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발언이다. 무상급식이냐 의무급식이냐,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 등으로 해묵은 논쟁이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홍준표의 발언이 지니고 있는 더 큰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643억원의 무상급식 지원비를 서민 자녀 지원사업에 투입한다는 것이 홍 지사의 입장이다. 그런 그가 ‘공부’와 ‘밥’을 대비시킬 때, 과연 그 ‘공부’는 무엇인가? ‘개천의 용’이 사라진 시대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노라는 홍 지사.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 국회의원, 도지사까지 승승장구한 자신의 ‘휴먼 스토리’를 슬며시 포개어 놓는다.
요컨대 홍준표에게 ‘공부’란 남을 이기는 공부, 남보다 더 높은 시험성적을 얻어내어 판검사 되는 공부, 그래서 ‘개천’ 출신들이 ‘용’되어 개천을 탈출하기 위한 공부인 셈이다.
왕년의 학생 홍준표는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도 붙으면 속된 말로 ‘팔자 바꾼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오늘날의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입시제도가 턱없이 복잡해진 탓에 사교육 시스템이 제공하는 온갖 정보를 동원하지 않는 한 ‘정상적’인 루트로 명문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역균형선발로 대학에 들어오면 ‘지균충’, 기회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하면 ‘기균충’, 학생들은 끝없는 차별에 부딪힌다. 명문대 입학했다고 어깨 쭉 펴고 다닐 수 있던 그런 시절은 진작에 끝났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명문대 나온 취업준비생이 될 뿐이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는 홍준표는 여전히 개발독재시대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아침마다 울려퍼지는 새마을노래를 들으며 굶주린 배를 안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명문대 가고 판검사 될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희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본인 스스로가 ‘개천의 용’으로서, 20세기의 가난을 자기 힘으로 극복한 사람이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이 있다. 과연 그 20세기 ‘개천의 용’ 모델은 지금까지 유효한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배고픔을 참고 공부해서 명문대 가고 사법시험이나 기타 취업 관문을 통과하면, 안정과 풍요가 보장되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나는 나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저소득층 학생에 대한 교육비 지원은 부질없는 짓이며, 따라서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교육에 대해, 그 교육을 통해 배분되는 직업들 사이의 소득 형평성에 대해, 각 가구의 자산 불평등에 대해 총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는 학교 교육과 국가고시를 통해 엘리트를 선발하고, 그 엘리트들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시켜주는 방식으로 수십년간 유지되었다.
이제 그렇게 만들어진 격차를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무상급식을 철회하며 ‘공부해’라고 윽박지른다 한들, 학생들이 희망을 느낄 성 싶은가?
‘개천의 용’을 위한 공부, 한 사람의 승자를 위해 아흔아홉 명의 패자를 만드는 교육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홍준표가 전국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무상급식 발목잡기’에 나섰다면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 같지만, 정작 그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독재 시절에나 통했던 ‘개천의 용’ 타령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홍준표의 ‘공부론’은 시대착오적이며, 자아도취적이기도 하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부’는 그런 게 아니다. 계약서 쓰는 법, 노동3권 보장받는 법,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지키는 법, 협상하고 합의하는 법 등 기존의 교육 과정에서 무시되었지만 실은 반드시 필요한, ‘내 밥그릇 지키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밥 먹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그렇다. 이제는, 밥이 공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22051205&code=990100&s_code=ao122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