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시선]손기정, 김연아, 빅토르 안
노정태 | 자유기고가
아마추어 선수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각자의 조국을 대표하여 경기하게 하는 올림픽은, 그 출발부터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그랬고,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말이다.
학창 시절 국사 교과서를 통해 질리도록 보고 듣고 배운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나라를 빼앗겼기에 조국의 깃발이 아닌 정복자의 국기를 달고 뛰는 마라토너 손기정. 그가 금메달을 획득했다는 낭보를 듣고도 끝내 기뻐하지 못하는 식민지 조선 사람들. 그 소식을 전하면서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버린 동아일보 기자들. 그로 인한 탄압, 고취되는 민족의식, 기타 등등.
그런데 이번 소치올림픽에서는 퍽 다른 양상이 전개됐다. 태극기를 달고 빙판을 누비던 쇼트트랙 최강자 안현수 선수가,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정말 좋아하는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기에, 러시아로 귀화해 그 나라의 국가대표가 됐다. 그는 부상에 시달렸고 소속팀이었던 성남시청이 해산되는 불운을 겪었다. 일각에서는 안현수가 한국빙상연맹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온 운동을 계속하고자 새로운 조국의 품에 안겼고, 러시아인들에게 친숙한 가수 빅토르 최의 이름을 따 스스로를 ‘빅토르 안’이라고 부르게 됐다.
냉전이 끝나고 ‘평평해진’ 세계 속에서, 자신의 선수 생활을 보장하는 나라로 엘리트 체육인이 귀화하는 일은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빅토르 안의 경우처럼 주목받은 사례가 많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계 체육인이 어느 외국의 국가대표가 되는 일은 그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로도 발생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특별했다. 나 자신을 포함해 TV나 인터넷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어느새 대한민국 국가대표팀보다 오히려 러시아 국가대표인 빅토르 안을 응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SNS를 통해 확인되는 여론은 그랬다.
한편 많은 이들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바, 김연아 선수는 한국빙상연맹에서 체계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기는커녕,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홀로 짊어지고 있었다. 요컨대 대한민국이 김연아에게 해준 것은 김연아가 대한민국에 해준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것은 적어도 김연아의 팬들 사이에서, 넓게는 피겨스케이팅이라는 종목 및 기타 스포츠 전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 국민국가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모든 인간은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등록되며, 그에 따르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 그래서 마라토너 손기정은 본인의 뜻과 달리 일본인으로서 경기를 치러야 했고, 한국인 안현수는 러시아인 빅토르 안이 되어 빙판 위를 누볐으며, 그의 라이벌이라는 아사다 마오 선수에 비교해볼 때 터무니없이 빈약한 지원을 받은 김연아는 그래도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손기정에서 빅토르 안까지. 그리고 ‘국적이 안티’라는 말을 종종 듣는 김연아까지. 1936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라, 갓 독립할 당시만 해도 최빈국 중 하나였던 그 나라는,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는, 적어도 올림픽이라는 ‘국가주의의 격전지’를 놓고 볼 때, 사뭇 다르다. 나라 잃은 설움을 곱씹고 공분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지금은 적지 않은 국민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한 선수를 응원하며, 오히려 그런 탁월한 이를 놓친 조국을 비웃는다.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한 명의 대한민국이다”라는 광고를 보며 마치 내 일처럼 분통을 터뜨린다.
개인의 행복과 성공보다 애국심과 헌신을 앞세울 수 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한민국’을 재정의할 것인가? 2014년 2월24일 막을 내리는 소치올림픽이 던진 숙제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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