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11월 형제들과 어머니, 외조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왔을 때, 마이클은 아홉살 반이었다. 이미 몇달 전에 베를린을 떠났던 아버지는 사실상 난방이 되지 않는 에든버러의 석조 주택 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밤늦게까지 사전과 교[206쪽]과서와 씨름하는 중이었는데,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에서 소아과 교수로 재직했던 그였지만 영국에서 계속 의사로 일하기 위해서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익숙치 않은 영어로 의사 면허시험을 다시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마이클이 쓴 자전적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없이 미지의 땅으로 이주해가는 가족의 걱정과 두려움이 극에 달했던 것은 도버에서 통관절차를 밟을 때였다. 그때까지 여행을 건강하게 잘 버텨낸 할아버지의 잉꼬 두 마리가 압수되는 것을 온 가족이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온순한 새들을 빼앗긴 것, 그 새들이 일종의 막 뒤로 영원히 모습을 감추는 것을 무기력하게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새로운 나라로 이주하는 것이 일정한 상황 아래서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경험까지 강요하는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마이클은 썼다. 도버의 세관에서 잉꼬가 사라진 사건은 그 이후 수십년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새로 획득하게 되는 정체성 뒤로 베를린의 유년시절이 사라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이 연대기 기록자는 실종된 아이를 위한 추도사를 쓰기에도 부족할 만큼 별로 남은 것이 없는 기억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내 안에는 내 고국이 얼마나 적게 남아 있는가(How little there has remained in me of my native country).[207쪽]
W. G. 제발트, 이재영 옮김, 『토성의 고리』(경기도 파주: 창비, 2011), 206-207쪽
2019-02-04
"그때까지 여행을 건강하게 잘 버텨낸 할아버지의 잉꼬 두 마리가 압수되는 것을 온 가족이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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