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사회, 안전장치인가, 통제 도구인가?
로빈 터지 지음·추선영 옮김·이후·1만3000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발표가 나오자 많은 이들이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CCTV의 해상도가 부족해서, 이른바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용의 차량으로 지목된 흰색 BMW 번호판의 정확한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 CCTV가 사건 현장의 것이 아닐 수 있음에 주목하고, 이전에 검토하지 않았던 영상을 반복해서 확인한 끝에, 용의 차량의 차종을 윈스톰으로 특정했다. 그러자 범인의 부인이 경찰서에 신고하였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에서 진범을 잡은 것은 과연 누구일까? CCTV가 주인공인가? 그것을 판독해낸 경찰인가? 아니면 이른바 ‘집단지성’을 발휘한 ‘네티즌 수사대’에 그 공을 돌려야 할까?
CCTV 및 기타 감시 시스템에 대한 2015년의 논의는 우리가 10여년 전에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감시 카메라의 존재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TV를 틀면 숫제 가정용 CCTV 광고가 나온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언제라도 위치 추적 기구로 돌변할 수 있음을 잘 알지만, 20세기 말의 호들갑이 아니라 21세기의 무덤덤함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크림빵 뺑소니’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들에게 더 많은 CCTV 정보를 공개하라는 상식 밖의 발언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감시 사회’에 대한 역치가 낮아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로빈 터지는 <감시 사회, 안전장치인가, 통제 도구인가?>를 통해 해당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물론 인류는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쭉 남을 감시하고 감시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모든 죄수들을 효율적이고 과학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판옵티콘을 구상했다. 나치는 게슈타포의 세밀하고 촘촘한 감시망을 통해 독일 국민들의 내면까지 억누르고자 했다. 미국은 9·11 테러를 계기로 오늘날 스노든에 의해 폭로된 무지막지한 인터넷 감시체계를 갖추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해외를 오가는 전화통화 내용 가운데 테러리즘에 연루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통화 내용을 도청해도 좋다고 승인했다.”(97쪽)]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유와 사생활을 중시하는 서구 국가들부터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면서 포괄적인 감시체계를 마련하고 나섰다. 둘째, 정보통신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감시가 가능해졌다. 가령 페이스북에 당신과 친구들이 찍은 사진을 올려보라. 컴퓨터가 자동으로 사람의 얼굴을 식별한다. 이러한 기술이 CCTV와 결합하면, 컴퓨터는 행인 중 용의자를 곧장 파악하여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시민사회 자체가 감시에 익숙해지고 있다. 오히려 더 많은 CCTV를 요구하는 것이 오늘날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저자 로빈 터지는 좌파 저널리스트답게 시종일관 비판적인 태도로 오늘날의 감시 사회를 바라본다. 물론 앞서 말한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 있는 한, 감시 사회로 향하는 경향성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 또한 분명한 일이다. “CCTV가 우리 일상에 항상 끼어 있는 제3자로 자리 잡으면서 일반 시민은 남의 싸움에 끼어들기를 꺼리게 되었고 자기가 사는 지역의 문제에 대한 책임감도 줄어들었다”(270쪽)는 저자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티즌 수사대’ 이전에, 서로 챙겨주는 이웃사촌 아닐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2091902531&code=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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