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쓰여진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문구는 역설적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시사한다. 물론 예수는 그러한 역할을 거절한 채,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한다. 베드로는 첫 닭이 울기 전에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한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되살아난 스승이 자신들의 앞에 서도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되살아난 스승이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버린 후, 살아남은 자들이 한 줌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분투해야만 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 문학이다.
예수가 제시한 메시아는 세속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것은 새끼고양이의 뒷목을 잡아서 안전한 곳에 내려놓는 주인의 손길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의 모범이었고 견본이었으며 힘겹게 걸어야 할 좁은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자유로운 선택의 두려움, 불합리한 세계의 부조리 속에 내팽겨쳐져 있다는 사실은 성자의 구원 사업 이전에도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우리는 이제 하나의 대답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한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투사에게 자신의 정치적 바램을 투사하던 이들 중 일부는,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끝없이 이곳저곳 들이받고 있을 뿐인, 한낱 '투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절대악'을 상정하고 그것의 위의를 한없이 높임으로써,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고 그것을 정복하려 들기는 커녕, 자신들이 '상식'을 지키고 있는 성채로서 받아들여지기만을 갈구한다. 그들 중 일부가 문국현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메시아를 발견하여 그에게 '올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명박이 집권한 후 도래하게 될 암흑시대에 대한 공포를 조성하고, 온 국가가 토건 열풍에 휩싸임으로써 집값이 지금보다 더 높이 치솟아오를 것이라 경고하며, 따라서 그 자를 막을 수 있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절실하다는 것이 문국현 지지자들의 주된 논변이다. 요컨대 세상은 이미 말세로 치달았고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공세가 눈앞으로 다가와 있다. 여기까지 동의하고 나면 나머지 부분은 의외로 쉽다. 유한킴벌리가 얼마나 높은 생산성을 보유하고 있는지, IMF 때에도 단 한 명의 사원도 해고하지 않고 위기를 넘긴 유일한 기업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만 일하고 재교육을 받으며 사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 보라는 요구가 끝없이 이어진다.
정치적 메시아가 제시하는 비전은 결국 유한할 수밖에 없다. 정통신학은 악을 존재의 결여로 정의한다. 악은 그 자체로서 실체가 아니며 다만 선이 충실히 달성되고 있지 못한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노무현 당시에도 그랬고 문국현을 후보로 지지하고 있는 지금도 그러하다. 정치적 메시아를 희구하는 이들에게는 대한민국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밑그림이, 적그리스도가 불러올 지옥에 대한 반박으로서만 존재한다. 반면 그 후보가 가지고 있는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상식적인 시선'은 말 그대로 상식선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기에 노무현 지지자들은 노무현 개인에 대한 인성론에 그리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 현상은 문국현 지지자들에게서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기에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안타깝게도 후보 경선에서 탈락한 심상정이 그러하였던 것과 같이,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포함하고 있는 전반적인 정책을 공약의 형태로 이미 만들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국현은 4%의 잠재성장률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명박의 747 플랜에 맞서기 위한 레토릭을 갈고 닦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해주러 온 사람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에 하늘의 왕국을 지금 당장 건설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문구가 포함된, 아주 짤막한 기도문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이들의 시선을 오직 하늘로 향하게 하고, 그들에게 일찍 온 자건 늦게 온 자건 문을 두드리는 자는 모두 같은 상급을 받으리라는 것을 약속함으로써, 하늘을 상상하며 땅을 뒤엎을 수 있는 작은 힘을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메시아들은 언제나 하늘의 왕국이 아닌 지하의 지옥을 먼저 논하고,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믿고 따르라며 깃발을 흔든다. 우리는 그런 목소리에 이미 속았다. 두 번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 메시아를 희구하는 이들은 하나의 덩어리를 형성하여 한국 사회의 정치 구도가 이른바 '메시아적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황우석 사태, 심형래의 '디 워' 소동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한국인들은 언제나 대한민국이 피죽도 못 얻어먹는 거지 나라가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엄청난 외화를 벌어다 줌으로써 우리를 가난으로부터 구원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이 영웅주의가 아니겠느냐고 하지만, 거기에는 실패한 영웅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가 정치 지도자가 아니며 로마인들을 단박에 쫓아내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유대인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듯이, 황우석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그 수많은 이들 또한 매우 기민한 동작으로 손에 돌을 집어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광신도'라 불리면서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일부 '황빠'들이 대견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우리는 희생양을 만드는 일에 너무도 익숙하다. 한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메시아적 정치는, 정치적 메시아를 지향하는 수많은 후보자들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적 메시아들의 구원 사업은 실패를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모든 이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는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심지어는 현직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있는 이조차 그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그러한 희생양의 연쇄 구조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열열히 사랑하고 지지함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한 후, 자신들이 바라던 그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이중적인 심리구조가 극복되거나, 그러한 이들이 대세를 형성할 수 없게끔 하는 건전한 정치세력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않는 한, 정치적 메시아와 메시아적 정치의 연쇄고리는 쉽사리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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