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26

[별별시선]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별별시선]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철학자 루소는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만약 누군가 ‘나는 나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너의 노예가 되겠다’고 계약한다면, 그 계약은 과연 유효한가? 계약을 쌍방이 서로에게 특정한 의무를 지고, 상대에게 그 의무의 이행을 요구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본다면, 노예계약은 형용모순이다. 계약에 의해 노예가 되는 순간 그는 아무런 권리를, 가령 하루에 세 끼는 밥을 먹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 따위조차,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민이 노예계약을 맺으면, 그는 노예계약의 권리와 의무를 누릴 자격마저 잃어버리므로, 그것은 원천무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여 루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노예제도와 권리라는 이 두 말은 양립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서로 상반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하든, 아니면 한 인간이 한 나라 인민 전체에게 하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제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너와 계약을 하나 맺겠어. 그런데 모든 부담은 네가 떠안고, 이익이란 이익은 모두 내가 갖는 거야. 또 나는 내가 원하는 한에서만 그 계약을 지키겠어. 그러니 너도 네가 원하는 한은 그것을 지키도록 해.’ ”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다. 또한 인간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완전히 박탈할 수 없다. 설령 그가 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루소의 생각은 그랬다. 그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사회계약을 통해 공동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내려온 권리에 의해, 오직 국왕만이 자유를 누리며 국민들을 통치할 권리를 갖는다는 기존의 정치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왕은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누리며, 국민들은 오직 의무만을 갖는 사회계약, 즉 전제군주에 대한 노예계약은 성립할 수조차 없다. 루소의 혁명적 발상이었다.

원래부터 온 인류에게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한국인의 개인정보가 한 번 더 유출되었기로서니, 루소가 어쩌고 사회계약이 저쩌고 떠들어대는 것은 속된 말로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규모가 큰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지만, 사실 사건 자체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 카드 회사들은 개인정보 관리 업체를 고용했고, 그 업체에서 일하던 직원이 개인용 USB에 수천만 명의 개인정보를 복사하여 자기 집에 들고 갔다. 동원된 방식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로-테크(low-tech)하긴 하지만, 어쨌건 본질적으로 해킹을 통한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커지자, 현오석 경제부총리는 “소비자도 정보제공단계부터 신중해야 한다. 모두 다 정보제공에 동의해줬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동의’를 클릭하거나 체크하지 않으면 금융 거래가 불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제공된 개인정보를 제대로 간수하지 않은 금융기관이 아니라, 개인들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형식이 얼마나 불공정하건 간에, 너는 ‘동의’했으니, 책임은 네가 지는 것이며 카드 회사들에는 그 정보를 잘 간수했어야 할 의무를 묻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한국의 지배 계층이 국민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너는 한국에 태어났고, 한국인이며, 한국인으로서 온갖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하지만 국가는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며, 국가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건 국민에게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만, 18세기의 철학자 루소가 말한 불공정한 노예계약을, 지금 이 순간에도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사건은 피해 규모와 무관하게, 본질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오늘날 빈번하게 발생하는 개인정보 해킹 사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현오석의 ‘망언’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치인들의 ‘명언’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계약과,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계약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은 너무도 투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호히 외쳐야 할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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