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25

사형제 위헌 판결 실패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형제가 폐지되었으면 광화문 광장에서 만세삼창을 하려 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하겠다.

잠시 이글루스를 돌아다녀보니 위헌심판을 청구한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지른 70대 어부라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분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바로 그런 반응을 우려하여 사형제 폐지 운동에 나선 단체들은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가장 최악의 인간이 받는 대우가 바로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라는 상식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작년 가을 무렵, 이 재판의 공판이 시작되기 전 나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부탁을 받아 변호인에게 참고자료로 제공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형제 폐지 판결문 중 일부를 번역하였다. Ackermann이라는 이름의 판사는 사형제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필연적으로 자의적인 판결의 가능성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남아공은 영미 보통법(Common Law) 계열의 국가이므로 그는 미국의 판결을 줄곧 인용한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이런 것이다. 어떤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사형당할 확률이 높지만 (가령 텍사스), 어떤 주에서 체포되면 사형당해도 계속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메사추세츠). 이 경우 법의 집행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왜 동일한 처벌이 동일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말인가? 이것이 법적 평등성에 부합하는가?

Ackermann 판사는 Callins v. Collins, cert. denied, 114 S. Ct. 1127, 127 L.Ed 435 (1994) 판결에서 Blackmun 판사가 제기한 소수의견을 인용한다. 여기서 재인용해보기로 한다.

“경험에 따라 우리는, Furman V. Georgia 사건에서 보았듯이, 사형 행정에서 자의성과 불평등성을 없애고자 하는 헌법적 노력이, 근본적인 평등의 필수적 구성 요소의 함축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행의 개별성이 그것이다. Lockett v. Ohio, 438 U.S. 586 (1978)판결을 보라.”


“형사소송법과 실질적 규제의 조합으로는 사형 처벌을 헌법적 결핍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내게는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체제가 정확하고 신뢰할만하게 어떤 피고가 ‘죽을만 하다’고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기초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이기 어렵다.”


“공공 여론의 대부분이 원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헌법이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벌로서의 사형은 당연히 사형제 자체가 일관되게 이성적으로 집행될 수 없는 한, 그것은 전체적으로 집행되지 말아야 한다. (강조는 저자)”


정권 바뀔 때 무렵 사형수를 '일괄처리' 해버리는 한국의 기존 법 집행 관습 역시 '비일관적'이고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중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과 정권이 바뀌고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고려와는 아무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형은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있을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잔인하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죽음 앞에 노출시킨 채 오랜 시간을 강제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도 비인도적이다. (현재 언론에 의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형수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다른 처벌에 비해 자살 기도자들의 숫자가 훨씬 높다는 것은 사형제도가 가진 '대기 기간'의 비인도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인도주의적, 상식적 관점을 견지하는 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당신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한꺼번에 사형 집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기도 하고 (인혁당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등), 어떤 사람은 죽고 싶을 만큼 오래도록 국가에 의한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수 년, 혹은 수십 년을 보낸다. 설령 그가 뱃놀이 하러 온 청춘 남녀를 살해 강간한 흉악범이라 해도, 당신은 그에게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2010-02-21

단상

한국의 중산층들은 양심을 놓고 벌이는 가학-피학 놀이에 아직 익숙하지 못하다. '강남 3구에 도시 빈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당연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만으로도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신 그들은 국개론에 빠져들고, 노무현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팽창한 '올바른 정치 의식'을 위무하는 듯하다. 요컨대 아직까지는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성립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 역시 그렇다. 이른바 '교양'이 아닌, 내면의 부재가 문제다.

2010-02-13

강남, 간지, 패션

강남좌파, 간지좌파, 패션좌파 따위의 어휘들은 명료한 개념적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대중들이 '좌파'라는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만약 가지고 있다면, 통상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들이다.

사유재산에 반대하고 계급차별 철폐만을 부르짖는 기존의 좌파와 달리, '강남좌파'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 주는 풍요로움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운동권들은 옷도 거지같이 입고 다니는 주제에 맨날 술이나 처마시면서 여자 후배들한테 '너는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아니?' 같은 소리 하다가 빈축이나 사고 있으니, 그러지 말고 여자 후배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간지가이'로 좌파가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 간지라는 것이 패션으로 소화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을 것이니, 패션좌파라는 논의까지 고구마 줄기, 혹은 리좀처럼 따라나온다.

'진보'라고 통칭될 수 있거나 그렇게 불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 세력들이 현재 처한 교착상태를 해소하겠다는 시도는 언제나 바람직하고 옳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① 현재 실재로 존재하는 진보운동의 모습을 왜곡하는데 일조하거나, ② 대체 왜 좌파 어쩌구 하는 논의가 필요한지조차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런 시도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강남좌파건, 간지좌파건, 패션좌파건, 모두 잘못된 인식 하에서 출발한 헛된 노력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우선 간지좌파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의 진보운동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간지좌파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된 논거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할 때 '패션좌파'라는, '운동권도 옷을 잘 입고 다니자'라는 식의 단선적인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칼럼니스트 허지웅은 '패션좌파'론을 비난하였지만, 논리의 흐름상 '간지좌파'론은 '패션좌파'론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정치인 혹은 정치적 결사체가 내뿜는 '매력'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차원에서의 매력 내지 간지와 매우 다르다. 예컨대 노무현을 보자.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노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노무현의 '간지'가 과연 옷을 잘 입는 것에서 나오는가? 실제 벌어지는 일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노무현은 딱 동네 아저씨같이 보이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간지'를 획득하였다.

통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노무현은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는 정몽준의 간지를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멋지다', '잘생겼다', '외모가 끌린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정치인으로서의 매력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르만족의 건강한 육체를 운운하는 히틀러의 펑퍼짐한 엉덩이와 2:8 가르마를 떠올려보면, 정치의 영역 내에서 '매력' 혹은 '카리스마'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 깨닫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막스 베버의 논의를 참조해도 좋다).

'간지좌파'론이 과연 이런 차원에서의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는 것인가? 지금까지 논의된 뉘앙스는 그런 고차원적인 논의와는 큰 관련이 없었고, 그저 '여태까지 좌파들은 너무 후졌다'는 식의 성토에서 나오는 안티테제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렇다,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라고 말해도 그것은 올바른 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정치적 영역에서 사람들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그런 '매력'은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운동권들은 왜 매력적이었는가? 그들의 패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억압을 느끼는 대신 편안함을 느끼며 별 일 없이 산다. 하지만 당시에는 '군사독재'라는 명백한 악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악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도덕적인 아우라가 덧씌워질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당시 운동권들의 '간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운동권들의 말투가 갑자기 후져져서도 아니고, 그들의 패션 감각이 언제는 좋았다가 망가져서도 아니다. 운동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운동권은 후져보이는 것이다.

'간지좌파'가 되자는 말은 그래서 어처구니 없는 표현이다. 혼자만의 패션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만의 간지는 성립할 수 없다. 매력은 누군가가 나를 평가할 때 쓰는 용어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술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매력적인 남자'라고 말하고 다녀보라.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집단이건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바라봐야만 한다. 지금 좌파가, 운동권이 매력을 상실한 것은 사람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탈각한 채 그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따라가고 싶은 진보운동'을 말하는 것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패션좌파' 같은 기형적 변태를 도출하게 되는데, 앞서 말했듯 두 논의는 모두 지나칠 정도로 피상적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자는 것이 '강남좌파'론의 대전제이기 때문에, '간지좌파'론과 '강남좌파'론의 거리 역시 그리 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소설가 백영옥은 『스타일』의 출간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패션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명품만 입고, 속물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며 "좋은 집안에서 혜택 받고 자란 소위 '강남 좌파'의 상반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재열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강남좌파란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처럼 진보 성향의, 보보스적인 부유층"이라고 한다. 애초에 동아일보에 의해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때에는 '좌파'라는 단어가 으르렁말로, 즉 '강남에 살면서 골프에 미친 빨갱이 이해찬'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하나, 현재 인터넷에서 논의되는 것은 그와 정 반대로, 강북스러운 촌티를 내지 않고도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쪽으로 더 많이 이해되고 있다.

진보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어떤 금욕주의나 반세속주의를 택하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좌파는 태초부터 반종교적이었고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세속적인 가치와 쾌락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는 것, 그 칠층탑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강남'이라는 기표를 굳이 차용함으로써 진보진영과 '세상'과의 거리를 굳이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미심쩍은 기동이 될 수밖에 없다. '강남'에 대한 욕망은 결국 '집값 상승'에 대한 욕망이며,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좌파처럼 우아해지자고? 차라리 '양심적인 지방토호'가 되자고 하는 건 어떨까?

본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거주지가 어디인지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긍정하는 것은, '강남'이라는 단어가 한국어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정한 고압적 지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결국 선거일에도 투표하지 못하는 50%의 무주택자를 도외시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정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면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바뀌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바꾼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림으로써 단지 '여당이냐 야당이냐'를 떠나서 더 폭넓은 정치적 선택 앞에 사람들을 마주서게 하는 것, 노동조합의 폭과 교섭력을 늘림으로써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조직된 생산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기본적인 정보 통신 접근권을 보장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없게끔 하는 것 등이 모두 그에 해당될 것이다. 손낙구의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가 말하는 바도 그것이다. 우리는 절반의 국민들만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택할 때, 우리는 이미 나머지 절반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치적 담론의 영역은 전적으로 경험주의적 접근에 의해 다루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최소한의 드러난 진실만큼은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강남에 사는 부유한, 우아하게 살지만 세상 문제를 걱정하는 대학생과 교수들은 한 줌도 안 된다. 그런 이들을 머리 속에 하나의 이상으로 놓고 '강남좌파'를 운운할 때, 정작 그곳에 사는 도시빈민들은 정치적 담론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보정당을 '내 집값 떨어뜨리겠다는 놈들'로 바라보는 그런 '강남스러운' 시선을 긍정한 채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사람들이 알아서 쫓아오는 진보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공허하고 유치한 발상일 뿐이다. 좌파가 간지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현재 진보 계열의 담론을 긍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옷을 잘 입겠다고 고민할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출발한 힘있는 담론을 생성해내는 것이다. 손낙구의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강남타령, 간지놀음, 패션쇼, 모두 이제 그만두고, 현실로 돌아가자.

2010-02-12

프리즈비의 발명자 월터 프레드릭 모리슨 사망

"Frisbee inventor Walter Frederick Morrison dies aged 90"

via BBC

전 세계의 개 주인과 개들을 행복하게 해준 분. 명복을.

한국어를 어떻게 형성해나갈 것인가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Null Model, 2010년 2월 11일)
'시'의 비밀(Null Model, 2010년 2월 12일)

아 이추판다님이 쓴 이 두 글은 동일한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어는 '주어'가 아니라 '주제(topic)' 중심의 언어이기 때문에, 초중고등학교 교육을 통해 얻은 문법적 상식에 어긋나는 듯 보이는 표현도 실은 단정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명료하고 단정한 한국어의 '용례'를 생산"하자는 나의 취지에 대해 반대의 뜻을 표한 후, 스티븐 핑커의 책을 인용하며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를 끝맺는다.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만 다시 읽어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문장들이 문법적이었고, 특히 일상 언어의 절대다수가 문법적이었다. 또 중간계층의 대화보다는 노동계층의 대화에서 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더 높았다. 비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뜻밖에도 학식 있는 학자들의 학술회의였다.

"그것은 한국어가 아니다"에서 재인용.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 문미선, 신효신 옮김, "언어본능: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동녘사이언스, 44쪽.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인 듯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문법적 타당성'이라는 것의 속성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뿐이다. 아이추판다님이 기대고 있는 언어학적 해설은 '현존하는 언어'를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어 학술적으로 정리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하늘은 파랗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관찰 방법으로 하늘을 보면 당연히 대부분의 경우 파란 하늘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가 주제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는 관찰된 사실로부터, "치킨 너겟 세 개시고요"라는 표현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마찬가지 원리로 당연히 너무도 쉽다. 사람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현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현상에 맞게 짜여진 이론을 들이대고 있는 한, 언제나 결론은 동일하다.

문제는 이러한 반박이 나의 논지와는 큰 관련이 없다는 데 있다. '비문'이라는 단어를 엄밀하게 사용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겠으나, 나를 포함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주제 중심적'으로 쓰여진 문장들을 볼 때 거부감을 느낀다. 물론 통계적으로 따지면 언제나 그 숫자는 미비할 것이며, 전체 한국어 화자 중 그런 언어 생활에 반감을 느끼고 그러한 경향성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추판다님은 그에 대해 "이미 있는 걸 또 다시 '생산'하는건 삽질이고, 그저 아무도 쓰지 않을 한국어 닮은 인공언어를 하나 만드는 것 뿐"이라고 대응한다. 여기서 그는 내 주장을 다소 과장하여 논박하고 있다. 인공언어의 창조까지는 바라지 않고, 다만 한국어 사용자들 중 일부라도 현존하는 방향과 다른 쪽을 일부러 지향함으로써 좀 더 정확하고 명료한 표현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수준의 주장을 나는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화이트칼라'와 '윤리'라는 개념을 끌어들였다. 개인적으로 바빠서 적절한 시점에 대답을 못 하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댓글들은 흘러 흘러 결국 '가게 점원들의 이상한 높임말'이라는 고전적 떡밥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나는 바로 이런 모습에서 한국어 화자들의 윤리 의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서를 다루고 작성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앞서서 '올바른'(그것이 어떤 방향이 되었건) 한국어를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은, 특히 인터넷 공간에서, 적어도 내게는 그리 도드라지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들과 상관 없는 '타자'인 가게 점원들의 높임말 사용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이들이 쌍심지를 켜고 사례를 외워둔 다음 기회가 날 때마다 되새기고 곱씹는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 체계 하에서도 이런 행동은 용납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나브로' '우리말글'을 '바투어' 나가자는 식의 손쉬운 대응은 이제 그만두고, 혼동의 가능성이 최소화된 한국어 문장을 사용하며, 미적인 완결성을 지니는 문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있다. '치킨 너겟 세 개시고요, 거스름돈 있으시고요'를 탓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이며, 윤리적이다.

내게 한국어는 많은 사람들이 쓰는 한국어의 통계적 합산치로 주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방식이고, 내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다. 이 결심은 지극히 사적인 차원에서 머무를 수 있으되, 다른 이들에게도 호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다.

2010-02-11

한국어에 대한 게으른 사랑

역사다리꼴 형태로 지어지고 있는 용산구청 신청사 옆을 지나다가 공사 현장 안내 문구를 읽었다. '이 공사는 뭐시기 저시기 이러쿵 저러쿵을 건설중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미래의 디자인 수도 서울의 공식 글꼴인 서울한강체로 쓰여진 그 문구를 이해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기란 쉽지 않지만 어쨌건 비문이기 때문이다.

'이 공사는'으로 시작하는 이 문장은 당연히 명사형 어구로 끝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공사의 성격을 설명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반면 '건설중입니다'는 주어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무언가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지, 공사 그 자체가 다양한 건물들을 건설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공사는 ……를 짓는 공사입니다'라고 하거나, 좀 더 친근하게 표현하고자 한다면 '저희는 ……를 건설중입니다'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게 대략 이런 식이다. 한국'어' 그 자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내셔널리티와 관련되어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부각시킨 후 그것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훌륭한 한글 글꼴을 만들어서 무상으로 배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글꼴에 담기는 문구가 비문이라는 것은 매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사람들은 한국어를 사랑하지만 (혹은 그렇다고 즐겨 말하지만), 그 사랑은 몹시도 파편적이다. 한국어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질 만큼 사람들은 부지런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나는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이 아니라 '화이트칼라'임을 명확히 해두자. 말하자면 용산구청 신축 공사장 현수막 문구를 쓴 바로 그 담당자 같은 사람 말이다. 인터넷 앞에 앉아 한국의 지식인들을 비아냥거리고 메신저로 바삐 수다를 주고 받으며 이명박은 싫지만 진보정당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런 '보통 사람'들을 나는 지금 염두에 두고 있다.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은 충분히 부지런하지 않고 생산적이지도 않으면서 윤리적으로 올바르고자 하는 노력도 그다지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내셔널리즘의 확대와 함께 자국어에 대한 관심이 솟구치는 것은 한국, 혹은 조선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다. 영국의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보낸 용례들로 가득 차 있다. 조지 오웰이 산문을 쓰던 당시에는 앵글로-색슨 계열 어휘만 사용하자는 운동(요즘 식으로 치자면 '순우리말 운동')이 벌어져서 지식인들이 그 주제로 토론을 벌이곤 했다. 우리가 아는 현대 영어는 그런 식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게 되었고 지금까지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벌어졌고 그 결과 우리는 짧은 역사에 비해 제법 깊이를 갖춘 국어국문학 연구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4·19 세대 이후 한국인들은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상실한 채, 파편적인 상징으로서의 '한글'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맞아요, 사람들은 한국어와 한글을 구별하지도 않는다니까요'라고 어깨를 으쓱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런 식의 편리한 이분법을 통해 스스로는 뭔가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 치고 한국어에 대해 어휘 수준 이상의 고찰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한국어에 대한 크나큰 관심을, 동시에 그것을 무신경하게 다루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새삼스럽게 느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아마도, 아직 사지 않았다면, 이오덕의 『우리말 바로쓰기』를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는 '…적(的)' 같은 표현은 일제의 잔재가 묻어 있는 것이라고 비판할 것이며, 최대한 '순수한 우리말'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한국의 화이트칼라들, 즉 직업적으로 원고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인터넷에서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는 중심 세력들은, 딱 여기까지만 나간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누리집'에서 올바른 '말글살이'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싯거리'며 '톺아보는'데, 이것은 오세훈 식의 '디자인 서울'의 일환으로 건설된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이 두르고 있는 가갸거겨 금테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들이다. 언어로서의 한국어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부분적인 대상, 즉 훈민정음 내지는 몇몇 고유어 어휘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시킨다는 점에서, 그것을 패티쉬의 소재로 삼아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어를 사랑하고 그것을 아낀다면, 이제는 '일본식 한자어 추방'이니 하는 철 지난 노래는 집어치우자. 이오덕 선생의 책 한 권 읽고 '올바른 우리말'을 논하는 대범함은 차라리 '우리말 오덕질'이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할 터이다. 어차피 우리는 지금 입만 열면 영어 단어를 섞어 말하며, 그렇게 하지 않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의 몇몇 단어를 지키거나 교체하는 게 아니라 명료하고 단정하게 한국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용례'들을 생산해내는 것이다. 적어도 공식적인 문건이나 표어에 비문이 등장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길을 걸을 때마다 눈을 뜨고 다니기가 힘들 지경이다.

한국어에 대한 쇄말한 집착은 사람들의 취향마저도 크게 왜곡하는 것 같다. 가령 김훈을 보자. 일부러 툭툭 끊어치는 단문 및 이유 없이 등장하는 고유어와 고어들은 그가 도서 시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화이트칼라 계층의 '한국어에 대한 판타지'를 절묘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판타지의 바탕에는 '긴 문장은 나쁜 문장', '외국에서 온 어휘는 나쁜 어휘'라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이 포진해 있다. (나도 그랬지만) 잠시라도 그의 문장에 열광했다면 스스로의 취향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런 바탕에서 출발한 미의식은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서 글을 맺도록 하자.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는가? 남들은 게으른 사랑을 하고 있다고 실컷 비난했지만, 여기서는 가부간에 답을 내놓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답할 수 있는 그런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이 언어를 쓰고 있을 때에만 나는 자유롭지만, 이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자유롭지 않다. 국어사랑 표어를 머리에 걸고 남이 쓴 글에 빨간펜을 들이대는 사람들은 이 어려운 문제에 너무 쉽게 답을 내놓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이것은 정말이지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나는 '진지하게' 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물론 이것은 소심한 대답이다. 하지만 "소심한 주장을 소심함의 주장으로 간주하지 말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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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41쪽,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철학적 탐구』(서울: 책세상, 2006)

2010-02-08

칼 로브의 청춘시절

어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칼 로브의 청춘시절에 대해 잠깐 언급했는데, 그때는 정확한 레퍼런스가 안 떠올라서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오늘 책꽂이를 살펴보다가 내가 그 비범한 청년의 이야기를 어디서 봤는지 깨닫고 스크랩했는데, 기왕 한 김에 공개하기로 한다.

권모술수에 능해야 공화당에서 출세할 수 있게 된 것도 닉슨시대의 일이다. 1970년 대학생이었던 칼 로브(Karl Rove)는 ①민주당 후보 진영에서 훔친 선거 팸플릿 안에 ②맥주를 무료로 준다는 가짜 전단지를 끼워 넣어 선거 집회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듬해 로브는 전국대학공화당위원회(College Republican National committee)에서 상임이사직을 맡기 위해 대학을 자퇴했다. ③2년 뒤 로브는 전국대학공화당위원회의 회장 후보로 나서서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으며 당시 전국공화당위원회의 회장이었던 조지 H. W. 부시의 축하를 받았다.

보수주의 운동은 이런 유형의 전략에 갈채를 보냈다. …후략…

156-157쪽. 폴 크루그먼, 예상한 외 옮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서울: 한국경제연구원BOOKS, 2008)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난 공화당의 정치 꿈나무는 이후... 에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