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럼포의 왕 로보
윌리엄 그릴, 찰리북, 1만5천원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동물학자 어니스트 시튼은 자신이 관찰하고 겪은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커럼포의 왕 로보'다. 미국 뉴멕시코의 커럼포는 로보라는 이름의 늑대가 지배하고 있다. 로보는 수백, 수천 마리의 양, 염소, 개 등을 물어죽이고 사냥하며 커럼포의 목장주들의 골칫거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초청받은 시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로보를 추적한다. 강력한 독약을 정성스럽게 만든 미끼에 설치하고, 비싼 덫을 놓았다. 하지만 로보는 시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보다 영악해서, 그 어떤 미끼도 물지 않고, 덫도 피하며, 오히려 사람을 조롱하듯 그 위에 똥을 싸놓기까지 했다.
시튼은 사냥꾼이면서 동시에 동물학자였다. 그는 로보의 무리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감히 로보를 앞서나가는 어떤 늑대가 있다는 것. 암컷이었다. 시튼은 그 늑대가 로보의 짝임을 직감한다. 흰 털을 가진 아름다운 암컷 늑대 블랑카. 블랑카를 잡으면 로보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적중했다. 블랑카의 시체를 찾기 위해 로보는 평소라면 절대 빠지지 않았을 함정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시튼에게 붙잡혀, 물과 음식을 모두 거부한 채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영국의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윌리엄 그릴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주로 색연필을 이용한 따스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필치로 로보와 블랑카, 로보의 무리, 사냥당하는 동물들, 그들을 추적하는 시튼의 모습을 담아냈다.
단지 그림만 다시 그린 게 아니다. 그는 시튼이 로보를 사냥해낸 후 늑대 보호 운동가로 변신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이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튼이 깨달은 바, 로보가 가축을 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이 늑대의 먹잇감이 되어야 할 다른 야생동물의 씨를 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그릴의 로보 이야기는 시튼의 원작을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오늘날의 맥락에 맞게, 야생의 피 냄새를 파스텔톤으로 지워내면서 환경과 생명에 대한 고민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커럼포의 왕 로보>는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며, 고전의 리메이크라는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몇 개의 고민이 뇌리에 남는다. 시튼은 로보를 죽이고 나서야 늑대의 '보호'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윌리엄 그릴은 그 이야기에 다시 한 번 현대적 맥락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것은, 늑대의 야생성을 이미 거세한 후에 벌어지는, 안전한 '애도'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 정복한 자연만을 '보호'하며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어네스트 시튼의 로보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시대적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수많은 갱스터물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바, '남성미를 뽐내는 마초가 짐덩어리밖에 안 되는 철없는 여자를 사랑해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의 몰락을 위해 종종 포르노적으로 학대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원형을 암컷 늑대 블랑카가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편한' 이야기이며 우리를 고민하고 사색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면이야말로 <커럼포의 왕 로보>를, 윌리엄 그릴의 것이건 그 원작이 되는 어니스트 시튼의 것이건, 두고두고 되짚고 곱씹어야 할 걸작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6.11.15ㅣ주간경향 1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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