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9

[북리뷰]20세기 말에 예견한 21세기 모습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이희재 옮김·김영사·1만7900원

당대에 아무리 큰 논란을 낳은 책일지라도 그 책의 예견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제대로 기억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작품을 ‘발견’ 혹은 ‘재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어깨 위에 온전히 놓이는 짐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2014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문명의 충돌>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게 될 21세기의 모습을 20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냉철하게 예측해냈기 때문이다.

‘문명’들이 ‘충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개별적인 ‘문명’들을 묶어주던 ‘이념’의 틀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세계 정치는 문화와 문명의 괘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전파력이 크며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갈등은 사회적 계급, 빈부, 경제적으로 정의되는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지 않고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21쪽) 헌팅턴은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중화, 힌두, 그리스정교, 불교, 일본을 그러한 ‘문명’들로 보았다. 1990년대까지는 서구와 비서구, 즉 공산권이 대립하였지만, 이제는 다른 세상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 중 이슬람 문명에 대한 평가와 예측이 당시 불러일으켜진 논란의 핵심이었다. “이슬람의 경계선은 피에 젖어 있으며 그 내부 역시 그렇다”(350쪽)는 헌팅턴의 말은 <포린 어페어스>에 논문의 형태로 처음 실렸을 때부터 극단적인 반발과 호응을 동시에 불러왔던 것이다. 1996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후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2대의 여객기가 날아오면서 헌팅턴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현실 속에서 실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2014년, 이른바 ‘이슬람 국가’로 스스로를 표방하는 ISIL이 미국인 저널리스트 제임스 폴리를 참수하면서 ‘문명의 충돌’ 이론은 구태여 반박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상식’의 범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미국은 ‘이슬람 국가’와 싸우고, 중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며, 우크라이나는 유럽에 가까운 서쪽과 러시아에 가까운 동쪽으로 사실상 양분된 상태다. ‘문명의 충돌’ 그 자체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면모는 단지 문명들끼리의 충돌을 예견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소련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문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혀 다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이념분쟁이었으며, 판이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근대적이고 세속적이며 자유, 평등, 물질적 복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하여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188쪽) 반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전통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배들의 린치를 경찰이 묵인하고 방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문명’끼리 충돌하는 세계는 그 ‘문명’ 속의 야만이 ‘이념’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문명의 충돌>은 세월의 검증을 이겨낸 당당한 현대의 고전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21세기의 국제정치적 변화를 예측했고, 그 중 많은 수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문제는 그 속에 묘사된 세계와 한반도의 모습이 결코 밝지 않다는 데 있다. 차분한 마음으로 이 책을 다시 읽고, 다가올 새해와 새로운 세계 속의 우리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2021053111&code=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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