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1

새 번역서, <야바위 게임>이 나왔습니다.

번역한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야바위 게임>. 원제는 Rigging the Game입니다. 영어 단어 Rig의 어감을 어떻게 살릴까 하다가 일단 가제를 달았는데, 출판사측에서 저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책의 저자인 마이클 슈월비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가령 앤서니 기든스처럼 학술적인 영역을 넘어 대중에게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는 슈퍼스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좋은 교수, 훌륭한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야바위 게임>은 미국의 10여개 대학에서 불평등과 관련한 사회학 수업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번역을 위해 책을 꼼꼼히 읽어보니 잘 알겠더군요.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갈고 닦아온 방법론과 화법이 촘촘히 배어들어가 있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을 학생들에게 단번에 느끼게끔 하기 위해, 10명을 교실 앞으로 불러내어 종이접시를 나눠주는 것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상위 10%가 종이접시 열 개 가운데 일곱 개 이상을 차지해버리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하고 나면 학생들로서는 집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죠.

이렇게 학생들의 이목을 잡아챈 후, 수업이 좀 지루해진다 싶으면 마이클 슈월비는 간단한 사례나 우화를 만들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곤 했나봅니다. <야바위 게임>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덕분에 학생 뿐 아니라 번역자 역시 틈틈이 쉬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순전히 '재미'로만 읽을 책은 아닙니다. 또한 저는 이 책의 내용에 백퍼센트 동의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불평등은 제도와 차별, 약탈로 인해 발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술의 발전이나 새로운 지식과 가치의 창출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특히 갓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을 상대로, 주로 경제 영역에서의 불평등에 대해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현재로서는 <야바위 게임>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블로그에 소개글을 올립니다.

교보문고
YES24
알라딘
인터파크

댓글 2개:

  1. 안녕하세요, 독자입니다. 번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중에서 '...특히 갓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을 상대로, 주로 경제 영역에서의 불평등에 대해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현재로서는 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부분에서 '잘 골랐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거의 그 경우거든요(2001년생... 이제 고3....).
    저는 번역가님께 "함께 고민해볼 생각거리들"에 관해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 가령, 챕터 3에 달린 문제들입니다. 이를테면,

    2.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의 행동의 규범이 되는 사회적 규칙에 대해 생각해보자. (1)거의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규칙이 존재하고 있는가? (2)가령 남자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들이 있는가? (3)집단적인 의사 결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4)누군가가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규칙은 어떠한가? (5)노동과 부가 나누어지는 방식에 대한 규칙은 어떠한가? (6)그렇다면 그 규칙이 낳은 결과는 어떠한가? ...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할 때 순서대로 답을 한다면
    1) 있다. 2) 간접적으로 제시되지만, '후계자'라는 단어를 보아, 대를 잇고 조상의 명예를 지킨다. 3) 초기에는 대화로, 이후에는 힘의 논리(?)로. 4) 헹 부족의 명예와 역사(story. tale)와 일관된 방식으로. 5) 상동. 6)불평등.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뭔가 더 공부하고 생각할 만 한 질문, 그러니까 통찰력을 제공하는 질문이 나올 만 한 대답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단답식으로 답이 이루어지는 게 제가 사회학이나 경제학에 대해 아는 게 없거나 작가가 스토리 속에 설정했을 표지들을 놓쳤기 때문인 듯 싶습니다. 혹시 번역가께서도 이 작품을 번역하실 때 '함께 고민해볼 생각거리들'에 대해 고민해 보시며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으셨다면,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답글삭제
    답글
    1. 안녕하세요, OOO님. 반갑습니다.

      제가 번역한 책을 꼼꼼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질문해주신 내용에 대해 답변한 후, 을 읽기 위한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 약간 이야기를 덧붙여볼까 합니다.

      2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법과 제도가 어떻게 가진 자들의 몫을 늘리고 지켜나가기 위해 짜여져 있는지 서술하고 있습니다. 3장은 헹 부족, 하 부족, 지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작은 원시적 공동체가 어떻게 계급, 제도, 약탈과 착취의 구조를 지닌 위계적 공동체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다룬 가상의 이야기이고요. 따라서 3장 "아홉 식구가 사는 골짜기"는 기본적으로 2장 "야바위 게임"을 이야기의 형태로 풀어 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특히 "함께 고민해볼 생각거리들" 대목을 옮길 때, OOO님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게는 다소 '답정너'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헹 부족의 젊은이는 사실 비겁자입니다. 침략자에게 협박을 당했을 때 모든 부족 구성원에게 알리고, 특히 '외적이 침입했을 때 뭉쳐서 싸우는 전통을 가지고 있던 남자들 모두'에게 알리고 함께 맞섰더라면 이겼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기 부족의 금만 쏙 빼돌리고 다른 부족이 약탈당하게 했죠. 특히 남자들에게 거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규칙은 그러니까, '남자라면 외적이 침략해왔을 때 목숨을 걸고 싸운다'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헹 부족의 젊은이는 실제로는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침략자 왕이 헹 부족의 젊은이와 일합을 겨룬 후 봐주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마치 그 젊은이가 '남자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줍니다. 그 결과 헹 부족의 젊은이는, 실제로는 헹 부족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약탈당하도록 만든 원흉이지만, 마치 '최악의 상황에서 차악 정도를 해낸 영웅'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사기극이죠.

      이 지점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란 왜 존재하는가? 가장 기본적으로는 외부의 적(침략하는 외국, 근대 이전에는 왜구라던가 북방의 유목민족 같은 무장집단)으로부터 구성원을 지켜주기 위해서겠죠. 또한 내부의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겠고요. 그런데 마이클 슈월비는 가상의 소규모 도시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그런 '정당성'이 과연 진실된 것인지에 대해서부터 의문을 품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2장에서는 '국가란 과연 그 출발부터 정당한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97쪽 "국가를 틀어쥐다" 앞부분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거죠. 그런데 모든 국가는 나름의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건국 신화는 자신들이 왜 이 새로운 국가와 지배 질서를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담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건국 신화가 없다고 해서 현재의 국가가 일순간에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건국 신화가 흔들리면 그 건국 신화를 차지하고 있는 정치 세력은 보다 쉽게 공격당하게 되고, 때로는 권력을 잃는 결과도 발생합니다.

      가령 한국에서 진보 세력은 분단의 책임이 미국과 일본 등 '외세'에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정당한 민주적 의사가 반영된 결과물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기획에 따라 탄생한 괴뢰 국가이며, 따라서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보 세력이 잘 말하지 않는 바는, 북한의 김일성 역시 통일된 민족국가의 건설보다는 자신의 권력이 보장받는 소련의 위성국가를 세우고 본인의 지배를 확고히하는데 훨씬 관심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지금 이 대화에서 길게 이어나갈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중요한 건 이런 식으로 '역사적 정통성'을 둘러싼 논쟁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통성의 신화와 탈신화화는 곧 사회가 어떤 구조로 구성되고 생산하며 생산물을 분배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와 많은 부분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겠고요. (여기서 사견을 밝히자면, 저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합법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당연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렇게 큰 줄거리를 파악해놓고 나면, 3장의 말미에 붙은 문제들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 같이 짧게 대답하는 것은 저자의 질문 의도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이클 슈월비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혹은 정당하다고 여기는 많은 제도들에 대해 '과연 이것은 정당한가, 이러한 제도와 관습, 그리고 도덕은 누구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죠. 헹 부족이 중심이 된 나라와 헹 대왕의 비밀을 독자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도덕성과 정통성의 신화에 대해서도 쉽게 의문을 던져볼 수 있겠죠. 그런 훈련을 해본 후, 현실 속의 본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여보자는 것이 저자의 의도인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2장과 3장을 다시 읽어보신다면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텍스트를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장의 말미에 붙은 질문에 대해서도 충실한 대답을 스스로 붙여보실 수 있을테고 말이죠. 마찬가지로 의 5장은 4장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고, 7장은 6장의 내용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바꾼 후 저자의 희망사항을 덧붙여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불평등을 인식하고, 불평등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며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까지 파악한 후,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고민해보자는 것이 저자의 큰 그림입니다.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는 간단히 대답을 드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되, 제가 너무 앞서나가며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기 위해 고심하다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제가 번역한 책을 이렇게 성의있게 읽어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도 드리고요.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