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03

[북리뷰]왜곡된 종교 원리의 폭력적 적용

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
클라우스 슐리히테 지음·이유경 옮김 현암사·1만8000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대작 <신국론>에서 ‘국가에 정의가 없다면 그것은 무장한 강도떼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의 결론도 사실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의 오토 폰 게리케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는 클라우스 슐리히테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하고 또 사라진 수많은 무장단체들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역작을 내놓았다.

무장단체는 국민국가의 권력에 공백이 생기거나, 적어도 그것이 크게 약화된 경우에 출현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이슬람국가’의 경우, 처음에는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대통령과 맞서는 반군으로 출발한 조직이다. 내전으로 정부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수니파 무장 조직 중 일부가 세력을 키운 후 스스로를 ‘정통 이슬람 율법에 의한 칼리프 국가’로 선포해버린 것이다.

조금 안정을 얻으면 무장단체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세금을 걷기 시작한다. 해외로부터의 원조, 마약 재배나 무기 밀매 등에만 의존하면 경제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슬람국가’ 역시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세금을 걷는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해줄 이념, 이념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럴듯한 말’을 필요로 한다. 라이베리아를 무력으로 장악했던 요미 존슨은 라이베리아의 전 부통령을 생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잡아들인 최초의 지식인이다. 나는 전투원이니 당신이 나를 도와 무장투쟁의 정치적·경제적 측면에 사상을 접목해 우리 투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194쪽)

이것은 마치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무장단체는 필연적으로 성장 과정에서 이념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고, 많은 구식민지 국가에서 그것은 ‘민족해방’ 등의 이름을 얻는다. ‘이슬람국가’는 종교의 깃발을 들어올리고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이슬람교의 교리를 해석하여 그것을 폭력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중이다.

앞서 나는 요미 존슨과 라이베리아 전 부통령의 만남을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에 비유했다. 이것이 다소 심한 표현 아니냐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독일인인 저자가 옛 독일연방, 즉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일으켜 세운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해 평가한 대목을 읽어보자. “유럽의 최강대국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엄밀히 말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되는 운명을 맞을 만큼 억압적 통치자였다. 그는 강제로 병사를 모집하고 이주와 정착도 강제로 시행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전망 있는 영토를 장악하고자 이웃 국가를 침략하였다.”(356쪽)

이것은 ‘문화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역시 예전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한낱 무장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객관적 자기 인식일 뿐이다. 다만 큰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진행 중인 국가 건설 노력에서 어떤 조직이 유럽의 부르주아에 견줄 만한 기능을 수행할지는 불분명”(376쪽)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부르주아는 국가가 민주적으로 기능하도록 압박을 가했다.”(같은 곳) 반면 ‘이슬람국가’의 지배세력들은 오히려 왜곡된 종교 원리를 강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의 국가는, 정의로워야 한다.

<노정태 ‘논객 시대’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1261842541&code=116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