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6

매개념 문제

인터뷰를 마치며 박 교수는 걱정스런 얼굴로 “제 얘기가 그렇게 근본주의로 들리나요?”라고 물었습니다. (1) 진보신당 사람들은 늘 올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2)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인데도 제가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저의 그런 우려에 박 교수는 “지식인의 삶의 유일한 기준은 죽음에 임박해 자기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30년대 말의 조선 지식인들을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뜨끔했습니다. 근본주의적이든 아니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수자로 태어나 평생 약자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과 냉철한 이성을 벼려온 박노자의 존재는 ‘지엔피 인종주의’에 빠져 외국인과 소수자 차별이 일상화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의 아들 율희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더 오랜 시간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 인터뷰였습니다.

집안일 많이 하며 죄악을 씻고 있어요”(한겨레, 2012년 9월 15일)
김두식이 박노자를 만나 인터뷰를 한 후, 마지막 정리 발언으로 한 말. 여기서 ①과 ②의 논리적 관계를 추적해보자.

(1)은 일종의 대전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진보신당 사람들이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인다고 김두식은 말하고 있지만, 어차피 본인의 주관적 판단을 정정할만한 다른 내용을 제시하지 않으므로, (적어도 화자에게는) 진보신당의 지식인들이란 까대기에만 능숙한 청맹과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이지만, 진보신당에 선뜻 표를 주지 못한다.

이 사이에 빠진 소전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금새 알 수 있다. ‘나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에게는 표를 주지 않는다’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임의로 (1.5)라고 번호를 부여해보자. 그렇다면 이 삼단논법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띄게 된다.
(1) 진보신당 사람들은 늘 올바른 이야기를 하지만, 가끔은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1.5) 저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의 집단에는 표를 주지 않습니다.

(2)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당인데도 제가 선뜻 표를 주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즉, 그래서 저는 진보신당에 표를 주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매개념’, 즉 대전제와 소전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이 바로 그것인데, 그것이 결론에서는 “좋아하는 사람들”로 슬쩍 바뀌어있다. 하지만 이 삼단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매개념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즉 김두식에게는 “현실과 담 쌓고 까대기에만 능숙한 지식인”들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이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같은 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색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물론 ‘애정어린 비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지만, 굳이 분석해 보았다.

김두식은 현실과 담 쌓은 지식인들을 좋아하지만 그들에게 투표하지는 않는다는, 즉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에서 오늘의 보람을 찾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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