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10

[북리뷰]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위대한 페미니스트의 일대기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브누아트 그루 지음·백선희 옮김·마음산책·1만2000원

“여성해방에 남성이 반대해온 역사가 이 해방의 역사보다 더 말해주는 바가 많다.”(21쪽)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다. 이성과 합리에 따라 근대 국가를 만들겠다고 나선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조차, 콩도르세라는 단 한 명의 예외를 빼고 나면, 모두 여성들의 주체적 권리 요구를 싫어하고 반대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는 바로 그 시대에, 자신과 수많은 여성들의 보편적 인권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단두대에 올라 목숨을 잃은 위대한 페미니스트, 그리고 어쩌면 최초의 ‘꼴페미’의 인생을 기술하고 그가 남긴 글을 모은 책이다.

일단 주인공의 일생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그는 문필가인 귀족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올랭프 드 구주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열여섯에 시집을 갔고 열일곱에 아들을 낳았으며 그로부터 몇 달 후 남편과 사별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온갖 사회적 비난을 감내하면서, 남편 없는 여자의 자유를 죽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극작가로 명성을 날렸고 정치적 팸플릿을 쓰기 시작하면서 당시 역사의 격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최초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노예제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1788년 2월, <흑인들에 대한 성찰>을 출간하면서 그는 온갖 비아냥과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1791년, <왕비에게 헌정하는 여성 권리 선언>이 출간되었다. ‘왕비에게 헌정’이라는 말은 일종의 농담 같은 것이었지만, 훗날 권력을 잡는 자코벵 파는 그것을 빌미 삼아 올랭프 드 구주에게 왕당파의 혐의를 덧씌운다. ‘인권선언’의 ‘인간’은 당연히 남자고, 여자는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던 당시의 프랑스에서, 올랭프 드 구주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달라.”

프랑스는 1791년도 아닌 1944년에 이르러서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다. 무려 두 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올랭프 드 구주가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두 번째 여성이 되기까지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된 지 보름 후인 1792년 11월 3일의 일이었다. “근본적인 견해까지 포함해서 누구도 자신의 견해 때문에 위협을 받아서는 안된다.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여성 인권 선언’ 제10조의 당당한 요구는 그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실현되면서, 결국 오랜 세월 묵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가 IS보다 위험하다’는 칼럼으로 인해, SNS에서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김태훈이 한국 중계 해설자에서 물러난 2015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파트리샤 아퀘트는 <보이후드>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모든 여성들에게 동일한 임금과 기회를 제공하라는 페미니즘적 연설을 내놓았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그리고 여성해방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3021627241&code=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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