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19

[별별시선]대통령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다. 동시에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한국뿐 아니라 대통령제를 택한 수많은 나라들의 헌법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국왕이 없는 나라를 만들 때 논란이 있었던 대목이다. 누군가가 행정수반이면서 동시에 국가원수라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계몽주의자들과 미국 헌법의 작성자들은 입법권과 사법권을 독립시킴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지만, ‘민주주의임에도 선거로 왕을 뽑는다’는 대통령제의 근본적 결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은 대통령제만의 결함이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원수를 선출하거나, 세습된 국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21세기에도, 모든 국가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경우,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이다.

지난 4월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인 바로 그날, 박근혜는 팽목항에 들러 문자 그대로 ‘쓱 둘러본’ 후 다시 차량에 탑승하여 청와대로 발길을 옮겼다. 만약 청와대가 세월호 피해자 및 유족들과 사전에 성의껏 만남을 갖고 일정을 조율했다면, 팽목항 분향소가 임시 폐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고, 먼 길을 달려온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모든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혹은 박근혜를 ‘모시는’ 청와대는, 그런 결과를 애써 구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단둘이 만났고, ‘국정 현안’을 논의한 후, 중남미 해외 순방에 나섰다.

지금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는 해외 순방 중이다.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국가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할 자격을 지닌 단 한 사람이다. 거대한 참사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그날 이후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국민들을 진정시켜야 한다. 국민이 대한민국에 손가락질하면 자신의 왼뺨과 오른뺨을 모두 대주어야 할 사람이다. 설령 사고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대통령의 책임이 전혀 없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은 현재 중남미 순방 중이다. 그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임시로 권한을 대행하게 될 국무총리는 현재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족들은 겹겹이 버스로 차벽을 세워둔 전경들에게 가로막힌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희생자를 추모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끄러운 경찰의 경고 방송과 물대포뿐이다.

이 국면에서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현장에서 물대포를 같이 맞는 게 아니다. 그 누구도 물대포를 맞지 않고 추모 행사를 평화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정부와의 입장에서 균형자 노릇을 해야 한다. 청와대로 흥분한 시민이 뛰어들어올지 모른다고 겁내는 정부와, 캡사이신 최루액에 눈물 흘리는 국민들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과 정치적 명운을 걸고 이들을 다독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진정 역사와 국민 앞에 책임감을 느끼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박근혜가 내팽개치고 가버린 국가원수로서의 역할을 대신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떠났고, 국무총리가 검찰의 수사 대상인 지금, 상징적 군주이며 국민의 구심점인 ‘대통령’ 자리는 사실상 비어 있다. 이럴 때 어떤 정치인이 정부, 경찰, 세월호 유족, 시민들을 설득해 광화문에서 평화적으로 추모 행사가 진행되는 장면을 이끌어낸다고 가정해보자. 국민들은 아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진정한 ‘대통령’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김무성과 유승민, 문재인, 박원순 등에게 모두 열려 있는 정치적 기회다. 세월호 참사 이후 표류하는 대한민국은 그런 선장을, 책임지고 비난을 감수하며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대통령을 필요로 하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192042255&code=990100&s_code=ao122

2015-04-09

유승민이 옳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연설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여권에서는 찬반 양론이 갈라진 반면, 야권에서는 대체로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편 야권 혹은 진보 지지 성향의 네티즌들로부터는 '그건 어차피 말 뿐이다, 좋은 말 하는 걸로만 치면 박근혜야말로 대단한 진보다'라는 식의 비아냥이 들려오기도 한다. 요컨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대응이야말로 이번 유승민 연설에 대해 나올 수 있는 가장 나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치는 결국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지키지 못한,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 하더라도, 어떤 약속을 어떻게 하고 왜 못 지키느냐에 따라 정치인과 정치 세력의 운명이 좌우된다. '그건 그냥 말뿐이다'라는 반응은 값싼 정치 회의주의에 다름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정치인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다.

45분에 달하는 연설에 다양한 논점이 있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 세금과 복지에 대한 부분만을 살펴보자. 그 대목을 통해 우리는 유승민의 연설이 왜 이렇게 큰 반향을 얻고 있는지, 반대로 비슷한 이야기를 해왔다고 여겨지는 야권은 왜 그만한 호응을 얻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中부담-中복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부담과 복지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평균 정도 수준을 장기적 목표로 정하자는 의미입니다. (중략) 中부담-中복지를 목표로 나아가려면 세금에 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무슨 세금을 누구로부터 얼마나 더 거둘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합의해야 합니다. 
증세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3년간 22.2조원의 세수부족을 보면서 증세도, 복지조정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부담은 결국 국채발행을 통해서 미래세대에게 빚을 떠넘기는 비겁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 그리고 소득과 자산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보편적인 원칙까지 같이 고려하면서 세금에 대한 합의에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유승민은 중부담-중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증세"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단 증세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부자증세, 법인세 인상 혹은 기존 감면분 철회, 자산세'등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승민의 연설이 야권의 '부자증세'론과 달라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승민은 국민 전체가 복지 부담을 져야 하며, 그것은 결국 지금보다 높아진 세금이 될 수밖에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반면 야권은 어떤가? '서민 여러분, 부자 증세가 이루어진다 해도, 아무튼 여러분도 세금을 더 내셔야 합니다'라는 진실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4월 8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연설에 이어, 4월 9일에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대표연설이 있었다. 그 내용 중, 앞서 인용한 유승민의 연설에 대응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집중된 조세감면 제도를 과감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국세감면액이 2013년 30조에 달합니다. 조세감면 혜택이 대부분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돌아가 조세체계의 공평성과 투명성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고용 증가, 비정규직의 정규직으로 전환, 비정규직 차별 해소 등에 대한 지원책으로 조세감면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소득세는 최고세율 구간 설정을 높이고 누진율도 높여야 합니다. 금융과 자본소득 및 재산소득에 의한 고소득에 대해서도 적절한 세금을 부과해야 합니다. 유리지갑이라는 근로소득과 비교해 공평한 소득세 부과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민 중산층 증세는 자제하여야 합니다. 더 이상 서민 중산층의 유리지갑을 털어서 세수를 메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문재인이 언급하다시피,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가 깎아준 법인세율만 되돌려 놔도, 연 4조6000억원의 추가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연 4조6천억원이 과연 큰 돈인가? 지난 3년간 부족한 세수만 해도 22.2조원이었다. 법인세율을 원상복귀한다 하더라도 약 10조원 가량이 모자란다. 그 돈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물론 부자증세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조세감면 혜택이 대부분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돌아가 조세체계의 공평성과 투명성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는 문재인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하지만 서구식 복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미국이나 일본 수준의 사회 복지를 이루려면, 우리는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부자들 뿐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증세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전체 국가 인구는 노령화되고 있고, 경제 활동 인구는 줄어들며, 돈 버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돈 써야 할 일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경제적 현실이다. 그리고 유승민과 달리 문재인은, '서민증세'를 전혀 하지 않고도 현재 수준의 복지를 유지하거나 그보다 더 복지 지출을 늘릴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올해 연말정산 파동에 대한 문재인의 언급은 보는 이를 더욱 답답하게 한다. 물론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세 부담이 크게 느는데도 "세율은 건드리지 않았으니 증세는 아니다"라는 정직하지 못한 주장"이었다는 그의 지적은 매우 정당하다. 그렇다면 그걸 잘 아는 문재인은, 왜 '월급쟁이 증세' 없이 복지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정직한 태도를 박근혜 정부에게 요구한다면, 스스로도 정직해야 하지 않는가?

연말정산 방식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꾼 것은 대단히 정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소득공제는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쓰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액공제로 전환함으로써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덜 돌려받고, 낮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이런 경우,

실제로 과세표준 7000만 원인 직장인이 300만 원의 의료비를 지출했을 경우 소득공제 방식으로는 24%의 소득세율이 적용돼 72만 원을 환급받을 수 있었지만 세액공제 방식으로는 15%의 공제율이 적용돼 45만 원만 환급받는다. 반면 과세표준 1200만 원인 직장인이 300만 원의 의료비를 지출하면 지금까지는 18만 원을 환급받았지만 이번 연말정산에서는 45만 원을 환급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과 문재인은 '서민증세 반대'를 기치로 삼고 세액공제로 전환된 연말정산에 대해 끝없이 공격을 가했다. 그 기조는 그가 대표연설을 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니 세상에, 과세표준 7천만원 이상인 직장인의 세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과세표준 7천만원인 직장인이 '고소득층'이 아니면 대체 누가 '고소득층'이란 말인가?

문재인의 연설과 유승민의 연설은 같은 달을 가리키는 다른 손가락이다. 하지만 유승민의 손가락이 훨씬 더 곧고, 용기 있게, 그 달을 가리고 있는 구름까지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증세를 피할 수 없다. 적절히 국민의 세 부담을 높히고 그것을 통해 소득재분배를 이루어내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문재인은 바로 그 점에서, 국민에게 사실을 사실로 전하고 설득할 용기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부자 뿐 아니라 서민들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그래야 복지를 더 할 수 있고, 그 이전에 지금 수준의 복지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다. 유승민은 그 사실을 말했다. 문재인은 진실을 회피하고 있다. 두 연설 전문을 다 읽어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윈스턴 처칠의 가장 유명한 연설 문구를 떠올려보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눈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전쟁중의 연설이긴 하나, 정치가 왜 '말'로 하는 일인지, 그리고 정치인의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곱씹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가 거짓말이라면, '서민증세 없이 부자증세만으로 복지' 역시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정치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증세와, 그 증세에 따르는 복지일 뿐, '서민증세 없이 부자증세만으로 보편복지'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정치권은 국민들 앞에 정직해져야 한다. 서민증세 없이는 서민복지도 없다. 정치인은 국민들에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도, 그것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전달하고 보편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복지가 필요하다면 증세를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유승민은 증세를 이야기한 반면, 문재인은 자꾸 중요한 대목에서 말꼬리를 흐리고 있다. 두 사람의 연설이 불러오는 파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승민이 옳다.

2015-04-07

[북리뷰]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 - 싱가포르가 이룬 부와 교육의 비밀…인공낙원의 다양한 면모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싱가포르가 이룬 부와 교육의 비밀
이순미 지음·리수·1만3900원

“가난한 어촌 마을을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가 사망한 후 언론에 수도 없이 오르내린 관용어구다. 그 나라의 지도층이 얼마나 청렴결백한지, 거리가 얼마나 깨끗한지, 기타 등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떤 ‘이미지’들이 그 뒤를 잇는다.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는 싱가포르에 대한 간접경험을 제공하는 책이다.

저자 이순미는 싱가포르에 주재원으로 근무한 남편과 함께 4년을 그 나라에서 보냈다. 이 책의 눈높이는 저자 본인의 그것, 다시 말해 중산층 가정의 주부 겸 파트타임으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는 지식인 여성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저자가 싱가포르의 다양한 면모를 관찰하고, 그 감상을 솔직하게 적어놓은 덕분에, 우리는 최근 언론에서 호들갑스럽게 칭송하는 ‘그 싱가포르’의 이면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싱가포르를 표상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유리문’이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출입구의 유리문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여러 번 방문했다고 해도 싱가포르를 안다고 할 수 없다.”(6쪽) 그 유리문을 넘어서면 숨이 턱 막히는 열대의 습한 공기와 언제라도 벌금을 매기기 위해 사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비밀경찰의 눈초리와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다니며 저임금 노동을 제공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땀냄새가 가득하다. 유리문 안의 싱가포르는 너무 강하게 틀어놓는 에어컨 때문에 종종 스웨터나 카디건을 걸쳐야만 하는 인공낙원이다. 그 밖은 한밤에도 기온이 20도를 웃도는 열대성 기후다. 리콴유 전 총리가 싱가포르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에어컨을 꼽았다는 것은 이제 국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싱가포르는 그 에어컨을 쬐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칼 같이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세 등급의 우열반이 정해지면서 시험에 의한 걸러내기(streaming out) 제도가 시작”되며, “초등교육을 마칠 때까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싱가포르 땅에서는 중등교육조차 받을 수 없다.”(106쪽) 학교 성적의 차이는 곧 ‘인생 등급’이 된다. “정규 코스에 합류한 우수 학생들이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으로 스카우트되면 특별관리를 받은 뒤 30대에 국장을 하고 40대에 장관을 하는 초고속 승진”을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걸러진’ 학생들에게는 무더위 속을 헤매고 다니는 일꾼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중산층 이상이 사는 맨션, 평균적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국가 소유 아파트는 모두 그러한 ‘인간 등급’에 맞춰져 있고, 그 속에서도 ‘유리벽’은 사라지지 않는다. 중산층 이상 고학력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주는 존재인 ‘메이드’(maid)가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와 통로는 거주민의 그것과 겹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유일하게 에어컨이 없는 곳이 바로 부엌과 메이드의 거처”(111쪽)다. 그 “거처는 집 뒤쪽에 있는 창고 바닥”(113쪽)이다. 민주주의라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사실상 뚜렷한 신분제 국가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잘 짜여진 인공낙원은 그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의 땀과 눈물로 간신히 유지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의도와는 약간 어긋나게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를 읽으며, 우리는 싱가포르를 보다 입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3301549131&code=116

2015-04-02

잘라라, 일베하는 그 수습을

1.

'이것은 또 다른 마녀사냥 아닌가?' 이른바 'KBS 일베 수습'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4월 1일부로 그가 정직원이 되어버린 후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일베라는 이유로 입사한 회사에서 잘리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식의 논의가 드물게 관찰된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안 협회장이 언급한 수습기자가 올린 글은 '생리휴가를 가고 싶은 여자는 직장 여자 상사에게 사용 당일 착용한 생리대를 제출하거나 사진 자료를 남겨서 감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 '핫팬츠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닌 여자들은 공연음란죄로 처벌해야 된다', '밖에서 몸을 까고 다니는 뭐 여자들은 호텔가서 한 번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라는 내용이다. http://m.segye.com/content/html/2015/04/01/20150401006204.html

이러한 가치관에 KBS라는 조직이 동조하거나,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앞서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안주식 KBS PD협회장은 "이 친구가 올렸다는 반성문은 사내 공개 게시판에 올라온 적이 없다. 반성문도 자신의 과거에 썼던 표현에 대해서 '조금 과했다'는 아주 가벼운 반성문이다. 구체적인 반성문은 아니었다고 건너서 들었다. 일종의 제스처였을 뿐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반성문을 썼느냐?'고 물어보면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게 우리들 입장이다"고 밝혔다.

자, 이러한 '일베 기자' 논란이, KBS의 입사시험에 있어서 '사상검증'을 강화시킬 것이며, 결국 방향만 다를 뿐 또 하나의 '마녀사냥'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과연 그 우려는 타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베에 혐오발언을 해놓고, 그걸 또 걸린 사람이 입사전형을 통과했다면, 그 혐오발언이 해당 채용 기관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 한, 어떤 식으로건 신입 선발 시스템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다. 그걸 정정하는 것이 '사상검증'이 안 되도록 해야 하겠으나, KBS가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방식에 어떤 맹점이 있었고, 그 맹점을 타고 인격의 결함이 밝혀진 구성원이 입사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드러난 시점에 이미 '이 건으로 인해 KBS 입사시험에 사상검증이 포함될까 우려된다'는 말을 하는 건, 너무 편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물론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제는 그런 말을 할 시점이 아니다.

지금은 좀 더 보편적이고, 반박 불가능한 가치에 기반하여 논의를 펼쳐나가야 한다. 남들이 다 한 이야기다. '일베를 했다'로 대중의 이목이 쏠렸으면, '생리대 인증' 같은 구체적 여혐 발언의 위험성을 지목하는 식으로 말이다.


2.

문제는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일베'라는 추상적인 기호에는 반대하면서, 구체적인 여성 혐오나 호남 차별 등에 대해, 실은 그리 큰 문제 의식을 절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베'라는 가짜 범주를 넘어서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형식이 내용이다.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내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베에 글을 쓰면 일베 형식을 따라야 하고, 일베 형식은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근간으로 삼는다. 그 사이트에서 통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다는 말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낙인찍기 = 집단주의 = 히틀러 = 스탈린 = 나빠요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일베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찍는 낙인'이 현존함을 인정하며, 동시에 '일베라는 낙인'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으며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베 하는 놈'이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거 나 알아 나쁜거야 일베 하는 애들 봤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사전적 정의상 '낙인찍기'에 속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낙인찍기'라고 해서 그냥 '악'이라고만 하지 말고, 질문을 좀 나눠보자.

(1) 그 낙인이 과연 부당한 낙인인가?

(2) '일베 하는 애'가 가치관을 갱신하는데 그 낙인이 도움이 되지 않나?

(3) 제3자들에게도 유익한가?

첫째, 일베에서 활발한 사용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 그 사이트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화법인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베 하는 놈'이라는 낙인이 '나쁜' 낙인이라면, 그것은 그 사이트의 언어 자체에 문제가 있고, 사용자가 그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노력하여 벗어던질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일베는 나쁘다'는 낙인은, 당연히 '일베'를 하면서 본인도 모르게 혐오발언과 차별적 사고방식에 물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사실 한국 사회는 '비공식적'인 곳에서 늘 그래왔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공개적으로 문제시되고 있으며, 그 모든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단어가 바로 '일베'가 되었다. 여기서 '너는 일베'라는 말이, 그저 '딱지 붙이기'라는 이유로, 금기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나?

오히려 '나는 일베를 했다, 나쁘다'라는 죄책감을 느낄 때, 비로소 스스로의 행동을 다잡고 보다 여성과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시민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일베'에 무슨 미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하다. 여성차별과 호남차별이다. 그것을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점점 도외시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악'을 지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 무엇도 '악'이 아니라면, '선'을 지킬 수도 없다. 일베에는 이론의 여지 없이 '악'으로 취급될만한 여성혐오와 호남혐오가 득시글거리는데, 대체 무슨 '선'이 있는가?

여성혐오와 호남혐오. 그 거대한 악을 포괄하는 이름을 '일베'라고 하는 것, 그래서 '타자화'의 효과를 불러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도덕적 기준선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비난받을 소리를 하며 즐기고,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뭉친 자들을, 왜 '악'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가?


3.

당연히 '일베가 안 되면, 오유도 잘라야 하는 거 아냐?' 같은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리가 나올까봐 근심하는 행위가 가능한 시점은 진작에 지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되었다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답을 말하자면, 일베가 아니라 오유를 하더라도,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고 있다면 당연히 문제시될 수 있다. 특히 민간 기업도 아니라 국민 전체의 세계 인식과 언어 생활 등을 책임지는 공영방송 KBS의 기자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사안에서 굳이 '일베'라는 이름을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그 과장된 결벽성, 그것은 양비론으로 향하는 미끄러운 비탈길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묻자. '낙인찍기'는 나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사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일단 낙인을 찍어야만 한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을 겪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요구되는데, 그러한 자기 객관화는 스스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범주를 찾아내어 붙이고, 그 라벨을 갱신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낙인찍기가 자기 객관화로 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자기 객관화를 한다면 스스로에게 찍혀있는 낙인을 응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 남자다. 그런데 내가 '한국 남자'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흔히 여겨지는 이러저러한 악덕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런 범주가 있음을 인정하고, 나 자신에 거기에 속하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근본적으로는 탈피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나는 한국 남자 아니거든?' 이라고 우겨봐야,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나 자신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

하물며 '일베 회원'이라는 것은 벗어던질 수 있는 정체성이다. '나 아이디 지웠어요' 뭐 이런 인증하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베 회원'이라는 범주가 갖는 불명예스러운 요소들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노력한다면, 나중에는 훨씬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너 일베 하냐?' 같은 말을 손쉽게 '폭력'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그 점에서, 오히려 본인들이 지향하는 '일베 회원의 정신적 교화'를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기독교적인 참회와 속죄가 가능할 게 아닌가.


4.

지금 한국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평가와 반성이 끝난 것 같고, '여성가족부'도 있으니 페미니즘은 완성된 것 같고, 그래서 다들 알아서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쓰면 될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도덕적으로, 또 법적으로 제재되어야 할 수많은 사안들이 존재하며, 그 각각은 너와 나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죄책감을 통해 유지된다.

'일베'를 무조건 타자화하지 말라는 속 편한 소리들을 보면, 과연 그들은 한국 사회의 진보를 원하는 것인지, 혹은 더 이상의 퇴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금 우리가 '일베의 타자화'를 걱정할 때인가? 그들로 인해 타자화되고 있는 수많은 소수자들은 걱정되지 않는가?

'일베에서 '생리대 인증' 같은 소리 하다 걸려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한국 사회에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공연하게 여성 혐오 발언을 유포하던 일베 회원이 공영방송 KBS의 기자직을 수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잘라라, 일베하는 그 수습을.

2015-03-31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나 - 군가산점과 청춘

제1회 여정남학교 초청 강연 원고입니다.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신 행사 주최측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북대학교 학생 여러분들과 뜻깊은 논의의 시간을 갖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강연문의 내용은 실제 강연장에서 한 발언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나 - 군가산점과 청춘

1.

안녕하세요. 제1회 여정남학교의 초대를 받아 이 곳에 온 강연자 노정태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군가산점과 청춘'입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군가산점을 요구하는 일부, 혹은 대다수 남성들에게, 그렇게 해서는 본인의 청춘에 대한 올바른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군가산점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특히 남자들이 손가락질하고 권리를 요구해야 할 대상은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국방부라는 이야기도 할 것입니다.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논의의 과정에서, 향후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지, 한국 사회가 그렇게 바뀌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본인의 청춘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빛나게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부족하게나마 대답해보고자 합니다.

일단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자신의 신원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저는 2010년 10월 11일 논산훈련소를 통해 입대하여 2012년 7월 18일 제대했습니다. 칼럼을 쓰거나 할 때에는 대체로 자유기고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지만, 수많은 한국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육군 예비역 병장이라는 신분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1983년생이니까, 제대하던 해에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훨씬 군대에 늦게 갔고, 최선을 다해 무난한 군생활을 한 덕분에, 그나마 영창을 가거나 하는 일 없이 제 시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카투사였습니다. 동두천에 위치한 미군부대인 Camp Hovey에 자리잡고 있는, 미2사단 1여단 산하 BSTB Bravo 중대 소속이었죠. 주특기는 통신이었습니다. Bravo 중대는 통신에 특화된 집단이었습니다. 저 하늘 어딘가에 미군에서 띄워놓은 인공위성이 있는데, 그 위성을 통해 보안 처리된 인터넷을 연결해주는 것이 저와 동료들의 주 임무였습니다. 말하자면 인터넷 기사 아저씨였던 것인데, 그래서인지 미군 동료들은 제대하고 난 후 그쪽 업계로 많이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뭐 인터넷 기사가 되는 것이죠.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실 군대 얘기라는 게 하는 사람도 딱히 재미있거나 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은 몇 배로 재미가 없으니까 더이상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논의와 관련된 것만 말하도록 하죠. 제가 있던 부대는 카투사의 수가 약 10명 내외로 유지되었습니다. 미군은 간부 사병 부사관 다 합쳐서 50여명 가량이었고요. 나름 중대지만 규모가 작았는데, 그래서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의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고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학급 같은 분위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신병으로 들어와서 병장으로 나갈 때까지, 카투사들은 대략 세 가지 집단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첫째, 유학생 그룹. 둘째, 서울에 사는 명문대생 그룹. 셋째, 지방 출신 그룹. 저는 그 중 무엇도 아니었죠.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군대에 갔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관찰자로서의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보이더군요. 가령 이른바 '군대 놀이'를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셋 중 유학생 그룹입니다. 한국 내의 연줄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에 조바심을 느껴서 '위 아래 관리' 이런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더라고요. 서울에 사는 명문대생들이 가장 편안한 태도를 보입니다. 반면 지방에서 온 카투사들은,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많은 경우 제대한 후 뭘 어째야 할지 상대적으로 훨씬 더 고민하고 여러가지 자격증 시험 등에도 몰두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다들 기본적으로 토익 750점은 넘는 사람들이니까,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은 그럭저럭 잘 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카투사는 미군부대에서 생활을 하는데, 미군은 사병의 경우에도 부대 내에서 2인 1실 혹은 가끔은 1인 1실 생활을 합니다. 또, 일과 시간이 끝나고 나면 사생활에 대한 간섭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후 전방의 주한미군 전투부대들이 대거 다른 곳으로 배치되었고, 동두천은 텅텅 비었습니다.

이런 소리를 대체 왜 하느냐, 지금부터 본론입니다. 덕분에 저는 상병 때부터 저 혼자 방을 썼습니다. 1인 1실. 지금 제가 사는 집에서 주로 생활하는 방보다, 당시 부대에서 제공되던 방이 더 큽니다. 업무 시간이 끝나고 나면, '짬'도 높아졌고 나이도 많고 하니까, 그야말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 되짚어보니, 모두의 군생활이 그렇듯 제 경우도 좀 공허한 느낌이 듭니다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계획이 없어서 그러지 않았습니다만, 작심하고 공부했다면, 공무원 시험 같은 걸 준비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2.

오늘의 강연 제목을 다시 살펴봅시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 있나 - 군가산점과 청춘"이라고 써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해준 게 많은 편이겠죠. 한국이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고, 카투사라는 이상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는 덕분에, 저는 2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1년 반 가량 아주 밀도 높은 어학 연수를 경험한 셈이니까요. 물론 그게 영어마을 캠프 같은 것은 아닙니다. 군 생활이었습니다. 한국군에게도 신병 때 좀 혼도 나고(군대 용어로는 '갈굼을 먹는다'라고 하겠죠), 미군들에게도 많이 배우고 기 싸움도 하고 그랬습니다. 동두천에서 카투사 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많은 경우 1주일에 한 번씩 군장을 매고 행군을 합니다. 대략 서너시간 가량 그 넓은 부대 내를 돌아다니는 걸 매주 합니다. 훈련은 다 해서 10번 넘게 나갔던 것 같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열흘 넘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달이 넘는 영외 훈련도 물론 있었고요.

그래도 제 군생활은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었습니다. 영어는 읽고 쓰기밖에 못했는데 입과 귀도 틔였고, 경험의 폭이 확 넓어졌습니다. 신병 기간 끝나고, 훈련이 없고, 부대 내에서 누가 사고를 치지 않았다면, 주말에 외박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설령 외박이 불가능하다 한들 2인 1실, 그 다음에는 1인 1실 생활이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저는, 다른 카투사들과 마찬가지로, 작심하고 하려고 했다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편하게, 여름이면 긴팔 윗도리를 입는 게 좋을 정도로 강하게 에어컨을 틀어주는 저 혼자만의 방 속에서 말입니다.

더 중요한 건 제가 카투사 중에서는 상당히 '빡세게' 군 생활을 한 축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100명의 예비역이 있으면 100개의 군생활이 있으니 함부로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만, 대체로 카투사들 중에서는 동두천 가는 게 가장 힘든 축에 속한다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아무튼 제게는, 같은 시간대에 같은 방식으로 군인 신분이었던 수많은 동지들과 비교해볼 때, 0.01%에 속하는 모종의 특권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자, 이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모든 예비역들에게 공무원 시험에 있어서 군가산점을 부여한다면, 그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강한친구 대한육군에 명실상부하게 소속되어, 전방에서 '개고생'하는 사람들일까요? 그보다는, 아마 저처럼 카투사가 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이른바 '땡보직'을 타고 앉아서 공부할 시간을 하염없이 확보할 수 있는, 그런 군생활을 한 사람에게 훨씬 유리한 결과가 발생할 것입니다.

이것은 두 번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고생하는 사람 따로, 시험에서 가산점 얻는 사람 따로. 가끔 '군대에서 사법시험 합격' 같은 뉴스가 나옵니다. 그런 경우, 윗선에서 어려운 시험 준비한다고 따로 시간과 여유를 챙겨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7급이나 9급 공무원 시험은 합격한다고 해서 딱히 언론에 보도될만한 자랑거리가 아니니 그런 특혜를 누리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아무튼 군가산점 제도가 부활하면 이익을 볼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전방이나 기타 근무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고생한 사람들이 아니겠지요. 저처럼 개인 여가를 전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만한 여건에서 군생활을 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혜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군가산점 폐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역차별'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옵니다. 남자들이 2년의 청춘을 바쳐서 나라를 지키고 오는데, 여자들에게도 출산이 의무로 강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억울해하고, 여자들은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이거나, '김치년' 같은 욕을 먹지 않기 위해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일단 그런 모든 모습을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런데 정말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왜 남자들은, 그렇게 2년의 군생활이 억울하다면서, 자신이 받아야 할 보상을 생판 모르는 '땡보'들에게 퍼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것일까요?


3.

1999년 12월 23일, 그 세기말의 현장으로 돌아가봅시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가 떨어졌던, 혹은 준비중이었던 다섯 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던 한 사람의 남성 장애인도 있습니다. 이들이 낸 위헌법률심판청구의 사건번호는 98헌마363.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 제8조 제1항 등 위헌확인 소송입니다. 그 유명한 '군가산점 위헌 판결'입니다. 군가산점 부여가 어떤 제도인지 확인하려면, 그것이 왜 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폐지되었는지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2012년 신검 규칙이 개정되기 전까지, 발기부전이나 무정자증에 걸린 남성은 현역 판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신체의 다른 부분이 전부 건강하다 해도 발기부전이면 4급이었습니다. 무거운 역기를 들어올리고 사격을 아무리 잘 한다 해도, 고환에서 정자가 생산되지 않으면 역시 4급이었습니다. 키가 196센티미터 이상인 경우에도 현역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2012년 신검 규칙이 개정되면서 이들은 모두, 현재로서는 다른 신체적 이상이 없는 한 3급 판정을 받고 현역 군인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딱히 '장애인'이 아닙니다. 물론 무정자증이나 발기부전은 장애가 맞고, 키가 지나치게 크면 일상 생활에서 불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지체장애나 정신장애 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발기부전, 무정자증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러한 장애가 없는 사람에 비해 공무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발기부전을 이유로 수행할 수 없는 '공무'라… 네, 그런 건 없습니다.

하지만 98헌마363 판결이 없었다면, 수많은 발기부전 및 무정자증 환자들은 결코 공무원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코' 될 수 없다는 말은 다소 과장이겠군요. 하지만 난이도가 매우 높아집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도 쉽게 짐작하실 수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위헌심판의 대상이었던, 다행스럽게도 폐지된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 제8조 제1항과 그 시행령은, 6급 이하의 공무원 시험 혹은 사기업 입사 시험에서, 그 필기시험 과목별 만점의 5퍼센트 내지는 3퍼센트를 오직 현역 복무자에게만 가산해 주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군대에 가고 싶어도 발기부전이나 무정자증 때문에 군대에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같은 조건 하의 현역 복무자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되지 않냐고요?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들이고, 다들 열심히 공부합니다. 한 문제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데, 심지어 군가산점이 도입되면 100점이 아닌 103점이나 105점이 커트라인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 경우 무슨 수를 써도 군대에 안 갔다 오면, 당연히 100점을 넘는 점수는 받을 수가 없으므로, 절대 공무원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폐지된 법의 내용을 더 살펴보면, 심지어 군대에 가더라도 의가사제대를 한 사람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동법 시행령 제9조 제1항에 이렇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① 법 제8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제대군인이 채용시험에 응시하는 경우의 시험만점에 대한 가점비율은 다음 각호의 1과 같다.
1. 2년 이상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한 제대군인:5퍼센트
2. 2년 미만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한 제대군인:3퍼센트

군가산점의 문제를 '남자 대 여자'의 대결 구도로 놓고 보면, 큰 그림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군 복무를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모든 남자들을 위해, 그 외의 경우를 차별하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땡보' 이야기를 해봅시다. '땡보'들은 잘 다치지도 않습니다. 본인이 축구를 하다가 무리하지 않는 한 결코 다칠 일이 없다, 그것이 '땡보'를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반면 고생하는 군인들은 늘 부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칫하면 의가사제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렇게 군복무 중 부상당한 이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군가산점에서 차별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법이 과연 정당합니까?


4.

헌법재판소의 논리를 순서대로 짚어봅시다. 대한민국헌법 제39조는 국방의 의무에 대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39조 ①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②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여기서 제2항은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음'을 규정하고 있지, 병역의무를 이행했다 해서 추가적인 이득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와 '이익을 얻는다'는 분명 다릅니다. 앞의 것은 국가에게, 누군가 군대에 갔다 왔거나 군 복무중이라고 해서 특별히 불이익을 가하지는 말라고 명령하는 내용입니다. 가령 현역 복무중인 군인이 일과 시간 이후 '싸이버 지식 정보방'에서 웹서핑을 즐긴다고 해봅시다. 그 군인이 특별히 군 기밀을 유출할 위험이 심각하고 현저하지 않는 한, 그런 개인적 행복 추구를 가로막을 권리가 군에게는 없다고 헌법은 말합니다. 제39조 제2항은 그런 의미입니다. 군인이라고 해서 재판 없이 즉결처분을 당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헌법 제39조 제2항이, 군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인 그의 권리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헌법 제32조 제4항은 여성의 노동권에 대해 '적극적 보호'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32조 전체를 읽어보면 그게 어떤 맥락인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제32조 ①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②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③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④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⑤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⑥국가유공자·상이군경 및 전몰군경의 유가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우선적으로 근로의 기회를 부여받는다.

제32조 제1항이 있으니 걸스데이의 혜리 씨가 광고에서 '대한민국 최저임금은 5580원'이라고 홍보할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다. 아무튼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판에, 장교로 자원입대하지 않는 한 여성의 군복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군가산점이 유지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장교로 자원입대하면 그건 애초에 6급 이하 공무원시험을, 적어도 당분간은 응시할 상황도 아닙니다. 헌법재판관 전원이 일치된 의견을 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데, 98헌마363은 예외적입니다. 그 이유는, 약간의 법적 상식을 가지고 있다면, 너무도 뻔한 것이고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근로에 있어서 여성을 보다 더 보호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군가산점은 헌법 제25조에 규정되어 있는 공무담임권, 즉 조건이 갖춰진다면 공직자가 되어 공공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합니다. 결국 그 모든 차별은 헌법 제11조, 법 앞의 평등에 위배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 뿐 아니라 '영 좋지 못한 곳에 총을 맞은' 심영 씨, 그 외 다양한 장애인들이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실질적으로 가로막아버리는 악법이었습니다. 판결문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가산점제도는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려 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초래하고 있으므로 우리 법체계의 기본질서와 체계부조화성을 일으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제대군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회정책적 지원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공동체의 다른 집단에게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할 균등한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어서는 아니되는데, 가산점제도는 공직수행능력과는 아무런 합리적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는 성별 등을 기준으로 여성과 장애인 등의 사회진출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5.

"가산점제도는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려 한 나머지". 이 대목이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대한민국 최저임금은 5580원이며 그것은 최종적으로 헌법에 의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군인의 월급은 어떻습니까? 2015년 기준 이병 12만 9400원, 일병 14만원, 상병 15만 4800원, 병장 17만 1400원 입니다. 이걸 시급으로 나누면 아주 작은 금액이 나올텐데, 과연 군인의 근무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혹은 10시간으로 계산하는 것이 타당할지 아닐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10시간으로 가정한다면, 한 달을 30일로 놓았을 때, 병장은 시간당 571.3원을 받습니다. 최저임금의 약 10분의 1인 셈입니다.

여성부나 '이대 나온 김치X'들이 군인들로부터 군가산점을 빼앗아간 게 아닙니다. 국방부가 군인들의 노동력을 빼앗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청년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송두리째 바치는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말 그대로 동전 몇 푼씩 쥐어주고 있습니다. 그 불만이 점점 커지자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겠다며 군가산점 제도를 도입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온 것처럼 군가산점 제도는 여성들과 장애인을 부당하게 차별하며, '고생하는 사람 따로 혜택 보는 사람 따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태생부터 불공평한 제도입니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키는 이 나라에 '군대 안 갔다 온 여자들'이 무임승차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일부 남성들이, 왜 내가 고생했는데 남이 공무원 시험 가산점 받는 그런 종류의 무임승차에는 분노하지 않는지 말입니다.

모든 군인들에게 군 복무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어떤 방향에서 검토하더라도 적절합니다. 사병들의 월급을 대폭 높혀주고, 그들의 영내 복지 혜택도 강화하여, 넉넉하게 쓰고 싶은 사람은 풍족한 군 생활을 하고, 돈을 모으고 싶은 사람은 전역할 때 두둑한 통장을 들고 나올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달래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라고들 합니다. 그 냉소적인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많은 경우, 정말 대부분의 경우, 가장 보편적인 보상책은 결국 돈을 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택하지 않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드는 단 하나의 진정한 요구 역시 바로 그것입니다. 어디 정부 뿐인가요? 기업들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려 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의 정신 세계는, 알바비 떼어먹으려고 눈을 번뜩이면서, '이것도 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라는 몰지각한 알바 고용인의 그것과 사실상 동일합니다. 구구절절한 덕담이니 힐링이니 다 필요없고, 일단 일한 만큼 돈을 주면 되는데, 죽어도 그것만은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2012년, 사병의 월급이 최저임금에 훨씬 못 미치고, 직업군인과 비교해도 훨씬 부족하다는 소송에 대해, 만장일치로 소극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2011헌마307 공무원보수규정 제5조 중 별표 13 등 위헌확인 소송입니다. 최저임금, 군인 월급 등의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런 헌재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장일치로, '군인은 최저임금보다 못 받아도 된다'라니, 군가산점 폐지하는 것도 그렇고 역시 헌재는 군인을 무시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더군요.

실상은 그보다 좀 더 복잡하고, 어떤 면에서 난삽합니다. 언론 보도만 봐서는 알 수 없고 직접 헌재 결정문을 읽어봐야 하는데, 그 심판의 청구인은 말하자면 '군대의 문제아'였습니다. 군복무 중 상관을 폭행하여 1년 6개월간 별도의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자신에게 불이익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을 모두 헌법소원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죠. "월 급여에 대하여 최저시급제나 최저임금제를 정하여 지급하지 아니한 행위, 남성에 한한 병역의무 부과, 군교도소 미결수용 중 학습기기 반입금지, 군교도소 미결수용 중 전화사용 제한, 정신과 병원 수용 중 전화사용 제한과 사지억제 행위, 병영생활관에의 학습기기 반입금지, 병의 휴대전화 소지 및 사용 금지를 다투는 취지"를 내세웠습니다.

2011헌마307 소송의 청구인에게 어떤 개인적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만, 그가 내세우는 논리는 뒤죽박죽이고 사실 정확히 뭘 요구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청구인이 누구냐'에 따라 헌재 재판관들의 편견이 개입되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한 차례 실패하긴 했지만, 군인의 월급 문제에 대해 제대로 법적 공방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6.

정리를 해봅시다. 첫째, 군가산점 제도는 군 복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 공무담임권 등을 침해하는 불평등한 제도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만장일치로 폐지되었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보면, 그 제도가 수많은 이들에게 족쇄가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설령 군가산점 제도가 시행된다 해도, 그 제도로 이익을 볼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땡보'들이 혜택을 독점합니다. 반면 위험한 환경에서 고된 군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은, 내가 고생해서 남 시험 점수 퍼주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가산점에 대한 찬성과 반대, 여자들과 남자들의 대립, 국방의 의무냐 출산의 의무냐, 이런 가짜 대립 구도를 벗어나, 예비역과 예비 군인들이 집결하여 자신들의 청춘에 대한 올바른,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본격적 시도는 아직 시작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군대를 갔다 왔거나 갈 예정인, 혹은 가지 못한 수많은 남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제 군가산점 논란으로부터 벗어납시다. 그것은 당신과 나와 앞으로 군대에 가야 할 수많은 남자들의 청춘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이 되지 못하는 제도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군가산점 '떡밥'을 물고 파닥거리는 동안, 국방부는 군인의 처우 개선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압박을 덜 받게 됩니다. 아주 흔한 수법입니다. Divide and rule. 분할하여 통치하라. 애꿎은 여자들을 상대로 피해의식을 폭발시키는 동안, 국방부는 빙긋이 웃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고, 저는 이 자리에서 단 한 명이라도, 올바른 방향의 분노를 느끼기를 희망합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라는 억울함이 솟아오를 때, '돈으로 갚아라'라고 함께 외칠 수 있는 그런 주체들이 들불처럼 번져가기를 바랍니다. 물론 흘러간 청춘이 돈으로 다 보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쳐 국가로부터, 그 소중한 세월의 댓가를 정당한 수준까지 받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 남자들의 청춘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이 국가를 민주화시켰듯이, 2010년대의 대학생들은 그들이 갔다 왔거나 가야 하거나 친구들을 보내야 하는 군대를 민주화시키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간곡히 요청합니다.

특히 군 입대를 앞둔 남자들이 핵심입니다. 만약 단 100명, 아니 50명이라도, 똘똘 뭉친 군 입대 연령 남자들이 '우리는 시급 500원짜리 인생이 아니다, 최저임금 보장없이 군복무 불가하다'라고 선언하고 드러누워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당사자들은 대한민국 전체와 '맞장'을 떠야만 할 것입니다. 아주 외롭고 힘겨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사방팔방에서 비아냥과 손가락질이 쏟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싸움의 편에 서겠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저부터 앞장서서 설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군가산점 문제'를 던져, 한창 서로 눈 맞추고 웃고 사랑해야 할 남자와 여자를 싸우게 만드는 대한민국의 지배세력과 진정으로 맞서는 싸움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청춘이기에 시작할 수 있는 싸움. 가장 많은 청춘이 당사자로서 동일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싸움. 그것이 바로 군인들의 처우 문제이며, 그 처우 중 핵심이 바로 급여 문제입니다.

이미 '30대 논객'이 되었고, 이 강연을 처음 시작할 때 말했던 것처럼 사회 평균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군 생활을 했던 저는, 그 싸움의 당사자가 되기 곤란한 입장입니다. 그것은 제가 '청춘'으로부터 하루하루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수많은 제 또래들과 함께, 새로운 청춘들이 싸움을 시작하기를 소망합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편에 함께 설 준비를 한 채 말입니다.


* 2015/03/30 오후 7시,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교 132호에서 강연한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