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0

귀족이냐 평민이냐

1.

정치는 갈등이다. 어떤 집단과 집단이 무슨 주제로 갈등하고 있느냐를 파악하면 정치적 구도가 그려진다. 유행어가 된지 10여년 만에 시쳇말이 되어버린 '프레임'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조지 레이코프가 제시한 언어심리학적 개념의 섬세한 학술적 맥락과 달리, 현재 한국에서는 누가 누구와 왜 싸우고 있는지를 단번에 설명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개념으로 '프레임'이라는 단어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가깝게 잡아도 2008년 대선부터 야권은 늘 지고 있다. 대선에서 두 차례나 패배했고, 총선에서도 다수석을 점해본 적이 없다. 시계를 조금 더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1997년, 2002년의 대선 승리는 주기적인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의 시작이 아니라 역사적 예외로 기록될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많은 이들이 시달린다. 현재의 야권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한 것은 오직 17대 총선에서만 가능했었고, 그 총선은 다들 기억하고 있다시피 탄핵 역풍 속에 치뤄진 '비상선거'였다.

요컨대 야권은 늘 불리한 상황 속에 처해 있었고, 최근에도 늘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개념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쭉, 계속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마치 지형지물처럼 주어진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야권이 패배하면 운동장이 기울어진 탓이라는데, 입장을 바꿔서 국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야권의 브레인 내지는 빅마우스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패배한 것은 원래 환경이 그래서 그렇습니다'라고 웅얼거리고 있는 꼴이다.

'프레임'을 바꿔야 이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현실을 설명할 때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프레임을 퍼뜨리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이 실망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도가 20퍼센트 대에서 맴도는 것도, 야당의 구성원들끼리 총선과 대선의 승리라는 단일한 목적 의식 하에 단결하여 일관된 지도 체제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이미 담론이 오가는 내용과 수준만 놓고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타령을 하며 국민들에게 징징거리고, '20대 개새끼론'을 들먹이며 본디 야권 지지 성향이 높은 청년층에게 표 내놓으라고 반 협박을 해서 도리어 심정적 지지도를 갉아먹고, 이중 삼중의 억압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투표장으로 이끌고 지지층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기는 커녕 '아줌마들이 몰표를 줘서 박근혜가 당선되었다'는 여성혐오적 인식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야권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수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매우 부정적이다.


2.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정치는 갈등이다. 이것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정치학의 거장 E. E. 샤츠슈나이더의 통찰이다. 정치는 갈등의 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긋고 지지자를 확보하는 게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갈등의 선이 불리하게 그어져 있는 한, 미시적인 노력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령 지금까지 '지역감정'이라는 말로 호도되어 온 호남혐오, 호남포위 전략에 대해 생각해보자. 군사정권과 그들로부터 기원을 두고 있는 정치 세력은 위협적인 대선 후보 김대중을 눌러앉히기 위해 끝없이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동시에 그의 지지 기반인 호남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누군가 김대중을 지지한다면 그는 호남 사람이다, 이렇게 김대중이라는 개인과 호남을 1:1로 결부시킴으로써, 김대중을 둘러싼 갈등을 '호남 대 비호남'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대중이 어떤 새로운 정치적 갈등의 선을 제안하건, 그것을 빨갱이 아니면 호남이라는 두 개의 타자화된 개념틀에 포박지어 버림으로써 그를 1997년까지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전략은 현재 '친노 대 비노'라는 구도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나중 문제고, 일단 그가 '친노'라고 분류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갈등의 선이 그어진다. 야권 내의 정치인을 '친노'와 '비노'로 분류하고 있으니, 당연히 갈등은 노무현이라는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을 중심으로 그어질 수밖에 없다. 비극적인 것은 노무현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을 기준선으로 그어진 갈등을 극복하거나 재설정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끝없이 갈등의 선으로 제시되며, 사실상 학대당하고 있다.

야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더 나아가 다가올 총선과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며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고민은 좀 더 근본적인 곳을 향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갈등은 어디에 있는가?


3.

현재 야권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매달려 있다. 이미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의 형식이 만들어진 나라에서, 2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대선도 그래서 졌다. 정치인 박근혜의 가장 큰 자산이자 부채는 그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갈등'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그 구도가 여전히 통용된다고 믿었고, 특히 이제는 50대에 접어든 386 세대 사이에서 그러한 믿음이 팽배했던 것 같다.

그들은 군사독재를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20대를 향해 '너희가 문재인을 찍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사 독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협박했다. 20대는 꾸역꾸역 선거장에 나가 야당에 많은 표를 몰아주었지만, 정작 386들은 자신들의 동년배가 경제적 이유로, 혹은 잘난척하는 386들을 더는 참아주기 싫다는 이유로 도리어 박근혜에게 몰표를 주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12년 대선 결과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50대 이상에서 박근혜에게 몰표가 쏟아졌기 때문에 진 것이다. 그들은 숫자도 많고 표 결집도도 높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민주 대 반민주'라는 갈등은 거의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386들은 고장난 축음기처럼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붙들었고, 영남 득표에 올인하더니, 졌다.

대선 패배 이후 야당이 몇 번의 구조적, 혹은 명칭에서의 변화를 겪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갈등의 구조를 업데이트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친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선거에서 졌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 체계인 '민주 대 반민주'를 버리지 못한다. '비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심지어 그 정도의 이념적 틀거리도 갖추지 못한 채 현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간헐적으로 드러내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겠지만, 정치는 갈등이다. 새로운 갈등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정치도 있을 수 없다. 안철수의 새정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한 행복과 개혁을 약속하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서 당장 맞서 싸워야 할 핵심적인 갈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은 듯하다. 안철수 현상이 대선 직후 시들어버리고 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갈등의 설정이어야만 한다.


4.

그렇다면 여권의 핵심적인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야당 성향의 지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같은 말을 얼른 꺼내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들이 '빨갱이' 낙인 찍기로 압축되는 그러한 갈등 구도를 지금까지 즐겨 사용해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그러한 구도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 성립하지도 않거니와, 애초에 '빨갱이 딱지 붙이기'는 부정적인 방향에서의 선 긋기를 가능하게 할 뿐 어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갈등을 창출해내지 못한다.

선진국 대 후진국. 그것이 지금까지 여권에서 국민 일반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해온 가장 근본적인 갈등의 축이다. 보수 정당 중 하나의 이름이 '자유선진당'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누리당이라는 이름부터가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를 새로운 어떤 차원으로 이끈다', 다시 말해 선진화시킨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후진국이 되지 말자, 가난에서 벗어나자, 경제를 발전시키자, 그렇게 선진국이 되자. 이것은 5.16 쿠데타 이후 군부와 신군부의 교체를 거치고, 3당 합당으로 입당한 김영삼이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면서까지도 바뀌지 않은, 여권의 핵심 갈등이다. 지금까지 야당보다는 여당이 정치적 논의를 주도해왔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결국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개발독재 시대를 넘어 아주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핵심 갈등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해방 직후 해외 원조에 의존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해외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된 것은, 그만큼 선진국 대 후진국의 대립 구도가 국민 전체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잡아, 최선의 결과를 뽑아낼 수 있는 긍정적 갈등으로 기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늘날 그 갈등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 되었지만, 과연 우리가 '선진국 대 후진국'의 갈등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따라서 그 갈등이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진국 대 후진국'의 구도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효하다고 할 수도 없다. 분명 우리는 잘 살게 되었고, 이제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심지어 국회마저도 '선진화' 되었으니 말이다.

선진국이 되어야겠다는 열망은 사라졌지만 개별적인 경제 주체들의 탐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나라가 모두 함께 더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선진국의 꿈'은, 어느덧 남들이야 망하건 말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각자도생의 꿈'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가 힘을 잃었지만, 그것을 대체할만한 전 국민적 도전 과제가 새롭게 제시되지는 않은 지금, 대한민국은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며 그저 표류하고 있다.


5.

한국 사회의 이상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다시 짜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갈등을 재정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인당 국민 소득 2만불을 넘긴 나라, 평균 출산률이 세계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 국민들이 밤낮 없이 일하지만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나라. 이 나라의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이냐, 평민이냐'의 갈등을 겪고 있다. 소수의 '귀족'들이 그들의 '가족'을 위해 국가 전체의 이익을 해치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느냐, 아니면 절대 다수의 '평민'들이 틀을 깨고 연합하여 일 하는 사람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위대한 평민의 나라'로 향하느냐의 갈림길이다.

최근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어를 떠올려보자.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수십년 더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눈에는 곧장 보이는 것이다. '상속받을 유무형의 재산이 있는 자'와 '부모로부터 빚이나 잔뜩 물려받지 않으면 다행인 자'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당신들이 함부로 순진하다고 치부하며 계도하려 드는 젊은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헬조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최근 언론에서 그 단어를 거론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섯불리 현실 속에서 절망하는 젊은이들을 꾸짖느라 바쁜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국 인생의 문제를 부모와 조부모의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태어난 평민 청년들의 울부짖음이다. 왜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헬대한'이 아니라 '헬조선'이라고 말하는가? 젊은이들이 경험한 바, 이 나라는 신분제 조선에 더욱 가까운 무언가로, 다시 말해 양반이라는 특권 귀족 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그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헬조선'을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그저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이 나라가 아무리 '선진국'이 된다 한들 그 과실이 자신에게 돌아올 리 없다는, 남들은 행복하겠지만 자신은 끝없이 늘어나는 노동 시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데, 선진국 타령이 말같은 소리로 들리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의 청년들은 성장기에 2002년 월드컵을 일종의 원체험으로 경험했고, 전 세계인들이 케이팝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지 말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더 선진국이 된다 한들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청년 세대가 볼 때 대한민국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충분히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선진국의 작동 방식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귀족이냐 평민이냐. 오직 이 갈등만이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6.

현존하는 정치적 갈등을 귀족과 평민의 갈등으로 재편하는 것은 야권에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겨준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기울어졌다고 불평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운동장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물론 새누리당도 선거를 앞두고 '서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야권보다 좀 더 왼쪽에서는 '민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서민'이나 '민중'은 그러나, 그에 대립하는 개념이 없는, 정치적으로 오작동하기 딱 좋은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학적 개념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생각해보자. '서민'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중산층'인가? 아니다. '서민과 중산층'은 마치 짜장면과 짬뽕처럼 한 세트로 취급될 뿐 서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둘 다 모든 정치 세력이 앞장서서 지켜줘야 할 누군가이며, 더 많은 연말정산 환급을 받아야 하고, 온갖 종류의 지원을 받아야 하며,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할 시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언어 속에는 '서민과 중산층' 바깥의 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서민 정당'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반서민 정당'을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민들의 이익'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가 돌아와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 된다. 그러므로 선거를 앞두고는 좋은 말을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서민을 위해, 중산층을 위해.

그 결과 진정한 정치적 갈등은 실종되어 버렸다. 2012년 대선을 돌이켜보자. 여당과 야당의 경제 공약이 거기서 거기였다. 야당의 지지자들은 '어차피 저들은 실천하려는 진정성도 없이 공약을 마구 베꼈다'라고 불평한다. 하지만 애초에 공약을 '베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만약 야당의 공약이 진정으로 올바른 갈등을 설정하고,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올바른 혜택을 가져다주며 갈등선 너머에 있는 세력에게 불이익을 주도록 만들어져 있었다면, 그런 공약은 절대 도둑질당할 수 없다. 여당이 야당의 경제 공약을 베낀 게 아니라, 야당이 여당의 경제 공약을 대신 써준 셈이다. 어차피 양당 모두 한국 사회의 갈등을 올바로 파악하고 재설정하여 그에 맞춰 정치의 룰을 다시 짜는 대신, 그들에게 익숙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의미한 갈등 위에서 기존의 지지층을 재결집하여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7.

'평민'은 '서민'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서민'은 '민중'처럼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막연한 선의 거대한 대변자이면서 수혜자인 반면, '평민'에게는 분명한 외부의 적이 있다. '귀족'이 바로 그것이다. 평민은 귀족과 맞서서, 단결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지켜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서민'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그 어떤 실존적 선택도 강요하지 않는다. 연봉 1억을 받아도,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별별 희한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이 서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스스로를 '평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분명한 실존적 선택이다. '귀족 마케팅'이 넘실거리고 '없어보이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분명 그렇다.

바로 그렇기에 '평민'은 정치적인 힘을 갖는 단어다. '나는 평민이다, 그렇다면 너도 평민인가?'라고 유의미하게 물어볼 수 있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스스로 평민이 아니라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귀족이겠군, 나는 다른 평민들과 함께 당신 같은 귀족에 맞서겠다'고 말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나뉘는 세상에서, 너는 누구인지, 혹은 누구의 편인지 물어볼 수 있는, 현실과 맞물려 제대로 작동하는 대립적 언어의 쌍을 우리는 지금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저 '귀족'의 범위 안에 우리는 수많은 이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창업주 일가'의 이익을 위해 왜 국민들이 납부한 국민연금이 투입되어야 하는가? 그들 같은 귀족을 위해 우리 평민들이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귀족들은 땀흘려 일하는 평민을 내쫓고 권리금을 빼앗으며 임대료를 올려 자영업자들을 고사시킨다. 평민 집안의 자녀들은 날로 복잡해져가는 대입의 문턱에서 좌절하지만, 귀족들은 이미 자신들의 자녀를 일찌감치 외국에 빼돌려놓은 상태다. 여차하면 평민들이 총알받이 하는 사이 귀족의 아들들은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되어 돌아와 통치할 기세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을 가르는 갈등의 선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 '노동귀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IMF 이후 대대적으로 비정규직이 늘어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작은 기득권을 사수하는데 급급하여 정규직 노동조합 조직률도 늘리지 않고, 비정규직은 아예 내팽개쳤다.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그 노동귀족들은 경영귀족, 관료귀족들이 평민들의 노동권을 침탈하는 것을 반쯤은 방조와 묵인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진보는 '노동귀족'들이 내팽개친 평민들의 손을 잡는 대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런 귀족'과 '저런 귀족' 사이의 선택지만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사무직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 잘 조직된 대규모 블루칼라 사업장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청년들에게, 더 나아가 정치적인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귀족들에 맞서 평민의 이익을 지켜줄 단단한 정치 조직이다.


8.

레드 컴플렉스는 통합진보당의 해산, 그리고 김정은의 뚱뚱한 몸매와 함께 정치의 장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우리는 그 동력을 상실한 채 후진국으로 한 걸음씩 후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야당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끝없이 반복하면서 역사의 퇴행을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정작 그 사이, 이제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청년들은 '헬조선'을 외친다. 그것은 단순한 비관이나 풍자가 아니다. 신분제 사회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비명이다. 특권층, 양반, 귀족들이 지배했던 우울한 역사를 벗어나, 가까스로 노력한 만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태어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절망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과 평민이 대립하는 나라다. 회사를 물려받고 건물을 물려받고 학벌과 명성을 물려받는 귀족들이 있고, 자기 손으로 아등바등 벌어도 가까스로 먹고 살까 말까 하는 평민들이 있다.

평민들이 귀족을 이기는 것은 역사의 당위다. 올바른 정치 세력이라면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이기고 싶은 정치 세력이라면 더더욱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귀족보다 훨씬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갈아엎고, '노령화 핵폭탄'을 맞은 인구 구조를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은 오직 그것 뿐이다. 갈등을 새로 짜라. 이제는 평민들이 힘을 합쳐 귀족과 싸워야 한다.

2015-09-17

[북리뷰] 우리의 노동,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노동여지도
박점규, 알마, 1만6800원.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우리 모두는 사용자 아니면 피용자, 즉 노동자다. 하지만 '노동자'라는 단어는 2015년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빨간색 조끼를 입고 파업을 하는 사람들' 정도의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는 듯하다. 게다가 대도시, 특히 서울에서 화이트칼라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수도권 밖의 넓은 세상을 잘 인지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노동여지도>는 바로 그 좁은 편견을 깨주는 책이다. 주간경향의 독자라면 다들 익숙할 바로 그 연재가 묶여서 책으로 나왔다. 저자 박점규는 1998년부터 민주노총에서 홍보와 투쟁을 담당해왔고, 이후 수많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수원, 울산, 인천, 서울 등 큼지막한 도시들 뿐 아니라, 군산, 구미, 화성, 광양, 동해, 삼척 등의 소도시에도 노동의 현장이 있다. 저자는 "2013년 3월 수원을 출발해 바다 건너 제주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 28개 지역을 돌았"(8쪽)다.

그가 바라보는 전국 노동 현장의 모습은 모두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각자의 맥락과 상황이 있을테니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절망과 탄식 속에 제한된 희망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현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들 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대전의 대덕연구개발특구의 연구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국공공연구노조 이광오 사무처장의 말이다. "연구원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이에요. 스펙도 좋고 유학파도 많아요. 지금은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때쯤이면 쫓겨납니다."(171쪽)

<노동여지도>는 뚜렷한 대립각과 입장을 세우는 책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깊은 동지애가 느껴지지만, 대체로 사측에 대해서는 깊게 언급하지 않는다. 제한된 지면에 연재된 원고여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노동 현장의 분위기와 상황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흔히 말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언급할 때만큼은 비판적인 뉘앙스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와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36일간의 파업 이후, 울산의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을 외면한 부끄러운 역사를 지나왔다. 현대자동차 정규직노조는 생산현장에 16.9퍼센트의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고, 비정규직과의 노조 통합을 세 차례나 부결시켰다."(29쪽)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하나의 노동자계급이 일하던 공장은 연봉 9000만원의 A급 직영노동자, 연봉 4500만원의 B급 하청노동자, 초단기 알바로 일하는 C급 촉탁노동자로 나뉘었다."(36쪽)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냉정한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따스한 동지애에 기반하여 쓰여진 책이다. 전국의 수많은 사업장, 그 중에서도 중소기업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화합하여 승리를 얻어낸 사례들을 기록할 때, 저자는 진심으로 기뻐한다. 타다대우상용차의 정규직 선배들이 매년 2천만원이 넘는 성과급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정규직 후배들을 정규직이 되도록 도와준 사례를 읽고 있노라면 독자의 입에도 절로 미소가 걸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례가 그리 흔치만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는 것. 그 당연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세상이 십수년 째 지속되어왔고, 이제는 정리해고를 넘어 일반해고가 포함된 노사정 대타협안이 통과되었다. 다가올 미래가 그리 희망차 보이지 않는 지금,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우리의 노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2015.10.06ㅣ주간경향 114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10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마라

여아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는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주겠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물론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은 공천권을 둘러싼 갈등이 표현되는 한 양상이며, 총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인단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여당에서도 야당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좀 더 원론적인 차원으로 논의를 끌어가보자. 과연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은 '정치'의 고유 권한, 말하자면 공천권 같은 게 아니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올바른 정치의 '결과'다.

정치공학적인 고려를 완전히 배제하고 말해보자. 오픈프라이머리가 됐건 국민공천단이 됐건 그것은 모두 원칙적으로 당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애초에 당원들에게만 공천투표권을 준다면 역선택을 우려할 필요도 없고 안심번호 같은 기술적 해법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의 의사 결정이 정당정치의 기본 원리에도 잘 부합한다.

그러나 여당 야당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각 계파마다 원하는 결과에 제도를 뜯어 맞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바라볼 때에만 현재의 논란이 제대로 보인다. 정당은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물적, 제도적, 금전적 지원을 하되, 정작 그 후보는 일부 당원을 포함한 '국민'들의 공천투표를 통해 결정된다면,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당비 내는 진성당원 같은 걸 하겠는가 말이다.

앞서도 말했듯 이것은 서로 정치적 계산이 뻔히 서 있는 상황에서, 말하자면 '명분'을 끌어들이기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지만, 문제는 빌미로 제공된 명분 그 자체다. 다시 원래의 문제 제기로 돌아가보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저 말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1)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국민'은 누구인가?
2)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정치'란 무엇인가?
3)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돌려준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지금처럼 공천권 싸움을 하면서 '국민'을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천받을 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으며, 정치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거나 동원되지 않는 한 공천투표권을 행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국민'은 재벌 총수부터 서울역 앞 노숙인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 아니다. 내년 총선 출마 지망생, 정치적 변화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 정치 고 관심층 등이 포함되는 협의의 개념일 뿐이다.

둘째,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말은 허위다. 왜냐하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공천권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정치에서 아주,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공천권의 배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 내부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문제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정치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각자의 삶을 최선을 다해 꾸려나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공정한 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 대선 결과에 따라 삶의 이해관계가 180도 달라지는 그런 삶을 사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정치권 동향에 민감한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기업 사원이거나, 공무원이거나, 대선 테마주를 매입했거나, 언론사 직원이거나, 여러 사례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람들은 전체 인구 비중을 놓고 볼 때 10퍼센트도 채 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90퍼센트의 국민들이 정치권에 원하는 것은 공천권이라던가, 공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따위가 아니라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셋째, 그렇기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말은 거대한 사기극으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천권으로 표상되는 '정치권 내부의 정치'와 직접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치권이 뭔가를 '돌려준다'고 해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돌려주긴 뭘 돌려준단 말인가. 그런 복잡하고 세세한 정치권 내부의 역학관계에서의 이득은 국민이 받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정치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통령을 바꿨더니 나라가 더 좋아진다는 결과, 우리 동네 국회의원을 잘 뽑아서 내가 원하는 정책이 실현된다는 그런 결과만이, 정치가 국민에게 약속할 수 있으며 또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그런 약속을 흔히 공약이라고 하며, 그 공약을 지키지 못했을 때 정치인은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의 정치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공천을 받아서 나오는지 그런 것에 대하여, 국민들 일부의 관심만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 결과, 정작 정치의 결과에 따라 국민 전반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도 못하다. 더욱 큰 문제는 정치인이 자신이 실현하겠다는 결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그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문화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는' 대신, 정치권이 정치 내부의 일을 알아서 잘 해결하면서, 대신 국민들에게 정확한 결과를 약속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신 국민들은 정치가 약속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다음번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묻는다고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주적 대의정치의 작동 방식이다.

대한민국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소수의 이해관계자 및 정치 고 관심층을 상대로는 무책임한 직접민주주의 비슷한 무언가가 시행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 그 자체로부터 유리된 채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세력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 이 모든 파행의 결과는 결국 대한민국 전체가 짊어지게 되는데, 그 고통의 배분조차도 불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마라. 대신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치의 결과만을 안져주길 바란다. 그 결과가 마음에 들면 국민들은 해당 정치 세력을 계속 지지할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팽개칠 것이다.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원론이야말로 시간과 역사 속에서 검증된 유일한 정답일 때가 많다. 나는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이 아니라 양당이 경쟁하는 총선에서 내 투표권을 행사하여, 내가 원하는 후보와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나의 이익을 지키고 싶다. 그 밖의 논의는, 적어도 내게는, 그저 '지들끼리 치고 박는 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수많은 국민들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공천권이 아니라, 올바른 후보를 찍어서 발생하게 될 정치의 결과 뿐이다. 그래야 국민도 정치에 올바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이 본질적 내용을 도외시하는 정치 개혁 논의는 모두 공허한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북리뷰] 우리에게도 와 있는 그들, 난민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 박진숙, 이후, 1만6500원.


욤비 토나. 1967년 콩고에서 태어나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난민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은 여러 차례 방송으로 소개되었고, 이 책 <내 이름은 욤비> 역시 널리 알려지고 읽힌 편에 속한다. 콩고에서 작은 부족의 왕손으로 태어난 저자는 제2차 콩고 내전과 관련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고, 2002년에 망명 신청서를 제출한 후 최종적으로는 법무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거쳐 2008년부터 난민 자격을 인정받은 상태다.

책에 따르면 "2012년 5월 말 기준으로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294명,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4515명"(333쪽)이다. 난민 인정률은 13퍼센트 가량으로, 전 세계 평균 난민 인정률이 약 30퍼센트인 것과 비교해볼 때 대단히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욤비 토나는 그 13퍼센트의 확률을 이겨내고, 약간 높이는 데 기여한,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책은 욤비 토나가 구술한 내용을 박진숙이 기록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욤비 토나의 궤적을 순서대로 추적하고 있다. 그가 13세에 처음 기숙학교로 떠나던 순간부터, 어떻게 본인이 지망하지 않았던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비밀정보국 요원이 되었는지, 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난민이 되어야 했는지에 대해 충실한 설명을 제공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부연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욤비 토나라는 한 사람의 삶으로부터 난민 문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준다. 가령 욤비 토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1장의 끝에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따라붙고, 그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발을 내딛는 2장이 마무리되면서 32년간 장기집권한 독재자 모부투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식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주변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짜여진 책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에 동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난민도 사람이며, 대한민국의 수많은 난민들은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정치적 난민으로 살았던 홍세화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욤비 토나에게 일말의 동정심과 인류애적 연대감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난민협약에서 정의하는 바,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의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위험 때문에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받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 자로서 국적국 바깥에 있는 자"들을, 우리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한 가지 더 깊게 생각해볼만한 문제를 안겨준다. 욤비 토나의 자녀들은 대한민국에서 성장했고, 박지성을 '우리나라 축구선수'로 생각하며 유관순을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로 인지할만큼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있다. 콩고로 돌아가 콩고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하는 저자와 달리, 자녀들은 하루가 다르게 콩고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상태다.

인류애적 당위와 공공선 차원에서 벗어나, 지금 토나 집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 1세대와 2세대의 문화적 갈등을 사회적으로 확장해보면, <내 이름은 욤비>가 놓치거나 간과하는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오직 아버지의 눈으로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자녀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들과 딸의 시각에서 망명자의 자녀로 살아가는 경험을 논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세대간의 갈등이야말로 이민 문제의 핵심임에도 말이다.

난민에 대한 논의를 동정심 너머로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의 고민은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2015.09.22ㅣ주간경향 1144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06

[별별시선] '반미'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劒)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배를 타고 가다 물에 칼을 빠뜨린 사람이, 그 자리를 표시한답시고 뱃전에 칼집을 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배가 움직이는데 배에 표시를 해둔다 한들 물에 빠뜨린 칼을 찾을 수 있을 턱이 없다.

2015년 대한민국 진보 진영의 오늘을 묘사하면서 이 고사성어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에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의 진보, 좀 더 넓게 잡아 범야권은, NL과 PD를 막론하고 넓은 의미에서 ‘반미주의’라는 큰 배에 탑승해 있다. 그들이 눈과 귀를 막고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있지 않은 사이, 반미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는 끝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굉장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과 TV를 통해 주요 외신을 검토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지난 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상원의원 34명을 확보했다. 의회에서 절차를 밟아 지난 7월14일 최종 타결된 이란 핵 협상을 엎어버리려던 공화당의 의도는 실현 불가능하게 됐다.

미국의 중동정책이 큰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이다. 단단하게 굳은 혈암(shale)에 갇힌 석유를 ‘프래킹’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 40년 만에 원유를 수출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말은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밖에 중동 산유국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략적 가치가 급락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칼럼이 지난 2일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우리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절친,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수많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이 이슬람국가 혹은 다양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해왔음에도 미국은 그 사실을 올바로 지적해오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석유에 중독돼 있었고 중독자들은 마약판매상에게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을 비난하던 바로 그 논리다. 미국은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 때문에, 인권과 평화를 위해 개입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순에 눈을 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중독을 끊을 수 있다. 미국에서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 많은 전쟁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 정치적 안정은 군사적 기반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서구의, 특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석유 중독에서 갓 벗어난 미국이 왜 중동의 문제에 끼어들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개입을, 마치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여겨왔다. 중동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이 발생시키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섬세한 맥락을 고려해 정책을 제시하고 레토릭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외치면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가 해답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은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만,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반미주의자 김기종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를 반대한다며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지금 공화당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를 진지한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그만큼 미국 국민들이 ‘세계의 경찰’ 노릇에 염증을 내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미국도 바뀌고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반미주의만큼은 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하던 방식대로 미국에 손가락질을 하지만 이미 미국은 거기에 없다. 낡은 반미주의로는 오늘날의 세계가 설명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스스로 변해야 할 때다.


입력 : 2015.09.06 20:52:10 수정 : 2015.09.06 20:56: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06205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