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4

박하사탕(1999)

나는 이 영화가 개봉 후 한창 화제를 끌 때에도, 이창동이 영화감독을 넘어 문화부장관으로 승승장구할 때에도 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KBS에서 매주 금요일 방송하는 '한국영화 100년 더 클래식'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돌아가고 싶다. 내가 <박하사탕>을 안 봤던 그 시절로.

<박하사탕>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줌의 윤리적 자의식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오프닝 크레딧이 뜰 때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시간의 역순이라는 핑계를 대고 서사적 구성이 전혀 맞지 않는 '억울한 나님'들의 현란한 전시로 꽉 채워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남들 때문이고, 여기서 그 '남들'은 대부분의 경우 여자이며, 여자 중에서도 특히 첫사랑인 순임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죽어라고, 정말이지 죽어라고, 여자 탓을 한다. 그가 80년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후 트라우마에 빠진 건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 여고생 때문이다. 때문인가? 물론 영호의 자기 서사 속에서는 본인은 착하게 여고생을 집에 보내주고 싶었지만 뒤에 다른 군인들이 다가와서 쫓아내기 위해 허공에 총을 쏘다가 잘못 맞았다. 그러므로 영호는 피해자다. 영호가 피해자면 누가 가해자인가? '비극적인 현대사' 탓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 그 자리에 나타났던 그 여자 탓이 없다고도 하지 않는다. 허공에 대고 총을 쏘는 그 쉬운 일조차 제대로 못 해놓고서(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사실, 순임이 겹쳐보이는 그 여고생을 영호가 일부러, 혹은 미필적 고의로 쏘아 죽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나?) 세상 모든 고통과 아픔을 짊어진다.

그의 인생에 나타나는 회상과 반추가 모두 이딴 식이다. 1984년, 신참 형사가 된 그가 본격적으로 타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또 어떤가. 고참들이 강요해서 고문을 하다 손에 똥이 묻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첫사랑 순임이 자신을 찾아와, 영호에게 '착한 손을 가졌다'는 둥 그의 상처받은 마음을 들쑤시는 소리를 한다. 그래서 평소에 본척만척하던 식당 종업원 홍자의 엉덩이를 더듬는다. 순수한 영혼이 상처를 받아 일부러 위악적 행동을 하며 순수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한 행동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이창동이 만든 영호의 서사란 '나는 울고 싶은데 네가 나타나서 내 뺨을 때려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호가 삐뚤어진 것에는 순임의 탓이 있다.

잘 따지고 보면 영호는 죽을 때까지 순임 탓을 한다. 혹은, 영호가 죽은 것에는 순임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짜여져 있다. 대체 어떻게, 마치 고르고13처럼 생긴 순임의 남편은 영호가 인생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는 그 시점에 영호를 찾아낸 것인가? 전날 밤까지 의식이 있었다던 순임은 대체 왜 영호가 자신을 찾아오자 의식을 잃었나?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영호는 이해받지 못한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억울억울 열매의 재료일 뿐이다. 그래서 영호는 죽는다. 순임과의 추억이 어린 그곳에서.

이렇게까지 순수하게, 100%의 네 탓으로, 100%의 억울함만으로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창동은 그걸 해냈고, 특히 남자 관객들은 이 영화를 '크 캬 커' 소리를 내며 보았을뿐더러,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영화라는 둥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2000년대 초에 이런 영화를 보며 엄지척 눈물 주르륵 하던 남자들이 지금 한국 영화계의 어엿한 중견들이다. 한국 영화판에 온통 억울한 남자들이 가득하고, 다들 '씨-발'이나 외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시발점이 바로 <박하사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나는 돌아가고 싶다. 이 영화를 모르던 그 순수의 시대로. 하지만 이미 봐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영호라던가, 영호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1999년 무렵의 이창동과 달리, 나와 이 글을 읽을 당신은 스스로의 행위와 그 행위가 낳은 결과에 대해,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몫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며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윤리적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박하사탕>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보고, 읽고, 만들어가며 살아갈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댓글 7개:

  1. 저도 개봉당시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뒤 근 이십여년 만에 kbs 한국영화 클래식을 통해 이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느낌이 좀 달랐던 게 시대가 변한건지, 제가 변한건지 싶었는데 이 글을 보면서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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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당시 다들 박하사탕에 열광하던 분위기 속에서, 영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제가 뭔가 좋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애석하게도 실제로 보니 정말 그랬고요. 언제 기회가 되면, 제가 이창동 영화 중 최고라고 생각하며 좋아했던 밀양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과연 그때 그 감상이 옳았는지, 어떤 이유에서 그 시절에 나는 그런 감상을 느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졌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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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봤는데 저는 영호라는 인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왜 삶의 마지막 날까지 그 오래 전의 순임이가 그의 인생에서 모든 어긋난 선택의 지점마다 존재했다는 식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당시 모든 매체가 기립박수를 쳤고 명작이라고 했기 때문에 저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호탕한 박수를 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내가 예술을 모르고 철이 없어서 그런갑다 라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어요.
    노정태 님의 글을 읽으면서 당시 영화를 보며 완벽히 해소되지 않았던 내 안의 의문이 좀 풀립니다. 이런 글을 읽고 싶어서 블로그를 찾아 오기도 했고요.
    노정태 님의 트위터 팔로워인데 더 이상 새글을 읽을 수 없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종종 들러서 잘 읽겠습니다. 오랜 동안 블로그를 살뜰하게 가꿔가시는 모습을 보니 버려진 제 블로그가 생각나고 그렇네요. 새해에 건강 그리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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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오래 전의 순임이가 그의 인생에서 모든 어긋난 시점마다 존재했다는 식"

      아, 정확합니다. 그걸 세 글자로 하면 '여자탓'이죠. 남들은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하는 영화인데, 저는 어이가 없고 어안이 벙벙해서, 기어이 리뷰 비슷한 걸 쓰게 되었습니다.

      트위터는 어느날 바빠서 안 들어갔는데, 다음날 보니까 좀 재미가 없어서 또 안 들어가고, 하다보니 지금 방치된 상태 같습니다. 뭔가 할 말이 있으면 블로그를 이용하면 되는 거고요.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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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블로그를 통해 계속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제가 감사하죠. ㅎㅎ 이틀 전에 휴대폰에서 댓글을 썼는데 여기 게시되지 않고 날아가버렸어요. 주요 내용은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블로그만이 줄 수 있는 충분한 호흡의 글이 더 읽기 좋다는 간만의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깔끔한 글을 읽고 싶어서 왔다는 얘기였습니다.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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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박하사탕 안본 영화인데 이런 전개였나보네요. 사실 이런 주제를 다룰 때 감독님도 그렇고 극본가도 그렇고 공공성과 작품성을 조율하는게 애매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진짜 같이 시각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매체라 신기하기도 하면서 호불호가 갈리죠. 영호라는 인물의 직업은 모르지만 보다 적극적인 극화는 미화가 되기도 하고 의미 전달면에서 역시 공공의 취향에 맞춰가야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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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 본 영화라면 한번쯤 보셔도 괜찮으리라 봅니다. 저는 싫어할 것 같았고 역시나 싫어하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니만큼 적어도 남들과 이야기할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꼭 보라고 강추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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