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3

[북리뷰]‘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

[북리뷰]‘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

불멸화 위원회
존 그레이 지음·김승진 옮김·이후·1만6500원

그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다윈과 동시에 진화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 선택 이론을 발견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심령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의 심령주의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죽은 이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심령주의를 “전적으로 사실에 근거한 과학”이라고 옹호했다.

19세기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원자력 같은 전혀 모르던 에너지가 발견되거나, 플루토늄 같은 원소의 존재가 확인되거나, 전화처럼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 모든 것들이 과학의 산물이었다. 과학은 인류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원동력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과학의 힘이 한계를 모르고 뻗쳐나간다면, 그것은 마땅히 죽음마저 정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학으로 죽음의 벽을 넘겠다는 발상은 이토록 자연스러웠다. 과학 그 자체는 과학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그 과학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심령주의는 심령주의를 주도하던 지식인 계층이 와해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과학으로 죽음을 넘어서겠다는 발상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1910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재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다. 모든 것에 과학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공산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사적 유물론은 인류 역사의 과학적 전개 원리를 밝히고 그에 따라 혁명의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소련의 공산주의자들 역시 과학의 힘으로 죽음을 넘어서겠다는 발상을 떠올린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영국의 부르주아들과 죽음에의 접근방식이 달랐다. 19세기의 영국인들이 이미 죽은 자와의 대화 및 접촉을 시도하는 것에 머물렀다면, 20세기의 소련인들은 인간의 육체 그 자체가 죽음을 극복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 레닌의 시신은 지금껏 이런 저런 방식을 동원하여 보존되고 있는데, 그것은 언젠가 그 몸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저자 존 그레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 주는 행복과 평화를 논하며 이 책을 마무리짓는다. 그의 결론에는 귀를 기울일 만한 지점도 있는 반면, 어떤 면에서는 다소 싱겁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특히 가이아 이론 등을 받아들여 지구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주창하는 모습을 보면 일종의 배신감이 들기까지 한다. 대단히 유려하면서도 신랄한 문체로 구시대의 오류를 해체하던 본문과 달리, 결론이 너무도 ‘온건’하니 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한 이후, 그의 상태에 대한 뉴스가 연일 신문 지면을 뒤덮었다. ‘심장 스텐스’니 ‘저체온 요법’이니 하는 생소한 의학용어들을 접하노라면 바로 이 책, <불멸화 위원회>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멀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과거를 반추하며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6.03ㅣ주간경향 1078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5261745001&code=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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