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9

[신동아] 가덕도 신공항이 뉴딜? 케인스가 코웃음 칠 일

 

가덕도 신공항이 뉴딜? 케인스가 코웃음 칠 일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9.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⑪]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오독한 진보

●‘정부가 헛돈 쓰면 경제 성장한다’는 사고
●‘일단 이 지역에 돈 쓰겠다’는 건 페론주의
●시장 기능 후퇴, 경쟁 마비, 생산성 추락
●與 선거용 꼼수에 PK 주민들만 속앓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국무총리실 산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 김수삼 위원장이 11월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해신공항 추진은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검증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몇 년 전 일이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중년 남성 몇 분과 식사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는 늘 어렵다. 경기를 되살리는 방법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그러자 교수 중 한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는 게 아닌가.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못 하는 거죠." 

"그럼 방법이 뭘까요?" 

나는 궁금한 마음이 들어 물어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이 돌아왔다. 

"지하철 자동개찰기를 없애버리고 옛날처럼 차장이 손으로 개표해주기만 해도 전국에 지하철역마다 일자리가 몇 개가 생기는데요. 그런 식으로 고용을 창출하면 됩니다."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지만 그는 자신이 창출한 가상의 일자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검표용 가위를 들고 차표에 구멍을 뚫는 손놀림을 흉내 내며 입으로 '짤깍 짤깍'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다시 물었다. 

"그건 사실상 일부러 비효율을 증가시키는 것인데요, 그런 식으로 경제의 효율을 일부러 떨어뜨리는 게 어떻게 경제 성장이 될까요?" 

"케인스가 말한 게 바로 이런 거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일이라도 시키면서 돈을 주면 그 돈이 사회에 풀리고 돌면서 불황이 해결된다는 말이죠."

돈 파묻고 퍼내는 영국 콧수염 아저씨

동남권 신공항 예정지로 거론되는 부산 강서구 가덕도. [부산=뉴시스]
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하자면 그의 전공은 경제학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과학과도 무관하다. '조국기 부대'도 '태극기 부대'도 아닌 건전한 상식인이다. 본인의 분야에서 두루 존중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작업물을 여럿 낸 실력자다. 그런 지성인마저도 케인스의 이름을 외치며 사회의 효율을 떨어뜨리면 경제가 살아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것이다. 

나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문이 돌아왔다. "‘일반이론'에 그렇게 쓰여 있잖아요. 폐광에 돈을 파묻고 사람들이 캐 가게 하면 불황이 해결된다고.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케인스 이론이니까요.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거죠."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케인스는 멀쩡히 잘 돌아가는 자동개찰기를 없애고 대신 개찰구마다 직원이 한 사람씩 서서 검표용 가위를 짤깍거리는 것이 불황의 해법이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이렇듯 케인스를,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쓸모없는 일자리, 오히려 사회적 효율을 떨어뜨리는 일자리를 만들면 실업이 사라지고 결국 경제가 좋아진다는 건 케인스의 책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일반이론)'에 등장하는 한 대목을 오독한 결과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식자층 사이에서 케인스란 '돈 파묻고 퍼내는 영국 콧수염 아저씨'다. 좀 길지만 문제의 구절을 읽어보자. 

"만약 재무성이 낡은 몇 개의 병에 은행권을 채워서 그것을 폐광된 탄갱의 적당한 깊이에 묻고, 그 다음에 탄갱을 도시의 쓰레기로 지면까지 채워놓고, 허다한 시련을 잘 이겨낸 자유방임(自由放任·laissez faire)의 원리에 입각해, 개인 기업에 그 은행권을 다시 파내게 한다면 (물론, 이것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은행권이 묻혀 있는 지역의 임차에 대한 입찰에 의해 얻어진다) 더 이상 실업이 존재할 필요도 없어지고, 그 반작용의 도움에 의해, 사회의 실질소득이, 또 나아가서는 그 자본적 부 또한, 그것이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될 것이다."(‘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 번역, 비봉출판사, 2007, 152쪽) 

이 대목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직접 보았거나 누군가가 언급하는 것을 한 번은 접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사람들에게 그냥 돈을 나눠줄 거라면 허공에 뿌려도 된다. 줄을 세워놓고 나눠주면 질서정연한 현금 살포 정책 역시 가능하다. 왜 하필이면 폐광의 갱도에 돈을 파묻은 후 다시 캐는 헛된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떠올리기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인데, 웃기려고 만든 비유일까. 

그렇지 않다. 이유가 있다. 맥락을 알아야 한다. 케인스가 '일반이론'을 펴낸 것은 1936년. 대공황의 한가운데였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금본위제를 유지하던 때다.

풍자를 진지한 조언으로 받아들이다니

케인스가 볼 때 이 공황을 끝내려면 화폐를 더 찍어내야 했다. 그런데 중앙은행들은 금본위제 때문에 돈을 더 찍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금본위제란,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은행에 금괴를 쌓아두고 그것으로 종이에 찍힌 돈의 가치를 보증하는 제도다. 따라서 돈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금을 더 캐야 한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이 금광의 발견과 금괴의 수급에 의해 좌우되는 셈이다.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면 위 인용문이 이해될 것이다. 금광을 발견하고 금을 캐낼 때까지 화폐 증발을 하지 못해 불황을 겪는 그런 상황은 난센스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저 유명한 '광산에 묻힌 돈다발'의 비유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앞서 인용한 문구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이 대목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금광으로 알려져 있는 땅 속에 구멍을 파는 형태는, 그것이 세계의 실질적인 부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직 노동의 비효용만을 가져올 뿐인데도 (경기 회복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해결책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다." 

케인스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삽질을 하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한 게 아니다. 금본위제에 묶여 정부 지출로 수요를 진작시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돈을 땅에 묻었다가 다시 캐내라는 기발한 풍자를 했을 뿐이다. 위에 길게 인용한 문단 바로 뒤에서 케인스가 "물론 가옥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을 건조하는 게 더욱 현명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건 그래서다. 집을 짓고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유익한 사업을 벌여라, 그게 안 되면 차라리 광산에 돈을 파묻고 도로 캐내라. 물론 그런 미친 짓거리를 진짜 할 리는 없으니 어서 쓸모 있는 건설 사업을 벌이자, 이런 말이다. 

2020년대의 우리는 케인스가 만들어낸 거시경제학적 관점을 전 세계인이 대부분 알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케인스가 비판한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세상을 지배한 1930년대와 달리, 이제는 경기가 조금만 나빠질 것 같으면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알아서 금리를 내리고 돈을 푼다. 미국은 허공에서 헬기를 타고 돈을 뿌리자는 농담을 즐겨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은 벤 버냉키를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 앉히기도 했다. 즉 2020년 현재 전 세계인은 어느 정도까지는 케인스주의자다. 

그러니 케인스가 '차라리'라는 단서를 붙여서 제안한 것을 진지한 정책 조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땅에 돈을 파묻은 후 캐내거나 피라미드를 짓는 게 차라리 경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케인스가 말했다는 사실 자체는 옳다. 하지만 그 말을 근거로 케인스의 이름을 외치며 대한민국에 진짜로 피라미드를 짓는 것은 미친 짓이다. 

불필요한 공공사업을 벌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기반시설 중복 투자로 인한 예산 낭비를 케인스는 찬성하지 않았다. '일반이론'의 같은 대목에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시피, "두 개의 피라미드, 사자(死者)를 위한 두 개의 미사곡은 하나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요크까지의 두 개의 철도는 그렇지 않다."

탱자가 된 케인스의 농담

2016년 6월 9일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가덕도 신공항 예정지를 방문해 피켓을 들고 있다. [부산=뉴스1]
문제는 케인스의 저 '돈 파묻고 퍼내기'의 비유가 너무도 강렬하다는 데 있다. 이미지의 힘이 너무 컸다. 마치 기억력 대회에 출전하는 사람들이 괴상하고도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암기해야 할 단편적 정보들을 끼워 맞춰서 기억력을 높이는 것과도 유사하다.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전체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케인스는 돈을 파묻고 퍼내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했다'는, 일종의 '경제학적 밈'이 생겨난 셈이다. 

미국의 풍자 유머 사이트 어니언(The Onion)이 2008년 11월 13일 공개한 가상의 TV 토론 영상을 살펴보자. '정부는 거대한 돈 구덩이를 폐쇄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네 명의 패널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원하는 사람은 정부의 구덩이가 아니라 자기 집 뒷마당에 돈을 묻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없애는 방법은 파묻는 게 아니라 태우는 것이다' '종이 파쇄기에 넣고 분쇄해서 말에게 먹이로 줘야 한다'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없앨 궁리를 한다. 마지막 논객이 던지는 멘트는 일품이다. '당신이 미국을 사랑한다면, 미국의 구멍에 돈을 버리세요.'(https://www.youtube.com/watch?v=JnX-D4kkPOQ)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퍽 많은 사람들이 '돈 파묻고 퍼내기'의 비유를 진지한 경제학적 조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언급한 한 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 체감 상 거의 모든 식자층, 특히 진보 진영의 식자층은 '정부가 헛돈을 쓰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거나, 그런 믿음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한 상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경제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만약 케인스의 피라미드 농담이 사실이라면, 전국 방방곡곡마다 세워진 수많은 전시성 조형물 덕분에 각 지자체의 경제는 우뚝 일어섰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 차라리 피라미드를 짓자'던 케인스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와서 저 온갖 '랜드 마크'들을 봤다면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물론 찬성하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2020년은 1930년대와 달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를 선택지에 전혀 두지 않는 세상이다. 중앙은행들은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금리를 인하하고 통화량을 늘려 경기 후퇴를 막는다. 따라서 케인스의 농담을 순수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지자체가 증명하고 있다. 피라미드를 짓는다고 해서 되살아날 만큼 21세기의 경제는 만만하지 않다.

공항은 피라미드가 아니다

가덕도 신공항 논란이 다시 불거진 까닭은 문재인 정권의 선거 전략 때문이다.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다. 화두가 떠오르자마자 부산에 지역구를 둔 야당 의원들은 곧장 찬성 의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여당은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애가 타는 당사자는 날로 침체되는 지역 경제로 속을 앓는 부산과 경남 일대 주민들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선거용 꼼수로 인해 온 나라가 '공항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이미 프랑스의 용역회사를 통해 경제성, 확장성, 기타 입지의 적절성에 대해 판단이 끝난 사안이다. 그럼에도 가덕도에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김해공항이 위험하다거나, 가덕도가 실은 더 확장성이 좋다거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때문에 시끄럽다거나 등등. 그때와 달리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 지면은 그런 사항을 다루기에 적합한 곳도 아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상식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공항은 피라미드가 아니다. 앞서 인용한 케인스의 말을 다시 반복하고 싶다. "두 개의 피라미드, 사자(死者)를 위한 두 개의 미사곡은 하나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요크까지의 두 개의 철도는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상 그 어떤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공항 같은 사회기반시설의 중복 투자와 건설은 비합리적이다. 국가 예산을 투입해 민간 수요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재정승수 효과를 노린다면 차라리 그 효과를 거두는 게 목적이라고 정직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최선의 사업을 찾는 단계부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공항이라는 키워드에 묶여있을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합리적 해법을 찾아야 하겠다. 

‘일단 이 지역에 돈을 쓰기 위해 합리성이나 타당성과 무관한 사업을 벌인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케인스주의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에 가깝다. 두 경제 사상은 심지어 케인스주의의 옹호자들 사이에서도 곧잘 혼동되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시장이 제 기능을 되찾게 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 반면 후자는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하게 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가로막으며,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면서, 오직 지지율과 정권 유지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케인스주의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계 경제를 부흥시켰다. 페론주의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던 아르헨티나를 단번에 주저앉히고 말았다.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온갖 '랜드 마크'들을 보면 웃기다 못해 섬뜩해지는 것은 그래서다. 페론주의가 아닌 케인스주의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고민하는 정치를 원한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11-28

[노정태의 시사哲] 美 엘리트는 '내 탓이오'인데, 韓 586은 왜 '네 탓이오'인가

 

美 엘리트는 '내 탓이오'인데, 韓 586은 왜 '네 탓이오'인가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8. 03:08 수정 2020.11.29. 17:02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윤리철학 최신 담론 '능력주의'
일러스트= 안병현

린 닐텝. 가난하지만 천재적 두뇌를 가진 태국 소녀다. 목표는 해외 유학. 아버지가 그 학비까지 대줄 수는 없지만 상관없다. 장학금을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전학 첫날부터 친해진 단짝 친구에게 호의로 커닝을 시켜줬다가 점점 판이 커졌고, 결국 걸렸다. 가까스로 퇴학은 면했지만 장학금은 받을 수 없다.

내 유학비 내가 벌겠다는 마음으로 린은 커닝 비즈니스를 더 키우기로 한다. 미국 유학을 가고자 하는 금수저 수험생들이 고객이다. 미국 대학 입시에 필요한 STIC라는 시험은 전 세계에서 같은 날 치르는데, 그러니 태국보다 시간이 앞선 호주에 가서 먼저 문제를 풀고 답을 알려주는 계획을 세웠다. 린은 또 다른 천재 소년 뱅크와 함께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2017년 개봉한 태국 영화 ‘배드 지니어스’의 내용이다.

‘배드 지니어스’는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범죄 영화, 즉 ‘케이퍼 무비’에 시험이라는 요소를 절묘하게 섞었기 때문이다. 보석 대신 정답을 훔치는 천재 소녀 린의 활약을 보며, 우리는 문득 능력주의(meritocracy)의 허와 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라는 소설을 썼다. 어느 날 혁명을 통해 신분이나 재산이 아닌 능력에 의해서만 사람을 평가하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었는데, 결국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어째서 그럴까? 시험을 통한 능력 평가는 안정적으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는 계층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시험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엘리트는 자기들끼리 결혼하여 지능이 높은 아이를 낳아 좋은 여건을 제공한다. 온갖 제도 역시 자녀에게 유리하게 바꾼다. 대학교 학벌 같은 ‘능력 인증’을 받고 나면 다시는 그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된다. 실제로는 더 나쁜 신분제가 되는 것이다.

‘배드 지니어스’에서 린이 목격하는 부잣집 아이들의 인생을 생각해보자. 머리가 나쁘지만 돈 많은 집 자식들은 기부금을 내고 명문 사립고에 들어간다. 머리 좋은 누군가를 시켜 커닝까지 한다. ‘보스턴에 있는 대학교’ 간판을 따기만 하면 아무도 그들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능력주의 문제는 현실이다.

2017년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인 리처드 리브스가 ’20대 80의 사회'(Dream Hoarders)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후, 미국 지성계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뒤이어 나온 예일대 로스쿨 교수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 하버드 철학과 교수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 정치, 윤리철학의 최신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016년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라는 충격으로 인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미국의 리버럴은 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게 문제이며, 자신들처럼 능력 있는 중상층 엘리트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위 20%가 나머지 80%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진짜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능력주의 비판은 미국 지성계의 자기반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능력주의 비판을 수입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퍽 이상하다. 미국에서는 기성 엘리트가 ‘내 탓이오’를 외치고 있는 반면, 한국의 중장년 진보 엘리트는 청년들을 향해 ‘네 탓이오’라며 손가락질하는 분위기랄까. 20대와 30대 사이에서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그 대항마로 능력주의 비판을 끌어들인다. 인천국제공항 사태, 공공의대 논란 등에서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청년들에게 ‘공정충’ 같은 모멸적 딱지를 붙이고는, ‘너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자체가 특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식이다.

그런 비판은 학력고사 봐서 대학 간 다음 데모 좀 하더니 정치권의 주류가 된 586 기득권층에 돌아가야 한다. 학력고사나 수학능력시험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입시 제도에 비해 부모의 정보력, 인맥, 문화적 자산 등의 영향을 덜 받는다. 만약 1980년대의 한국이 2020년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학 입시를 치르는 나라였다면 지금 586세대 상당수는 대학 문턱을 밟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은 학벌과 인맥으로 평생을 먹고살면서 그들은 능력주의의 혜택을 철저하게 누린다.

그들이 만들어낸 오늘의 모습은 어떤가. ‘컨설팅’을 받아야 대학 갈 수 있는 나라, 물려받은 재산 없으면 살아 생전 집 한 채 살 수 없는 나라 아닌가.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사회 전체의 꿈을 긁어모아 제 자식에게만 물려주는 탐욕스러운 기득권자들. 수십 번씩 부동산 정책을 내놓아도 집값을 못 잡는 무능력자들. 그들이 무슨 염치로 능력주의 비판을 입에 담는 걸까.

능력 중심 사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류를 봉건적 신분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준 자유주의 혁명의 근간에 개인의 능력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으니 말이다. 능력 중심 시장주의는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단, 학벌을 능력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며, 진정한 능력을 갖출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해야 한다. 특히 인적 자본 형성기, 즉 유년 시절 가정 환경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리브스는 강조한다.

‘배드 지니어스’는 능력주의의 맹점을 배경으로 한 범죄 스릴러 영화다. 있는 집 자식들은 돈 써서 커닝하고, 없는 집 자식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남 좋은 일 시켜주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긴장감 넘치는 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딘가 서글퍼진다. 그래도 시험은 공정한 조건에서 자기 실력으로 경쟁하여 평가받아야 하며, 커닝은 누가 뭐래도 나쁜 짓이다.

12월 3일,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이제는 수능 하나만 잘 봐서는 대학 가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한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그 기간에 집중해서 비대면 학원 수업을 받아 공부를 더 잘하게 되었다는 말도 들려온다. 올겨울은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울 것 같다. 모든 수험생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

2020-11-27

미친 소와 감기 걸린 닭에 대한 전 지구적 고찰 (GQ 2008/06)

미친 소와 감기 걸린 닭에 대한 전 지구적 고찰 (GQ 2008/06)

 

그것을 인간 광우병이라고 불러도 좋고, 혹은 vCJD라고 해도 상관 없다.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과 인간 광우병이라 불리는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의 정확한 발생 원인 및 감염 경로에 대한 과학적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확실한 것들을 우선 짚어보자. 첫째, 뇌에 구멍이 송송 뚫려서 사망하는 질병 중 인간이 걸릴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CJD, vCJD, 그리고 파푸아섬에서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던 원시인들이 걸리던 '쿠루'라는 풍토병. 둘째, 이 세 가지 질병은 모두 걸리면 수년의 잠복기를 거친 후 100% 사망한다. 셋째, CJD는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 발병 확률은 100만분의 1도 채 안 된다. 넷째, 동물성 사료의 사용을 금지한 이후, 영국에서 CJDvCJD의 발병률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세계에서 인간 광우병이 가장 많이 발병한 나라가 영국임을 감안해볼 때, '통계적'으로 보자면 동물성 사료의 사용 금지 이후 광우병의 위험은 상당히 잘 통제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정부측에서 '끝장 기자회견'과 이후 <MBC 100분 토론>을 통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산 소고기가 광우병에 노출되어 있다는 주장은 현재로서는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값싸고 질좋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서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어떤 우유 회사가 자기들이 만드는 우유 100만 팩 중 하나에 청산가리를 넣어서 판다고 치자. 그런 경우에도 그것을 먹고 죽을 가능성은 고작 100만 분의 1에 불과하지 않은가? 대체 어째서 우리가 고기 한 점을 먹을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100만분의 1'의 확률이라는 것이, 위에서 말한 CJD의 자연발병률과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가 먹는 한우가 순수하게 풀만 먹고 자란 소가 아니라면, 우리는 vCJD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인은 매일같이 고기국을 먹고, 소 피를 응고시켜서 선지국을 끓여먹으며, 소의 뼈를 고아서 곰탕을 만들어 먹기 때문에 특별히 더욱 위험하다는 주장에 대해, 정부에서는 그런 비위생적인 "Behavior(행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식으로 국민들을 윽박질렀지만, 소의 각종 부산물을 섭취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매우 다양하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갈아서 소고기 패티를 만든 후 그릴에 구워 햄버거 빵 사이에 끼우는 것이다.

, 소의 살코기가 아닌 부산물을 섭취하는 것이 비위생적인 "Behavior(행태)"라는 정부측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타당하지만, '미국분'들도 그렇게 드시고 있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전혀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동시에 그 사실은 유독 한국인들이 광우병에 더욱 위험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례가 되기도 한다. 설렁탕 먹는 한국인들이 광우병에 집단감염될 우려가 있다면, 그건 미국인도 마찬가지다. 미국인들이 모두 미국산 쇠고기만 먹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미국인들이 먹는 햄버거에 뉴질랜드산 청정우의 살코기만을 갈아 넣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로 인해 광우병 희생자가 줄을 잇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진작에 미국에서 먼저 발생했어야 한다. 물론 과격한 반대론자들은 '미국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종류의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만 있을 뿐이므로 더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하지만 기왕 '정부 탓'을 시작했으니, 여기서는 미국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 쪽으로 시선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정부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번 쇠고기 협정이 한미 FTA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미국 퍼주기'가 아니냐는 지적을 하지만, 정부측에서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기 때문에, 심증을 유지할 수는 있어도 물증을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드러난 정황만을 놓고 보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이번 쇠고기 협상의 타결에 있어서 상당히 불성실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듯하다. <<경향신문>>512"사료조치, 에 백지위임 '2의 쇠고기 파동' 조짐"이라는 기사를 1면에 실었다. 광우병 감염우려가 높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선면수입을 허용하면서 강화된 동물성 사료 금지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 없이 미국에 사실상 '백지 위임'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정부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지난달 25일 연방관보를 통해 공포한 강화된 동물성 사료 금지조치 내용과 다른 설명을 해놓고는, 그 사실이 폭로되자 "영문 번역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내놓았다.

이것은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에 감염되었을 확률이 얼마나 높은가와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과학적인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가 다른 층위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뼛조각' 하나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미국산 쇠고기의 통관을 가로막던 정부가, 지금은 적극적으로 그것을 수입해도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YTN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돌발영상>의 소재가 되는 영광을 굳이 떠안고 싶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쇠고기 수입 협상을 둘러싼 의혹들을 모두 '정치적'인 것으로 몰아붙이고, '미친 소 먹고 죽기 싫다'며 거리로 나선 10대들의 '배후'를 캐겠다고 눈에 쌍심지를 켠 정부의 태도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음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의 그러한 대응은 도리어 탈정치적이던 10대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삶이 크게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때에 따라서는 아주 단순한 반발의 목소리를 내는 것마저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한국의 10대들은 몸으로 배우고 있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책적인 것에 더욱 가까웠는데, '정치적으로 몰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발언으로 인해 더욱 정치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말을 전달하는 농림부 관료들의 화법 또한, 또 다른 차원에서 정치적이며 또한 철학적이기까지 한 논점을 던져준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직접 '확률'의 문제를 들이밀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로또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대단히 잘못된 이유는 사안의 본질을 전달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또 1등 당첨의 꿈을 꾸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제대로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서민적인 마스크를 지닌 탤런트 손현주씨가 가문의 영광을 누리며 팔짝팔짝 뛰는 모습에 서민들은 스스로를 오랫동안 대입해왔다. 그런데 그게 바로 광우병 걸릴 확률이라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닌가. 정부측에서는 '사실'을 전달하는 방법만 알았지 '사태'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나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절차와 관련된 정치적 논란에서, 정부측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기존의 입장을 뒤엎는 협상을 하면서, 그러한 입장 변화를 국민들에게 전혀 납득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불거진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대응만을 보여줬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 10~20년 후 인간 광우병 환자가 속출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식품의 위생 차원을 넘어 식품의 안전까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과잉해석이다.

 

물론 나는 MBC <PD 수첩>에서 vCJD의 위험성을 경고함으로써 여론을 환기시킨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편이다. 적어도 그들은 1년 전 사설에서 광우병의 위험에 대해 근심하다가 오늘에 와서는 '10대들의 정치적 배후'를 묻던 주요 일간지들보다 훨씬 언론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광우병은 국제적으로 볼 때 상당히 잘 통제되고 있으며, 그 전염성은 HIV(에이즈) 등에 비해 매우 낮다. 정작 지금 세계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512일 현재 서울 송파구에까지 상륙한 AI, 즉 조류독감이다.

현재로서는 조류독감이 육류 섭취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사람에게 감염될 수 있는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하고 있으며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연구중이다. 만약 그러한 변종이 대기 중에 유포될 경우 한국은 재앙에 가까운 독감 열풍에 휩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광우병 정국'에 심취한 네티즌들은 조류독감이 위험하다는 보도를 소가 닭 보듯 할 뿐이다. 정부에서 '물타기'를 하기 위해 언론에 자료를 뿌리고 있다고 냉소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1918년 전 세계적으로 4000만에서 1억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광우병이 아닌 독감이었음에도, 한국인들은 과학을 불신하고, 언론을 경멸하며,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소의 뇌에 구멍이 뚫리는 것보다 더욱 걱정스러운 일은 객관적인 지식에 대한, 또한 시민들 스스로 구성하는 공공성에 대한 믿음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조망해본다면, 질병의 확산과 예방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광우병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조류독감이다. 역시 국제적인 차원에서, 또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검토해볼 때 지금처럼 미국산 쇠고기에 한국 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것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20세기가 IT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BT, 즉 생명공학(Bio Technology)의 시대이다. 핸드폰을 팔아 밀가루를 사오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공업 생산품의 가격은 특히 중국의 발전으로 인해 나날이 떨어지고 있는 반면, 작년 국제 곡물 시장에서 밀의 가격은 자그만치 287퍼센트나 치솟았다. 이렇다보니 세계 각국은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혈안이다. 또한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들은 하나같이 농업과 관련된 다국적 기업들이다. 모사익(Mosaic Co.)319퍼센트, 포타쉬(Potash Corp.)140퍼센트, 몬산토(Monsanto Co.)105퍼센트씩 지난해 주가 상승을 기록했다. '첨단 산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농업이 첨단산업이고, 소 키우고 닭 치는 것이 고부가가치 산업인 시대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검역 주권까지 포기하면서 미국산 쇠고기에 한국 축산 시장을 무차별적으로 개방하겠다고 하며,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 또한 우리 아이가 광우병에 걸리게 되지나 않을까 근심할 뿐 근본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 축산 농가가 모두 쓰러진다면 경쟁자를 물리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업체들은 '시장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가격을 높일 것이다.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가 졸지에 '비싸고 맛없는 쇠고기'로 돌변하겠지만 그쯤 되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순간에도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국경을 넘어 닭장 속으로 날아들어온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이렇듯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한국이 가운데 놓인 평면 지도가 아닌, 둥그런 지구본 위에 올려놓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 노정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이 원고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여기: https://basil83.blogspot.com/2008/05/blog-post_13.html

2020-11-23

코로나와 인종 문제, 혹은 정치적 올바름의 재구성

수많은 확진자가 나오는 가운데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 코로나는 인종별로 영향이 달리 나타납니다. 영국에서 수집된 자료에 따르면, 흑인 남자의 사망률은 백인 남자에 비해 네 배 높음. 흑인이 인종차별 당해서 아니냐? 하겠지만 인도인(대체로 흑인보다 소득 수준이 높음)도 백인 남자에 비하면 코로나로 두 배 많이 죽습니다.

그러니 인종별로 세부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유대인이나 로마니(aka 집시)처럼 인종으로 분류되어 학살당한 경험이 있는 집단들은 더더욱 인종 정보 제공을 원치 않기 때문.

하지만 인종 자료가 필요하고 유의미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코노미스트의 이 기사에서 제시하는 사례. 브라질은 1990년대부터 피부색에 따라 인종을 5개로 분류했더니, 백인과 그 외 인종의 영아사망률 차이가 가시화되었고, 사회적 분노가 집중되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After Brazil started collecting data in the late 1990s by five different skin-colours, the gulf in infant mortality between indigenous and white babies became apparent. Public outrage led to serious efforts to start narrowing the gap. The Brazilian example shows that the data need to be granular. Catch-all terms such as “BAME” (Black, Asian or Minority Ethnic), used in Britain, are unhelpful. “Non-Western migrant” or “foreign born” contain even less information.

그러므로 '흑인과 아시아인과 소수자', '비서구 이민자' 같은 뭉뚱그리는 표현을 이제는 지양해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 코로나로 인해 인종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새로운 방향에서 생각해보게 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신동아] 與부대변인이 진중권을 '예형'에 빗댄 건 협박

 

與부대변인이 진중권을 '예형'에 빗댄 건 협박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3.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⑩] 증오 선동하는 자들이 자유민주주의 등에 칼 꽂아

●새빨간 거짓에 희생당한 프랑스 교사 사뮈엘 파티
●표현의 자유는 원래 ‘불편한’ 것
●탈진실(post-truth) 용어, 사태의 본질 왜곡
●공산주의자가 공유한 나치, 파시스트 선동 화법
●敵 공격 위해 거짓과 폭력 거리낌 없이 동원
●與의원 “X자식들” “X탱이”… 국민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
●文정권의 진실 결여, 검찰총장을 대선후보 만들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연일 정권에 쓴 소리를 하며 사회참여 지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당의 상근부대변인이 10월 13일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 예형은 ‘삼국지연의’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처형당한 지식인이다. 사진은 진 전 교수가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진행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대담에 참석한 모습. [박해윤 기자]
사뮈엘 파티(Samuel Paty). 목이 잘려 살해당한 프랑스 역사 교사 이름이다. 표현의 자유는 그가 공들여 가르치는 주제였다. 공화국으로서 프랑스가 지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동안 시사 풍자 잡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일러스트를 수업 교재로 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 언론은 이 사건의 맥락을 온전히 보도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나쁜 백인'이 '선량한 유색인종'을 도발해 벌어진 일처럼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상은 그보다 복잡할 뿐 아니라 암울하다. 이 사건을 '표현의 자유 대 종교 감정'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표현의 자유 기능하려면 불편함 참아야

가장 먼저 지적할 점은 프랑스 정규 교육은 표현의 자유를 교과 과정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티는 어떤 식으로든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가르쳐야 했다. 표현의 자유를 논하려면 본질적으로 도덕 감정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미국 도색잡지 '허슬러' 발행인이던 래리 플린트의 인생을 떠올려보자. 영화 '래리 플린트'에 잘 묘사돼 있다시피, 그는 성(性)과 쾌락에 엄숙한 혹은 위선적인 미국 기독교인의 종교 감정을 건드렸다. 신앙인의 표를 노리는 보수적 정치인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 래리 플린트마저도 미국 연방대법원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보호해줬다. 

즉 표현의 자유란 본래 '불편한' 것임에도 법과 제도 및 사회적 관용을 통해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자유가 침해당한다면 함께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명언이 뜻하는 바도 그런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하려면 불편함을 참아야 한다. 내 감정에 거슬리는 내용도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걸 배워야 한다. 그것이 공교육의 역할이다. 

사뮈엘 파티는 학생들에게 "이 수업은 특히 무슬림 학생들에게 불편할 수 있으며, 내가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 싶지 않다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도 좋다"고 말한 후 수업을 진행해왔다. 종교적으로 예민한 소재를 다루고 있긴 했지만, 전문적인 자격과 경력을 지닌 교육자가 진행한 정상적인 수업이었다. 파티는 수년 동안 계속 '샤를리 엡도'의 풍자만화를 소재로 수업을 진행해 왔고 별 문제가 없었다. 

2020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페이스북에서 사뮈엘 파티의 수업에 대한 반대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유명한 무슬림 선동가 압델카힘 세프리위(Abdelhakim Sefrioui)가 있었다. 그는 파티의 수업이 "무책임하고 공격적"이라는 취지의 영상을 올렸다. 세프리위에게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의 딸 자이나(Zaina)에 따르면, 파티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무슬림 학생들에게 이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손을 들어 표시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슬림 학생들은 종교 감정을 모욕당하고 프랑스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한, 즉 인종주의·국수주의 행태의 희생자가 됐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다. 자이나는 파티의 수업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번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슬람 혐오자라는 딱지가 붙은 파티는 교장에게 불려갔고 교육청의 감사도 받았다. 교육청은 그의 수업 내용과 방식을 보고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경찰 역시 같은 결정을 내렸다. 파티는 자신을 비방한 압델카힘 세프리위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파티를 향한 무슬림들의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이슬람 혐오자라는 온라인 폭로가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적개심이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자가발전하기 시작한 증오는 점점 더 커지더니 결국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향했다. 압둘라흐 아부예도비치 안조로프(Abdoullakh Abouyedovich Anzorov)라는 18세의 무슬림 난민 소년이 그 증오에 휩쓸렸고, 칼을 빼들었다.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아버지인 사뮈엘 파티는 2020년 10월 16일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됐다.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금기

수업 중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무슬림 청년에게 테러를 당한 프랑스 역사 교사 사뮈엘 파티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10월 17일(현지시간) 그가 근무하던 파리 북부 콩플랑생토노린의 부아돈 중학교 앞에 꽃을 놓고 촛불을 켰다. [콩플랑생토노린=AP 뉴시스]
프랑스의 공교육이 제공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학교 측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며,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항의 시위를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의 형성과 표출은 '샤를리 엡도'의 풍자만화가 그렇듯,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 하에 보호받는다. 

여기서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금기가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런 금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지만, 한번 무너지고 나니 확실히 보이는 선이 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파티의 수업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그 수업을 실제로 듣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오직 진실에 근거해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압델카힘 세프리위와 자이나는 상식적이고 올바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을 기반으로 페이스북에 선동적 영상을 올렸다.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과 다르다는 게 드러났지만, 자신들이 들쑤셔놓은 사뮈엘 파티를 향한 증오와 분노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들의 증오 선동에 넘어가 범죄를 저지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이 사건을 두고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대립을 논하는 건 적절치 않다.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요소를 빠뜨리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사뮈엘 파티가 이슬람 혐오자이며 교실에서 무슬림 학생들을 모욕하고 쫓아냈다는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파티가 진행한 표현의 자유 수업은 프랑스의 정규 교과 과정 중 일부였다. 그는 그것을 교장과 감독관이 볼 때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증오할 거리를 찾고 있던 선동가인 압델카힘 세프라위는 딸의 거짓말을 믿었거나 딸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다. 거짓을 연료로 타오른 증오의 불길은 사뮈엘 파티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파티를 살해한 18세 소년 압둘라브 안조로프의 인생까지 망가뜨리고 말았다. 

여기서 종교적 감정의 존엄성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에 대한 모욕 아닐까. 세상 그 어떤 종교도 '남에게 거짓말을 하고 네 이웃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니 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특히 거짓으로 남을 고발하고 선동하지 않는 것. 이것은 인간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 규칙이다. 그 어떤 대단한 이유와 핑계를 들이댄다 한들 거짓 선동과 폭언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사뮈엘 파티 피살 사건의 대립 구도는 표현의 자유 대 종교가 아니다. 진실 대 거짓이다.

레닌, 히틀러, 트럼프

요즘은 '탈진실'(post-truth)이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저런 고상한 표현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탈진실 같은 건 없다. 탈진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그리고 한국에서도 거짓말로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자들이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근간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의 등에 칼을 꽂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전설적인 서평 전문 기자 미치코 가쿠타니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에서 거짓을 근간으로 삼는 폭력적 언어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에 따르면 나치와 파시스트의 선동 화법을 공산주의자들도 공유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부터 미국의 좌파 학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주로 고학력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대중문화를 거점 삼아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1세기가 되자 오히려 우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문화주의에 편승해 진실을 부정하고 아무렇게나 내뱉으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탈진실'의 물결에 가담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트럼프 대통령 옹호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논의를 이용해 트럼프의 거짓말을 변명하고 싶어 하고, 우파는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기후변화의 현실을 부인하거나 대안사실(alternative fact)을 홍보하고 싶어 한다."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우파도 좌파도 아닌 거짓과 폭력의 승리였을 뿐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히틀러뿐 아니라 레닌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다시 가쿠타니의 설명을 들어보자. 

"레닌은 언젠가 자신의 선동적인 언어가 증오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키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어법은 상대 계급을 납득시키는 게 아니라 깨부수려고, 적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아니라 적을 파괴하려고, 적의 조직을 지구상에서 전멸시키려고 의도한 것이었다. 이런 어법은 실로 적에 대한 최악의 생각, 최악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성격의 것이다. 이 모두가 트럼프와 지지자들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동안 힐러리 클린턴을 공격하면서 사용한 언어(‘힐러리 클린턴을 가둬라'), 영국 브렉시트 운동의 과격한 지지자들이 사용한 언어, 대서양 양쪽 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 운동이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언어의 원형처럼 들린다." 

즉 선동의 언어는 좌우의 구분을 넘어선다. 서구냐 비(非)서구냐, 근대적 세속국가냐 종교냐 하는 대립과도 무관하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거짓말과 폭력을 거리낌없이 동원하고자 하는 태도의 문제다. 사뮈엘 파티를 향한 적개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이나가 거짓말을 했고 압델카힘 세프리위가 선동을 했던 것은 그 흐름 위에서 벌어진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종교의 신성함이나 신앙의 자유와는 상관이 없다.

말론 브란도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11월 4일 국회 운영위원회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대통령경호처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석했다. 이날 그는 “8·15 광화문 집회 때문에 이것을 클러스터로 해서 발생한 확진자가 600명이 넘는다. 사람까지 7명 이상 죽었다.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이라고 말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11월 4일 청와대 국정감사에서 "8·15 광화문 집회 때문에 이것을 클러스터로 해서 발생한 확진자가 600명이 넘는다. 사람까지 7명 이상 죽었다.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속기록에도 기록돼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논란이 커지자 노 실장은 11월 13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국민에 대해 살인자라고 한 적 없다. 어디서 가짜뉴스가 나오나 했더니, 여기서 나온다. 속기록을 보라"고 했다. 탈진실, 아니 거짓말이다. 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국민을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 들어 가장 우려스러운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국민을 상대로 폭력과 증오의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공무원들을 상대로 'X자식들'이라는 폭언을 던지고,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국민에게 'X탱이'라고 문자를 보낸다. 언어 습관이 고상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웃고 넘길 일도 아니다. 그들은 국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당 상근부대변인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상대로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는 말을 한 일도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예형은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결국 처형당하고 마는 지식인이다. 집권 여당의 부대변인이 지식인을 향해 예형을 운운하는 건 문자 그대로 협박이다.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 어떤 점잖은 제안이 아닌 협박인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기억하는 한 민주화 이후 그 어느 정부도 이렇게 대놓고 국민에게 위협을 가한 적은 없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문재인 정권의 이런 행태는 어쩌면 일찌감치 예견됐을지도 모른다. 201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타 후보에게 문자폭탄을 보내고 18원의 후원금을 넣는 등의 방식으로 공격적 행동을 할 때 문재인 당시 후보의 반응을 떠올려보자.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는 친문세력뿐 아니라, 문 대통령 본인이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짓을 기반으로 한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진실의 결여에 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렵기에 '검찰개혁'이라는 양의 머리를 내걸고 증권범죄합동수사단 해체 같은 만행을 저지른 걸까.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독일에서는 전례가 없다. 일본에서는 1954년 법무대신이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하던 뇌물 정치인 사건을 불구속 지휘한 사례가 유일하다. 결국 법무대신은 여론의 비난에 사퇴했다. 수사지휘권을 남발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라도 해서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기가 어렵다. 이 거짓의 정권으로 인해, 민심은 급기야 퇴임하지도 않은 현직 검찰총장을 차기 대선후보로 바라보게 됐다.

설령 진실이 아프더라도

거짓말쟁이를 추궁하면 계속 거짓말을 한다. 그래도 끝까지 물어보면 나중에는 의심당하는 자신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피해자 행세를 하거나 되레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에서 쏟아지는 '막말'들은 그런 면에서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교양이 부족하고 품위가 없어 생기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폭언과 선동은 거짓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올바른 정치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양한 세력을 규합하고 의제를 파악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대중을 견인하는 등 여러 과정이 필요할 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진실이다. 설령 그 진실이 아프고, '우리 편'에게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택해야 한다. 너무 뻔하고 식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