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2-21

자기 아니면 우주

요컨대 민족국가의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해석돼온 친일이란 문제는 생활사라는 큰 틀 속으로 흡수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각적인 사고와 조명이 가능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동시에 국가 민족 표준어 등 근대의 큰 틀이 깨지면서 소설 역시 그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상상력을 보십시오. 그리고 일본 만화를 보세요. 자기, 아니면 우주입니다. 소설이 담당해왔던 중간항인 역사나 사회는 빠져있지요. ‘창공의 별’은 사라지고 아주 유치한 동물적 단계와 아주 높은 우주적 단계만 남아있습니다.”

김윤식, “향후 100년 문학의 화두는 ‘우포늪에서 우주 상상하기’”, 경향신문, 2008년 2월 21일, W2면


‘이 작가’란에는 젊은 소설가 김애란을 초대했다. 김애란은 첫 창작집『달려라, 아비』를 통해 한국 소설의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두번째 창작집 『침이 고인다』 역시 이 작가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의 소설이 새로운 서사적 밀도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규 사회의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동시대 젊은이들의 궁핍한 실존을 현실감 있게 드러내면서, 특유의 ‘우주지리학’을 펼쳐 보이는 이 작가의 문학적 기량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으로서의 김애란의 뜨거운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문학과사회』겨울호를 엮으며, 『문학과사회』80호


"일본 만화를 보라"는 김윤식의 지적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모닝구무스메의 "Love Revolution" 가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지구' 타령이 나오는 것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일이 문득 기억난다. "The stars, my destination."이라고 선언하는 걸리버 포일은 현존하는 사회적 인간 관계를 손수 파괴하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인간과 사회와 질서를 나름의 방식으로 존중한 반면,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다 먼지에 불과해'라고 쉽게 나불거리는 일본 만화 속의 캐릭터들은 결국, 자신의 유아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냉소해버린다. 글이 잘 풀리지 않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댓글 5개:

  1. 오오오오오오~
    흔히 보기 힘든 날카로운 평론이로다능.
    특히 마지막 줄 대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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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글이 흥미로워서, 몇몇 구절을 가져오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http://trueandmonster.tistory.com/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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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마지막문장 대반전 충격 2
    ---요즘 유행하는 개그 중에, 일본에서 건너온 '중2병'이라는 게 있다더군요(이제 이런 유행어도 웹을 통해서 공식화되어야만 알 수 있게 되었다는 -_ㅠ) 한마디로 소년에 머무르고 싶은 성인의 찌질병을 일축하는 거라든데, 좀 웃겨요 ㅎㅎ
    --이 글이 좀더 길어져서 다른 이야기도 듣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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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정통/ 마지막 반전까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능...

    여울바람/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논의로 이어졌으면 하네요.

    plath/ 이 주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오긴 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버벅거리게 되어서, 급한 마음에 일단 운만 띄워놓은 거에요. 그때까지만 해도 표 번역을 다 하지 못했거든. 이 주제는 문학평론 내지는 문화비평의 범주에 들어가겠는데, 어떤 방법론을 택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중이야.

    '중2병'이라는 단어는 나도 처음 듣는 건데, 거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인조이재팬에서 싸운다는 한국 네티즌들, 2채널로 대표되는 일본 인터넷 언어의 영향을 너무 심하게 받으면서도 그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아. 역시 그것 또한 문화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겠죠. 쓰고 싶은 글은 많은데 무슨 연장을 쥐어야 할지 원.

    암튼 이 주제에 대해 조만간 긴 글을 써 볼 생각이니 기다려요. 헤헤.

    한윤형/ 고맙네.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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