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2

82년생 김지영, 86년생 엄홍식

유아인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최대한 '유아인'에 집중하고 싶었다. 연기자로서의 인격에만 논의를 국한하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 이름은 그가 공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따라서 비판을 받더라도 페르소나의 이면에 있는 인격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유아인은 스스로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자신의 이름 세 글자의 한자 풀이를 하며 기꺼이 선을 넘었고, 따라서 이제 우리는 말해야 한다. 86년생 엄홍식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82년생 김지영들이 착취당해온 세상에 대해.

소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자. 『82년생 김지영』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을 아는 베스트셀러이며, 화제작이고, 문제작이다. 일단 이 '보편적'인 인물의 프로필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김지영 씨는 1982년 4월 1일,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키 50센티미터, 몸무게 2.9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김지영 씨 출생 당시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위로 두 살 많은 언니가 있고, 5년 후 남동생이 태어났다. 방 두 개에 마루 겸 부엌 하나, 화장실 하나인 열 평 남짓 단독주택에서 할머니와 부모님, 삼 남매,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살았다.

딸 둘에 아들 하나. 김지영 씨 어머니의 시부모 뿐 아니라 친정어머니도 아들을 낳으라고 성화다. 김지영 씨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실패한 복권이었다. 결국 5년 후 태어난 아들에게 모든 자원이 집중되었다. 밥, 옷, 혼자 쓰는 방, 용돈, 교육비, 기타등등. "우산이 두 개면 동생이 하나를 쓰고 김지영 씨와 언니가 하나를 같이 썼고, 이불이 두 개면 동생이 하나를 덮고 김지영 씨와 언니가 하나를 같이 덮었고, 간식이 두 개면 동생이 한 개를 먹고 김지영 씨와 언니가 나머지 한 개를 나눠 먹었다."(25쪽)

가족 내에서 시작된 차별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누적된다. 학교에서는 남학생들이 급식을 먼저 받아먹고, 더 달라고 성화를 부려 맛있는 반찬을 거덜낸다. 대학에 가도 여학생은 동아리의 '꽃'일 뿐 '활동 주체'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김지영 씨는 2001년에 대학에 들어간 01학번인데, IMF의 직접적인 타격은 극복한 듯 보이는 시절이었지만, 친구의 말을 듣고 문득 깨닫는다. 이름만 대면 아는 번듯한 직장 다니면서 '우리 회사 와라'면서 폼 잡는 선배들이 다 남자라는 것. 그 똑똑하고 잘난 여자 선배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 그런 '사라짐'이 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이라는 것.

그렇게 김지영 씨는 계속되는 차별을 겪고, 참고, 입을 다문다. 말을 아끼고 (남자들이 보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고 세상이 나한테만 불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한다. 그러다가 결국 애를 낳기 위해 그 어렵게 들어갔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후,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자신을 보며 남자 직장인들이 '맘충'이라고 킬킬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김지영 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다.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165쪽)

이렇게 폭발해버린 김지영 씨의 분노는 '말문이 트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 죽은 사람이건 산 사람이건, 완벽하리만치 똑같은 말투와 표정으로 그 여자들의 말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애를 낳다가 죽은, 남편이 좋아했던 대학 시절 친구에게 그가 고백했던 내용까지도, 미쳐버린, 혹은 신들린 김지영 씨는 알고 있다. 그는 최선을 다해 엄마이고자 했지만 '맘충', 즉 인간 이하의 존재로 비하당했기에, 세상의 모든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책에 붙은 해제에서 여성학자 김고연주가 잘 이야기하고 있다시피, 김지영은 언제나 '말'을 빼앗기는 존재다. 학교에서 급식을 받아먹는 것 같은 사소한 문제에서마저, 남학생이 여학생을 때리고 괴롭히는 것을 선생님에게 호소할 때마저, '너는 여자니까 부당함을 참아야 한다'는 당위적이지 않은 주장이 마치 당위 명제인 양 그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지영은 어처구니없고 부당한 상황에서 거의 입을 닫아 버"(184쪽)렸고, 결국에는 자신처럼 입을 닫아버렸던 수많은 여자들을 대신해 말하는 존재가 된다.

애석하게도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소설이기 때문에 김지영 씨가 향후 겪게 될 사건을 무궁무진하게 펼쳐갈 수도 있었겠지만, 작가는 대신 그를 정신과 의사에게 데려간다. 정신과 의사(男)는 김지영 씨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175쪽)고 다짐한다. "내가 평범한 40대 남자였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것"(170쪽)이라며 김지영 씨가 겪어온 고통과 차별을 '특별한 나'를 꾸며주는 장식품으로 몽땅 소비해버리고 난 후에 말이다.

마치, 86년생 엄홍식이 그랬던 것처럼.

2017년 11월 26일 오후 12시 12분에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엄홍식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구 출신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보수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에서 누나 둘을 가진 막내 아들이자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야 할 장남으로 한 집안에 태어나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살았"다고.

앞서 인용한 『82년생 김지영』의 한 구절과 비교해보자. 86년생 엄홍식이 감당하셨다는 '차별적 사랑'이란, 자신의 누나 두 명이 간식 하나를 나눠먹을 때 본인은 한 개 다 먹는 것, 누나 두 명이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비에 젖을 때 본인은 제일 좋은 우산으로 비를 가리는 것 등을 의미할 것이다. 누가 봐도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백한데, 82년생 김지영 대신 86년생 엄홍식이 외친다. 내가 더 힘들었다고 말이다.

86년생 엄홍식의 '불행 배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아들을 원하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둘째 누나의 이름이 왜 '방울'이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가 직접 공개한 내용이고, 나는 그것을 비판하려 하는만큼, 인용하겠다.

작은누나의 이름은 한글로 ‘방울’이다. 그때까지는 내 조부모들의 귀한 자식들인 내 부모가 가진 자식들이 딸 둘 밖에는 없어서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할머니가 그렇게 지으셨다고 한다. ‘엄방울’ 불쌍하고 예쁜 이름.
https://www.facebook.com/hongsik.uhm.14/posts/1985718098308225

이러한 발화 행위를 통해 86년생 엄홍식은 '엄방울'이라는 여성에게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빼앗아갔다. '내 이름이 엄방울인 이유는 내 부모가 여자인 나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이제 전 국민이 엄홍식의 누이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안다. 이제 그 누이는 자신이 여성혐오의 극단적인 피해자라는 사실을 감출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다. 남동생 엄홍식이 누이인 엄방울의 비극을 약탈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86년생 엄홍식은 친누이로부터 빼앗아온 비극을 전시한 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마치 아프리카의 국립공원에서 불법 사냥을 한 이들이 맹수의 사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자신이 맹수인 척 하는 것처럼 말이다.

착취자가 피착취자를, 억압자가 피억압자를, 가해자가 피해자를 낭만적인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수없이 반복되어온 패턴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해본 적이 없다. 86년생 엄홍식은 바로 그것을 해냈다. 누이의 비극을 팔아, 그 누이가 자신의 비극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서사화하고 발화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버렸다. 누나의 비극까지도 남동생이 무대 장치로 소비해버리는 그런 모습을, 나는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았다.

여성들은 이렇게 착취당하면서,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서사화할 기회까지도, 착취당한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속된 말로 '돌아버리게' 만든 방아쇠가 된 사건은 '맘충'이라는 혐오 표현이었다. 86년생 엄홍식 씨는 본인에게 동의하지 않는, 비판하는, 혹은 비아냥거리는 수많은 여성들을 향해 '폭도'라는 혐오 표현을 던졌다. 이건 실수라고 볼 수도 없다. 그가 흩뿌린 수많은 트윗들 뿐 아니라, 11월 27일에 올린 게시물에 선명하게 그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SNS를 통한 저의 외침은 세속적 가치를 내려 놓고 진정한 나의 가치와 관계를 찾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저의 노력이 언제나 처럼 폭도들에 의해 ‘인생의 낭비’로 조롱 당하고 매도 당한다 해도 저는 지금의 인생을 온 힘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나가고자 합니다. 부끄럽지 않고 진실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아! 내가 여기에 ‘댓글’의 기능을 기꺼이 남겨둔다. 너희의 존재를 모두가 확인할 수 있도록. 더러워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희의 손이고 너희의 입이고 너희의 영혼이다. 너희가 감히 선량한 사람들과 내가 나눈 소통을 막아서는 일을 묵시하지 않을 것이다.
https://www.facebook.com/hongsik.uhm.14/posts/1986309071582461

혹시 모를까봐 하는 말인데, 오늘날 한국어의 용례에서 '폭도'가 지칭하는 대상은 명백하다. 5.18 광주민주항쟁 참여자들 및 광주 시민, 더 넓게는 전라도 사람들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김상경이 연기한 강민우는 외친다. "여러분,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폭도'는 바로 그런 어휘다. 약자를 향해 집어던지는 흉기와 같은 단어. 그런 표현을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엄홍식은 누이의 비극을 팔아 페미니스트 행세를 하는 한 대구 남자에 대해 분노하는 여성들을 향해 외친다. "폭도들아!"

그의 의도는 명백하다. 상대를 '폭도'로 규정함으로써 '입을 닥치게' 하겠다는 것이다. 86년생 엄홍식이 그러고 있는 사이, 82년생 김지영'들'은 점점 더 할 말을 잃어간다. 대외적으로 온갖 멋진 모습을 다 보여주는 소위 '개념 연예인'이 처음에는 여성들에게 '메갈짓'을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폭도'라고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그런 대구 출신의 한 남자를 어떻게든 두둔하려 드는 가부장적 체제의 구성원들을 보며.

86년생 엄홍식이 82년생 김지영을 만나면 무슨 대화를 할까. 차별받는 주체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하고 본인과 다른 여자들이 못 해왔던 말을 쏟아내는 이들을 향해 엄홍식이 선사한 어휘의 목록을 되짚어보자. '메갈짓', '익명의 폭력배', '온라인 테러리스트 집단', '조직폭력배', 그리고 '폭도'. 이미 그는 수많은 김지영'들'을 향해 이런 소리를 해왔다. 어떤 면에서 그는 『82년생 김지영』의 진짜 화자인 정신과 의사보다도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적어도 그 정신과 의사는 '나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난감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수많은 남자 독자들의 찬사를 받은 책이다. 수많은 남자들이 이 책을, 읽었건 읽지 않았건, 다른 남자들을 향해 권했다. 그리고 또 많은 남자 연예인들은, SNS에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다양한 페미니즘 서적을 올리고 소위 '인증'을 하면서 자신의 '개념'을 증명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그들 중 그 누구도, 내가 아는 한, 82년생 김지영'들'을 향한 86년생 엄홍식의 폭력적 언행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 정작 현실 속에서는 이렇게 82년생 김지영'들'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방언이 그저 '익명의 폭력배'의 행패요 '온라인 테러리스트 집단'의 깡패 놀음 취급당하고 있는데, 이름값 있는 남자들은 현실 속의 김지영'들'을 위해 한 마디 하기보다는 그냥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을 알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전시함으로써 제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글은 허공에 흩어진다. 문학은 우리의 삶을 겉돈다. 그리고 수많은 김지영'들'은 다시 할 말을 잃는다. 그 자리를 86년생 엄홍식 같은 남자들의 뻔하디 뻔한 자의식 노출이 채워넣는다. 그들이 스스로를 충분히 '불쌍한' 존재로 전시하기 위해 여성의 비극이 동원된다. 여자들의 언어는 충분히 정련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폭발하고,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86년생 엄홍식'들'은 82년생 김지영'들'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나 같은 사람이라고. 너희들은 '메갈짓'을 하는 '폭도'라고.

이 역겨운 역설 앞에 나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래도 길게 쓰고 기록으로 남긴다. 86년생 엄홍식과 같은 남자들의 폭력적 언행을 제지함으로써, 더 많은 82년생 김지영'들'이 자신의 언어를 잃고 방언을 내뱉는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여성혐오가 어떻게 여성들의 언어를 박탈했는지, 그 자리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의 함성을 어떻게 매도하면서 또 소비해버리는지, 우리는 더 정확히 알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2017-11-25

유아인, 빨갱이, 메갈짓

11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던 밤, 배우 유아인이 트위터에서 주고받은 설전 중 일부다. 여성 트위터 사용자에게 농담으로 '애호박으로 맞아볼테냐'고 말했다가 설화를 치른 지 한 주만의 일이다.

평소에 페미니즘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갖고 표명해온 소위 '개념 배우'였기에, 인터넷에서 여성주의적 의제에 동참해온 여성들의 실망이 특히 크다. 그런데 25일 보도되는 내용에 따르면 대체 왜 여성들이 유아인의 저 발언에 실망하는지, 그리고 저 발언 자체가 무엇이 문제인지 설명하는 내용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잠깐 '빨갱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단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라는 뜻이 아니다. 공산주의자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몰락과 북한의 한반도 무력 통일을 추구하는 극단 세력으로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한 절대 용납할 수 없고 용납해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함의가 깔려 있다.

한국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의 진보주의자가 존재한다. 나처럼 자유주의적 원칙을 최대한 고수하고 확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서유럽식 사민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말은 안 하지만 레닌주의적 노동자 혁명을 꿈꾸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중심의 무력통일을 추구하는, 한국 정부를 폭력으로 뒤엎으려 하는, 다시 말해 저 '빨갱이'라는 개념 정의에 부합하는 사람이, 과연 단 한 명도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진보라고 넓은 의미로 불러왔던 사람들 중에는 진짜 '빨갱이'가 있을 것이고, 그들은 실제로는 진보의 바탕에 깔린 자유주의적 이념과 제도(일당독재가 아닌 다당제, 자유투표, 사생활의 자유, 사유재산제, 기타등등)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는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면 손해라는 판단 때문에 민주적 가치에 입각한 진보주의자 행세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빨갱이'라는 표현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과격한 폭력적 혐오발언은 진짜 '빨갱이'들이 숨게 만들고, 도리어 다양한 범주의 진보주의자들을 윽박지르는 효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시절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가령 함석헌 같은 경우, 그는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반공주의자였지만, 단지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낙인이 찍혔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서도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은 금새 따라붙었다. 세상에 천주교 주교가 어떻게 유혈혁명에 찬성하는 공산주의자일 수 있겠느냐는 이성적 반론은 용납되지 않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단 한 차례도 버리지 않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자유 선거를 원치 않고 자신들이 영원히 독재하고자 했던 세력에 의해 '빨갱이'로 매도당해 왔다.

진보주의자라면, 아니 민주주의자라면 '빨갱이'라는 표현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그런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런 표현을 입에 담는 것 역시 적극적으로 제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수많은 진보 담론이 수면 위로 올라와, '담론의 자유시장' 속에서 어떤 것은 살아남고 어떤 것은 도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메갈짓'은 어떨까? 오늘날 여성주의의 토론에 있어서 '메갈'이라는 딱지는, 진보주의에 있어서 '빨갱이'라는 딱지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공산주의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동일임금 동일노동을 원하기 때문에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군사독재세력은 '너 빨갱이냐?'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렇게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가 OECD 최악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여성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임금 격차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해법은 어떻게 구해야 할지 토론하는 대신, 남자들은 이죽거리며 묻는다. '너 메갈이냐?'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 사법 절차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멸시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은 그 여자들이 그냥 닥치고 살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질문 아닌 질문을 하는 것이다. '너 메갈이지?'

이 시점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정상적인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여자들에게 '메갈이냐', '메갈짓 하지 마라'는 식의 표현이 먼저 원천봉쇄되지 않으면, 여자들은 자신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공포를 표출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마치 '너 빨갱이냐'라는 표현을 원천봉쇄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진보적 의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도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문자 그대로 체포 구금 고문 살해당할 수 있었다. 국가 권력의 직접적 폭력에 노출된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여성들은 한국 사회의 남성주의적 구조가 여성들이 늘 겪는 폭력과 불안에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일부 남성'들의 성폭력, 강간, 폭행, 살인을 방관한다고 생각한다. '너는 메갈년이다'라는 표현을 '선량한 나는 그렇지 않겠지만 누군가 너를 강간하더라도 나는 수수방관하겠다'는 맥락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떤 남자, 가령 유아인이 '메갈짓'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러한 야비한 협박의 언어에 힘을 실어주는 것과 같다.

나는 메갈리아에 찬성한다. 마치 1960년대의 백인들 중 누군가는 말콤 X의 급진적인 흑인 해방 운동에 찬성하고 지지를 보냈던 것처럼. 여성들이 '여성'의 정체성을 걸고 벌이는 해방 운동에 대해 남자들이 찬반을 논하는 것 자체가 실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는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여성의 이름으로 울려퍼질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유아인의 발언에 반대하고, 그에게 반성과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가 '페미인 척 메갈짓 하지 마라'고 하는 것은 '진보인 척 빨갱이짓 하지 마라'던 지난 시대의 군사독재 옹호자들과 다를 바 없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차이 이전에, 생각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게끔 하는 기본적인 룰이 있다. '메갈짓'이라는 낙인은 그 룰 자체를 부정하는 표현이다.

설령 유아인이 '메갈짓'에 찬성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면, 저런 소리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남자에게만은, 언제나 너그럽게도 실수를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유아인은 저런 발언을 하고도 다른 여성 연예인처럼 매도당하지 않는 것 자체가 남성의 특권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남성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의 편을 들어야 한다. 남성의 특권을 가장 정의롭게 사용하는 방법은 남성의 특권을 이용하여 억압당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지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아인 씨의 심사숙고와, 고민과, 반성과, 사과를 원한다. '모든 국민 여러분', '팬 여러분', '걱정해주시는 모든 분들' 따위가 아니라 오직 '여성'을 수신자로 한 사과의 메시지 말이다.

2017-11-10

"층간 내리사랑"과 국가의 역할

KBS 1FM 라디오를 듣던 중 공익광고가 흘러나왔다. 자기 집에서 살살 걸어다니고, 악기 연습을 자제하는 등 조심스럽게 생활하는 사례들을 죽 나열한 것이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이어지는 멘트.

"위층은 아래층을, 아래층은 그 아래층을 먼저 생각하는 층간 내리사랑. 이웃간의 새로운 사랑법입니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적어두었다. 위 인용문은 공영방송 KBS 라디오 공익광고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친 것이다. 층간소음이 심하니 이웃간에 서로 '배려'해야 한다며,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하자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은 광고를 하고 있다.

이 광고는 대한민국에서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 실패가 어떻게 시민사회의 짐으로 전가되고 있는지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정부는 시민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은연중에 강조하거나 미화한다.

아파트 층간소음은 구조적 문제다. 사회경제적 구조 이전에 건물의 구조상 발생하는 문제라는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지어지는 아파트 중 대다수는 벽식 구조로 지어져 있다. 별도의 기둥 없이 아파트의 벽 자체가 중량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벽식 건물은 공사 속도를 내기 좋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인근의 진동이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층간소음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절대다수의 아파트가 애초부터 층간소음이 울려펴지기 쉬운 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벽식 구조에서는 바닥 울림이 고스란히 벽을 타고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맹점이 있다. 쉽게 말해 진동을 일으킨 바닥과의 접점이 모든 벽으로 넓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전달이 잘 된다. 특히 벽식 구조라면 7층의 쿵쿵대는 소리가 5층·4층까지는 물론, 거꾸로 위로 8층으로도 더 잘 전해진다. 반면 기둥식은 벽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핵심은 기둥과 보이다. 바닥의 충격음, 진동이 보와 기둥으로 분산된다. 바닥 충격이 기둥을 타고 전달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철승 연구원은 “네모난 상자를 두드리면 벽이 공진현상을 일으켜 진동이 증폭된다. 벽식 구조 아파트가 이런 형태다”라며 “구조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 바닥 두께나 차음재에 치중해 왔다”고 지적했다.

전병역, "‘구멍뚫린’ 층간소음, 대안은 기둥식인데…", 경향신문, 2016년 8월 20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01832011&code=940100

기둥식 건물은 벽식 건물에 비해 공사비가 많이 든다. 같은 높이의 건물을 지을 경우, 벽식으로 지어야 더 많은 세대를 우겨넣을 수 있다. 기둥식으로 지으면 층고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대별로 부담해야 할 돈 또한 늘어난다. 최종적으로 그 비용은 소비자인 주민이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답일까? 아이가 뛰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데, 자기 집에서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조심조심 까치발로 다녀야 하는 상황이 정상일까? 서울 시내 아파트의 경우 수억원씩 하는데, 그 돈을 들여가며 자기 집에서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해야 하나?

이것은 전형적인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문제다. 리스크를 감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이 분명 존재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자신이 짊어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층간소음이 발생하지 않을만큼 확실한 기준을 만들어 건설사를 규제하는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하면 모두가 편해지지만, 만들고 정착시키는 비용을 아무도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는, 규칙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 말이다. 그러한 역할을 하라고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가는 그 세금으로 군대와 경찰과 행정 조직을 꾸려나간다. 공익을 위해 정부가 설정한 넓은 의미에서의 규제 외의 영역에서 국민은 자유롭게 거래하고, 영업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인생을 개척해나간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이렇게 설계되어 있다.

KBS 1FM에서 흘러나오는 공익광고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따위 공익광고를 통해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정부는 오늘날 한국인의 거주 형태 중 가장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의 건설에 있어서, 대체 어떤 구조적 하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층간소음에 의해 고통받는지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기업을 규제함으로써 개인들이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대신, 국민들에게 '너희들끼리 친절하고 행복하게 지내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와중에 동원되는 수사법이 가족주의적 상하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집 사는 사람은 아랫집 사는 사람의 손윗사람이 아니다. '내리사랑'이라는 표현을 동원할 계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꼭데기층 사는 사람은 단군할아버지라도 되는가?

이런 식의 '개혁'은 폼이 나지 않는다. 건설사 뿐 아니라 자신들이 내야 할 분양가가 높아질 우려를 느끼는 아파트 소비자들 역시 반발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재벌 회장 몇 명 불러놓고 꾸짖는 모습 보여주고, 감옥 보내고, "재벌 혼내느라 늦었다"고 공정위 위원장이 말하는 그런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웃사랑은 '내리사랑'도 '치사랑'도 아니다. 평등한 관계에서의 수평적 관계다. 그건 국민들끼리 알아서 할테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에 있어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실태 조사와 그에 따른 엄격한 규제다. 물론 멋지지도 않고 폼도 나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며, 국가의 역할인 것이다.

2017-11-05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1.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물론 우리, 대한민국에는 핵탄두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이 있다. 한국형 신형 원전 모델인 APR-1400은 지난 10월 유럽사업자요건 인증을 받았고, 그보다 앞서 지난 6월에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 인증 심사를 사실상 통과"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안전성을 검증받은 원전 설계 기술이 있고, 설계도에 맞춰 실제로 원전을 만들어낼 기술과 인력 또한 확보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건만 갖춰진다면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전을 '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는 우리가 가진 강점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오히려 원자력 발전을 말려죽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쏘는' 상상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환경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마따나, 우리는 다른 미래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2.

2017년 11월 5일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는 대규모 정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초대형 허리케인 마리아(Maria)와 어마(Irma)가 발전소가 밀집한 섬의 남동부를 강타하면서 주요 송전망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10월 23일 복스(Vox)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본섬의 79퍼센트가 아직 정전 상태에 놓여 있다.

푸에르토리코 대정전 사태는 엄밀히 말해 발전소가 아니라 송전망이 망가져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왜 송전망이 망가졌는지 따져본다면, 푸에르토리코의 경제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때 잘나갔던 푸에르토리코 경제가 주저앉게 된 이유의 한복판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원전 논쟁의 한복판에서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푸에르토리코는 본디 스페인의 식민지로 개발되었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스페인이 물러나게 되었고, 1952년 새 헌법을 통해 미국의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 2012년 주민투표를 통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될 것을 결정했지만 미국의 연방의회에서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은 탓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령'이지만 '미국'은 아니다.

그 섬의 역사는 섬 전체에 전기를 공급해온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Puerto Rico Electric Power Authority (PREPA))의 역사와도 같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하고 있다. 1941년 설립된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은 1970년대, 푸에르토리코의 호경기 속에서 함께 호황을 누렸다. 제약업체를 필두로 한 미국의 기업들이 세제 혜택을 노리고 푸에르토리코에 대거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다. 지금도 몇몇 의약품들은 잘 살펴보면 "Made in Puerto Rico"라고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1996년 클린턴 정부가 푸에르토리코의 세제 혜택을 없애면서 많은 공장들이 섬을 떠났다. 그와 함께 경제가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PREPA와 푸에르토리코 자치정부의 어리석은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첫째, 애초부터 정부와 지자체는 요금을 내지 않고 전기를 쓰고 있었다. 둘째, 경제가 위기에 몰리자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태양광과 천연가스 발전에 돈을 쏟아부었다(“The story of Puerto Rico’s power grid is the story of Puerto Rico”. The Economist.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conomist.com/news/united-states/21730432-even-hurricane-maria-hit-it-was-mess-story-puerto-ricos-power-grid). 셋째, 기저발전으로서 제 역할을 해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3.

2016년 기준 푸에르토리코의 발전원 비중을 알아보자. 미국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47%가 석유, 34%가 천연가스, 17%가 석탄, 2%가 신재생에너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은 2%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가격이 함께 오르내리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총 발전량의 8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Puerto Rico - Territory Energy Profile Overview -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EIA)”.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ia.gov/state/?sid=RQ).

애초부터 유가의 등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푸에르토리코는 90년대 말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유가의 고공행진 속에서 경제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경제위기 이후 폭락했던 유가는 이제서야 슬슬 고개를 들고 있는데, 그동안 유가가 낮은 상황에서도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가격은 미국 내에서 하와이 다음으로 높았다. 그런데 하와이의 경우 관광산업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는 반면 푸에르토리코에는 그런 게 없다.

경제적으로 워낙 낙후되어 있는 탓에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다.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는 탓에 지금과 같은 대정전이 아니어도 자꾸 전기가 끊기고 공장의 생산 비용이 높아진다. 인프라가 엉터리인 탓에 경제가 절름거리고, 경제가 힘차게 달려나가지 못하니 인프라 확충이 늦어진다. 악순환이다. 앞서 인용한 Vox의 기사에서 FiveThirtyEight의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발전소 설비의 연식 중위값은 44년이다. 일반적인 산업국가 발전 설비 연식의 중위값이 18년인 것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 낡은 전력 인프라에 의존해 간신히 돌아가던 경제가 초대형 태풍을 만나 좌초한 것이다.

4.

푸에르토리코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PREPA는 발전원 중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천연가스와 태양광 발전의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기업들이 문을 닫고 떠나는 와중이었다. 세제 혜택이 사라진 마당에, 전기요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그들은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영어권에서 나온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아도 뚜렷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 있다. 굳이 태양광과 가스 발전을 늘리려 드는 그러한 움직임이 '친환경'으로 포장되었으리라는 점 말이다. 산업과 경제의 기초 체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PREPA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이 아니라 '깨끗한 에너지'에 돈을 쏟아부었다. 물론 태양광 발전기와 풍력 발전기, 가스 발전기가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을 불러온 직접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저렴한 발전원이 존재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도 푸에르토리코에는 풍력 발전기가 존재한다. 심지어 태풍을 맞은 상태에서도 건재하게, 전혀 고장나지 않은 발전기가 남아있었다(지멘스의 놀라운 기술력이여!). 하지만 발전기를 운용하는 이들은 망연자실하게 돌지 않는 풍력 터빈을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풍력 발전기를 최초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력원이 필요한데, 바로 그 외부 전력원을 확보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태평양 앞바다가 사이다여도 컵이 없어서 못 마시는' 꼴이다(Dreazen, Yochi. “Darkness: life in Puerto Rico without electricity”. Vox, 2017년 10월 23일 접속. https://www.vox.com/2017/10/23/16501164/puerto-rico-hurricane-maria-power-water-sewage-trump).

5.

푸에르토리코에 건설되어 있던 태양광 발전 판넬이 태풍을 맞아 파괴된 모습.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던가. 일론 머스크는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 소식을 접하자 그것을 자신의 태양광 발전 사업의 홍보 기회로 삼았다. 푸에르토리코 전역에 솔라시티(Solar City)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일론 머스크의 그러한 제안이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가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개한 것처럼, 솔라시티에서 만드는 태양광 발전기 내장형 타일을 시공하여 테슬라 자동차 한 대를 굴리고 집안 전체에서 쓰고 남을만큼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해도, 푸에르토리코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기는 집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음악을 듣고 TV를 볼 때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등받이 쪽의 물탱크에 새로운 물이 차오른다. 그런데 수도가 정상 작동하려면 (고대 로마나 에도 시대의 일본처럼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하지 않는 한) 당연히 어딘가에서 전기를 이용해 수압을 만들어내고 있어야 한다. 도시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보일러가 작동하기 위해서도 전기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인프라 중의 인프라인 셈이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는 그러한 재앙을,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고소득층을 위한 제품의 홍보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집집마다 옥상에 깔려서 각 가정의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전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섬의 인프라 전체를 작동시켜줄, 절대 꺼지지 않는, 어지간한 자연재해에도 굴하지 않는 든든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원자력 말이다.

6.

1959년. BONUS(BOiling NUclear Superheat reactor)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BWR이라는 실험적 기법을 채택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이다. 푸에르토리코 측에서는 평범한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를 원했으나, 애석하게도 아주 작은 용량의 시험적 설비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끝인 린꼰(Rincon)에 부지를 마련하고 1963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General Nuclear Engineering Corporation (GNEC)이 이리저리 인수합병되는 과정을 거치며 건설은 지체되고 비용이 상승했다. 결국 예정보다 한 해 늦은 1964년 4월에 첫 시동을 했고 1965년 9월에서야 최대 출력을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국 발전소는 1968년 폐쇄되었고, 오늘날은 원자로의 건물을 재활용하여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웨스팅하우스를 통해 평범한, 검증된, 583메가와트의 발전소를 건설하고자 했다. 1970년 시작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는 실제로 진행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1978년 완전히 폐기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는 '핵발전소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섬'이 되어있다(“Nuclear Energy for Puerto Rico | ANS Nuclear Cafe”. 2017년 10월 22일 접속. http://ansnuclearcafe.org/2016/04/14/nuclear-energy-for-puerto-rico/).

7.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1970년의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푸에르토리코의 운명은 지금과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미 연방 정부의 세제 혜택 철회에도 견딜 수 있을만큼 안정적인 산업 기반을 확보하고 경제력을 다졌더라면 그토록 낙후한 발전 및 송전 설비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은 경제적 실패의 문제고, 그 경제적 실패의 밑바탕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 실패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자력을 도입해야 할 시점을 놓쳤다. 둘째,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택한 것이 천연가스와 태양광이었다. 말하자면 후라이팬 바깥으로 뛰어서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런데 두 번째 실패에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에너지 정책 실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클린턴 정권과 함께 불어닥친 미국 내 탈원전 열풍에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정책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미국의 담론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수많은 IT 기업들이 푸에르토리코를 소재로 자기 회사의 기발한 기술을 뽐낸다. 일론 머스크 뿐만이 아니다. 구글은 거대한 기구를 띄워서 푸에르토리코에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겠다고 하고 있고, 페이스북은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24시간 돌아가는 신뢰할만한 기저발전이 없다면 현대 문명은 유지될 수 없는데 말이다.

8.

관련 뉴스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누구도 푸에르토리코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감히 입에 올리고 있지는 않다. 물론 원자력 발전소는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설비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술 자체가 굉장히 고난이도이며, 여타의 발전소보다 훨씬 건설 비용이 크다. 당장 전기가 안 돌아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섬을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경제이고, 경제는 인프라가 확충되어 있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실질적으로는 섬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다. 마치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원자력이 필요하다. 설령 폭풍우와 기상 악화로 석탄이나 석유 혹은 가스를 실은 배가 입항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작동하는, 한 번 연료를 보급하면 1년 정도는 거뜬한, 그런 원자력 발전소 말이다.

만약 한국이 석유 47%, 천연가스 34% 등의 에너지 믹스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경제적 처지는 어땠을까?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견디고, 2008년 경제위기 이전까지의 고유가 상황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9.

11월 7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뭐니뭐니해도 북핵이다.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ICBM에 장착하여 발사 실험까지 성공하는 순간, 그것이 미국 본토에 떨어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들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실이 있다.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시 미국에 핵을 '쏠' 능력이 있다는 것 말이다. 다만 그들의 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핵은 완성된 기술이며 평화적으로 활용되는 발전소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미국에 원전을 수출할 수 있을만한 기술력을 인정받은 나라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원하는 300만 이상의 (미국 대통령 투표권은 없는) 미국 시민들이 살고 있다. 북한이 아니라 우리도 미국에 핵을 '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상상, 아니 망상에 가깝다. 현 정권의 탈핵 기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내의 여론과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의 의사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담대한 계획'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원자력의 유용함과 안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래서 한국에 온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던진다면? 그렇게 우리가 가진 기술로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밤을 밝힐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긴 글을 한 편 써 보았다.

2017-11-03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월 1일 국회 시정 연설에서 지방분권개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년 지방선거에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하자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권한을 어떻게 지방에 넘겨줄지,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과정에서 지자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한 중 일부는 중앙정부가 회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덜컥 지방분권개헌을 약속하는 것은 무책임한 정치적 행보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지역 사회가 위축되고 소멸하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실체 없는 이상을 앞세워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예산이 새어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추진하는 백년지대계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있다. 가령 탈원전 정책을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단위를 놓고 본다면 탈원전이란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우리는 사실상의 섬나라에 살고 있으며, 석유도 LNG 가스도 나오지 않는다. 바람의 질도 형편없고 국토의 70%가 산이다.

국가 단위의 에너지 정책을 놓고 볼 때 최선의 선택지는 원전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여 더 안전하고 풍부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반면 개별적인 지자체의 시선에서 보자면 탈원전이 좋다. 위험하지도 않지만 아무튼 다들 싫어하는 기피시설인 원전은 어딘가로 쫓아내버리고, 우리 동네는 소위 '꿀 빠는 지역'으로 남아있는 것이 최선일테니 말이다.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은 바로 저런 식의 지역이기주의를 적극 부추기고 그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원자력만큼 안전한 전력 공급원이 또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는 마땅히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불편한 짐을 떠안고 있다고 느끼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이런 진실을 설득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일개 시장이나 도지사의 눈으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라보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전공대의 건설과 유치에 대한 논의도 그런 식이다. 과연 지금 한국전력이라는 공기업이 대학을 추가로 건설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대학에 들어갈 학생들의 숫자는 날로 줄어들고 있고, 멀쩡히 있는 대학들도 정원을 줄이는 이 판국에 말이다. 정상적인 대통령의 시각으로, 나라 전체의 살림을 바라보며 미래를 대비하는 시각에서라면, 굳이 지금 대학을 더 지을 이유를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일개 지자체장의 눈으로 보자면 무슨 상관이랴? 일단 우리 지역에 번듯한 건물 가진 대학 하나 더 들어오는 게 급선무다.

정작 지자체의 운영을 보면 한숨만 나올 지경이다. 풍기인삼축제조직위원회는 지난 10월 20일, 2.5미터 크기의 인삼 조형물을 공개했다. 그런데 그 실상은 이런 꼴이었다.

축제의 주제를 나타내는 조형물로 축제장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남원천에 세워졌다. 문제는 인삼 조형물 중간 부분에 붉은 색을 띤 남자의 성기 모형이 부착돼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터장치를 해 성기 모형이 아래위로 계속 움직인다. 인삼 조형물에는 '인삼의 힘!'이라고 적힌 어깨띠가 걸쳐져 있다. 풍기인삼이 정력에 좋다는 뜻을 담기 위해 조직위가 설치했다. (이용호, "풍기인삼축제? 풍기문란축제!", 한국일보, 2017년 10월 23일.)

지자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돈을 펑펑 쓰고 있다. 강원도 양구군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시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만들고 기네스북에 등재하기 위해 1억1천6백만원을 소진했다. 울산시 울주군의 초대형 옹기에는 9천만원, 충북 영동군의 초대형 북에는 2억3천만원이 들었다. 지자체장이 자신의 업적으로 삼으려고 했거나, 알량한 '관광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물건들일 것이다. (참고: 윤영현, "'세계 최대'가 뭐길래...지자체 '억' 단위 세금 펑펑", SBS, 2017년 10월 31일.)

이건 반드시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강남스타일 말춤 조형물'이 있다. 2016년 신연희 강남구청장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풍기인삼처럼 문란하지는 않지만 제작비는 총 4억원 가량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여선웅 강남구의회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당시 싸이측에서 동상 제작에 부정적이어서 완전한 말춤 동상을 제작할 수 없었다"며 "정상적이면 포기해야 되는데 기어코 손목이라도 만들어 버린 것이다"라고 조형물 관련 뒷얘기를 전했다"(김남중, "싸이, 코엑스 '강남스타일' 조형물에 "과하다"", 국민일보, 2017년 7월 24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 누구에게도 양도하거나 유보될 수 없는 자유의 이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의 기반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자의적 판단이나 폭력에 우리의 자유가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의 확충은 지자체에 수많은 예산을 퍼주고 그것을 낭비하건 말건 수수방관하며, 큰 필요성이 있건 없건 아무 축제나 벌이고 대학을 짓겠다고 하는 그런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런 과정에서 국가 전체의 역량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우리의 자유와 풍요는 훼손된다. 지방자치의 이상 하에 우리 개인들의 삶이 침해당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치경찰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위 '섬마을 주민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인 교사는 낙도의 경찰이 아니라, 그 경찰을 관할하는 목포의 지서까지 찾아가 신고를 했다. 왜일까? '섬마을 공동체'와 경찰은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내는 이웃이기 때문에 성폭력을 신고해봐야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복을 당할 우려가 크다는 판단이었다. 공권력은 주민과 친근해야 하지만, 유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자치경찰제가 과연 지역 토호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 내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모든 지방자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줄어드는 인구와 고령화에 대응해 훨씬 밀도 높고 '스마트'한 방향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재정적으로 자립도 어렵고 산업 기반도 허물어진 가운데, 지자체들이 궁여지책으로 조잡하고 흉측한 조형물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대학 유치에나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중앙정부가 제동을 걸기는커녕 도리어 지방분권개헌을 덜컥 약속해버리는 오늘날의 모습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지자체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예산을 최종적으로 책임진다. 지자체는 내부의 범죄나 소요를 통제하지 못하면 군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에 스스로 맞서야 한다. 지자체는 남자 성기가 껄떡거리는 인삼 조형물 수천 개를 만들고 파산해도 중앙정부에 재정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반면 중앙정부가 재정적으로 파산하면 그 여파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요컨대 권한과 책임의 범주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지자체적 시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지자체는 내후년의 산업 동향과 '미래 먹거리'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른 지자체에게 돌아갈 몫을 어떻게 우리 지자체가 확보하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다. 하지만 국가는 다르다. 국가의 경영은 미래를 바라보며 이루어져야 하고, 때로는 국민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도 추진하며 동의를 얻어나가야 한다. 요컨대, 대승적 관점을 견지해야 마땅하다. 언제나 주민 행복만을 위해 오직 그것만을 원칙으로 삼아도 큰 탈이 없는 지자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이게 나라냐? 지난해 촛불시위에서 많이 들려왔던 구호다. 당시 시위의 참여자들은 그 시위를 통해 '나라다운 나라'가 이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현재의 집권 세력은 '나라다운 나라'를 '촛불특별시'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대한민국은 국가다. 지자체의 연맹이 아니다. 청와대가 지자체의 눈으로 국가를 바라보지 말고, 국가의 눈으로 지자체를 바라보면서, 온 국민을 위한 미래의 계획을 수립할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