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30

19대 대선, 누구를 찍을 것인가? (수정)

대선이 벌써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 구도가 짜이기 전부터 누구를 찍을지 마음을 정해놓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워낙 선거가 급하게 치러지는 바람에 아직도 누구를 찍어야 할지, 어떻게 자신의 투표를 설명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써본다. 목차의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면서 누구에게 나의 소중한 표를 줄지 결정해보자.


1.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가?

이번 대선은 사상 초유의 '대통령 보궐선거'다. 많은 이들이 이쯤 되니까 아예 박근혜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있지만 아직 1심 유죄판결조차 받지 않은 피의자일 뿐이다. 복역중이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 투표권도 있다(언론에서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이번 대선 투표는 기권할 것 같지만, 아무튼 권리가 있다).

그 박근혜를 지지하는 세력과 후보 역시 여전히 활동중이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가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남재준은 독자 출마 후 4월 29일 홍준표 지지를 밝히며 사퇴했다. 보도에 따르면 "홍 후보는 "조 후보도 아마 그만둘 것 같다"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암시했(링크)"다고도 하던데, 여기서 말하는 '조 후보'는 조원진이며 그의 선거 구호는 '박근혜를 지킵시다'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탄핵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은 홍준표를 찍는 게 맞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본인의 부정적 입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숫자로 제시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니 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이유에서도 홍준표를 찍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가 왜곡되어 정치권에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준표를 으면 근혜가 아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2. 문재인을 좋아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당신은 문재인을 좋아하는가? 나는 다른 후보들에 대해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를 좋아하는가? 심상정을 좋아하는가? 유승민을 보면 배신자라고 느끼나?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 않고도 그들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이유는 충분히, 정책과 입장으로 인해 나누어진다. 하지만 문재인은 예외다. 정치적, 정책적 발언을 근거로 문재인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인 싸드 배치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재인의 입장은 무엇인가? 트럼프의 '10억 불'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 그는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트럼프가 이상한 소리를 하자 '국회 비준을 거쳐 배치하자'고 한다. 그런데 그는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다. 그렇다면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겠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나의 정책적 지향점을 유권자들에게 설명하지 않은 채 선거에 임하겠다, 왜냐하면 싸드 배치 반대하는 표 떨어질까봐, 이 소리 아닌가?

다른 공약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공약 전부가 그런 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예산 문제부터가 불투명하니 말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 측은 28일 19대 대선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득표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유로 세율인상의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았다."(링크) 득표 활동에 도움이 안 되니까, 이것저것 퍼주는 공약을 제시하되, 세율 인상은 슬쩍 뭉개고 지나간다. 그것도 대선 정책공약집이라는, 말 그대로 '공약'을 해야 하는 문서에서 말이다. 그 이유를 문재인 선대위 윤호중 공동정책본부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국민도 자신이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라고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틀렸다. 어떤 국민들은 문재인을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문재인이 당선 후 뭘 하건 그냥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문재인을 찍으면 된다.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재인이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꼭 문재인을 찍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버리는 편을 권하고 싶다.

나는 문재인의 공약을 믿기 어렵다. 공약과 정책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찍는 선거는 2012년을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에서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문재인을 꼭 찍고 싶다면, 어쩌겠는가, 찍어야지.


3. 싸드 배치에 반대하는가?

현 대선 국면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의미한 질문을 단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싸드 배치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이것은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 나누어지는 양자택일형 질문이며, 온 국민의 안위와 관련된 안보 이슈일 뿐 아니라, 한국 및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싸드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상정을 찍어야 한다. 일단 심상정은 현 대선 국면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싸드 배치 반대 의사를 흔들림 없이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후보다. 앞서 말했듯 문재인의 입장은 '다음 정부인 내가 알아서 하겠다, 지금 나한테 묻지 마라'는 쪽이지 결코 싸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국회 비준을 거치겠다는 말도 그렇다. 대통령이 된 후에 국회에 통과를 요구하면 당연히 통과될 것이니 결코 반대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반면 심상정은 한미동맹의 폐기까지 감수할 수 있다는 아주 강경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 싸드 배치 반대는 궁극적으로 한미동맹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미국의 힘이 약해져서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재래식 병력만으로 북한과 전쟁을 하면 당연히 대한민국이 이긴다. 하지만 수만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이미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동맹을 파기하고 '주체적'으로 남쪽에서도 핵무장을 한다면, 그것은 북한과 같은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되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런 과감한 군사적, 외교적 실험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싸드 배치만은 절대 안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 아니 상당수는, 사실 민주당과 문재인이 반대하니까 덩달아 반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후 '착한 싸드'를 놓으면 오히려 싸드 예찬론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진심으로 싸드 배치에 반대하고, 미국으로부터 당장 전시작전권을 회수해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며, 싸드 레이더에서 나오는 소위 '죽음의 전자파' 때문에 성주에서 나오는 참외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 싸드 배치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심상정을 찍어야 한다. 심상정의 득표율만이 한미동맹의 파기를 무릅쓰더라도 싸드 배치를 철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존재하는지 확인해주는 공식적이고도 명백한 지표일 것이기 때문이다.


4. 싸드 배치에 찬성하는가?

싸드 배치에 찬성한다면 안철수를 찍어야 한다. 유승민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러므로 유승민을 찍는 것 역시 싸드 배치에 찬성하되, 박근혜 탄핵 반대 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선택지가 된다.

안철수는 본래, 4월 30일 현재 문재인이 취한 것과 흡사하게, 국회의 비준을 거쳐 싸드를 배치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 입장을 바꾸었다. 입장을 바꾼 이유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TV 토론을 통해 여러 차례 설명했다. 대선후보에 맞춰서 국민의당 역시 싸드 배치에 대한 입장을 변경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지원은 "햇볕정책은 튼튼한 한미동맹에 기반한다"며 햇볕정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 입장이다. 나는 싸드 배치 그 자체에 대해서 동의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치인과 정당이 입장을 변경하고 표명하는 과정의 투명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관리인인 박지원은 당연히 싸드 배치에 반대하고, 햇볕정책을 영원토록 유지하며, 개성공단을 되살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 후보와 입장이 다르므로, 햇볕정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후보의 입장을 조율했다. 이런 게 바로 정치인과 정당의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승민의 경우에도 목적지는 같다. 싸드 배치에 찬성하고,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재정 정책 하에 '중부담 중복지'로 복지 정책을 펴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향점이 유사할 경우, 당연히 당선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유승민을 찍는 것보다 안철수를 찍어서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유승민의 정치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다른 정책들은, 그리고 온갖 네거티브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미 지지율 1위인 후보의 캠프부터가 공약에 수반하는 예산에 대해 정직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그런 선거다. 어차피 정책들은 주어진 예산과 여건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령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당장 2018년 최저임금을 순식간에 1만원으로 올릴 수는 없다. 문재인이 대통령 된다고 해서 내년에 곧장 전국에 단설유치원이 쫙 깔리고 모든 유아들을 수용할 수 있을 성 싶은가?

달콤한 공약만큼이나 씁쓸한 네거티브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후보에게 호의를 갖고 보기 시작하면 모든 공약이 다 좋아보인다. 반대로 '저 인간 조져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뉴스를 보면 네거티브의 소재는 늘 넘쳐난다. 문재인 아들 문준용 씨의 취업 비리 의혹, 안철수 후보 부인 김미경 씨의 소위 '갑질' 논란, 심상정은 본인이 진보라면서 아들을 '귀족학교' 보냈다더라, 유승민은 선거에 딸 동원 안하겠다면서 지지율 안 나오니까 홍대입구에 데리고 나왔네, 등등.

한편 홍준표는 돼지발정제로 강간 모의를 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밝히고도 10%가 넘는 국민들은 그를 대통령감으로 생각한다. 그 수치는 박근혜의 탄핵에 동의하지 않았던 여론조사상 수치와 거의 흡사하다. 다시 말해 홍준표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네거티브는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안철수나 문재인의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부터 지지하던 사람들이 최근 나온 몇 개의 이슈 때문에 마음을 바꿀까? 그럴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본인이 부동층에 속하는 경우, 인터넷, 특히 SNS를 통해 몇 개의 네거티브 사안들을 돌려보면서 어떤 후보를 반대하거나 그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지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도 그 정도 논란은 당연히 있다. 그런데 상대편의 네거티브한 요소를 욕하면서 자신이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후보자에 대한 의혹들은 일부러 무시하기 시작하면, 소위 '빠'가 되어버린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선거에 못 이겨도 '빠'는 되지 말자.


6. 세계적 추세(잡담)

이것은 잡담이다. 객적은 소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현재 세계인들은 '안 해봤던 짓'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브렉시트, 트럼프, 그리고 프랑스 대선이 마크롱과 르펜의 대결이 된 것. 물론 이 배후에는 억울하다고 느끼는 백인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장 크게 도사리고 있다(그에 대해서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나의 칼럼들을 참고해도 좋겠다. "[별별시선]트럼프 당선과 ‘진보’의 가치"(링크), "[별별시선]트럼프, 샌더스, 대한민국"(링크)).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작년부터 벌어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이변에는 결국 '지금까지 안 해왔던 일'을 해보자는 갈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정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기존 정치권이 그러한 변화에의 갈망을 보다 순치(馴致)된 정치적 견해로 탈바꿈시키지 못한 채 포퓰리스트들이 놀이터로 삼는 동안 수수방관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최근 정치적 상황 역시 세계적 경향의 일부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총선을 통해 자체적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제3당이 출현했고,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으며, 결국 12월이 아니라 5월에 조기 대선을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안 가봤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여당도 둘로 쪼개졌고, 야당도 둘로 쪼개졌으며,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여당이 아예 사라져버린 채 치러지는 선거다. 정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기존에 자신이 해왔던 투표에 비해 보다 파격적인 표를 던져도 좋을 시점이다.[주]


7. 요약 및 결론

1)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면 홍준표 찍자.
2) 문재인이 그냥 좋으면 문재인 찍자.
3) 싸드 배치에 반대하면 심상정 찍자.
4) 싸드 배치에 찬성하면 안철수나 유승민이다.
5) 당선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안철수를 찍자.

이번 대선은 대통령 보궐선거다. 대한민국의 정치 구도를 완전히 개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선거이며, 3당 합당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거대 여당의 잔존 세력들을 완전히 정치의 변방으로 몰아낼 수 있는 역사적 기회다. 동시에 미국의 트럼프, 일본의 아베, 중국의 시진핑, 북한의 김정은을 상대할 수 있는 유능하고 대담한 정치 지도자를 반드시 선출해야만 하는 그런 선거이기도 하다. 싸드 배치 논란과 중국의 보복, 트럼프의 돌발 발언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해야만 할 시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의 사안(박근혜 탄핵, 싸드 배치)와 한 명의 인물(문재인)을 기준선으로 하여,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의사 결정 가이드를 만들어 보았다. 온갖 종류의 현란한 공약들을 수십개씩 클릭하는 것보다, 위에서 제시한 다섯 개의 선택지에 따라 다섯 명의 후보자 중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는 것이 훨씬 명확하고 합리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한 사람의 유권자이자 주권자로서, 이 글을 읽은 분들의 사고 역시 조금이나마 더욱 단단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꼭 투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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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허핑턴포스트에 이 글을 보냈다. 그런데 허핑턴포스트가 선관위에 문의해본 결과,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기사나 기고를 실으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여, 글을 일부 수정했다(허핑턴포스트 블로그도 일종의 '언론'으로 취급되고 있나보다). 5월 2일에 허핑턴포스트에 올라올 게시물과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해당 지면에 맞춰 수정한 내용을 이곳에도 반영한다. 참고로 삭제된 문단은 다음과 같다.

지난 총선에서, 다들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안철수는 40석에 가까운 제3당을 출현시켰다. 그 결과 새누리당의 내분도 가시화되고, 점점 친박과 비박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박근혜의 탄핵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한국 정치가 '안 가봤던 길'이다. 우리는 군사독재냐 민주화냐라는 30년 묵은 대립구도에서 벗어난 또 다른 선택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5월에 대선을 치르고 있다.

1에서 5까지 다 읽고도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안 가봤던 길'을 가보자. 투표권을 갖게 된 이래 지난 총선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비판적 지지'따위 하지 않고 올곧게 진보정당만 찍어온 나의 결론이다. 지금은 보수정당의 후보를 찍겠다. 왜냐하면 그래야 정치권의 전체 구도가 바뀌고, 진보정당에도 새로운 활로가 뚫릴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위 두 문단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기왕 허핑턴포스트 블로그에 송고한 판본에서 삭제되기까지 했으니, 조만간 (적어도 사전 투표가 시작되기 전) 해당 내용에 대해 좀 더 길게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허핑턴포스트에 보내지 않고 내 블로그에만 올릴 계획이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 글은 다음과 같다.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2017년 5월 2일 작성)

2017년 4월 30일 03:40 작성 / 2017년 4월 30일 21:45 수정

2017-04-25

[북리뷰] 기다린다,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로재나
마이 셰발·페르 발뢰, 엘릭시르, 1만3천8백원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게 스웨덴이란 인근의 북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다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범죄소설들을 통칭하여 '스칸디나비아 느와르'라 하는데, 최근 독서 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재나』는 바로 그 '스칸디나비아 느와르'의 출발점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스웨덴 남부를 가로지르는 예타운하에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있고 교살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외의 다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중년의 수사관 마르틴 베크가 이 사건을 떠안게 되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 사건 발생 후 한 달이 지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잊혀졌다. 하지만 경찰은, 마르틴 베크는, 그럴 수 없다.

여자의 신원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신문들은 더 이상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았고, 함마르는 더이상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새로 접수되는 실종자 신고 중에 여자의 인상착의에 조금이라도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가끔은 그런 여자가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르틴 베크와 알베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보았던 것조차 잊은 듯했다.(82쪽)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로재나』가 출간된 것은 1965년의 일이다. 작품은 196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와 독자들이 살아가고 있던 '현재'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지 않은 세상이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추리소설가 헨닝 만켈이 쓴 서문을 펼쳐보자.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 휴대전화는 없었다. 다들 공중전화를 썼다. 다들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었고, 자그마한 녹음기를 주머니에 숨기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며, 컴퓨터란 걸 아는 이도 드물었다. 그때의 스웨덴은 미래보다 과거와 밀접한 사회였다."(12쪽)

그러므로 모든 수사는 기다림과 뛰어다님의 반복이다. 가령 피해자의 모습이 찍혀있을지 모를 사진 한 장을 찾으려면 배에 탔던 승객들의 명단을 확보하여 일일이 탐문 수사를 벌여야 한다. 숨막히는 긴장과 스릴이 아니라, 두텁게 깔린 짙은 안개속을 더듬어나가는 듯한 암담함이 소설 전체를 뒤덮는다. 명탐정의 천재적 시각이 아니라 평범한 경찰들이 '개발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사건의 조각을 하나씩 찾아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독자는 재미를 느낀다. 가깝게는 헤닝 만켈의 '발란데르' 시리즈부터 멀게는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수사반장'까지, 우리가 아는 모든 경찰추리극은 『로재나』와 그 뒤를 이은 총 열 권짜리 연작의 후예들인 것이다.

현재 발행된 『로재나』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모두 이른바 '스포일링'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모가 어떠한지, 독자도 모르고 경찰도 모른다. 마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마르틴 베크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독자는,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단서들을 하나씩 모으며 끈질기게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점이 중요하다. 끝내 어떤 자는 법의 칼날을 미꾸라지처럼 피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1960년대 스웨덴 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현실을 마주보면서 참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짧고 강렬한 현실 도피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17.04.25ㅣ주간경향 1223호

2017-04-16

[별별시선] 진보의 적폐, 음모론자들

나는 '적폐(積弊)'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붙이는 화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꼭 써야 한다면, 상대편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적폐 또한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보에도 적폐가 있다. 음모론자들이 바로 진보의 적폐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며, 사안에 대한 상식적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보수 적폐세력과 적대적 공존을 이어간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음모론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그 참사의 배후에 단일한 '악의 세력'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과적으로 인한 복원력 상실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단순한 이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레이더 무기부터, 미국인지 이스라엘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나라의 잠수함까지, 수많은 '아니면 말고'가 밑도 끝도 없이 던져졌다. 선박 및 교통안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검증하느라 귀중한 논의의 기회가 날아가버렸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난 후 속된 말로 가장 '멘붕'한 쪽도 다름아닌 일부 진보 세력이었다. 그들은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잠수함과의 충돌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굉장한 음모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정부에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듯이 분위기를 조성하던 사람들. 세월호가 떠오르자 그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계속 음모론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닻을 던져서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던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세월호 인양 후에도 '고의침몰설'을 고수하더니, 4월 14일에는 18대 대선에서 개표 부정이 벌어졌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더 플랜>을 인터넷으로 공개했다.

<더 플랜>에서 인터뷰한 UC 버클리 통계학과 교수 필립 스타크의 말을 통해 <더 플랜>의 기본적 오류를 반박해보자.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종이 기록지가 남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록지를 재확인할 수 있지만 전자투표는 오류를 확인하거나 수정이나 복원을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한국의 선거는 정확히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투표가 아니다. 투표지분류기는 이름 그대로 투표지를 '분류'만 해줄 뿐이고, 실제 개표는 사람이 한다. 애초부터 한국의 선거는 애초부터 수개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수개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계를 동원해 표를 '분류'할 뿐이다. 미분류표에 박근혜 표가 많았건 문재인 표가 많았건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최종적으로 사람이 손으로 넘겨보고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개표소에는 각 후보 및 정당에서 추천한 참관인들이 있다. 18대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도록 부정개표가 이루어졌다면 민주통합당에서 추천한 참관인 중에 매수 혹은 협박당한 사람, 혹은 그런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사례는 확인된 바 없다.

김어준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이 시점에서 음모론을 하나 던져보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18대 대선 개표부정설을 퍼뜨린다니 이게 무슨 짓일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불복 운동을 벌이려는 냄새가 나지 않나? 뭐, 아니면 말고.

누가 이기건 정권교체가 예정된 대선이다. 보수의 적폐세력은 무너졌다. 이제 범진보진영 역시 스스로의 적폐를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청산해야 한다. 동쪽에는 트럼프, 서쪽에는 시진핑, 북쪽에는 김정은이 둘러싸고 있는 지금, 음모론 따위에 낭비할 여력은 없다. 진보의 고질병인 음모론, 적폐세력인 음모론자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대를 헤쳐 나가자.

입력 : 2017.04.16 21:28:04 수정 : 2017.04.16 21:32:33

2017-04-11

[북리뷰] 갈등의 시대, 통합의 리더십을 고민한다

권력의 조건
도리스 컨스 굿윈, 21세기북스, 3만5천원

미국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연방제 국가다. 정치의 기본 단위가 주(州)인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에는 각각의 주마다, 그리고 연방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준주마다, 노예제에 대한 개별적인 입장이 존재했다. 그 차이는 남부의 이탈과 연방의 붕괴로 이어질 참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오두막집에서 성장한 일리노이의 변호사 에이브러햄 링컨이 처한 정치적 조건이 그랬다.

링컨은 포부가 매우 큰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랬다.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 야망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제 동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 외에 더 큰 야망이 없습니다. 제가 이 야망에 다다를 수 있을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88쪽) 대학은 고사하고 남에게 책을 빌려 스스로 법학을 공부했던 가난한 젊은이가 있다. 그런데 그의 나라는 지금 건국 이후 전례 없는 갈등으로 인해 분단되거나 내전을 겪을 위기에 처해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야심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역사학자인 도리스 컨스 굿윈은 모든 미국인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대통령의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탐구했다. 링컨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가 백악관의 주인이 된 후 꾸렸던 '팀'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권력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의 원제, Team Of Rivals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링컨의 성공은 그가 자신의 경쟁자, 심지어는 자신을 뒤에서 헐뜯고 비방했던 이까지 포용해서 하나의 팀으로 결속시키고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했던 단단한 포용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링컨은 종이에 원하는 일곱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목록에는 대통령 후보 공천 당시 그의 경쟁 상대였던 슈어드, 체이스, 그리고 베이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 옛 민주당원인 몽고메리 블레어, 기디언 웰스, 노먼 저드와 옛 휘그당원인 뉴저지 주의 윌리엄 데이턴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각 구성이 완료되기 전 몇 달간 사방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아야 했지만, 링컨은 그날 새로운 공화당의 모든 파벌, 즉 옛 휘그당과 자유토지당, 노예제를 반대하는 민주당 출신 중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뽑기로 결심했다.(299쪽)

한국어판으로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링컨을 중심으로 그가 꾸린 '경쟁자들의 팀'이 어떻게 하나가 되어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지 숨돌릴 틈 없이 서술해나가는 비평적 전기(傳記)의 걸작이다. 정치권의 소수파, 아니 단독자였던 링컨은 지켜야 할 공통의 도덕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준수해나가며 자신의 편을 확보했다. 그러면서도 복수가 아닌 포용의 힘으로 미국을 통합해나갔다. 남군의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악대에게 남부인들이 사랑하는 노래 '딕시'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포용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한국어판에는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과 색인 등이 생략되어 있을 뿐 아니라, 책과 각 장의 제목이 일종의 처세술 책처럼 옮겨져 있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가 헌정 문란 세력만의 것인양 오용되는 이 갈등 속에서 이 책은 보다 진지하게 읽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단죄와 '우리'의 통합을 함께 고민해야만 할 때이다. 링컨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함께 생각해보자.

2017.04.11ㅣ주간경향 1221호

2017-03-28

[북리뷰] 전쟁의 문헌들, 평화를 위해 읽는다

전쟁의 문헌학
김시덕, 열린책들, 2만8천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문헌학'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문헌을 통하여 한 민족 또는 시대의 문화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그러나 그 연구의 대상이 꼭 협의의 '문화'로 제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와 정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 전쟁에 있어서도 문헌학적 고찰이 가능하다. 김시덕의 책 『전쟁의 문헌학』을 펼쳐보자.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목적을 밝힌다. "이 책은 15~20세기까지 6세기에 걸쳐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서 문헌이 형성되고 주변 국가로 전래되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 대해 전쟁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지 시험한 결과물이다."(5쪽)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지성 교류사를 전쟁의 관점에서 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굳이 분류하자면 '일반 독자'보다는 문헌학이나 역사학 등에 기존의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전문 독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져 있다. 그러나 차분히 페이지를 넘겨보면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내용을 쫓아갈 수 있다. 누가 어떤 책을 읽었는가?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책이기 때문이다.

몇몇 대목에서는 그런 면에서 일종의 추리물같은 즐거움이 있다. 가령 조선에서 출간된 『동국통감』이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건너간 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 책을 당대의 장서가 하야시 라잔의 가문에서 재출간하여 『신간동국통감』이 일본에 유통되는데, 하야시 라잔의 차남 하야시 가호가 쓴 서문이 문제가 된다.

그는 『동국통감』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라는 고대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잘못된 책이라고 비판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 기반해 조선의 책을 비판한 그러한 관점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통설로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일부 일본인들은 『동국통감』을 다른 책들과 비교하며 하야시 가호의 서문을 논박하기도 했다. 전쟁을 통해 건너간 책이, 결국 또 다른 전쟁의 정당화 논리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일본 내부로부터 비판되기도 했던 것이다.

서문과 결론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은 청이나 일본과 달리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도전에 직면하지 않고 200여년을 보냈다. 청은 준가르 칸국과의 전쟁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 및 서구 열강들과의 교역과 군사 분쟁으로 인해,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특히 일본의 경우 그러한 맥락 속에서 "학술과 군사라는 두 가지 요소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병존 가능한 것이고 또 병존해야 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367쪽).

반면 조선인들, 예컨대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의 권12에 실린 두 편의 '일본론'을 통해 일본인들이 주자학을 공부하고 있으니 '문명인'이 되어서 더는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의를 펼친 바 있다. 물론 말년에는 입장을 수정하여 일본의 재침략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으나,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지 오래인 그의 주장은 조선이 빠져 있던 기나긴 평화의 단잠을 깨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전쟁의 문헌학』은 특정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전개되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전문적인 문헌학적 논의로 가득차 있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을 펼쳐볼 필요가 있다. 전쟁은 책을 불태우지만 새로운 책이 탄생하는 사건이기도 했는데, 애석하게도 '전쟁의 문헌'들을 더 치열하게 쓰고 읽은 쪽은 '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2017.03.28ㅣ주간경향 12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