 쏙 빼놓고 한글로 옮겨 지면에 표시하였고, 그러자 마치 이경숙이 [오린지]라는 발음이 미국에서 통용되는 것처럼 말했다는 듯 이야기가 와전되어버렸다. 그 잘못된 정보에 기반하여 우리의 네티즌들은 벌떼같이 일어났는데, 문제가 되고 있는 대상 그 자체에 대한 바라봄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두루뭉수리하게 '옳은 소리'나 하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되었다.

애초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자들이, 경찰로 치자면 초동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사태의 논점을 명확하게 잡고 있었더라면, 논의가 불필요한 방향에서 불타오름으로써 정치적인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글로 영어를 표기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네티즌 중 상당수는 '오뤤지'니 '오뢘지'니 하며, 마땅한 별명을 짓기가 곤란할 때 가령 '노정태'를 '노줭퇘'라고 발음하며 시시덕거리는 고등학교 1학년 유소년들처럼, 극도로 유치하게 자신들의 '반 MB 감정'을 표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영어가 타자의 언어임을 깨닫지 못한 채, 숭고한 글자인 한글의 덫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08-02-21

자기 아니면 우주

요컨대 민족국가의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해석돼온 친일이란 문제는 생활사라는 큰 틀 속으로 흡수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각적인 사고와 조명이 가능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동시에 국가 민족 표준어 등 근대의 큰 틀이 깨지면서 소설 역시 그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상상력을 보십시오. 그리고 일본 만화를 보세요. 자기, 아니면 우주입니다. 소설이 담당해왔던 중간항인 역사나 사회는 빠져있지요. ‘창공의 별’은 사라지고 아주 유치한 동물적 단계와 아주 높은 우주적 단계만 남아있습니다.”

김윤식, “향후 100년 문학의 화두는 ‘우포늪에서 우주 상상하기’”, 경향신문, 2008년 2월 21일, W2면


‘이 작가’란에는 젊은 소설가 김애란을 초대했다. 김애란은 첫 창작집『달려라, 아비』를 통해 한국 소설의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두번째 창작집 『침이 고인다』 역시 이 작가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의 소설이 새로운 서사적 밀도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규 사회의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동시대 젊은이들의 궁핍한 실존을 현실감 있게 드러내면서, 특유의 ‘우주지리학’을 펼쳐 보이는 이 작가의 문학적 기량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으로서의 김애란의 뜨거운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문학과사회』겨울호를 엮으며, 『문학과사회』80호


"일본 만화를 보라"는 김윤식의 지적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모닝구무스메의 "Love Revolution" 가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지구' 타령이 나오는 것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일이 문득 기억난다. "The stars, my destination."이라고 선언하는 걸리버 포일은 현존하는 사회적 인간 관계를 손수 파괴하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인간과 사회와 질서를 나름의 방식으로 존중한 반면,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다 먼지에 불과해'라고 쉽게 나불거리는 일본 만화 속의 캐릭터들은 결국, 자신의 유아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냉소해버린다. 글이 잘 풀리지 않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2008-02-15

한국판 CSI

채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좁혀진데는 방화 현장에서 발견된 일회용 라이터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경찰은 전했다.

일회용 라이터는 춘천의 한 노래방 홍보용으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채씨의 거처가 있는 강화도 장정리 마을 주민들이 지난해 말 춘천에 단체로 놀러가 그 노래방에서 유흥을 즐긴 것으로 확인됐다. 노래방 주인은 강화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경험이 있어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복원하면 되잖나” 태연한 범행 재연…숭례문 현장검증", 경향신문, 2008년 2월 16일.

완전범죄란 없다.

2008-02-14

메신저와 이메일

메신저 소리 때문에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다. 드라마몹 시절인데, 한창 녹취를 풀기 위해 볼륨을 크게 해놓았던 때문이다. 몇 초가 멀다 하고 '띠링'하고 울려대는 메신저의 소음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설정에서 소리를 끄면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메신저의 알림 기능에서 소리는 끈다. 사무실에 있으면 부득이하게 이어폰을 껴야 하는데, 그 와중에 '띠링' 같은 소리가 들려오면 정말 짜증나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메신저를 활용하는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뭔가 재미있는 것을 읽을 때 그 링크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기능을 활용하고자 할 때 더욱 유용한 것은 메신저가 아니라 이메일이다. 이메일은 당장 그 순간에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지메일 같은 경우 매우 빠르게 검색이 가능하기도 하며, 명확한 기록이 남는다. 메신저 대화도 잘 찾아보면 대화 기록이 자동으로 저장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순간적으로 흘러가는 대화라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이메일은 남는다.

물론 메신저로 링크를 찍어줄 때 그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당장 그것을 보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뭐 그러자는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끼리, 지금 당장 반응을 듣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그런 것들만 보낸다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이메일

2008-02-13

칭얼칭얼의 왕국

흥인지문 감지기 꺼놨었다…"너무 자주 울려서"
[SBS 2008-02-13 21:19:55]

<8뉴스>

<앵커>

더 기가 막히는 일도 있습니다. 동대문, 즉 흥인지문도 KT 텔레캅에서 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예 야간 적외선 감지기를 꺼 놓았던 것으로 SBS 취재 결과 확인됐습니다. 너무 자주 울려 귀찮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박세용 기자입니다.

<기자>

숭례문에 앞서 지난해 9월 흥인지문의 야간 무인경비 업무를 맡은 KT 텔레캅은 흥인지문 주변에 적외선 동작 감지기 15개 조를 설치했습니다.

순찰이 없는 저녁 6시부터 아침 9시까지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설치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적외선 감지기를 고의로 꺼버렸습니다.

사람들이 흥인지문에 자꾸 드나들어 수시로 경보가 울렸고 관리주체인 종로구청과 경비업체에서 매번 출동하다 보니 짜증이 났다는 것입니다.

[KT텔레캅 직원 : 거기(흥인지문) 하도 사진을 많이 찍는데 이용객들이 그래서 (감지기에)자꾸 걸리는 건데. 우리는 매일 (출동) 가다시피, 하루에도 몇 차례 가야 되고.]

그러다가 숭례문이 불타 무너지는 걸 보고 나서야 꺼놨던 적외선 감지기를 부랴부랴 살렸습니다.

[ KT텔레캅 직원 : (감지기) 신호가 많이 발생돼서 해당 구청에서도 너무 많이 (출동을) 오니까. 센서를 정지시켜 놨다가 어제(11일) 또다시 요청해가지고 다시 센서를 살려 놨다고.]

대문 정면의 감지기들만 꺼놨다며 별일 아닌 듯이 대답하는 종로구청.

[종로구청 직원 : (측면 계단으로 가지 않고 정면으로 들어갔을 때는 감지기가 안 울리는 상태죠?) 그렇죠. 정면 부분에서는 저희가 안 울리게 해 놓았었죠.]

아무나 보물 제1호에 침입해 불을 지를 수 있는 무방비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보안 책임자들이었습니다.


인용된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 신경 쓰지 말고,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의 뉘앙스를 느껴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칭얼칭얼로 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