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14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세월호와 한국사회-기성세대에 묻는다](1) 세월호 ‘선내 방송’ 같은 한국 언론


세월호 참사는 언론 참사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 시점부터 그렇다.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구조의 손길이 좀 더 빨리 현장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오보의 책임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2014년 4월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기울었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도 함께 뒤집혀버렸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모든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참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나버렸다. 이것은 이른바 ‘기성세대’들이 포진하고 있는 언론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언론을 감시해야 할 시민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세월호 언론 참사의 진행 추이를 되짚어보도록 하자.

언론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오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구조된 단원고 학생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며 ‘학생의 친구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거나, 희대의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검색어 노출을 노린 보험사 간접광고 기사를 내보내는 등의 일들 말이다. 막장 보도, 패륜 보도, 무슨 말을 붙여도 개운치 않다.

그 뒤를 따른 것은 희망 고문이었다. 어쩌면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침몰 후 본격적인 구조가 시작되었을 시점부터 언론은 ‘에어포켓’과 ‘희망’만을 하염없이 반복했다. 60시간 동안 에어포켓 속에서 탄산음료를 마시며 버틴 누군가의 사례가 꾸준히 언론에 등장했다. 그가 몸을 담고 있던 나이지리아 인근의 해수 온도가 높았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에어포켓만 있으면 72시간까지 생존이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만이 이명(耳鳴)처럼 울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에어포켓에라도 한줌의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가족들의 심정을 도외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국민 전체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객관적 상황을 인식하도록 도와야 할 언론이, 근거도 논리도 없이 막연한 ‘희망’만을 사흘 넘도록 떠들어대는 그 광경의 초현실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에어포켓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으며 생존자를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이미 침몰 당일 ‘JTBC 뉴스 9’에서 보도된 바 있다.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백점기 교수는 손석희와의 인터뷰에서 “세월호 격실이 폐쇄됐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배의 구조상 공기 주입을 하더라도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언론계의 백전노장 손석희마저도 그 말에 충격을 받고 10여초간 할 말을 잊었다.

물론 그 전문가의 의견만이 절대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희망과 희망사항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언론은 희망사항을 보도해서는 안된다. 희망을 보도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입각한 현실 인식과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언론은 ‘에어포켓’이니 ‘골든타임’이니 하는 네 글자짜리 단어 퍼뜨리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에어포켓이 형성되었다 한들 뒤집힌 배 속에서 생존자를 무사히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역시 많은 전문가들이 일찌감치 의견을 모았지만, 그것은 언론이 보도하고자 하는 ‘희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다이빙 벨’과 관련한 일부 언론들의 보도를 짚어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종인 알파잠수 대표는 세월호 침몰 사흘째인 4월18일부터 다이빙 벨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16일 침몰 당일에는 에어포켓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전문가의 의견을 전했던 손석희의 JTBC가, 이틀 후에는 이종인 대표를 인터뷰해 “다이빙 벨은 조류와 상관 없이 20시간 연속 작업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후 5월11일 이종인 대표가 현장에서 자진 철수할 때까지 다이빙 벨을 둘러싼 논란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이 사건을 바라보는 국민 모두가 초반의 구조 실패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해경의 출동은 늦었거나, 적어도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선장 및 선박직 승무원들은 제 목숨을 건지는 일에 급급했다. 청와대는 스스로 ‘컨트롤타워’ 역할을 자임해 떠맡지 않았고, 그래서 부처 간 혼선이 더욱 가중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다 더한다 해도, 다이빙 벨이 ‘해결사’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전원 구조’ 오보, 막장 인터뷰, 에어포켓 희망 고문 등의 사안을 검토해보면, 진보 언론이라고 분류되는 곳들은 그렇지 않은 언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의 품위와 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듯하다. 그러나 다이빙 벨 논란으로 접어들자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갔다. 구조 활동을 벌이는 언딘이라는 민간업체와 해경에 대한 불신이 다이빙 벨에 담겨 여론의 바닷속에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다이빙 벨 파동은 헛소동으로 마무리됐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2000년대 초, 나는 당시 대학에 입학한 수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안티조선 운동과 그 중심에 서 있던 논객들의 세례를 받았다. 감히 이런 주어를 써도 된다면, 우리는, 언론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세월호가 가라앉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시민적 언론운동이 발흥하고 꽃피었던 그 시절에 비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극히 부정적이다. 언론 소비자 운동, 언론을 바라보는 시민운동이 뜨겁게 달아오른 시절이 있었지만, 그것은 언론 내부의 구조를 바꾸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특정 언론사들에 대한 배타적 적대와 지지의 진영을 만드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현장에서 ‘기레기’라고 욕을 먹는 KBS와 MBC의 일선 기자들이 집단 항명에 나서고 있지만 시민사회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언론을 통해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이끄는 이 사회 속에서 희망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보장받기 어렵다는 공포에 질려가고 있다. 그들은 모든 신문과 방송을 불신한다.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야 구조받을 수 있다고 가짜 희망을 떠들어대던, 세월호 선내 방송 취급을 하고 있다.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한국 언론은, 지금부터 스스로를 구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입력 : 2014-05-14 21:25:45ㅣ수정 : 2014-05-16 17:52:3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142125455&code=990100&s_code=ao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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