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8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탱크와 전투기를 수출했다는 소식 때문에 오늘 인터넷은 '폴란드의 날' 비슷한 분위기가 되어 있다.

이럴 때 나는, 마치 외국인에게 '두유노 코리아? 손흥민 몰라요?' 이러는 진상 국뽕 한국인처럼, '폴란드'라는 단어의 자동 연관 검색어를 떠올린다.

쉼보르스카는 평화주의자, 세계주의자,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그는 전차와 전투기를 사고 파는 거대한 돈과 폭력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극도로 문학적인 아무말이며, 반박시 일단 내 말이 맞는데, 솔직히 누군가 뭘 반박할 거리가 있지도 않다. 아무말이니까.

이런 시가 있으니 한 편 읽어주시면 좋겠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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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태양이 저물고 있네."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그저 시간을 가리키는 척 하고 있을 뿐이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에 이제 어린애는 없단다."

자,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2022-05-29

프리랜서: 사교성, 실력, 마감


새 책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프리랜서: 사교성, 실력, 마감>입니다. 

이 책의 맥락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워크룸 실용 총서'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워크룸 실용 총서'란 마치 실용서인 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실용서가 아닌, 그래도 어쩌면 실용적인 쓸모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담는 총서 시리즈입니다. 

가령 CIA의 사보타주 매뉴얼을 담은 <생활 공작>,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군인들에게 배포된 육박전 매뉴얼인 <실전 격투>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용서였지만 실용서가 아니고, 실용서라고 보기 어렵지만 실용서(였)죠. 

<프리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로 10년차도 더 된 프리랜서인 제가, 프리랜서로서의 삶의 태도와 방식, 여러 팁을 전합니다. 실용서입니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가령 <미라클 모닝>이라던가, 뭐 그런 식의 실용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가격은 고작 9천원. 전체 분량 182매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실용서가 아닌 정도를 떠나, 책의 만듬새만 놓고 보면 시집 같기도 하군요. 편하신대로, 좋을대로, 그렇게 읽으면 좋을 책이죠.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2-05-22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

오늘(5월 22일 일요일) 막을 내린 권진규 100주년전.

일단 대단히 훌륭한 전시였고, 여러가지 할 이야기가 많은데, 그 중 하나.

사람이 하는 말을 믿어줘야 하지만, 누군가 어떤 말을 굳이 반복해서 한다면 그 말과 반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권진규의 경우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장인일 뿐'이라고 젊은 시절 일본 가서 조각 배우고 왔을 때부터 그랬다고 전시 초반에 써 있는데, 실제로 걸어온 행보는 그와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 그리고 나무로 만든 불상 모두 그렇다.

그의 예수상은 개인적으로 만든 작품이 아니다. 멀쩡히 교회에서 돈 받고 의뢰 받아서 만든 것이다. 클라이언트가 따로 있는 작품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권진규는 그 예수의 머리의 후광을 굳이, 굳이!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들었다.

수레바퀴란 종교에서 어떤 상징인가? 불교의 상징이다. 불교의 法이요, 윤회의 輪이다. 예수 머리의 halo를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도에게 일종의 신성모독인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작업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건 아니다. 가령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정도까지 전국의 여러 성당들은 앞다투어 '상투 틀고 있는 예수'라던가, '색동저고리 입은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 같은 성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Roman Catholic'과도 미묘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천주교의 맥락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천주교에서 그런 유형의 성상을 주문 제작할 때에도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따라야 함은 당연하다.

권진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남의 돈을 받아서 작업을 할 때도 아주 대놓고 자신의 의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곤조를 밀어붙였다.


나무로 만든 불상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커미션 받은 작품이 아니지만, 종교의 내적 논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가주의적 의지가 강하게 개입해 있다. 미륵의 관을 썼지만 옷깃과 수인, 결가부좌는 부처의 그것이다. 종교의 문법을 알면서 무시하는 것이다.

권진규의 예술가적 목표가 뭔지, 얼마나 잘 추구하였는지, 뭐 그런 것에 대해 내가 함부로 말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 써두었던 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기술자/장인/등등일 뿐'이라고 말하는 예술가야말로 예술가적 자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다. 진정 간도 쓸개도 빼놓고 시키는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저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훌륭한 전시에 쓸데없는 말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22-05-15

19세기 힌두교 르네상스, 바가바드기타, 계급과 차별과 의무

이 고전이 지니는 힘과 영향력은 간디뿐 아니라 틸라크 (B.G. Tilak), 오로빈도(Aurobindo), 비노바 바베(Vinoba Bhave), 라다크리슈난(S. Radhakrisnhan) 등 수많은 현대 인도 사상가와 정치 지도자에게도 마찬가지로 강하게 미쳤다. 사실 『바가바드기타』가 힌두교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대중적 경전이 된 것은 19세기의 이른바 힌두 르네상스(Hindu Renaissance)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영국의 오랜 식민 통치는 인도 지식인들에게 정치적 저항과 독립 의식을 고취했을 뿐 아니라 종교적·문화적 각성도 가져왔다. 특히 영국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진 기독교와의 접촉은 인도 지식인들의 힌두교 이해와 개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힌두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공격적 선교에 대해 방어적 자세를 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서구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서 비판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따라서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무조건 동일시하던 견해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인 힌두교 사상의 강점을 새롭게 의식하게 되었다. 힌두교를 비판과 개혁의 대상으로만 보던 부정적 시각을 버리고 그들은 오히려 서구 세계를 향해 힌두교 철학과 종교 사상이 지닌 장점과 매력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에 누구보다도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은 유명한 비베카난다(Vivekananda, 1863-1902)였으며, 그의 사상 역시 『바가바드기타』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말해서, 현대 힌두교를 만든 것은 바로 『바가바드기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393쪽, 해설]

- 길희성 역주,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10)

가장 평이 좋은 길희성 역주 바가바드기타를 읽고, 부산대학교 박효엽 교수가 (당시는 교수가 아니었지만) 쓴 『불온한 신화 읽기』를 읽으니, 현대 힌두교가 지니는 여러 맥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힌두교는 본래부터 다신교에 어떤 종파가 지배하고 있지도 못했다. 일종의 토착 민간 신앙 차원에서 발전이 멈춰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인도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19세기에 '재발명'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약성경마냥 바가바드기타의 지위가 급상승하였고, 크리슈나는 '크라이스트'의 지위에 올랐다.

문제는 카스트 제도. 그 전까지도 인도를 관습적으로 묶어놓던 카스트 제도는 바가바드기타 역시 열렬하게 옹호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약성경과 달리 바가바드기타는 '보편 해방의 경전'이 되지 못했다(그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힌두교 신학자 혹은 신도들도 상당히 많은 듯하지만). 결국 카스트 제도는 인도가 '현대화' 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확고한 종교적, 이론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는 소리.

박효엽의 <불온한 신화 읽기>는 특히 이 지점을 충분한 분량을 동원하여 잘 언급하고 있다(제3장 "『기타』가 폭력을 옹호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바가바드기타』는 인간의 보편적 인식과 윤리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무사 계급'의 특수한 의무를 앞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 경우 힌두 신화 체계에 강하게 의존하지 않는 한 다수에게 설득력을 지니는 도덕 철학 체계를 이루기가 어렵다.

한국은 '의무'라는 개념이 아예 실종된 사회다. 특히 군복무와 관련된 논의를 보고 있노라면, '국방의 의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한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와 같이 의무 개념을 해석하며, 특수 의무를 보편 의무보다 절대적으로 앞세우면,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는 끔찍한 차별과 배제의 구렁텅이가 되고 만다. 『바가바드기타』를 비롯한 인도 철학을 애호하는 서구의 리버럴 엘리트, 서구 리버럴 엘리트를 흉내내는 한국의 식자층들은, 은연중 자신을 브라만 계급에 대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2022-05-14

금배지 방패 삼아 숨지 못하게... 나라의 주인들이 회초리 들어야

금배지 방패 삼아 숨지 못하게... 나라의 주인들이 회초리 들어야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성경 속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대한민국 최악의 대리인들

옛날에 어떤 부자가 있었다. 부자는 집사를 두고 살림을 맡겼다. 그런데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부자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집사를 불러 해고하겠노라고 통보했다. 당장 쫓겨나게 생긴 집사는 고민에 빠졌다. 다른 곳에서 집사 노릇을 할 수도 없게 된 처지에, 험한 육체노동을 해서 입에 풀칠을 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했다. 주인댁 바깥에서 자신을 반겨줄 사람들을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렀다. 그러고는 기름 백 항아리는 쉰 항아리로, 밀 백 섬은 여든 섬으로 깎아주었다. 낭비를 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생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도리어 더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그러자 주인은 집사를 불렀다.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이야기다. 옛날 말로 집사를 청지기라고 한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비유가 그렇지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특히 혼란스럽다. 논란의 여지도 많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주인에게 다른 사람들이 진 빚을 제 맘대로 깎아주고는 도리어 칭찬을 듣는다는 말인가? 성경에는 저 집사 혹은 청지기가 의롭지 못하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예수는 나무라지 않는 걸까?

세속의 학문을 통해 성경의 비유를 이해해 보자. 1976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젠슨과 로체스터 대학교의 윌리엄 메클링은 본인-대리인 문제, 혹은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를 제시했다. 일을 맡기는 사람과 맡아서 하는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경영학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다. 계약을 맺어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일을 시켜야 한다. 일을 맡긴 사람이 일의 주인이다. 하지만 일을 더 잘 아는 것은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 즉 대리인이다. 주인보다 대리인이 정보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주인에게 불리하고 대리인에게 유리한 정보 비대칭이 발생하게 된다는 뜻이다.

남에게 일을 맡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24시간 감시하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주인은 대리인이 자신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100% 확신할 수 없다. 대리인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아닌지, 심지어 대리인이 유능한지 여부마저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다. 업무 파악, 지시, 평가 등에 있어서 대리인은 주인보다 늘 우위를 차지한다.

주인-대리인 문제는 고용 관계, 업무상 계약 관계를 넘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엄마가 심부름을 보내면 아이는 그 돈으로 과자를 사 먹고 싶어진다. 선거철만 되면 굽실거리는 정치인들은 투표 다음 날부터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든다. 다수의 선량한 사람은 양심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주인-대리인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요즘 우리 사회는 대리인 문제로 홍역을 앓는 중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온갖 사건들만 놓고 봐도 그렇다. 오스템임플란트에서 2000억원, 우리은행에서 600억원, 돈이 돈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액수의 횡령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아직 수사 중인 사안이지만 밝혀진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이는 전형적인 대리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영진이 제대로 감시할 수 없거나 감시하지 않는 틈을 타, 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털고 있는 것이다.

온 나라에 대리인 문제가 심각해진 이유는 분명하다. 윗물이 썩었기 때문에 아랫물이 혼탁해진 것이다. 지난 5년, 문재인 정권이 벌인 일을 되짚어 보자. 세계로 수출되는 우리 원전 산업을 누구 한 사람의 고집으로 발목 잡고 주저앉히더니, 멀쩡한 숲을 밀고 중국산 태양광 패널을 도배했다. 우량 기업이던 한국전력을 빚더미에 올려놓고, 지방대가 문을 닫는 이 시점에 한전공대를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마음껏 낭비하고 그 청구서를 주인에게 넘긴 채 떠나버리는 최악의 대리인이다.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재개발 사업에서 건설 회사는 최대한 많은 이익을 남기려 한다. 정부의 역할은 그런 사적 이익의 추구를 적절히 통제하고 공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재명의 성남시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공공 개발을 막고 영리 개발을 허용하며 그 이익을 소수가 독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었다. 성남 시민과 대장동 입주민들의 대리인이어야 할 이재명은, 화천대유 일당 중 한 사람인 변호사 남욱의 말을 빌리자면, ‘4천억원짜리 도둑질’의 현장에서 시장 직인을 찍어주고 있었다.

대리인 문제를 원천 봉쇄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문제가 불거졌을 때 행동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주인이 고삐를 다잡는 것이다. 스스로 나서서 대리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야 한다. 주인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 벌어졌을 때, 확실히 적발하고 따끔하게 혼을 내야 대리인 문제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으로 돌아가 보자. 주인은 집사가 자기 재산으로 폭리를 취하는 대신 다른 이들에게 베풀기를 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집사가 돈놀이를 하고 낭비하는 것은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사람들이 진 큰 빚을 깎아준 것은 어여삐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온 세상의 주인인 예수는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향해, 물질적 손해를 보더라도 영혼의 풍요를 얻으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이재명은 대장동을 알았다면 공범이고 몰랐다면 무능이다. 어떤 면에서건 심각한 주인-대리인 문제다. 실패한 정치인, 행정가로서 자숙하며 수사에 협조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대선에서 패배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연고도 없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고 있다. ‘윤석열이 대장동 몸통’이라는 기상천외한 레퍼토리를 다시 꺼내든 것은 물론이다. 현실의 대리인 문제는 성경 말씀처럼 선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국회의원 금배지를 방패 삼아 숨지 못하도록,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단호하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