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7

힐러리 퍼트남과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

몇 살 때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기억하는 한, 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없다'고 말하는 주장에 대해 반대해왔다. 이것은 사실 철학적 회의주의의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무언가가 옳은지 그른지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동시에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척도로부터 벗어난 초월적 진리가 있다면,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어찌 알겠는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과연 그런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을까? 많은 철학자들에게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미국 철학자 콰인은 인식론 전체를 자연화하겠다는 기획을 내놓으며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선험적인 지식, 선험적인 인식, 선험적인 그 무언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파악해낼 따름이다. 따라서 인식론은 인지과학의 발전에 기대야 마땅하고, 인식론 자체가 '자연과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1969년작 "Epistemology Naturalized"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철학자들이 반발했는데, 오늘은 그 중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이 내놓은 희한한 논증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퍼트남은 "There is at Least One A Priori Truth"라는 독특한 논문을 통해 콰인의 과격한 주장에 반대했다가, 출간 전에 덧붙인 노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뒤집었다가,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래도 이런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묘한 논의를 전개했다.

최초의 논증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그는 모순률을 이렇게 저렇게 잘 다듬어 그가 '모순의 최소 법칙'(Minimal Principle of Contradic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 "모든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not every statement is both true and false)"는 것이 그 내용이다.

헤겔식의 단순한 모순률 대신 이렇게 복잡하게 최소화된 요건을 적용해야 하는 이유는 빌어먹을 양자역학 때문이다.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죽은 것이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빛은 파동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 될 수 있다. 퍼트남은 논리적 트릭을 통해 이 함정을 피한다. 양자역학적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 대한 명제들, 뭐 그 외에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는 명제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적어도 '모순의 최소 법칙'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험적 대상과 맞닥뜨리더라도, 다시 말해 선험적으로 참이다.

여기까지 초고를 써놓고 좋아하던 퍼트남은, 그러나 (나는 그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논문에 써 있는 바에 따르면) 수학적 직관주의(mathematical intuitionism)가 있기 때문에 '모순의 최소 법칙'이 절대적으로 선험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그 경우에도 "그 어떤 명제도 증명되면서 동시에 증명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새로운 '모순의 최소 법칙'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최초에 제시된 '모순의 최소 법칙(1)'이 모든 경우에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라는 것은 이제 틀린 말이 되어버렸다.

그 노트에 대한 새로운 노트에서 퍼트남은 자신이 순순히 콰인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변명을 늘어놓는다. 콰인주의에는 온건한 입장도 있는데, 대체로 추종자들이 본래의 사상가보다 더 목소리를 드높이는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콰인주의자들 중에서는 콰인이 제일 과격하다. 콰인은 그 어떤 명제도 선험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선험적으로 어떤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순의 최소 법칙'은 그런 과격한 콰인의 입장에 대해서라면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참'과 '거짓'이라는 개념들의 사용과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붙인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경험적 차원으로 치환될 수 없는 명제를 하나 만들 수 있다. "고전적인 참과 거짓 개념이 포기될 필요가 없다면, 모든 명제들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지는 않다."

퍼트남은 이 지점부터 슬그머니 논쟁에서 이탈한다. 자신의 논증은 콰인이 논박하고자 한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이성 규칙의 이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어떤 명제가 절대적으로 선험적이라는 주장이나, 그 어떤 명제도 절대적으로 선험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나, 모두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시했다는 것이 그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실컷 잘 싸우다가 이게 무슨 소리냐 싶지만, 이 논문 자체가 초고에 스스로 반박을 하고 또 반박을 해서 나온 것이니만큼 이 이상의 논의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론의 자연화에 맞서는 하나의 논증 방식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그 스스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퍼트남의 논증 방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내놓은 논증과 구조적으로 대단히 유사하다. 안타깝게도 학교 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코플스턴 철학사에 등장하는 내용을 통해 그 논증을 짐작해보는 수준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그[아우구스티누 스]는 또, 회의주의자일지라도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 예컨대 상반하는 두 개의 명제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것은 허위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가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여럿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만약 여럿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세계의 수가 유한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무한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세계에는 시작도 끝도 없든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든가, 시작은 없으나 끝은 있든가, 시작도 있고 끝도 있든가 그 중 어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언제나 모순률을 확신하고 있다.


퍼트남이 두 번의 퇴행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어떤 층위에서건 모순률을 발견해낼 수 있고, 그 모순률의 존재만큼은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과 '거짓'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증명된다'와 '증명되지 않는다'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하나의 명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내가 아는 바가 없으므로 일단 여기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참고문헌

Willard Van Orman Quine, “Epistemology Naturalized,” in 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9), 69-90., Reprinted in Sosa et. al., Epistemology: An Anthology(Wiley-Blackwell, 2008), pp.528-537

Hilary Putnam, “There is at Least One A Priori Truth,” Erkenntnis 13 (1978): 153-170. Reprinted in ed. Sosa et. al. Epistemology: An Anthology(Willey-Blackwell, 2008)

82p. 프레드릭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trans. 박영도, 코플스톤 서양철학사 2권 (서울: 서광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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