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3

<로마>에 대해 이것저것

  • 당연히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1.

<로마>는 한 가정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식모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떤 가족의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서사의 중심에 선 인물은 식모로 일하는 클레오이지만, 작품의 눈높이는 어린 시절의 감독 본인에게 맞춰져 있다. 아마도 막내아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

한국어로는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성체축일 대학살'이 언제인지에 대해서조차 알기 어렵다. TIME지의 기사에 따르면 1971년 6월 10일, 정부가 훈련시킨 깡패 집단인 로스 알코네스(Los Halcones, 영어로는 Falcons(매))가 시위 현장에 투입되었다. 마치 다른 학생운동 정파인 것처럼 위장하여 살인극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클레오의 남자친구였고 그를 임신시킨 후 외면해버린 페르민이 티셔츠 차림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씨네21>은 로마를 마치 별도의 도시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알폰소 쿠아론이 택한 영화의 재료는 1970년대 초 멕시코의 한 도시, 로마에서 살던 당시 3년간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사실 로마는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내의 한 구역의 이름이다. 물론 나도 가본 적은 없지만, 구글 지도로 확인되는 정보만 놓고 봐도, 멕시코시티의 한복판에 위치한, 옆에 큰 공원을 끼고 있는 멋진 곳이다. 구글 지도의 스트리트 뷰로 둘러볼 수 있다.

2019년인데, 인터넷으로도 확인 가능한 정보를 찾지 않은 채 기사를 쓴다. 다른 이들은 그런 기사를 보고 베낌으로써, 한국어로 유통되는 정보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다.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지겹다.


3.

그래도 국내에 나온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이 도움이 되긴 한다. 가령, 알폰소 쿠아론 본인이 직접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타일이 깔린 바닥을 보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클레오가 물을 붓고 청소를 한다. 어떤 곳에는 물이 고이고 다른 곳에는 물이 빠진다. 거품이 일어나고 부서지고 흘러간다. 고인 물 위로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가 비춰 보인다. 이 단순한 쇼트부터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것만 두 시간을 보고 있어도 만족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 지경이다. 물, 그림자, 거품. 극도로 단순한 구성 요소들을 섬세하게 담아낸 화면이 실로 압도적이다.

<로마>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마스킹(영사기가 빛을 쏘지 않는 스크린을 암막으로 가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스킹이 없다면 화면 바깥에서 허옇게 빛이 일어난다. 극중의 1970년 12월 31일 밤 11시 무렵 발생한 산불의 디테일 같은 것이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알폰소 쿠아론 본인이 연거푸 강조했다시피 이 영화는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극장에서 봐야 제대로 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명필름아트센터에서 관람해본 결과, 그 말이 사실이었다.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은 전방 뿐 아니라 측면과 후방, 심지어 극장의 지붕에도 별개의 스피커를 설치하여 바닥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사운드를 제공하는 방식인데, 영화를 보면 마치 <로마>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로마>는 멕시코시티를 주요 무대로 삼는 작품이며, 멕시코시티는 소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로마>는 카메라가 찍어낸 화면 뿐 아니라 마이크로 담아낸 사운드를 통해서도 관객을 압도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멕시코시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소음을 담아낸 후 그것을 다시 설계하여 배치하는데, 다른 극장에서 볼 경우 이런 감상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집에서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의 어머니 소피아가 큰 차를 몰고 가다가 어떤 소음을 만들어내는데,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극장에 앉아있으면 그 고통을 거의 온전하게 전달받을 수 있다.

작품의 결말이자 하이라이트인 대목에서 몰려오는 파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로마>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알폰소 쿠아론은 아주 소박한 소재를 통해 엄청난 숭고의 체험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비전을 갖고, 확고하게 실행에 옮겨, 성공했다.


4.

그런데 나는 알폰소 쿠아론이 제공하는 숭고의 체험에 압도되지 않았다. '이 사람이 관객인 나에게 숭고함을 느끼게 하려 했다'는 사실만큼은 절감했고, 이렇게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장악하려 드는 영화를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어서, 경탄했다. 하지만 나는 몰입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작품의 소재와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계속 소격효과를 불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오는 페르민에게 버림받았다. 소피아도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두 여성은 임신과 출산 과정을 거치며, 바다에서 빠져 죽을뻔한 아이들을 건져내면서, 단단한 연대를 이룬다. 바닷가의 그 장면은 실로 아름답다. 완벽하다. 숭고하다. 하지만 껄끄럽다. 계속 식모로서 살아가고 있는 클레오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 자체에 내가 동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멕시코의 원주민들은 스페인어를 쓰는 이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도시로 몰려와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농장주를 습격해 땅을 빼앗기도 하지만, 정복자의 후예들과 미국인들은 총 쏘는 연습을 하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사격을 여성과 아이가 고루 참여하는 레포츠인 양 포장해서 말이다.

이러한 현실을 굳이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로 양분해본다면 감독 자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빼앗는 자'의 편에 서 있었다. 멕시코시티의 로마라는 곳에서 원주민 식모를 두고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식모살이를 하던 원주민의 관점에서 1970년대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서사적, 혹은 윤리적 도박이 된다.

여기서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알폰소 쿠아론은 그 도박에서 잃지 않았다. 그는 '가진 자'의 눈으로 '못 가진 자'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만들 때 빠질 수 있는 모든 함정을 영리하게 비켜나갔다. 그러나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성공했다는 말과 동일하지는 않다. 클레오와 소피아는 개인적이지만 큰 사건들을 겪으며 단단한 정서적 유대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서사는 그 어떤 비윤리적 선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으로 맺어진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식모와 고용인이다. 클레오는 여전히 바깥채에 살며 따로 밥을 먹고 빨래를 하며 개똥을 치울 것이다. 성인이 되고 헐리우드에서 스타 감독이 된 알폰소 쿠아론은 수십년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 본인의 어린 시절을 보살펴준 식모와 꼭 닮은 원주민을 찾아내어 카메라 앞에 세워 연기를 시켰다. 자신을 키워준 식모와 같이 <로마>를 보기까지 했다("클레오에 해당하는 실제 인물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초연될 때 함께 <로마>를 감상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비윤리적이라고 지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과연 감동적인가?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감동'을 '향유'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5.

그렇다면 대체 뭘 어쩌라는 것인가? 나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져봤는데, 잘 모르겠다. 너무 잘 찍었고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지금 시대의 제1세계 관객들이 불편해할 수 있을만한 함정은 전부 피하면서도, 멕시코의 현대사 뿐 아니라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 이후 진행되어온 수탈의 역사까지 묵직하게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소재를 영화로 만든다면 이보다 잘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알폰소 쿠아론이 목표로 삼고 있는 관객이 아니다. 그 사실을, 영화를 보고 와서 곱씹는 지금까지도 실감한다.

우리가 영화를, 혹은 그 외의 창작된 서사를 소비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해서도 아니고 그 어떤 흠이 없어서도 아니다. 보는 이에게 일말의 불편함도 없게 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몇몇 작품들(머릿속에 몇 개의 예시가 지나가지만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다)일수록, '나는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올바른 작품의 팬이다'라고 우기는 소위 '팬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는 역설도 종종 발견되곤 한다. 윤리는 창작물이 아니라 창작물을 만들고 즐기는 사람의 몫일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로마>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볼 이유가 충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여러 번 봐야 한다. 하지만 그 소재와 이야기의 전개 등을 되짚어보면, 단순하고 상쾌한 감동 따위는 점점 설 곳을 잃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게 무슨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상문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 나 말고도 비슷한 고민에 빠져든 사람들이 있을테고, 누군가는 말문을 열어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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