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20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북리뷰]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구도

희생양
르네 지라르 지음·김진식 옮김·민음사·2만원

많은 이들이 이름은 한 번쯤 들어보았고, 동시에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는 못한 채 오해하고 있다면, 그 책은 고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나와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겠는가. 오늘 이야기할 <희생양> 역시 바로 그러한 고전의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책이다.

르네 지라르는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신화를 검토하여 그 속에서 한 가지의 공통 요소를 추출해낸다. 하나의 희생물을 폭력과 죽음 앞에 노출시킴으로써 다른 잠재적인 희생양들의 안위를 일시적으로나마 지켜내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신화 속에 이러한 희생 제의의 과정이 녹아들어 있다면, 그것은 곧 모든 신화가 집단이 소수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박해를 품고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 소수자의 범주는 매우 넓으면서 동시에 극단적이다. 신체 및 정신 장애인뿐 아니라 너무도 아름답거나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 한 사회 내의 지배집단에 속하지 않는 소수파의 누군가, 외국인 혹은 유대인 같은 소수민족 등이 모두 쉽사리 희생양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앞서 제시된 예시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시피, 하나의 희생물을 바침으로써 모두의 결속과 안위를 도모하는 희생 제의 구도는 아주 먼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르네 지라르의 시선 역시 역사 속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종횡무진으로 훑어나간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 속 등장인물들부터 프랑스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기에 흥분한 군중 앞에 손쉽게 희생양으로 바쳐질 수 있었던 18세기의 마리 앙트와네트까지, 그 목록은 하염없이 길게 이어진다.

비교적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이 책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독자들에게 잘못 이해되고 있다. 희생양을 만드는 신화적 구조는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종종 반복된다고 그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르네 지라르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결코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실은 인류가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강변한다. 예수가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군중 앞에 내밀어 ‘스캔들’을 벌이던 그 때 이후로 인류는 기존의 신화적 집단폭력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지라르의 핵심 주장이다.

지라르는 성경 속에도 희생양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바와 달리, 단지 그 사실만을 연거푸 확인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거듭되는 희생양 구조를 적극적으로 돌파해낸 이가 바로 예수이며, 예수의 희생 이후로는 동일한 폭력의 구조가 온전히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기독교 중심적인 해석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러한 비판이 많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구조적 폭력, 반복되는 모순들을 바라보며 르네 지라르라는 인문학자는 어떻게든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말이다. 인문학의 역할이란 구조적 폭력을 개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어떻게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분께도 일독을 권한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 자유기고가>

2014.05.20ㅣ주간경향 1076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5121551431&code=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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