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5

[북리뷰] 기다린다,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로재나
마이 셰발·페르 발뢰, 엘릭시르, 1만3천8백원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게 스웨덴이란 인근의 북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다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범죄소설들을 통칭하여 '스칸디나비아 느와르'라 하는데, 최근 독서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재나』는 바로 그 '스칸디나비아 느와르'의 출발점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스웨덴 남부를 가로지르는 예타운하에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고 교살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의 다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중년의 수사관 마르틴 베크가 이 사건을 떠안게 되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사건 발생 후 한 달이 지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잊혀졌다. 하지만 경찰은, 마르틴 베크는, 그럴 수 없다.

여자의 신원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신문들은 더 이상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고, 함마르는 더이상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새로 접수되는 실종자 신고 중에 여자의 인상착의에 조금이라도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가끔은 그런 여자가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르틴 베크와 알베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보았던 것조차 잊은 듯했다.(82쪽)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로재나』가 출간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작품은 196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살아가고 있던 '현재'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지 않은 세상이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 헨닝 만켈이 쓴 서문을 펼쳐보자.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휴대전화는 없었다. 다들 공중전화를 썼다. 다들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자그마한 녹음기를 주머니에 숨기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며, 컴퓨터란 걸 아는 이도 드물었다. 그때의 스웨덴은 미래보다 과거와 밀접한 사회였다."(12쪽)

그러므로 모든 수사는 기다림과 뛰어다님의 반복이다. 가령 피해자의 모습이 찍혀있을지 모를 사진 한 장을 찾으려면 배에 탔던 승객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일일이 탐문 수사를 벌여야 한다. 숨막히는 긴장과 스릴이 아니라, 두텁게 깔린 짙은 안개속을 더듬어나가는 듯한 암담함이 소설 전체를 뒤덮는다. 명탐정의 천재적 시각이 아니라 평범한 경찰들이 '개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사건의 조각을 하나씩 찾아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재미를 느낀다. 가깝게는 헤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부터 멀게는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수사반장'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경찰추리극은 『로재나』와 그 뒤를 이은 총 열 권짜리 연작의 후예들인 것이다.

현재 발행된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모두 이른바 '스포일링'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모가 어떠한지, 독자도 모르고 경찰도 모른다. 마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마르틴 베크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독자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단서들을 하나씩 모으며 끈질기게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이 중요하다. 끝내 어떤 자는 법의 칼날을 미꾸라지처럼 피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1960년대 스웨덴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현실을 마주보면서 참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짧고 강렬한 현실 도피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7.04.25ㅣ주간경향 1223호

2017-04-16

[별별시선] 진보의 적폐, 음모론자들

나는 '적폐(積弊)'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붙이는 화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꼭 써야 한다면, 상대편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적폐 또한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보에도 적폐가 있다. 음모론자들이 바로 진보의 적폐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며, 사안에 대한 상식적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보수 적폐세력과 적대적 공존을 이어간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음모론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그 참사의 배후에 단일한 '악의 세력'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과적으로 인한 복원력 상실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단순한 이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레이더 무기부터, 미국인지 이스라엘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나라의 잠수함까지, 수많은 '아니면 말고'가 밑도 끝도 없이 던져졌다. 선박 및 교통안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검증하느라 귀중한 논의의 기회가 날아가버렸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난 후 속된 말로 가장 '멘붕'한 쪽도 다름아닌 일부 진보 세력이었다. 그들은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잠수함과의 충돌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굉장한 음모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정부에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듯이 분위기를 조성하던 사람들. 세월호가 떠오르자 그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계속 음모론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닻을 던져서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던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세월호 인양 후에도 '고의침몰설'을 고수하더니, 4월 14일에는 18대 대선에서 개표 부정이 벌어졌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더 플랜>을 인터넷으로 공개했다.

<더 플랜>에서 인터뷰한 UC 버클리 통계학과 교수 필립 스타크의 말을 통해 <더 플랜>의 기본적 오류를 반박해보자.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종이 기록지가 남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록지를 재확인할 수 있지만 전자투표는 오류를 확인하거나 수정이나 복원을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한국의 선거는 정확히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투표가 아니다. 투표지분류기는 이름 그대로 투표지를 '분류'만 해줄 뿐이고, 실제 개표는 사람이 한다. 애초부터 한국의 선거는 애초부터 수개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수개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계를 동원해 표를 '분류'할 뿐이다. 미분류표에 박근혜 표가 많았건 문재인 표가 많았건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최종적으로 사람이 손으로 넘겨보고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개표소에는 각 후보 및 정당에서 추천한 참관인들이 있다. 18대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도록 부정개표가 이루어졌다면 민주통합당에서 추천한 참관인 중에 매수 혹은 협박당한 사람, 혹은 그런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사례는 확인된 바 없다.

김어준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이 시점에서 음모론을 하나 던져보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18대 대선 개표부정설을 퍼뜨린다니 이게 무슨 짓일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불복 운동을 벌이려는 냄새가 나지 않나? 뭐, 아니면 말고.

누가 이기건 정권교체가 예정된 대선이다. 보수의 적폐세력은 무너졌다. 이제 범진보진영 역시 스스로의 적폐를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청산해야 한다. 동쪽에는 트럼프, 서쪽에는 시진핑, 북쪽에는 김정은이 둘러싸고 있는 지금, 음모론 따위에 낭비할 여력은 없다. 진보의 고질병인 음모론, 적폐세력인 음모론자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대를 헤쳐 나가자.

입력 : 2017.04.16 21:28:04 수정 : 2017.04.16 21:32:33

2017-04-11

[북리뷰] 갈등의 시대, 통합의 리더십을 고민한다

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21세기북스, 3만5천원

미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연방제 국가다. 정치의 기본 단위가 주(州)인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에는 각각의 주마다, 그리고 연방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준주마다, 노예제에 대한 개별적인 입장이 존재했다. 그 차이는 남부의 이탈과 연방의 붕괴로 이어질 참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두막집에서 성장한 일리노이의 변호사 에이브러햄 링컨이 처한 정치적 조건이 그랬다.

링컨은 포부가 매우 큰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랬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 야망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제 동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 외에 더 큰 야망이 없습니다. 제가 이 야망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88쪽) 대학은 고사하고 남에게 책을 빌려 스스로 법학을 공부했던 가난한 젊은이가 있다. 그런데 그의 나라는 지금 건국 이후 전례 없는 갈등으로 인해 분단되거나 내전을 겪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은 모든 미국인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대통령의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탐구했다. 링컨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후 꾸렸던 '팀'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권력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 Team Of Rivals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링컨의 성공은 그가 자신의 경쟁자, 심지어는 자신을 뒤에서 헐뜯고 비방했던 이까지 포용해서 하나의 팀으로 결속시키고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던 단단한 포용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링컨은 종이에 원하는 일곱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목록에는 대통령 후보 공천 당시 그의 경쟁 상대였던 슈어드, 체이스, 그리고 베이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 옛 민주당원인 몽고메리 블레어, 기디언 웰스, 노먼 저드와 옛 휘그당원인 뉴저지 주의 윌리엄 데이턴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각 구성이 완료되기 전 몇 달간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 했지만, 링컨은 그날 새로운 공화당의 모든 파벌, 즉 옛 휘그당과 자유토지당, 노예제를 반대하는 민주당 출신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뽑기로 결심했다.(299쪽)

한국어판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링컨을 중심으로 그가 꾸린 '경쟁자들의 팀'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지 숨돌릴 틈 없이 서술해나가는 비평적 전기(傳記)의 걸작이다. 정치권의 소수파, 아니 단독자였던 링컨은 지켜야 할 공통의 도덕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준수해나가며 자신의 편을 확보했다. 그러면서도 복수가 아닌 포용의 힘으로 미국을 통합해나갔다. 남군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악대에게 남부인들이 사랑하는 노래 '딕시'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한국어판에는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과 색인 등이 생략되어 있을 뿐 아니라, 책과 각 장의 제목이 일종의 처세술 책처럼 옮겨져 있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가 헌정 문란 세력만의 것인양 오용되는 이 갈등 속에서 이 책은 보다 진지하게 읽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죄와 '우리'의 통합을 함께 고민해야만 할 때이다. 링컨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함께 생각해보자.

2017.04.11ㅣ주간경향 1221호

2017-03-28

[북리뷰] 전쟁의 문헌들, 평화를 위해 읽는다

전쟁의 문헌학
김시덕, 열린책들, 2만8천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문헌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문헌을 통하여 한 민족 또는 시대의 문화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그러나 그 연구의 대상이 꼭 협의의 '문화'로 제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와 정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 전쟁에 있어서도 문헌학적 고찰이 가능하다. 김시덕의 책 『전쟁의 문헌학』을 펼쳐보자.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밝힌다. "이 책은 15~20세기까지 6세기에 걸쳐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 문헌이 형성되고 주변 국가로 전래되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 대해 전쟁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지 시험한 결과물이다."(5쪽)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지성 교류사를 전쟁의 관점에서 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 독자'보다는 문헌학이나 역사학 등에 기존의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차분히 페이지를 넘겨보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내용을 쫓아갈 수 있다. 누가 어떤 책을 읽었는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책이기 때문이다.

몇몇 대목에서는 그런 면에서 일종의 추리물같은 즐거움이 있다. 가령 조선에서 출간된 『동국통감』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 책을 당대의 장서가 하야시 라잔의 가문에서 재출간하여 『신간동국통감』이 일본에 유통되는데, 하야시 라잔의 차남 하야시 가호가 쓴 서문이 문제가 된다.

그는 『동국통감』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라는 고대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잘못된 책이라고 비판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 기반해 조선의 책을 비판한 그러한 관점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통설로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일부 일본인들은 『동국통감』을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하야시 가호의 서문을 논박하기도 했다. 전쟁을 통해 건너간 책이, 결국 또 다른 전쟁의 정당화 논리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일본 내부로부터 비판되기도 했던 것이다.

서문과 결론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청이나 일본과 달리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도전에 직면하지 않고 200여년을 보냈다. 청은 준가르 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 및 서구 열강들과의 교역과 군사 분쟁으로 인해,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그러한 맥락 속에서 "학술과 군사라는 두 가지 요소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병존 가능한 것이고 또 병존해야 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367쪽).

반면 조선인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의 권12에 실린 두 편의 '일본론'을 통해 일본인들이 주자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문명인'이 되어서 더는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의를 펼친 바 있다. 물론 말년에는 입장을 수정하여 일본의 재침략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으나,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지 오래인 그의 주장은 조선이 빠져 있던 기나긴 평화의 단잠을 깨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전쟁의 문헌학』은 특정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전개되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전문적인 문헌학적 논의로 가득차 있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책을 불태우지만 새로운 책이 탄생하는 사건이기도 했는데, 애석하게도 '전쟁의 문헌'들을 더 치열하게 쓰고 읽은 쪽은 '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17.03.28ㅣ주간경향 1219호

2017-03-19

[별별시선] 태어나고 싶은 나라

'박정희 신화'가 허물어졌다. 재벌 중심 수출 경제의 신화 역시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청년들은 절망하고 노인들은 폭주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공회전하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대통령을 파면해낸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가의 이상을 제시하고 토론해야 할 시점임에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 논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떤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야 하는가? 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무지의 장막'을 드리워볼 때이다.

어떤 사회가 근본적인 규칙을 형성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조건에 처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해보자. 특권층에게 유리한 사회 구조를 만든다 해도 내가 그 특권층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무지의 장막'이 쳐져 있다면, 사람들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규칙을 수립할 것이라는 것이 존 롤스의 생각이었다.

무지의 장막을 쳐놓고 대한민국을 검토해보자.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본인에게 어떤 조건이 주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자신의 성별, 성정체성, 신체적 장애, 부모의 재산, 교육, 가정환경, 신분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는 말이다.

무지의 장막에 싸여진 아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태어나는 그 자체가 엄마의 경력 단절을 낳는 원인이다. 게다가 여자로 태어나면 내 엄마가 겪고 있는 차별이 내게 넘어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확률은 반반이다.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다 한들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사회의 일원으로 공정한 대우를 받기 위해 끝없이 투쟁해야 한다. 성소수자라면 본인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며, 결혼 등 동등한 법적 제도를 누릴 수 없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목표가 되는데, 일단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한다면 경제적 궁핍을 각오해야 한다. 고소득 정규직 혹은 전문직이 된다 한들 워낙 긴 노동시간으로 인해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은 그저 꿈일 뿐이다.

이런 나라에서 출산율이 높다면 그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 아닐까? 여론조사전문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이 2016년 1월에 수행했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조사 대상자 1000명 가운데 30.2%에 지나지 않았다. 11.9%는 잘 모르겠다며 대답을 유보했고 57.9%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같은 조사에 의하면 69.0%가 막연하게나마 이민을 꿈꿔보았다.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마음 속에서 이 나라를 버린 것이다.

출산율이 낮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론 수준'의 문화 컨텐츠를 만들자,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반 이상의 한국인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고 싶은 나라가 아니다. 이미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기회만 된다면 '탈조선'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한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나라에서 많은 것을 얻고 누려왔던 사람들조차 자기 자식은 '탈조선' 시키겠다며 온갖 편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그에 대해 사회적으로 지탄하기보다 오히려 부러워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수십년에 걸쳐 대한민국에 '빨대'를 꽂아온 최순실 일당의 목적도 결국은 '탈조선' 아니었던가?

이 땅에 남아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고, 지키고, 일구고, 가꾸고, 이루어내고,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이미 정신적으로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이 분위기 속에서 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야 하는지, 무지의 장막 너머의 아기를 설득해낼 수 있는가?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입력 : 2017.03.19 19:37:00 수정 : 2017.03.19 23:2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