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31

Five Years - Brian Molko(of Placebo, David Bowie - cover)



Pushing thru the market square, so many mothers sighing
News had just come over, we had five years left to cry in
News guy wept and told us, earth was really dying
Cried so much his face was wet, then I knew he was not lying
I heard telephones, opera house, favourite melodies
I saw boys, toys electric irons and T.V.'s
My brain hurt like a warehouse, it had no room to spare
I had to cram so many things to store everything in there
And all the fat-skinny people, and all the tall-short people
And all the nobody people, and all the somebody people
I never thought I'd need so many people

A girl my age went off her head, hit some tiny children
If the black hadn't a-pulled her off, I think she would have killed them
A soldier with a broken arm, fixed his stare to the wheels of a Cadillac
A cop knelt and kissed the feet of a priest, and a queer threw up at the sight of that

I think I saw you in an ice-cream parlour, drinking milk shakes cold and long
Smiling and waving and looking so fine, don't think
you knew you were in this song
And it was cold and it rained so I felt like an actor
And I thought of Ma and I wanted to get back there
Your face, your race, the way that you talk
I kiss you, you're beautiful, I want you to walk

We've got five years, stuck on my eyes
Five years, what a surprise
We've got five years, my brain hurts a lot
Five years, that's all we've got
We've got five years, what a surprise
Five years, stuck on my eyes
We've got five years, my brain hurts a lot
Five years, that's all we've got
We've got five years, stuck on my eyes
Five years, what a surprise
We've got five years, my brain hurts a lot
Five years, that's all we've got
We've got five years, what a surprise
We've got five years, stuck on my eyes
We've got five years, my brain hurts a lot
Five years, that's all we've got
Five years
Five years
Five years
Five years

2007-03-30

폴 크루그먼: 이미지 너머 실체

폴 크루그먼: 이미지 너머 실체


-뉴욕 타임즈, 2007년 2월 26일

육년 전 고위 공직을 맡기에는 지적 능력과 정서적 절제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던 한 남자가 어찌어찌 해서 결국 이 나라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게 어떻게 벌어진 일일까? 첫째, 그는 일찌감치 큰 돈을 묶어둠으로써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를 고등학교 인기 투표처럼 다룬 상당수의 뉴스 매체에 의해 열정적으로 고무된 여론에 따라, 그는 백악관의 나비 날개와 천공밥1) 안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성공적이지 못했던 후보가 그의 옷차림새와 식상함에 대한 끈덕진 앵무새 소리의 표적이 되어 있는 동안, 성공적이었던 후보는 그가 같이 빈둥거릴만한 재미있는 친구로 보인다는 이유로, 그의 정책 제안에 대한 복잡한 수학 문제를 무사통과 하는 것과 더불어, 솜방망이 심사를 받았다.

오늘날, 대통령의 실책 덕에 사망한 수천의 미국인과 수만의 이라크인 앞에서, 알카에다의 재부흥과 파열중인 아프가니스탄 앞에서, 당신은 우리가 뭔가 교훈을 얻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기 징후들은 고무적이지 않다.

"대통령 선거는 큰 규모의 고등학교 투표에요, 당연하죠,"라고 지난달 뉴스위크의 하워드 파인맨은 선언했다. 오, 이런 맙소사. 그러나 파인맨 씨에게 공정하도록 덧붙인다면, 그는 힐러리와 오바마 사이의 거의 내용 없는 경쟁 구도, 현 시점에서 누가 더 유명인이며 굵직한 기부자를 묶어놓을 수 있느냐에 관한 투쟁인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이미 충분하다. 이 선거는 정책 선거가 되게 하자. 대선 후보들에게 이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그들의 제안을 설명하게 하고,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들을 판단하자.

나는 반박 논리를 알고 있다. 당신은 대통령이 마주칠 도전이 무엇이 될지를 미리 말할 수 없기에, 정책적인 세부사항이 아닌, 그 사람에 대해 투표해야 한다고. 하지만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공적 이미지는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딕 체니가 진중해 보이던 때를 기억하는지? 그들이 어려운 정치적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정치인을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이다.

하여 여기 민주당 지지자들을 위한 몇 개의 질문이 있다(공화당에 대해서는 다른 시간에 말하기로 하겠다).

첫째, 건강 보험 위기에 대해 그들이 제안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나가는 모든 민주당 후보들은 그들이 일반 적용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오직 존 에드워드만이 구체적인 제안을 들고 왔다. 그 외에는 그저 광범위한 일반론--오바마 씨의 경우, 환상적으로 향상시키겠다는 일반론--을 실체 없이 제시했을 뿐이다.

둘째, 예산 축소에 대해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무엇인가? 민주당 내에서는 예상 강경파, 즉 클린턴 시절의 경기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지적하는 사람들과, 공화당원들이 빌 클린턴이 어렵게 이루어낸 흑자를 부자들을 위한 감세와 물색없는 전쟁을 위해 탕진하였는지를 지적하며, 일반 건강 보험같은 다른 분야에 예산 절감보다 더 높은 우선 순위를 둘 수 있다는 사람들 사이의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에드워드 씨는 반 예산 강경파의 편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클린턴 여사와 오바마 씨는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나는 아는 바 없다.

셋째, 세금에 대하여 후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부시의 감세안 중 많은 수가 2010년에 시효만기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그것들이 연장되어야 할까? 그리고 역 최소세, 무언가 마련되기도 전에 수천만의 미국 중산층을 강타할 그것에 대해 후보들이 제안하는 것은 무엇인가?

넷째, 후보자들은 부시 행정부가 파놓은 구덩이에서 어떻게 미국의 입지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인가? 모든 민주당 측 사람들은 크건 작건 이라크에서의 철수에 호의적인 것 같다. 하지만 파키스탄의 알카에다 은신처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이 뭐라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만약 레임덕 정권이 이란에 폭격을 시작하면 그들은 무엇을 할까?

이념적 리트머스 시험지를 제공하는 것은 이 질문들의 핵심이 아니다. 요점은, 대신, 후보자들의 판단력, 진지함, 그리고 용기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대답하느냐가 대답하는 내용만큼 중요하다.

비록 오늘 칼럼이 민주당에 집중하고 있더라도, 공화당 후보들이 이 굴레를 벗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해야겠다. 특히, 누군가는 루디 줄리아니, 공화당의 선발 주자가 된 듯한 그가, 자신이 9/11 당시 한 일에 독점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지난 육년간 우리는 뭉칫돈을 뒤에 챙겨두고 있어서 후보로 선출되고, 카메라 앞에 잘 서서 대통령으로 당선(비슷하게)된 어떤 대통령에 의해 저질러진 피해를 목격해왔다. 우리는 다음 대통령을 이미지가 아닌 실체의 원칙에 입각해 골라야 한다.

07. 3. 1. 초벌 번역
07. 3. 29. 번역 검수

1) 나비 모양으로 복잡하게 생긴 투표 용지와, 천공밥이 떨어졌는지 안 떨어졌는지를 놓고 재검표 소송이 벌어졌던 미 대선 상황에 대한 언급. 내 능력으로는 이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을 수가 없었음.


* The original text

Paul Krugman: Substance Over Image


--The New York Times, February 26, 2007

Six years ago a man unsuited both by intellect and by temperament for high office somehow ended up running the country.

How did that happen? First, he got the Republican nomination by locking up the big money early.

Then, he got within chad-and-butterfly range of the White House because the public, enthusiastically encouraged by many in the news media, treated the presidential election like a high school popularity contest. The successful candidate received kid-gloves treatment — and a free pass on the fuzzy math of his policy proposals — because he seemed like a fun guy to hang out with, while the unsuccessful candidate was subjected to sniggering mockery over his clothing and his mannerisms.

Today, with thousands of Americans and tens of thousands of Iraqis dead thanks to presidential folly, with Al Qaeda resurgent and Afghanistan on the brink, you'd think we would have learned a lesson. But the early signs aren't encouraging.

"Presidential elections are high school writ large, of course," declared Newsweek's Howard Fineman last month. Oh, my goodness. But in fairness to Mr. Fineman, he was talking about the almost content-free rivalry between Hillary Clinton and Barack Obama — a rivalry that, at this point, is mainly a struggle over who's the bigger celebrity and gets to lock up the big donors.

Enough already. Let's make this election about the issues. Let's demand that presidential candidates explain what they propose doing about the real problems facing the nation, and judge them by how they respond.

I know the counterargument: you can't tell in advance what challenges a president may face, so you should vote for the person, not the policy details. But how do you judge the person? Public images can be deeply misleading: remember when Dick Cheney had gravitas? The best way to judge politicians is by how they respond to hard policy questions.

So here are some questions for the Democratic hopefuls. (I'll talk about the Republicans another time.)

First, what do they propose doing about the health care crisis? All the leading Democratic candidates say they're for universal care, but only John Edwards has come out with a specific proposal. The others have offered only vague generalities — wonderfully uplifting generalities, in Mr. Obama's case — with no real substance.

Second, what do they propose doing about the budget deficit? There's a serious debate within the Democratic Party between deficit hawks, who point out how well the economy did in the Clinton years, and those who, having watched Republicans squander Bill Clinton's hard-won surplus on tax cuts for the wealthy and a feckless war, would give other things — such as universal health care — higher priority than deficit reduction.

Mr. Edwards has come down on the anti-hawk side. But which side are Mrs. Clinton and Mr. Obama on? I have no idea.

Third, what will candidates do about taxes? Many of the Bush tax cuts are scheduled to expire at the end of 2010. Should they be extended, in whole or in part? And what do candidates propose doing about the alternative minimum tax, which will hit tens of millions of middle-class Americans unless something is done?

Fourth, how do the candidates propose getting America's position in the world out of the hole the Bush administration has dug? All the Democrats seem to be more or less in favor of withdrawing from Iraq. But what do they think we should do about Al Qaeda's sanctuary in Pakistan? And what will they do if the lame-duck administration starts bombing Iran?

The point of these questions isn't to pose an ideological litmus test. The point is, instead, to gauge candidates' judgment, seriousness and courage. How they answer is as important as what they answer.

I should also say that although today's column focuses on the Democrats, Republican candidates shouldn't be let off the hook. In particular, someone needs to make Rudy Giuliani, who seems to have become the Republican front-runner, stop running exclusively on what he did on 9/11.

Over the last six years we've witnessed the damage done by a president nominated because he had the big bucks behind him, and elected (sort of) because he came across well on camera. We need to pick the next president on the basis of substance, not image.


우리는 같은 기준을 한국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 명패 한번 화끈하게 던졌다고, 남들이 차마 입 밖에 내지 않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고 대통령이 된 한 사나이가 저지르고 있는 패악을 우리는 겪었고 또 앞으로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니 2007년 대선 후보들은, 말하자면 '정책적 인물론'에 의해 선별되어야 하고, 그 기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과연 대선 후보들은 건강 보험 예산 파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더불어 공무원 연금 개혁에 대해서는 어떤 구상을 가지고 있는가? 대충 좋은 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면서도 가장 국민의 생활과 밀접한 영향을 맺고 있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바로 이 질문을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둘째, 한미 FTA 자체에 대해, 혹은 그것이 불러일으키고 있을 파장에 대해 어떤 대처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가? 민주노동당의 모든 후보들과 김근태, 천정배는 확실한 대립각을 세운 상태다. FTA에 찬성하는 이들에게 이유를 묻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한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슬기롭게' 해결하자는 식의 답변을 하는 사람을 진지한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는 말자.

셋째, 햇볕정책의 기조를 유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건 대선 상황에서 대북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상황이 좋으면 그냥 좋은 소리로 넘어가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답형 선택지가 아닌 논술형 대답을 요구해야 하며, 햇볕정책을 유지하거나 폐기하려 하는 이유에 대해 캐물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내수 경기를 어떻게 부흥시킬까요?' 따위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747 독트린이라느니 뭐니 하는 거짓 구호에 놀아나는 첩경일 뿐, 그 어떤 실체적인 검증 효과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경제적 구조 모순은 결국 부동산 거품 붕괴나 건강보험 재정 파탄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큰데, 부동산의 경우 자기 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서민층의 욕망의 안개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감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을 번쩍 차릴 수밖에 없는 주제를 던져놓은 후, 그 후보자가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안티조선이라는 시민사회 운동마저도 한 사람의 정치인을 위한 구호로 전락하게 되었던 지난 날의 전례를 생각해볼 때, 역사적 대의로서의 함의를 띄는 테마들보다는, 국민들의 생활에 직결되는 구체적인 주제들을 우선적으로 물고 늘어져야 한다. 차차기 대선에서는 고즈넉한 마음으로 미국 대선을 관전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정말 잘 뽑아야 할 것이다.

올해 외시 떨어졌어염

제기랄 ㅠㅠ

자자 진정하고 침착하게 생각을 해봅시다...

내가 2007년 외무고시 1차 시험에서 떨어지게 된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PSAT를 너무 우습게 봐서, 아예 준비도 안 하고 있다가 시험 약 세 주 전부터 하루에 길어야 30분 정도 문제집을 깨작거린 게 전부이다. 그것도 언어논리, 자료해석, 상황판단 중 자료해석만 준비했다. 언어는 껌이고, 상황판단은 상황을 잘 판단하면 되겠지, 뭐 이따위 마인드였던 것. 결과는? 80점은 나오리라고 기대했던 언어가 70, 모의고사에서 60점대였던 자료해석이 쑥 올라서 70, 단 가채점 기준으로, 그리고 아무 대비를 하지 않았던 상황판단이 50점. 그리하여 평균은 63.33이었고 절망감에 빠진 나는 의정부에서 외박 나온 친구가 잡아놓은 여관방에서 라면 끓여놓고 소주 먹으며 밤새 발광을 했다.

여기서 커트라인이 한 65점 정도로 나왔더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텐데, 문제는 발표된 합격선이 바로 63.33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나의 실제 점수는 60.83. 자료해석에서 세 문제를 추가로 틀렸다. 오늘 아침 중앙인사위원회에서 친절하게도 문자로 가르쳐주길래, 대체 왜 그런지 곰곰히 생각을 해봤는데, 아마 38에서 40번까지 세 문제의 답이 시험지 위에서와 답안지 위의 마킹에서 서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난 그것들을 풀긴 풀었지만 확신할 수 없었고, 그래서 별표를 쳐놨는데, 마지막에 마킹을 하면서 그냥 3번으로 주르륵 줄 세워버린 것이다. 하지만 시험지에서는 바꾸지 않았고, 가채점을 하면서는 내가 다른 답을 찍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려서, 내 평균이 63.33이라는 잘못된 정보 하에 올 한달을 기다리며 보냈다.

시험을 우습게 보고 특정 과목만 공부했다는 것부터가 떨어져 마땅한 짓거리이다. 그리고 나는 시험장에서, 풀어놓고도 나 자신의 선택을 믿지 못해 어설픈 찍기를 감행하고 말았다. 최초의 선택을 따랐더라면 아슬아슬하게, 혹은 언어에서 바꿔서 틀린 문제도 맞았을 테니 두어 문제 여유롭게 붙었을 것이다. 아, 이런 식으로 가정법을 자꾸 떠올리는 건, 결국 이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핵심은 내가 아예 대비를 안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시험을 같잖게 봤다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떨어지자 나름대로 충격을 받아서, 술 마시러 나오라는 한윤형의 전화를 뿌리치고 '발리에서 생긴 일'을 보다가 분노의 라면까지 끓여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발 공부 좀 하자.

2007-03-26

눈물 없이는 차마 읽을 수 없는 기사

방황하는 대학새내기들…대학 부적응 ‘폐인족’ 많다
입력: 2007년 03월 25일 18:34:37

서울 소재 사립대 법학계열인 07학번 김지훈군(19·가명)은 최근 한달간 수업에 들어간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다. 김군은 온라인게임에 빠져 있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 눈을 뜨면 이미 오후다. 오전 수업은 물론 오후 수업까지 미적대다 못 들어간다.

자취방에서 나와 간단하게 식사를 한 뒤 다시 간 곳은 PC방. 라면을 시켜먹고 게임에 몰두하다보면 어느새 새벽이 다가온다.



지방출신인 김군은 친구가 없다. 입학동기생은 100명이 넘지만 이름을 기억하는 친구는 많지 않다. 고교 친구들은 대부분 재수 중이다. 동문회에도 나가봤지만 선배들의 술 강요가 싫었다. 그나마 알게 된 동기생들에게 말을 붙이는 것도 쉽지 않다. 캠퍼스는 삭막했다. 지옥같은 고3이 끝나고 낭만적인 대학생활이 시작되리라 기대했지만 대학은 ‘고3의 또다른 연장’이었다. 동기들 중 상당수는 벌써 도서관에서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도 영어학원이다, 어학연수다, 자기계발이다 하면서 바쁘게 생활해 얼굴 보기도 쉽지 않다.

김군은 한달 뒤에 있을 중간고사를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답답하다. 이렇게 아무 준비없이 시험을 치른 적이 없어 더 불안하지만 대책이 없다. 인생 경쟁에서 뒤처진 ‘낙오자’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김군은 “탈출구가 필요한데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괴로움을 호소했다.

대학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새내기들이 늘고 있다. 시키는 대로 공부하던 생활에 길들어져 있던 학생들이 대학 진학 후 순간적으로 목표를 상실하거나 가치관에 혼란을 겪으면서 생기는 이른바 ‘새내기 증후군’이다.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학생들의 경우 무기력증에 빠져 일상생활이 엉망이 되거나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과거에는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과 조언으로 이를 극복했지만 요즘엔 캠퍼스가 ‘취업도서관화’되면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게 현실이다.

‘폐인족’ 만큼이나 ‘나홀로 공부족’ 역시 새내기 증후군에 노출돼 있다. 박은정양(19·가명)도 수업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서’ 보낸다. 오전 수업을 마치면 교내식당에서 간단하게 혼자 점심을 먹은 뒤 곧장 도서관으로 간다. 오후 수업이 없는 날은 하루종일 도서관에만 머물 때도 많다. 박양은 신입생환영회나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동기들을 보면서 내성적인 성격을 탓해보기도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박양은 “고3때는 대학 합격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입학하고 나니 막막하고 힘들다”며 “요즘은 혼자 우는 일도 부쩍 늘었다”고 털어놨다.

대학들도 새내기의 방황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보고 대책마련에 부심 중이다.

서울대는 2007학년도 신입생 전체를 대상으로 다면적인성검사(MMPI)를 실시했다. 이중 우려할 만한 심리상태를 보인 신입생 40여명에 대한 장기심리상담을 진행 중이다.

대학생활문화원 김명언 원장(심리학과)은 “입시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생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라며 “이런 증상을 방치하면 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되며 심할 경우 자살에 이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원장은 “상담실이나 주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대학생활의 목표를 무엇으로 정할 것인지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호준기자 hjlee@kyunghyang.com〉

2007-03-23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

저 어법은 일본어의 직역으로 추정된다. 한자를 그대로 쓰고, 그것을 음으로 읽느냐 뜻으로 읽느냐에 따라 뉘앙스라던가 의미가 갈리는 일본어에서라면, 어떤 단어를 표기해놓고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짚는 것과 다른 방식을 택한다는 식의 유머가 성립할 수 있다. 일본어를 못하므로 한국어로 비슷한 예를 만들어보자. 일본인들은 '빛'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光이라고 써놓고 '히카리'라고 읽는다. 그러한 맥락이 전제되어 있다면, '光이라고 쓰고 광 이라고 읽는다' 같은 소리를 할 수도 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友情'을 써놓고 '우정' 대신 '사랑'이라고 읽는 것도 유머 차원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훈독의 일종이라고 우기면 그만이니까.

일본 통신어투가 그대로 번역되어 들어오는 케이스를 몇 개 더 본 것 같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많이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방금 떠오른 것은 '...에 찬성하는 1人' 이라는 식의 리플들.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 무엇의 번역이라고 지적하기는 곤란하지만, 이 독특한 질감은 분명히 그쪽에서 나온 것이고 한국어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영어 단어를 섞어서 쓰는 것보다, 한국어의 순수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어구 자체를 차용하는 화법이 그 순수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문법적 유사성으로 인해, 또 두 글자 짜리 한자어의 용례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에, 일본어와 한국어의 거리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한국어는 이오덕이 꿈꿨던 그 무엇과는 다른 것으로 변모하게 된다. 나는 그의 이상에 동의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러한 변화 앞에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 다만, 한국어를 잘 사용하고 다듬어내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나름대로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직 영어로부터의 혹은 미국으로부터의 영향만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구심이 들 뿐이다. 그런 치들을 지칭할 때, 나는 '우리말 지킴이'라고 쓰고 '바보들'이라고 읽는다.

얘들아 봄됐다 모차르트 듣자








모차르트 바순 협주곡인데 어느 악단인지는 알 길이 없다는...

개인적으로는 1악장 도입부가 짤린게 참 아깝다는... C장조니까 리코더라도 있으면 따라서 불어보고 싶지만 손에 악기가 하나도 없다는... 봄이 오니까 덕후 말투도 한번 써보고 싶었다는...

p. s. 검색해보니 C장조가 아닌 B플랫 장조라는... 그러면 음악을 찔끔 배우고 만 나로서는 알아먹을 길이 없다는... (아 덕후놀이 재미없다)

Art of Fugue #9

2007-03-22

플라톤 식 우기기의 한 사례

"Now behind this parapet imagine persons carrying along various artificial objects, including figures of men and animals in wood or stone or other materials, which project above the parapet. Naturally, some of these persons will be talking, others silent.

It is a strange pictuer, he said, and a strange sort of prisoners.

Like ourselves, I replied; . . . "(515a, 228p.)

-- F. M. Cornford (tr.), [[The Republic of Plato]]


"이제 이 장막 뒤에서 다양한 인공물을, 나무나 돌이나 다른 물질로 만들어져서 그 장막 너머로 투사될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운반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보게. 자연스럽게, 이 사람들 중 일부는 말을 할 테고, 나머지는 조용하겠지.

거 참 이상한 광경이고, 그가 말했네, 또 이상한 종류의 죄수들이네요.

우리들처럼 말이지, 나는 대답했고; . . ."


전체적인 비유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들처럼 말이지"라는 저 눙치기가 꼭 부당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아테네에서 재판을 받고 사약을 마셔야 했던 소크라테스를 연상하고 있으니만큼,우리 모두가 저 죄수들이라는 그의 말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글라우콘의 정당한 의심을 한 방에 깔아뭉개버리는 이 '대화'를 보고 있노라면, 플라톤의 철인군주론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플라톤이 말하는 그런 철학자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2007-03-21

비트겐슈타인, "윤리학에 대한 강의", [[소품집]]

그런데 이런 주장이 저에 반대하여 강력히 제기될 때, 저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즉시 명료하게 봅니다 -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기술도 제가 절대적 가치로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기에 좋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혹시 제안할 수 있을지 모르는 모든 유의미한 기술을 그것의 유의미성을 이유로 처음부터 제가 물리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즉, 저는 이제 이 무의미한 표현들은 제가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기를 원한 것은 그저 세계를 넘어서는 것, 즉 유의미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입니다. 윤리학이 삶의 궁극적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 가치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한, 윤리학은 과학일 수 없습니다. 윤리학이 말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도 우리의 지식을 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한 경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어도 그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36쪽)


밑줄 강조는 인용자, 굵은 글씨는 원문에 따름.

2007-03-15

강유원 게시판의 비극

최근 몇 차례의 삭제와 글쓰기 금지 파동을 겪으며 급격하게 찌질해진 강유원 게시판의 분위기는, 그 운영자가 선택한 삶의 방향으로 인해 어쩌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 밖에 없었던 현상이었을지 모른다. 짧은 문장들로 추려서 말하자면,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의 카리스마가 예전같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쇠락의 냄새를 맡은 몇몇 파리들이 꼬여들어 그러한 문제가 불거졌다는 뜻이다. 파리라는 말이 개인적으로는 심할 수도 있지만, 자기만의 '철학'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치들을 따로 불러줄 말이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용어를 정정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강유원 게시판은 예전같지 않고, 그 배경에는 운영자의 카리스마 쇠퇴가 가장 큰 이유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나는 기억한다). 어설프게 '나만의 철학'을 풀어놓으려는 자들에게 강유원은 자신있는 어조로 '공부가 안 되었군,' 이라고 운을 뗄 수 있었고, 그러면 그의 동료들이 나서서 '이러저러한 책들을 먼저 읽어봐라'라고 마무리를 해줬다. 말하자면 그가 어떤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는 뜻인데,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점은 대체 왜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권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이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진실로 그렇다. 강의와 인세 수입(이라는 게 있다면)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지금, 그는 굳이 밤잠을 쪼개가며 책을 읽을 필요 없이, 하루를 온전히 투자하여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할 수 있다. 책을 들여다보는 양과 가르치는 내용의 질이 정비례까지는 아니어도 대충 비슷하게 따라간다고 가정하면, 그가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또한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풍성해져야 마땅하며, 그러한 변화는 대중에게 철학을 강의하는 그의 '선생'으로서의 입지를 강화시켜야 마땅한 것 아닌가? 헌데 상황은 그 반대다. '회사원 철학자'라는 수식어에서 '회사원'이라는 명사 하나가 떨어져나간 순간, 강유원의 아우라 중 매우 중요하고 커다란 것이 함께 사라져버렸다.

강유원이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은, 그가 기존 '학계'의 논리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 금전적으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뜻했고, 그리하여 그는 '독립된 지식인'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이러한 셈법이 부당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중요한 미덕이며,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택하지 않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기 위해 그가 벌였던 숱한 고행의 의의를 폄하할 생각도 전혀 없다. 다만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회사원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그가 누리고 있던 특수한 아우리가 과연 그 자체로서 한국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볼 때 합당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돈을 받으며 연구하는 것, 꾸준히 논문을 써 내고 동시대의 학자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것, 아카데미즘의 본질이라면 본질을 구성하는 이러한 요소들을 폄하하는 것이 '회사원 강박사'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그는 보란듯이 철학과 무관한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해왔다. 간단하게 줄여 말하자면 일종의 '은둔고수' 같은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회사에 다님으로써 그는 아직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직장인들의 호감을 사는데도 성공했다. 사람은 자신이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일, 다시 말해 질투를 하기에는 너무 어렵거나 그럴 가치가 없어보이는 일을 하는 누군가를 봤을 때에는, 대체로 사심 없는 칭찬을 보내는 법이다. 이 두가지 맥락이 맞물려 강유원은 나름대로 (책을 사서 읽는) 대중들 사이에서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요점은 그가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아니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도 학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대중들에게는 감동이었고 카리스마였고 '포스'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분위기 자체가 정당한 것일까? 내가 추측하는 바와 같이, 강유원의 책을 구매하던 대중들이 '회사원 철학자'의 이미지를 먼저 소비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철학자가 어떤 아이콘으로 자리잡는 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지만, 과연 그 '회사원 철학자'라는 딱지는 정당한 것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되물어질 될 수 있다. 과연 철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은둔고수'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들끼리 '빨아주는' 논문을 쓰는 대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헤겔 원문만을 파고 있다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강유원이 '내가 공부하는 방법'에서 제시하고 이후 자신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간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에는, 이렇듯 무협지의 내적 논리가 진하게 묻어나있다. 강호 잡사에 물들지 않고 오직 무공 한 길에만 정진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호탕한 웃음 한 번 짓고 스러질 수 있다는, 일종의 자뻑이며 자학인 그런 종류의 존재미학.

다른 부분을 다 접어두더라도, 그런 방식은 근대 학문의 기본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과학이건 철학이건, 그 학문이 대상으로 삼는 데이터(박홍규 식으로 말하자면)에 대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언하는 것이 근대 학문의 정신이라면, 공부하는 이는 마땅히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그들과 소통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강유원은 학계에서 떨어져나간 후 홀로 외로이 헤겔을 읽는 길을 택함으로써, '뭔가 센 놈'과 독고다이를 뜨고 싶다는 자신의 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켰을지언정, '공부'를 하고 싶다는 더욱 근원적인 바램은 접어두게 된 것이다.

결국 지금 나는 그가 하는 일이 '공부'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헤겔을 읽어도 토론을 할 수가 없고, 서평을 쓰면 '잘 봤습니다'라는 리플성 트랙백만이 달리는 현실. 강호에서 발을 빼면서 그는 시골 마을에서 검을 가르치며 독야청정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누구와도 시원한 칼부림을 주고받을 수는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무협지의 세계에서는 혼자 폭포수 옆에서 서른 여섯가지 자세를 잡고 운기조식을 하면 '내공'이 늘어나지만, 그런 일은 현실 속에서 가능하지 않다. 혼자 산 속에서 무공을 연마하던 '고수'들이, 다른 동료들과 투닥거리며 질펀하게 연습을 하던 '스포츠맨'들에게 줄줄이 얻어터지고 깨어져나갔다는 것은 이종격투기 'K-1'의 역사가 처절하게 증명하는 바와 같다.

아무튼 그가 화전을 일구고 있던 동안에는 '강호'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고, 그리하여 '은둔고수'의 품위도 유지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전업 지식인, 혹은 강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고, 즉 '나 철학자 아니야. 그저 책을 좋아하는 회사원일 뿐이지, 허허허'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포스를 잃어버리자, 여태까지는 범접하지도 못하고 있던 다른 '재야'들이 칼을 빼들고 기회를 노리며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품위가 있는, 적어도 '가오'를 잃어버리지 않는 법은 아는 사람이고, 그 게시판의 분위기를 사랑하는 다른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도 힘입어서, 강유원 게시판은 그럭저럭 책에 대해 물어보고 대학원 진학에 대해 상담하며 '철학 공부하면 먹고 살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그런 공간으로 남아있기는 하다.

그 균형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애초에 강유원이 설정하고 있던 모두스 비벤디가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둔고수'는 허구의 개념이며, 설령 그런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다면 이 자본주의 세상은 그런 인재를 반드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내고야 만다. 스타크래프트 연습생들은 모두 인터넷 고수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센 놈만이 남아서 프로가 되는 것이 그 바닥의 생리이듯이 말이다. 헌데 강유원은 그 길을 택했고,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상당한 수의 대중들이 그의 그러한 행보에 갈채와 찬사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강유원은, 자신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진정 인문학을 소비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어야 한다. 그들은 다만 현실 속에서 '은둔고수'가 현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던 뒤틀린 무협지 매니아였을 뿐이다. 헌데 그 이미지는 서사의 논리만을 따지고 보더라도 잘못된 것이어서, 그가 진정 '내공'을 쌓기에 적합한 처지가 되자 자체적인 모순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이야기의 대상은 결국 강유원 개인이었지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바는 그의 책과 홈페이지와 게시판에서 나온 것 뿐이기에, 글 제목을 '강유원 게시판의 비극'으로 하기로 한다.

2007-03-12

CNN 더빙 방송에 찬성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되고 싶어 환장한 컴플렉스 덩어리 한국인들이 미국님들의 시각이 이러저러하리라 추측하며 찍어내는 엉터리 국제 뉴스'가 판치는 국내 언론계에 큰 위기이자 활력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2007-03-09

'서민'들과 중산층의 동반 몰락 가능성 - 경향신문, 2007. 03. 09.

저소득 주택대출자 집값 급락땐 ‘직격탄’
입력: 2007년 03월 08일 18:08:40

앞으로 집값이 급락세를 보이면 월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의 저소득 가구가 다른 소득 계층에 비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8일 국민은행 연구소의 ‘2006 주택금융실태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저소득 가구 가운데 월 소득 대비 주택구입자금 대출 상환액 비율(PTI)이 40%를 넘는 가구는 전체의 53.5%로 나타났다. 이는 월평균 150만원을 벌어 60만원 이상을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갚는 데 쓰는 가구가 절반을 넘었다는 뜻이다.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인 가구 중에서 PTI가 40%를 넘는 비율은 2002년 15.7%에 불과했으나 2003년 19.0%에서 2005년 39.5%로 높아지는 등 매년 급등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조사 기준일(지난해 10월13일) 이후 주택담보대출 기준금리인 양도성 예금증서(CD) 금리가 연 4.57%에서 4.96%로 0.39%포인트 오른 것을 감안할 때 저소득 가구 부채상환 부담은 가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은행 연구소 관계자는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가구는 다른 소득계층에 비해 PTI 40%를 넘어선 가구의 비율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집값 하락으로 담보가치가 떨어지거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추가로 상승하면 월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가구를 중심으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다른 소득계층에서는 PTI가 40%를 넘는 비중이 한 자릿수에 그쳤고, 연도별 증가폭도 크지 않았다.

미국·일본·영국 등에서는 연간소득 대비 부채상환비율을 나타내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을 35~40%로 규제하고 있다.

국내 시중은행들도 지난 2일부터 투기지역이나 수도권 투기과열지구에서 1억원 넘는 대출을 취급할 때 DTI 40%를 적용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김성화 은행감독국장은 “금융기관의 대출관행을 담보가치에서 대출자의 채무상환 능력 위주로 바꿔나가는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감독을 강화해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상주기자 sjlee@kyunghyang.com〉


-PTI-

최근 3년간 금융기관으로부터 주택구입자금을 빌린 가구의 월평균 소득 대비 상환액 비율. 주택담보대출 규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이 주택담보대출뿐 아니라 모든 부채를 포함한 개념인 반면 PTI는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액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이 기사에서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중산층을 지향하는 저소득 계층이 바로 서민인데, 따라서 그들은 노동계급으로서의 연대를 통한 사회복지를 누리지 못하며, 동시에 중산층이 보유하고 있는 자기 자산의 안정성 또한 확보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대체 월소득 150만원이 안 되면서 빚을 내어 집을 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철 없는 소리 함부로 한다고 욕 먹기 딱 좋지만, 정말이지 지금 당장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 중 일부 극성적인 치들은, 강남 집값을 얼음물 퍼붓듯이 냉각시키면 주택 매매가가 폭락하여 서민층이 내집마련을 하기에는 더 좋은 상황이 형성될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하곤 하는데, 참고로 저 말은 이론상으로는 옳은 소리이긴 하나, 그건 한국 '서민'들이 어떤 행동 패턴을 보이는지에 대한 관찰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내뱉는 소리에 불과하니 그저 무시해야 마땅할 터이다.)

2007-03-01

샤워실의 얼간이

통화주의자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거시경제적 효과를 노리는 정부의 경기부양 긴축 정책이 실제 효과를 거두려면 어느 정도의 시차를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샤워실에서 물을 틀면 처음에는 아무튼 찬 물이 나온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온도의 뜨거운 물이 나올때까지 한 발 물러서서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샤워실의 얼간이, 즉 정부는, 그 순간 '앗 차가워!' 라며 황급히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필요 이상으로 확 틀어버린다. 다음 순간 그 얼간이는 '으악 뜨거워!' 라며 뜨거운 물 벨브를 꽉 잠그고 얼른 찬물을 튼다. 정책이 실행되는 순간과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시점까지는 어느 정도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 효과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면 언제나 두 극단 사이에서 오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선거 기간을 맞추자는, 이른바 '4+4년제 원포인트' 개헌론은, 국민을 '샤워실의 얼간이'로 만들어버릴 공산이 크다.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오히려 대통령의 연임이 가능해지니 정책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 반박의 문제점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주기를 맞춰버리는 것이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많은 경우 선거는 일종의 분위기를 타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금 논의되는 '원포인트 개헌'이 이루어질 경우, 대체로 여당은 원내 제1당이 되고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내키는 대로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면, 여당이 정권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원내 제1당도 같은 해에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그러면 기존의 여당의 정책에 반대하던, 대립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강력한 레토릭을 구사하며 정 반대되는 정책을 입안하던 야당이 여당이 되고, 또 원내 제1당이 된다. 그렇게 집권하게 된 정당은 스스로의 입지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성과를 거둠으로써 4년 후 선거에서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을만한 정책에 자신들의 자원을 주로 할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4년제 원포인트 개헌을 하면, 그 순간부터 모든 정책은 4년 후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입안될 수밖에 없다. 극도로 근시안적이고 불안정한 정국이 반복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개헌론은 철저하게 정치 중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선거 한 방에 나라가 뒤흔들리고, 그런 일이 4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해보자. 당신이 선거의 맛에 중독된 사람이라면 이 제안을 매력적인 것으로 느낄 것이다. 4년에 한번씩 국가의 운명을 건 큰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즉, 노 대통령 지지자들이 말하는 식의 '참여'를 적어도 4년에 한번씩은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참여의 개념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 등은 모두 전혀 건강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주기가 짧아진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에 부합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없잖아 있겠지만, 국민의 정치 참여가 선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질수록, 선거 기간이 아닐 경우 국민들의 정치적 기본권은 백안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논의되는 '원포인트' 개헌론에 찬성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거철만 되면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빨리 대선 시기가 왔으면 하고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히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극도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번갈아 뒤집어써가며 스스로를 대상으로 하는 가학적인, 또 피학적인 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보자는 말이다. 자신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중독 치료의 시작이자 절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