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9

[2030 콘서트] 2012년, 논객 없는 대선

필자가 2010년 가을 무렵 입대를 선택한 것은 2012년 여름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연말이 대선이니 이른바 ‘논객’들의 활약이 도드라질 것이고, 따라서 긴 공백을 뚫고 입지를 확보하는 일도 좀 더 쉬워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한 장의 전역증을 주민등록증 뒤에 살포시 감춰놓고 다니게 된 지금, 그 계산은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19일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논객’이 활약할 만한 입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 조건들이란 무엇인가?

첫째, 피아 대립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우리편’과 ‘너희편’을 확실히 나눠서, 내 글이 먹혀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 ‘우리편’에 모종의 정당성이 있어야 하고, 나 스스로가 그에 동의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 있게 논객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독자들도 비로소 설득된다.

셋째, 그 논객들의 활약을 실어줄 수 있는 언론들 역시 스스로의 입장을 확실히 해둔 상태여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특정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인혁당 사건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문명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는 후기 박정희 정부의 직접적인 관계자 중 한 사람으로, 유신정권의 공과 과를 모두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이 있다. 비단 ‘판결이 두 개’인 인혁당 사건만이 아니라, 유신정권이 만들어낸 그늘의 깊이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후보는 어떤가? 최근 항간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문재인의 캠프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공과 ‘과’를 모두 끌어안은 셈이다. 물론 그것은 ‘대한민국 남자’다운 태도일 수 있지만, 정치인으로서 올바른 자세일지는 매우 의문이다.

한편 1997년 대선 후로 얼마 전까지는 전통적인 여야 구도에서 벗어나더라도 좀 더 진보적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국민승리21부터 가시화된 진보정당 운동이 대안 노릇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인터넷에서 ‘찌질’거리고 있었을 뿐이지만, 어쨌건 스스로의 정치적 지향에 부끄럽지 않게 현실정치에 대한 담론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인 김규항의 말마따나, 예전에는 ‘신념대로 찍으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신념을 비춰볼 수 있는 현실 속의 거울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 분열과 파산이 ‘통합’의 기치하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잔여 세력과 국민참여당 계열의 정치인, 진보신당의 간판급 얼굴들이 모여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주사파’의 활약에 힘입어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등은 다시 한 번 탈당 보따리를 쌌다. 급격하게 힘을 잃은 진보신당은 사회당과 살림을 합쳤지만 그로 인해 어떤 상승 효과가 발생하고 있지는 않다. 지난 총선 당시 관악을 공천에서 부정선거를 한 이정희는 국민들 앞에 죄송한 마음을 담아 눈물의 ‘강남스타일’ 말춤을 춘다. 진보정치는, 적어도 제도권 속에서는, 죽었다.

당시 이정희의 부정선거를 기묘한 논리로 옹호하던 진중권은 현재 안철수를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이 칼럼을 쓰는 9월19일 새벽 1시45분 현재, 안철수는 유력한 대선 후보이지만 대선 출마 선언을 하지도 않은 대선 후보다. 말하자면 ‘슈뢰딩거의 안철수’인 셈인데, 필자는 그런 양자역학적 후보를 지지할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이 못된다. 게다가 19일 오후 3시, 그가 대선 출마와 관련하여 중대발표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지만, 신문사의 마감 시한으로 인해 그 내용을 이 칼럼에 반영할 수도 없다.

지지 세력뿐 아니라 심지어 운도 없으니, 필자에게 ‘논객’의 시대는 정말 끝났나보다.


입력 : 2012.09.19 21:27:47 수정 : 2012.09.19 23:10:2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92127475&code=990100&s_code=ao051#csidx500b31ec2f053909a49051e82ceac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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