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31

[노정태의 뷰파인더⑲] 문재인 팬덤에서 보이는 친박연대의 그림자

 ‘부족주의’에 끌려 다니는 한국정치

●우상호·박영선의 ‘文대통령 생일축하’
●애착·동일시·모방·투사로 이어지는 팬덤
21세기는 다시금 ‘부족의 시대’
●아이돌 팬클럽 닮은 정치인 팬클럽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 敵이 필요
●투표용지와 스마트폰 통한 패싸움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2017년 4월 27일 경기 성남시 야탑역 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집중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문 후보의 연설에 호응하고 있다. [동아DB]
1월 24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라디오에 출연해 “오늘은 문 대통령님의 69번째 생신”이라며 “축하드린다”고 했다. 같은 날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오늘 문재인 대통령님 생신. 많이 많이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입니다!!! 벌써 대통령님과 국무회의에서 정책을 논하던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라고 썼다. 

두 사람 모두 여당 내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생일 축하를 주고받는 사적 친분이 있지는 않다. 그들은 왜 이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경선 때문이다. 일반 유권자 50%와 권리당원 투표 50%를 합쳐 후보를 결정하는데, 투표에 나설 만큼 적극적인 당원들은 문 대통령의 열혈 팬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문재인 팬덤’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다. 

정치인이 당선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을 타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라가 눈치를 보는 나라보다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민주당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경선에 임하는 정치인이 문 대통령 팬덤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 않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집단을 조율하는 정치 제도다. 유권자는 연령, 지역, 학력, 소득, 성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된다. 정치인은 자신이 중요시하는 의제와 유권자가 원하는 의제를 조율해 선거의 승리를 꾀한다. 하지만 팬덤 정치는 이와 같은 통상적 기준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겉보기에는 민주적인 듯 하지만,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느슨한 애착에서 완전한 몰입까지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1월 27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에서 열린 ‘민주당 정책엑스포 in 서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필자는 세상 속 온갖 주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 스포츠 팀을 응원하는 팬의 심리가 그 중 하나다. 

스포츠가 주는 즐거움을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가령 손흥민이 멋진 골을 넣는 모습을 보면 즐겁고 흥분된다. 하지만 손흥민의 소속팀인 토트넘 핫스퍼를 응원하며 승패에 일희일비하고, 라이벌 팀인 아스날에 분노하며 적개심까지 드러내는 행태는 잘 이해하지 못 하는 편이다. 

스포츠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수 팬, 영화 팬, 드라마 팬, 수많은 팬이 뭉쳐 서로 화를 내고 공격한다. 왜 사람들은 자신과 거의 무관한 집단에 가상의 소속감을 느낄까? 본인의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고, 정서적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때로는 폭행이나 그보다 더 심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 걸까? 

영국의 사회학자 앤드류 튜더(Andrew Tudor)는 팬덤이라는 대중문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1969년 학술지 ‘스크린’(Screen)에 ‘영화와 그 영향의 측정’(Film and the Measurement of its Effect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대중문화 소비자가 팬으로서 받는 영향을 네 가지 모델로 정리했다. 

첫째, 정서적 애착(emotional affinity). 대중은 특정한 스타를 향해 느슨한 애착을 느낀다. 둘째, 자기 동일시(self-identification). 영화의 관객이 스스로를 영화 속 등장인물과 동일시한다. 셋째, 모방(imitation). 영화 밖 현실에서도 영화의 등장인물을 모방한다. 넷째, 투사(projection). 영화 속 등장인물의 외모와 행동을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심리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몰입한다. 

이러한 고전적 분석틀은 20세기 중후반까지 상당히 큰 설득력을 발휘했다. 가령 엘비스 프레슬리가 스타가 되자 젊은 남자들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른바 ‘군함머리’를 흉내 냈다거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본 후 오드리 햅번처럼 검은 스커트에 진주목걸이를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들이 대거 출현했다거나 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요긴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핑커는 그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제임스 딘이 주연한 ‘이유 없는 반항’의 흥행 이후 청소년 사이에 칼싸움과 난폭운전이 늘어났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내의 경우에도 비슷한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지금도 연예인 누가 입었다는 옷이나 들고 행사장에 나타났다는 가방이 품절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다반사다. 애착, 동일시, 모방, 투사로 이어지는 팬덤의 고전적 해석 모델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래 예견한 1988년作 ‘부족의 시대’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세기까지는 저 모델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21세기의 팬덤 문화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같은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상시적으로 의사소통하고 있다. 이에 같은 ‘부족’을 형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앤드류 튜더의 설명은 스타와 팬의 1:1 관계를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팬덤 현상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팬덤 상호간의 관계를 눈여겨봐야 한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스타와 팬의 관계보다 팬덤과 팬덤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 작품이 ‘응답하라 1997’이다. 주인공 성시원(정은지 분)은 고등학교 2학년이자 H.O.T의 열혈 팬이다. 당연히 H.O.T 팬클럽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가 H.O.T, 그 중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토니 안과 맺는 정신적 관계는 앤드류 튜더의 설명처럼 직선적이지 않다. 수많은 다른 H.O.T 팬, 그리고 젝스키스 팬클럽과의 관계 속에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두 아이돌 그룹의 팬들은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고,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끝나지 않는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이에 따른 감정의 앙금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남아 있다. 대체 팬이 뭐라고, 팬클럽 활동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한 집단에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다른 집단을 적대시한단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은 거대한 현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근본을 이루는 바탕은 150명 내외의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가 쓴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21세기의 우리는 다시금 ‘부족의 시대’에 살고 있다. 

1988년 발행된 ‘부족의 시대’는 미래를 예견한 책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국민국가라는 추상적이면서 공식적인 정치 기구와,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경험하는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근대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마페졸리는 그런 근대적 구도가 곧 허물어지고 대신 감성을 공유하는 소집단, 즉 ‘부족’으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인은 사라지고 대신 ‘부족원’만 남는 셈이다. 

과거의 부족은 씨족과 혈통을 중심으로 구분됐다. 오늘날의 부족은 문화, 스포츠, 성별과 성적 정체성, 종교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또 원한다면 (고통스럽겠지만) 탈출해 다른 부족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 마페졸리는 개인주의가 쇠퇴하고 “다원주의, 수평적 네트워크, 감성적 연대, 촉각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신부족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어른의 짐을 벗어던진 어린아이가 돼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그의 ‘포스트모던’한 입장이었던 셈이다.

‘바보 노무현’에서 ‘친박연대’까지
2008년 3월 31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서청원 당시 친박연대 대표와 총선 출마자들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사진을 넣은 유세차량을 세워놓고 합동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DB]
문제는 팬클럽의 시대, 부족의 시대가 문화·예술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데 있다. 21세기가 되자 아이돌 팬클럽의 작동 방식을 참고해 만들어진 정치인 팬클럽의 시대가 열렸다. 그 주인공은 지역감정과 맞서 싸우며 낙선에 낙선을 거듭한 ‘바보 노무현’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할 무렵, 갓 대학교에 들어갔던 필자 역시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노란색 돼지저금통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인터넷에 노무현에 대한 좋은 소식을 퍼다 나르며 글을 쓰는 등 ‘노무현 부족’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당시는 언론 뿐 아니라 기성 정치권 모두가 그 파급력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수없이 많은 ‘각본 없는 드라마’를 쓰며 대통령이 됐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대중 동원과 조직 모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팬덤에 서 꽃을 피웠다. 박근혜의 팬덤 정치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가 탄핵당한 지금은 실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2008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가 거둔 성과를 돌이켜보자. 정당득표율 13%, 지역구 6석을 당선시켜 총 14석의 의석을 얻었다. 정작 박근혜 본인은 당시 한나라당에 적을 두고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바깥에서 박근혜의 이름을 걸고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 당선될 정도로 강력한 팬덤 정치가 작동했다. 

팬클럽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달리 표현하면 오늘날의 한국 정치는 공적 조직인 정당, 그리고 개인으로서 판단하고 투표하는 유권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누구 팬의 숫자가 가장 많은지, 누구 팬이 가장 극성맞은지, 누구 팬클럽 간에 싸움이 붙었는지 말았는지 같은 요소가 가장 중요해져버렸다. 우상호와 박영선이 문재인 팬클럽의 눈치를 보며 ‘대통령 생신 축하’를 크게 외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부족주의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는 가장 공적인 영역이자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드러나고 조율돼야만 하는 분야다. 정치가 부족주의에 끌려 다니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보며 충격을 받은 미국의 지성계가 치열한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는 ‘정치적 부족주의’의 서문을 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한다. 그래서 클럽, 팀, 동아리, 가족을 사랑한다. 완전히 은둔자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도사도 수사도 교단에 속해 있다. 하지만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다. 부족 본능에는 필연적으로 ‘우리’와 ‘저들’을 갈라놓는 세계관이 반영돼있다. 그러므로 토트넘 핫스퍼의 팬과 아스날의 팬은 서로 반목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적’을 필요로 한다. 

부족주의의 작동 방식은 나치를 옹호했던 독일의 헌법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칼 슈미트는 그의 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란 적과 친구를 나누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칼 슈미트의 세계관 속에서 정치에는 상위의 목적이 없다. 너는 내 편이냐 아니면 적이냐, 이 질문을 던지며 편을 갈라 싸우는 게 정치의 본질이고 그것이 전부다. 정치를 현실적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치 허무주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돌멩이와 곤봉 대신 투표용지와 스마트폰
팬덤에 의해 유지되고 작동하며 끌려가는 정치가 위험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다.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것을 보고 즐기기 위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현실의 안건이 있다. 설령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의견이라 해도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 또 소수자, 아니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보호받아야 할 인권을 갖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법치주의와 다원주의가 필요하다. 선거에서 졌든 이겼든 누구에게나 빼앗길 수 없는 인권이 있다. 또 모든 정치 행위는 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파괴하려 들 것이다. 온갖 폭력과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민주적으로 집권한 나치가 적에게는 민주주의를 허락하지 않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나누고, 선거를 통해 우리 편이 더 많다는 점을 확인하여, 이긴 쪽이 진 쪽의 의사를 완전히 묵살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것.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돌멩이와 곤봉 대신 투표용지와 스마트폰을 손에 쥔 부족주의자들의 패싸움일 뿐이다. 물론 모든 정치의 근간에는 적과 친구의 구분이 깔려 있다. 하지만 특히 우리는 북한이라는 안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으며 대외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정치는 여야를 막론하고 적용될 수 있는 공공선을 발견하고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자면 법치주의에 뿌리를 두고 다원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 

문 대통령 팬클럽의 환심을 끌기 위해 여당의 중진급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쏘아 보내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이유다. 한국 정당정치에 팬덤 문화와 부족주의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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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0

입양아는 세상에 가장 아프게 던져진 존재… 대통령은 왜 사과하지 않나

 [노정태의 시사哲-아무튼, 주말] 하이데거와 김국환의 ‘타타타’
일러스트=안병현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 없지.”

온 국민이 다 아는 그 노래, ‘타타타’의 첫 소절이다.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1991년 첫선을 보인 이 노래는 같은 해 11월부터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통해 일약 국민 애창곡으로 거듭났다.

‘타타타’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 6월, TV조선의 예능 프로그램 ‘사랑의 콜센타’에서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 이찬원이 받은 신청곡 또한 ‘타타타’였다. 그 노래를 신청한 건 대구에 사는 23세의 여성 김모씨. 1991년에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이 ‘타타타’를 신청하고 불렀다. 그만큼 진한 감동과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가락과 노랫말이라고 할 수 있다.

‘타타타(Tathātā)’는 산스크리트어로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여(如如)’라고 의역됐다. 사물도, 인생도, 있는 그대로 그러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하다는 뜻이다.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3분 남짓한 노래에 담아낸 셈이다.

그 노랫말을 서양 철학의 관점에서 짚어볼 수는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독일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꽃을 피운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그와 짝을 이루는 기투성(企投性, Antworfenheit)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당할 피 자에 던질 투 자를 합쳐 만든 번역어다. 말 그대로 ‘던져짐 당했다’라는 뜻이다. 반대로 ‘기투성’은 꾀할 기 자에 던질 투 자를 쓴다. 무언가를 어딘가로 던진다는 뜻이다. 요즘은 어려운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던져짐’과 ‘던짐’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세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온갖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기독교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만들었다고 가르친다. 서구의 계몽주의자들은 합리적인 과학과 이성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굴러다니는 저 돌멩이처럼 ‘그냥’ 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다. 고대 인도의 작은 나라에서 왕자로 태어난 부처도, 가난한 성당 종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철학을 공부한 하이데거도, 1948년 미군정 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김국환과 수많은 한국인들 모두가,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세상 속에 던져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태어나 있고,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 정신없이 살다가 덧없이 죽는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불교의 지혜와 서구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가, 이렇듯 뜻밖의 조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온 국민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 나왔다. 아동 학대를 겪었고 사망한 아이의 사건으로 애통해하는 국민 앞에서, 대통령은 마치 입양이 사건의 원인인 양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입양 부모의 경우에도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안에는 입양을 다시 취소한다든지 여전히 입양하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지만 아이하고 맞지 않는다고 할 경우에 입양 아동을 바꾼다든지” 하는 것을 대책이라고 제시하고 있었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와 여당이 나섰다. 문 대통령은 사전위탁보호제를 설명하고자 했는데 언론과 야당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변명은 사실과 다르다. 문 대통령이 말한 내용은 이미 4년 전에 법무부에서 반대 의견을 냈던 사안이다. “임시인도 결정 후 입양 아동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양하지 않는 등 소위 ‘아동 쇼핑’을 조장할 수 있다. 입양 아동에게는 큰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던 법무부의 당시 입장을 보면 마치 미래를 예견한 것만 같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사전위탁보호제가 시행되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여당 및 일부 지지자들도 더러 보인다. 전문가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동방사회복지회 전 입양사업부장으로 37년간 근무한 김혜경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선진국은 입양할 때 남자아이, 여자아이를 선택조차 못 하게 한다. 성별도 못 고르는데 성격이 안 맞는다고 아이를 돌려보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

문 대통령의 발언은 사회 복지 정책 차원에서 실로 끔찍한 소리였다.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황당하고 난폭한 언어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다. 왕자로 태어나 어른이 될 때까지 고통과 근심을 몰랐던 싯다르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의 길을 택한 이유다. 스스로가 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고 있는 한, 사람은 한없이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대통령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입양아와 입양 부모를 향해 사과하지 않는가. 세상을 향해 내던져진 것은 우리의 존재로 충분하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을 향해 아무 말이나 내던지는 그런 세상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본인을 청와대 밖으로 내던질 날만 고대하는 국민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문 대통령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

답답한 마음, 다시 ‘타타타’를 듣는다.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그렇다. 우리는 세상 속에 던져졌지만, 어쩔 수 없다. 불안과 근심 모두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필연에서 우연으로의 전환. 미지의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기꺼이 던지는 것. 하이데거가 말한 기투, 혹은 ‘던짐’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입양아는 그중에서도 아프게 던져진 아이들이다. 입양 부모들은 마치 야구선수처럼 스스로의 몸을 던진다. 아이들을 받아내어 가정의 품에 안고 키워서 사회를 향해 송구한다. 던져진 존재, 던지는 존재. 입양 가정을 향한 지지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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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유시민·김어준의 헛발질 뒤엔 음모론이 있다

거짓말하고도 '의혹 제기'였을 뿐?
거대 수구세력이 온 세상을 지배한다는 엉터리 망상 즐겨


지난 1월22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사과했다. 지난해부터 그는 검찰이 노무현재단의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고, 그래서 의혹을 제기했지만, "제기한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다며 검찰의 모든 관계자와 노무현재단 후원자 및 시민 전반을 향한 사과문을 공개했다.

2012년 1월6일 광화문광장에서 당시 통합진보당 유시민 대표(왼쪽)가 정봉주 전 의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1인 시위 현장에서 김어준 방송인과 대화하고 있다.ⓒ시사저널 사진자료

유시민은 들키면 사과라도 하는데 김어준은 그것조차 안 해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유시민과 친문진영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용이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과를 한 게 어디냐'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울시 교통방송 TBS에서 '뉴스공장'을 진행하는 김어준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비난이 쏠리는 듯도 하다. 유시민은 거짓말을 하다 들키면 사과라도 하는데 김어준은 그마저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과연 그럴까? 김어준이 쏟아낸 온갖 음모론, 특히 세월호 고의 침몰설 같은 악질적인 음모론의 해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유시민이 사과를 했다는 사실에 가산점을 줄 이유도 없다. 유시민의 '사과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게임인가? 음모론이다. 그 음모론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검찰·언론·야당 등 이른바 '수구 기득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나라다. 물론 현실은 전혀 다르다.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더불어민주당과 우호 세력이 180석 넘는 국회 의석을 차지했으며, 심지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도 진보 성향의 판사들이 과반수를 점하고 있다.

현실 속의 대한민국에서 주류는 보수에서 진보로 넘어갔다. 그런데 주류가 된 진보 세력은 보수를 상대로 지금도 되레 엄살을 부린다. 보수 기득권의 뿌리가 너무도 공고하기 때문에 현재 집권하고 있으며 의석이 좀 많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른바 '20년 집권론'을 통해 구체화됐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20년 집권론'은 단순한 정치 플랜이 아니다. 특정한 역사철학에 기반한 세계관의 표현이다. 문제는 그 역사철학이라는 것이 음모론이라는 데 있다. 바야흐로 조선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가 심환지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에 의해 독살당했고,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진보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다는 역사 판타지, 이른바 '노론 음모론'이 이해찬의 사고방식의 기저에 깔려 있다.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이해찬이 한 말을 들어보자. "우리 역사의 지형을 보면 정조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이해찬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는 곧 "김대중·노무현 10년 빼면 210년을 전부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한 역사"이기 때문에, 정치적 편향을 "복원도 아니고, 복원을 시도해 볼 틈새, 그 틈새 정도만 만들려고 해도 20년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220년 중 210년을 수구보수가 지배했다"는 음모론적 역사 해석 

물론 그런 음모론은 현실과 무관하다. 노론의 영수 심환지는 정조의 심복이었다. 지난 2009년 공개된 대한민국 보물 1923조 정조 어찰집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정조 독살설'은 산산이 깨졌다. 일제시대가 끝나고 미군정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도 단일한 보수 기득권층이 유지되고 있다는 주장 또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박정희는 집권 후 이승만 세력을 축출했고, 전두환의 5공 세력은 3공 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노태우 역시 전두환을 백담사에 보내지 않았던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은 보수의 내분에 힘입은 바 크다. 대한민국을 200년째 손아귀에 쥐고 있는 노론 세력이 대체 어디 있나.

하지만 이해찬을 비롯한 여당의 주요 인사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가지고 노는 막강한 보수 세력이 절실하다. 그래야 자신들의 온갖 책임지지 못할 말과 행동을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유시민으로 돌아가보자. 유시민은 사과문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4월 정치비평을 그만두었"다는 간단한 사실관계의 오류도 그렇지만, 자신이 검찰과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도 그것을 '의혹 제기'로 포장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왜 하필 '의혹 제기'라고 하는 것일까? 그 용어 선택을 곱씹어봐야 한다. 유시민은 '거짓말'을 했다고 사과하지 않았다. '의혹 제기'를 했고, 입증에 실패했는데, 아무튼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했을 뿐이다. 유시민은 여운을 남긴 것이다. 자신이 꼭 밝혀야 할, 비록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입 밖으로 꺼냈어야만 했던 진실이 어딘가에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의혹 제기'라는 용어를 택한 것이다. 유시민의 사과문에는 여전히 노론 음모론, 혹은 '수구 보수 지배론'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더 큰 음모론에 기대고 있는 건 김어준도 마찬가지다. 그는 늘 '냄새가 난다' '소설 한 편 써보겠다'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책임지지 못할 말, 새빨간 거짓말을 남발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 김어준 자신과 그의 방송을 듣는 이들이 '수구 보수 지배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 온 국민의 뇌에 구멍을 송송 뚫는다는 둥, 천안함 폭침을 조작한 후 '1번 어뢰'를 건져내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려 한다는 둥, 세월호는 사고가 아니라 외부 원인에 의한 고의 침몰이라는 둥, 상식에 맞지 않는 '의혹'을 떠벌리면서도 김어준과 그 추종자들은 당당하다. 거대한 악의 세력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데, '의혹 제기'를 하다가 좀 틀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노론 음모론으로 대표되는 '수구보수 지배론'. 그것은 모든 음모론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음모론이다. 그리고 유시민은 사과문이라는 것을 내밀면서도 그 음모론적 세계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안이 유시민과 김어준 등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이유다. 저들의 세계관을 떠받치는 엉터리 역사 판타지가 있다. 그것을 공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올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비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노정태는 누구

대학에서 법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를 썼다. 《아웃라이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자연과 이해관계》 등을 번역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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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4

‘AI 이루다’에서 ‘목 잘린 윤석열 만평’ 떠오른 이유

 [노정태의 뷰파인더⑱] 챗봇 성희롱이 폭력의 불씨인 까닭

● 블랙핑크 좋아하는 ‘스무 살 여대생’ 캐릭터
● 사용자 음담패설 학습하면서 논란
● 尹 향한 만평, 재현 통한 적개심 표출
● 이루다, 언어 성폭력에 쓰인 ‘사람 모양 과녁’
● ‘원치 않는 대화 거절할 권리’ 없는 챗봇
● 與 광역단체장 권력형 성범죄 떠올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성희롱 발언과 혐오 표현을 학습해 논란이 된 AI(인공지능) 챗봇 ‘이루다’ 서비스가 1월 11일 중단됐다. 개발사 스캐터랩은 이날 “최근 일어난 일들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루다 페이스북]
일화 하나. 1940년 9월,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에서 기원전 1만5000년 전후로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동굴 벽화가 대거 발견됐다. 말, 들소, 심지어 사자까지 그려진 놀라우리만치 생동감 넘치는 벽화에는 더욱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창 같은 무기를 던진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구석기인들은 단지 그림을 그리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위로 무기를 던져가며 일종의 제의(祭儀) 행위를 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헝가리의 역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는 대표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그 행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구석기 시대의 사냥꾼 예술가는 그 그림을 통해 실물 자체를 소유한다고 믿었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진 사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림 속의 짐승을 죽이면 실제의 짐승도 죽게 마련이라고 믿었다.” 

일화 둘. 제1차 세계대전. 유럽의 온 국가가 전쟁에 휘말린 가운데 각국 장교들은 뜻밖의 고민에 빠졌다. 분명 실탄을 지급했고, 병사들이 총을 쏘는 소리도 들렸고, 탄약을 소비한 건 분명한데, 적이 쓰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전쟁에 익숙하지 않고 사람을 향해 총을 쏜다는 데 거부감을 느낀 병사들이 허공에 대고 총을 쐈기 때문이었다. 

장교들은 과녁의 모양을 바꾸기로 했다. 이른바 ‘Bull’s Eye’(과녁의 중심)라 부르는 무미건조한 둥근 원형 대신 사람의 모양을 본 딴 판자를 세워놓고 총을 쏘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러자 고의로 오발을 내는 빈도가 현저히 줄었다. 사람을 닮은 무언가를 공격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실제 사람에게 총을 쏘고 있다는 거부감을 줄일 수 있던 것이다.

성희롱 발언까지 학습한 챗봇
스캐터랩은 AI(인공지능) 챗봇 ‘이루다’의 캐릭터를 ‘가수 블랙핑크를 좋아하고,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취미가 있는 20살 여대생’으로 설정했다. [이루다 홈페이지]
AI(인공지능) 챗봇 ‘이루다’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스캐터랩이 지난해 1223일 출시한 이루다는 출시 2주 만에 75만 명에 달하는 사용자를 모으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개발사는 이루다를 ‘가수 블랙핑크를 좋아하고,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취미가 있는 스무 살 여대생’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챗봇이 일부 사용자의 음담패설 등 성희롱 발언은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까지 학습하면서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에 스캐터랩은 1월 11일 서비스를 중단했고, 같은 달 15일에는 이루다 데이터베이스와 딥러닝 모델을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이 글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고민을 풀어보고자 한다. 이루다 논란은 최근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재현(representation)의 윤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두 사례의 의미를 곱씹어보자. 태고적부터 인류는 무서운 동물과 맞서기 전에 그 동물의 그림을 그려놓고 공격성을 표출했다. 그럼으로써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고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았다. 20세기에 와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는 행위의 심리적 부담을 없애는 방법은 ‘사람을 닮은 무언가’에게 총을 쏘는 것이었다. 

그 과정은 모두 ‘재현’과 관련이 있다. 예술에서 재현이란 간단히 말해 현실에 있는 대상을 모사해 다시 나타내는 행위다. 실제의 동물을 보고 동물을 닮은 벽화를 그리는 것, 실제의 사람을 보고 사람을 닮은 과녁을 만드는 것 등이 모두 재현이다. 어린이에게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쥐어주면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그리는 바로 그 행위다. 가장 기본적이며 원초적인 예술 창작의 방식인 셈이다. 순수한 추상 미술이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미술 창작은 재현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재현은 미술, 더 나아가 예술의 근본을 이루는 토대다. 표현의 자유, 예술과 창작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것은 재현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대로 재현이 허용되지 않는 대상이 존재하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조선시대 궁중 미술에서 왕은 언제나 텅 빈 의자로만 그려졌다. ‘감히’ 왕의 모습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금한다. 이슬람교는 지금도 알라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선지자 마호메트 역시 함부로 재현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프랑스의 풍자만화 잡지 ‘샤를리 에브도’는 그 금기를 깨뜨렸다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을 당했다. TV에서 정치 풍자 코미디가 실종된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그래서 걱정스럽다. 

즉 재현에 대한 금기와 처벌이 강한 사회일수록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억압적인 사회다. 무언가를 보고 그리고 따라하는 것은 인간이 선사시대부터 해온, 인간으로서 가장 본능적인 행위 중 하나다. 재현에 대한 담론과 논의가 궁극적으로 금지가 아니라 해방을 향해야 하는 이유다.

누군가에게 ‘사람 모양 과녁’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지난해 1125일 경기신문에 게재한 만평. [경기신문 홈페이지]
하지만 모든 재현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일 뿐이므로 아무 비판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재현은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을 본 딴 허구의 무엇인가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술인데 왜 그러느냐’, ‘창작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지 않느냐’라는 식의 반론은 많은 경우 부적절하다. 

라스코 동굴 벽화가 보여주듯 인간은 재현된 대상을 향해 공격성을 드러내왔다. 사람 모양 사격 과녁의 사례는 재현된 대상을 통해 폭력성을 ‘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사시대도 지났고 1차 세계대전도 거의 1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인간의 심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현실 속의 무언가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고 훈련하는 방식으로 재현이 동원될 때, 그러한 재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여권의 공격이 극에 달한 지난해 1125일의 일이다. 시사만화가 박재동은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하는 만평을 그렸다. 목이 잘린 윤석열이 추미애를 향해 “난 당신 부하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만평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비판이 거세지자 박재동은 윤석열의 목이 다시 붙어 있는 모습을 그린 후 “붙긴 붙었는데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네”, “모쪼록 조심하슈”와 같은 대사를 삽입했다. 재현을 통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원시적인 사례다. 

AI 챗봇 이루다를 둘러싼 논란도 연장선상에서 해석 가능하다. 이루다는 컴퓨터 프로그램이고, 컴퓨터 프로그램은 사람이 아니다. 성희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제작진 스스로가 밝혔다시피 이루다는 ‘20대 여성’을 재현한 인공지능이기도 하다. ‘20대 여성’을 향해 언어적 성폭력을 구사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는 남자들을 위한 ‘동굴 벽화’, 혹은 ‘사람 모양 과녁’이었던 셈이다. 

이루다를 향한 언어적 성폭력에 젊은 여성들이 분노하고 반발한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을 향한 공격성이 이루다라는 재현된 대상으로 쏟아졌다. 이는 그 폭력적 심리가 곧 여성을 향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윤석열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여권의 정치적 공격이 옳지 않다고 느끼던 수많은 시민들이 ‘목 잘린 윤석열 만평’을 보고 분노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언컨대, 그런 재현은 옳지 않다. 

AI 챗봇은 단순한 그림이나 영상보다 더욱 진지한 사회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재현물이다. 사용자와 상호작용(interaction)하기 때문이다. 구글이나 애플 등 IT(정보기술) 기업들도 AI 어시스턴트를 출시할 때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가령 ‘구글 어시스턴트’에게 “너는 남자야 여자야?”라고 물어보면 “돌맹이에게 성별이 없듯, 저도 딱히...”라고 대답한다. 애플의 ‘시리’ 역시 “궁금하시겠지만, 저에게는 성별이 없답니다”라는 답을 들려준다. 삼성 스마트폰의 AI 비서 빅스비도 “대답하고 싶은데 알쏭달쏭하네요”라며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고 있다. 성별 뿐 아니라 인종 등 논란이 될 수 있는 정체성의 영역을 모두 비워놓고 있다.

이루다는 ‘싫다’고 하지 못한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AI 어시스턴트에게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하되, 사람을 재현하지는 않게 하려는 취지다. AI 어시스턴트가 사람을 재현할 경우 다방면에서 오·남용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애초에 그런 가능성을 차단한 셈이다. 가령 AI 챗봇이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평소 현실에서는 할 수 없던 흑인을 향한 발언을 쏟아내기 위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몰려들 것 아니겠는가. 

이루다 논란은 글로벌 IT 기업들이 그간 괜한 우려를 한 게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줬다. 이루다는 ‘20대 여성’을 재현한 챗봇이다. 출시할 때부터 이 점을 명시했다. 그러므로 사용자들은 이루다를 ‘20대 여성’으로 상정하고 말을 걸게 된다. 문제는 이루다에게는 현실 속 20대 여성과 달리 ‘원치 않는 대화를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 AI 채팅봇이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바로 그 점이 더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원치 않는 대화를 거절할 권리’는 20세기 중후반 페미니즘이 쟁취한 가장 큰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의 페미니즘은 투표할 권리, 정치에 참여하고 출마할 권리에 초점을 맞췄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고, 오랜 시위와 투쟁 끝에 얻어냈다. 거칠게 말해 ‘공적 페미니즘’이라 부르기로 하자. 

20세기 중반 이후의 페미니즘은 다음 목표를 추구했다. 일상에서 여성이 겪는 부당한 대우와 차별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남녀 간의 사적인 관계가 투쟁의 영역으로 떠올랐다. 남자는 여자에게 저돌적으로 ‘대쉬’하고, 여자는 ‘내숭’을 떨고 ‘튕기며’ 상대를 유혹한다는 식으로 요약되는 성 역할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여자의 ‘no’는 ‘yes’라고 받아들이던 사회적 통념은 깨졌다.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즉 ‘no means no’가 새로운 기준으로 정착했다. 그것이 20세기 중반 이후의 페미니즘, 말하자면 ‘사적 페미니즘’의 성취다. 

이루다는 바로 그 ‘사적 페미니즘’이 없는 세상을 원하는 남자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개발사 대표는 이루다를 20살 여대생이라는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주 사용자층을 좁게는 10대 중반∼20대 중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20세 정도가 사용자들이 친근감을 느낄 나이라고 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루다 출시 이후 수많은 사용자들이 캡처해서 올린 대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시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사람은 거의 없다. 

이루다는 ‘싫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대신 ‘그런 이야기는 쫌 별로양’, ‘너무 어려운 주제당 ㅠㅠ’ 같은 식의 수동적 회피만을 할 뿐이다. 사용자가 너무 심한 표현을 한다 해도 ‘잠시 시간을 두자’며 10분 정도 상대의 메시지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이루다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거절할 권리’가 없는 ‘20대 여성’을 재현하고 있던 셈이다. 남자들이 만들어낸 ‘이루다 공략’을 보며 여자들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어떤 광역단체장들의 성범죄
거부할 권리가 없는 여자를 상대로 아무런 말이나 마구 내뱉는 행위. 그것을 여섯 글자로 요약하면 ‘권력형 성희롱’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나 직장 등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상위 직급에 있는 사람이 하위 직급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없고, 본인이 무슨 말을 하건 웃는 낯으로 대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권력자는 점점 ‘선’을 넘는다. ‘성희롱’의 차원을 넘어 ‘성범죄’로 향하는 것이다. 하급자가 완곡어법으로 거절해도 권력을 가진 자는 ‘좋은데 내숭 떠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한다. 가해자의 누적된 폭력과 그로 인한 피해자의 스트레스가 어느 수위를 넘어서면 우리가 아는 권력형 성범죄 사건이 되고 만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충청남도, 부산시, 서울시 광역자치단체장들이 권력형 성범죄로 인해 직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여성에게 ‘아니다, 싫다’라고 말할 권리가 있는 것. 그 권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그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직장 생활 하다보면 겪을 수도 있는 스트레스 받는 일에 여자들이 괜히 민감하게 군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사안도 아니다. 이것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인권의 문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술자리에서 무슨 행동을 하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대꾸해주는 여성들이 과연 그 권력자들에게 사람으로 보이긴 했을까? 피와 살과 영혼을 지닌 인격체,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여겼다면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의 권력자들에게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여성들은 ‘현실의 AI 챗봇’ 쯤으로 보였던 건 아닐까? 그러니 자칭 타칭 인권변호사에 민주화운동가라는 사람들이 하급자인 여성을 향해 온갖 추잡한 말과 사진 등을 보낼 수 있던 건 아닐까? 

이루다는 사람이 아니다. 이루다를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AI 챗봇 이루다로 파생된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현실의 여성에게 휘두를 수 없는 언어적 성폭력을 구사해도 무방하도록 만들어진 ‘재현물’이기 때문이다. 

재현물을 상대로 한 폭력은 인간을 상대로 한 폭력과 같지 않다. 하지만 재현물에 대한 폭력 역시, 특히 재현의 대상이 된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폭력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 센 조직 중 하나인 검찰의 수장 윤석열의 목을 자른 그림이 폭력적이었듯 이루다 역시 20대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적인 재현이며 대상화다.

어떤 재현은 다른 재현보다 폭력적
재현을 억압하는 사회는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다.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재현을 법으로 제약하려는 움직임에 자유민주주의자는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재현을 옳다고, 혹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재현은 다른 재현보다 폭력적이다. 재현물을 향한 폭력이 누적될 때, 그 재현의 대상이 되는 현실 속 사람에 대한 폭력으로 번질 가능성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현실 속의 폭력에 대해 보다 엄격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책임은 법적일 수도 있고 정치적일 수도 있다. 둘째, 재현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 더 적극적이고 치열한 토론과 비판의 장을 열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문제가 많았던 이루다 같은 프로젝트를 다방면에서 검토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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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7

트럼프가 보수 유튜버에게 ‘백마 탄 초인’인 까닭

 [노정태의 뷰파인더⑰] 불량식품 팔아 펼치는 정치 사기극

●특종! 낸시 펠로시 긴급체포
●음모론 신봉자가 만든 ‘대안현실’
●강용석·공병호 등 ‘공인’의 활약?
4·15 총선 부정론과 美 대선 부정론
●보수의 승리 무관심한 ‘보수 유튜버’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미국 하원이 1월 12일(현지 시간) 수정헌법 25조에 따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직무 배제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텍사스주 알라모의 국경장벽 인근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 근처의 계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알라모=AP 뉴시스]
특종! 낸시 펠로시 미 연방 하원의장이 긴급 체포됐다. 국가반역죄 혐의. 지금까지 잘도 법과 정의의 칼날을 피해간 펠로시도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됐다. 

또 특종! CIA(중앙정보국) 국장 지나 해스펠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체포됐다. 미국 대통령 선거 조작에 연루된 ‘도미니언’의 서버를 압수할 때 현장에 있던 해스펠은 사실 선거 조작에 개입한 흑막 ‘딥 스테이트’(Deep State)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딥 스테이트’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는 미군들이 지나 헤스펠을 체포했다. 현재 미국의 모처에서 심문하고 있다. 곧 부정투표의 전말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특종! 바티칸에서 교황이 체포됐다. 낸시 펠로시의 노트북에서 발견된 증거에 고구마 줄기처럼 엮였다. 미국 민주당 뿐 아니라 로마 교황청까지 얽혀 있는 소아성애자들의 네트워크가 탄로난 것이다. 소아 성범죄, 마약, 인신매매 등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추잡한 범죄를 저지른 그들은 곧 감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어디 있을까. 언론에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텍사스에 마련돼 있는 지하 벙커에 피신한 상태다. 사방에서 본인을 공격하는 ‘딥 스테이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곧 반격이 시작된다. 1월 20일, 조 바이든 가짜 당선자가 취임하기 전, 트럼프는 텍사스에서 군대를 일으켜 워싱턴 DC로 진격할 예정이다.

음모론, 탐닉하거나 유포하거나
이 지점에서 독자 여러분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뉠 것이다. ‘신동아’를 꾸준히 읽어 오신 독자라면 대체로 ‘에이, 저런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는 대체 뭐야’라며 일축할 듯하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저런 온갖 미국 대선 음모론을 진심으로 믿는 분들도 있다. 아마 이 글에도 미국 대선 음모론 신봉자가 키워드 검색이나 기타 방식을 통해 유입될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드디어 이 진실이 주류 언론에도 보도 되는구나’라고 좋아했다가, 이 대목에서 실망감을 느낄 것이다. 아마 악성 댓글을 달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이 칼럼의 도입부에 적어놓은 저 모든 내용은 다 가짜다. 허구이며 픽션(fiction)이고 사실무근 사이버 괴담이다. 낸시 펠로시가 체포됐고 프란체스코 교황이 소아성애자여서 바티칸에서 붙잡혔다니 너무도 밑도 끝도 없는 소리 아닌가. 농담이라고 쳐주기도 민망할 만큼 조악하고 악의적이며 일말의 개연성조차 없는 저질 음모론일 뿐이다. 

음모론 신봉자들에게는 특유의 왕성한 활동력이 있다. 댓글을 달고 게시물을 쓰면서 인터넷 곳곳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한다. 그런데 음모론에 탐닉하거나 유포하는 건 이름 없는 익명의 누리꾼 만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런 음모론 유포자 명단에 강용석 전 한나라당 의원과 공병호 전 미래한국당 공천관리위원장 등 ‘공인’에 해당한다고 할 만한 사람들이 버젓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3일 치러진 미 대선 결과를 두고 같은 달 9일 가로세로연구소는 ‘언론이 감추는 미국 부정선거 ‘우리가 깐다!’’라는 제목의 방송을 내보냈다. 한 시간이 넘는 방송 분량 중 20여분 가량이 미국 대선에 할애됐다. 강용석은 바이든이 얻은 표 중 적법(legal)하지 않은 표가 있을 것이라는, 지난해 연말 무렵 유행했던 흔한 미 대선 음모론을 설파했다. 그리고 다른 출연자들과 함께 바이든의 사진 몇 장을 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등과 비교하며 비웃고 낄낄거리는 시간을 보내며 방송을 마무리 지었다. 해당 영상은 2021년 1월 현재 30만 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공병호TV’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1110일 공개된 ‘미국 대선, 증거 발견 / 게임, 끝났다 / MIT출신 천재 공학자, 시바 박사의 위대한 발견’을 틀어보니 이런 말로 영상을 시작한다. “숫자는 흔적을 남깁니다. 아무리 감쪽같이 숨기려 하더라도 조작은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숫자에 고스란히 담기게 됩니다.” 무슨 말일까. ‘미국 대선이 전자개표기 등을 통해 조작됐는데, 그것을 MIT(매사추세츠공대) 출신 천재인 시바 박사가 밝혀냈다’는 것이다. 현재 조회 수 43만회를 기록하고 있는 히트 영상이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법한 유명인들이 하는 방송이기에 이 정도로 ‘수위’를 조절하고 있을 뿐, 일부 보수 유튜버들의 세계는 한층 더 심각하다. 수만, 수십만의 구독자를 확보한 유튜버의 입에서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했던 해괴망측한 소리를 듣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런 황당한 소리가 댓글에 댓글을 타고 인터넷으로 퍼져나간다. 결국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는, ‘대안현실’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히틀러가 아직도 살아있다’
1월 6일(현지 시간) 미국 상·하원이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승리를 확정하기 위한 합동회의를 개최하자 친(親) 트럼프 시위대 수천 명이 성조기를 들고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 의회를 점거했다. 일부는 맨손으로 의회 건물 외벽을 기어올라 난입을 시도했다. [워싱턴=AFP·AP 뉴시스]
음모론 신봉자들의 ‘대안현실’은 심지어 미 의회 의사당 폭력 난입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지난 1월 6일, 백악관 앞에 모였던 시위대가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고무되어 의회까지 행진한 후 창문을 깨고 난입했다. 그 결과 시위대 4명이 죽고 경찰관 한 명도 중상을 입어 결국 사망했다.
 
현장에 난입한 시위대는 워낙 스스로 증거를 많이 남겨놓았다. 인터넷으로 생중계를 하고 ‘셀카’를 찍어 사방팔방에 올렸다. 이에 미 경찰과 언론은 최근 며칠간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들의 정체를 상당수 파악할 수 있었다. 펠로시 하원의장 집무실에 들어가 책상 위에 발을 얹고 사진을 찍은 사람은 리처드 바넷. 아칸소주 출신 총기 단체 회원이다. 웃옷을 벗고 털목도리와 모자를 쓴 사진으로 유명해진 이는 제이크 앤젤리. 극우 성향 음모론 단체 큐어논(QAnon)의 신봉자로 스스로를 ‘큐어논 샤먼’이라 부르기도 했던 열성분자다. 그 외에도 대부분 비슷하다. 음모론을 신봉하는 백인 극단주의자들이다. 

하지만 ‘대안현실’에 빠져 있는 한국인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위대를 두고 ‘저놈들은 블랙라이브즈매터(BLM) 운동의 배후에 있는 극좌 테러 조직 안티파(Anti-fa)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도저히 설득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본인들이 지지하던 시위가 극단적인 폭력 사태로 치닫자 ‘저들은 우리 편이 아니라 적이 심어놓은 프락치’라고 우기기까지 하는데 대체 무슨 합리적인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즐겨 인용하는 히틀러와 관련한 유명한 독일 농담을 연상케 한다. 독일, 네오나치 집단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히틀러가 남긴 친필 편지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네오나치들은 환호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편지는 최근 작성된 것이었다. 그러자 네오나치들은 더욱 크게 환호한다. ‘만세, 총통께서 살아계신다!’ 

시대착오적인 네오나치에게 히틀러의 친필 편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그 편지가 히틀러 사후에 작성된 가짜라고 해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광신도들은 그 가짜 증거를 토대로 ‘히틀러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새로운 신앙 체계를 세워버리기 때문이다. 

음모론에 빠진 사람, 집단과는 합리적 대화가 불가능하다.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정해놓은 후, 자의적으로 편집한 정보만을 받아들여 확증편향을 키워나간다. 최근 발전한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유튜브 등의 추천 알고리즘으로 인해 그러한 확증편향은 더욱 커지고 있다. 내가 보고 ‘좋아요’를 누른 것과 비슷한 것만 자꾸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똘똘 뭉친 미 대선 음모론자들을 두고 ‘대깨문’이 아닌 ‘대깨트’라 부르기도 한다. 문재인의 ‘문’을 트럼프의 ‘트’로 바꾸어, 맹목적 신앙의 대상이 문재인이 아닌 트럼프일 뿐 하는 행동은 비슷하다는 비난을 담는 표현이다.

트럼프는 눈 뜨고 코 베인 허수아비?
2020년 5월 28일 경기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4·15 총선 부정선거 주장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사전투표 및 개표 공개 시연을 하고 있다.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영화 ‘미쓰 홍당무’의 명대사를 떠올려보자. 사람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보수 진영의 일각에서 이토록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 정도로 눈에 띄게 보인다면, 그 이유를 파악하고 해결해야 마땅하다. 즉, 이 글은 미 대선 음모론에 빠져 있는 대중을 비난하거나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특히 보수 진영이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다. 

한국의 보수 진영 일각에서 트럼프를 일종의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된 이유가 있다. 4·15 총선 부정선거 음모론 때문이다. 그들은 원래 이겼던 총선을 선관위의 농간과 중국산 전자투표기와 기타 등등 다양한 음모로 인해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 전모를 밝히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건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뿐이라고 믿는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통령제 국가다. 게다가 지방자치의 전통이 깊게 뿌리박혀 있다. 우편투표라는 200년 넘은 부재자 투표 방식이 존재하며, 각 주 심지어 각 카운티마다 개표 방식이 다르다. 또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사전투표에 해당하는 우편투표를 선호하는 반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반대로 현장투표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하여 미국 대선 당일, ‘K-트럼프 지지자’들의 행복회로는 과열을 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현장투표가 먼저 개표되면서 트럼프가 우세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구원자, 메시아, 초인 트럼프는 기어이 부활하여 일단 미국 민주당을 심판하고, 그 다음에는 한국 더불어민주당에 피의 불벼락을 내려칠 터였다. 

물론 그것은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필자가 지난 ‘뷰파인더’ 칼럼(‘느려터진 美대선 개표야말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의 선거 개표는 각 지역의 커뮤니티에서 관할한다. 부정선거가 벌어졌다는 말은 그 모든 풀뿌리 커뮤니티를 미국 민주당이 죄다 장악했다는 말과 같다. 그렇지 않다. 미국의 민주주의는(적어도 투표라는 절차는) 정상 작동했다. 다만 그 정상적인 절차가 원래 느렸는데 선거에서 진 트럼프가 패배 승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느린지 비로소 눈에 보였을 뿐이다. 

트럼프는 졌다. 역대 최다 득표인 7300만 표 이상을 얻었지만 소용없었다. ‘트럼프는 안 된다’는 민심이 무려 8000만 표 이상 조 바이든에게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모든 선거가 그렇지만 패배의 원인은 결국 후보에게 있다. 후보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마저도 하지 않은 채, 극단적인 지지층을 계속 부추기다가, 불장난이 너무 크게 번져 결국 미국 민주주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참사를 빚어내고 말았다. 그러고도 지금까지 신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자존심만을 지키기 위해 버티는 중이다. 

백번 양보해서 트럼프가 부정선거의 희생자라고 해보자. 현직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부정선거에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선거에서조차 눈 뜨고 코 베일만큼 무능한 허수아비일 것이다. 그런 트럼프가 어떻게 한국의 부정선거를 바로잡아줄 수 있단 말인가?

쏟아지는 ‘슈퍼챗’(Super chat)
미국 대선 부정 선거론자들은 답답하다. 원하는 답을 시원하게 듣고 싶지만, 주류 언론을 통해서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4·15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믿고 싶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 혹은 정당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달콤한 거짓말을 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으려니 자꾸 허구에 의존하게 된다. 카드빚을 돌려막듯,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는 선원이 바닷물을 들이키듯, 잘못된 악순환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그 사람들 개개인 뿐 아니라, 그들을 잠재적 우호 세력으로 여기는 보수 정치, 더 나아가 한국 정치 전체의 비극이다. 

더 나쁜 건 그런 심리 상태를 이용해 장사를 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보수 유튜버’들의 상당수가 그렇다. 일부는 진심으로 미국 대선 부정선거론을 믿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짐작컨대 대다수는 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조회 수가 높은 몇 개의 영상을 체크하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보수 유튜버’는 보수의 승리에 관심이 없다. 구독자들이 점점 더 극단적이고 허무맹랑한 소리에 빨려들게 몰아간다. 사회 전체를 향한 설득력을 잃고 정치적으로 고립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더 좋아한다. 그렇게 고립돼 있어야, ‘주류 언론은 우리가 아는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고 믿어야, 자신들에게 ‘슈퍼챗’(Super chat·실시간 후원금)을 쏘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을 팔아 돈벌이를 하겠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셈이다. 

트럼프의 행보 역시 ‘보수 유튜버’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는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넓히고 중도층을 포섭해 장기적인 승리의 발판을 다지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지지층을 극단적으로 몰아갔다. 그 결과 중도층의 민심이 대거 이탈했다. 결국 공화당은 조지아 주의 상원 의석 두 개도 빼앗겨 대통령과 상·하원을 모두 잃고 말았다. 트럼프는 미국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고 공화당을 파국으로 몰아가고 말았다.

불량식품 장수
사기꾼 잡는 검사 출신 국회의원 김웅은 ‘검사내전’에서 사기라는 범죄의 특성에 대해 설명한다. 물론 사기꾼은 나쁘다. 하지만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사기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 역시 ‘결백’하지는 않다. 본인의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고, 그렇게 사기 피해자가 된 사례를 숱하게 접하며 얻은 결론이었다. 

이는 정치적 사기극, 즉 음모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4·15 총선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억울한 마음이 모여 음모론으로 향했다. 그 음모론을 지탱하기 위해 더 큰 음모론에 몰두한다. 그러니 불량식품 장수 같은 사람들이 기승을 부린다. 가짜 뉴스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결국 소비자들이 먼저 각성하는 방법밖에 없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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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6

포퓰리스트의 공통점, 경제에 무능하다

 [아무튼, 주말_노정태의 시사哲] 미 의사당 공격과 ‘지정생존자’
일러스트= 안병현
미국의 연방 의회, 일명 ‘캐피털 힐’. 대통령이 신년 국정 연설 중이다. 대통령, 부통령, 상·하원 의원과 대법관까지 모두 한곳에 모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이 전부 죽는다면 미국은 송두리째 마비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미국은 1947년 이래 ‘지정 생존자’를 두고 있다. 대통령 유고 시 승계 권한을 갖는 사람 중 적어도 한 명은 별도 장소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도록 규정을 만들어 둔 것이다. 지정 생존자는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하고 국가 기능을 회복해야 할 책임을 진다.

2016년 9월 처음 방영한 미국 드라마 <지정 생존자>는 바로 그 제도 위에서 상상을 펼쳐나간 작품이다.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 분)은 정치 경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도시계획 전문가이자 학자다. 대통령이 발탁하여 워싱턴 DC에 발을 들였지만 아무도 그를 진지한 정치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 평범한 남자가 하루아침에 미국 대통령이 된 것이다. 정체불명 집단이 저지른 폭탄 테러로 미 의사당이 무너졌고, 입법 행정 사법의 3부 요인이 거의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최악 상황에서 대통령이 된 커크먼은 테러 음모를 밝혀내고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때로는 현실이 예술을 모방하는 것일까. 2021년 1월 6일, 미 의사당이 공격당했다. 이번에는 실제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시위대가 범인이었다. 트럼프는 백악관 앞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포기도, 승복도 절대 없다” “힘을 보여줘야 한다” “의회로 가서 항의하라”고 연설했다.

그에 고무된 시위대는 의사당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상하원 합동 회의를 거쳐 선거인단의 투표 결과를 확정하는 대선의 마지막 절차를 힘으로 방해하려 든 것이다. 그들은 경찰 저지선을 뚫고 계단을 올라 창문을 깨고 건물로 난입해, 기물을 훔치고 파손하면서 셀카를 찍고 자신들의 행동을 인터넷에 생중계했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네 명,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시각으로 1월 7일 새벽. 잠을 못 이루고 있던 나는 CNN을 통해 그 사건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는 충격 속에서 문득 <지정 생존자>를 떠올렸다. 워싱턴 DC의 엘리트들을 폭탄으로 한 방에 다 죽여버리고 시작하는 이야기. 엉겁결에 대통령이 된 평범한 남자가 잿더미 위에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이야기. 그것은 당시 미국에 들끓고 있던 포퓰리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당선 후 포퓰리즘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독일 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 이론과 정치 사상사를 강의하는 얀 베르너 뮐러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에서 포퓰리즘을 “민주주의 최고의 이상을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정의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정치인은 자신이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포퓰리스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진짜 국민’과 ‘가짜 국민’을 나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국민'만' 진정한 국민이라고 주장한다. 나머지는 ‘우리’를 위협하는 불순물, 침입자, ‘토착 왜구’다. 포퓰리스트는 그런 ‘비국민’을 적발하고, 징벌하고, 쫓아내 ‘순수한 국민’을 회복하는 숭고한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트럼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뮐러는 트럼프의 선거 유세 중 이 대목을 주목했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국민 통합이다. 기타 인간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유색인종, 이민자, 성 소수자, 여성, 장애인 등 소수 집단을 향해 쏟아낸 온갖 비하 발언은 그런 의미였다. 백인을 제외한 모두를 ‘진정한 미국인’이 아니라며 몰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가르는 나쁜 정치. 민주주의를 악용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타락한 민주주의, 포퓰리즘. 이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현 정권이 집권 후 보여주고 있는 거의 모든 행보가 포퓰리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는 자신만이 국민의 진정한 대변자라 주장하며 권력을 잡은 후에도 피해자 행세를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 역시 마찬가지다. 180석을 가진 후에도 야당을 탓하고, 언론을 탓한다. 엘리트 세력이 자기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국민의 적’으로 몰아간다. ‘검찰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시도한 검찰 장악이 대표 사례다.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도 포퓰리즘 세력은 그렇게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망가뜨렸다.

세상은 착한 국민과 나쁜 엘리트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각자 이해관계를 가지고 상호작용한다. 그래서 포퓰리스트는 현실 문제, 특히 경제 문제 앞에서 무능하다. 가령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은 물가가 살인적으로 치솟자 병사들을 상점에 보내 상품에 낮은 가격표를 붙이게 했다. 인플레이션은 ‘부르주아 기생충’ 때문이니 대통령이 가격을 낮추면 물가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집값 폭등은 정권의 무능이 아니라 ‘투기 세력’ 때문이라는 문재인 정권과 너무도 닮은 모습 아닌가.

포퓰리즘은 때로 긍정적 역할을 한다. 엘리트 중심 사회가 간과하거나 억누르는 대중적 열망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트럼프 현상도 그랬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실물 경제는 박살이 났는데 월가에서는 성과급 잔치를 벌이며 ‘그들만의 호황’을 즐겼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속 시원한 개혁을 하지도 못한 채 임기 8년을 흘려보냈다. 돌이켜보면 트럼프가 선거운동을 하던 당시 <지정 생존자>가 폭발적 인기를 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와 현실은 다른 법. 트럼프라는 폭탄은 미국 정치를 ‘리셋’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너진 건 공화당이었다. 대통령뿐 아니라 상하원을 모두 민주당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 선거 결과를 곱씹을 틈도 없이, 현직 대통령이 고무한 군중이 의회를 급습하는 초유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미국을 민주주의의 교과서가 아닌 반면교사로 볼 날이 올 줄이야.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타락한 민주주의인 포퓰리즘을 건강한 민주주의로 이겨내는, 그런 2021년이 되기를 소망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1-01-09

이낙연發 사면론, 국민통합 카드? 얕은 정치공학!

 [노정태의 뷰파인더⑯] 링컨·만델라의 사면권 행사와 李·朴 사면론이 다른 이유

●군주제 잔재와 민주주의 훈장 사이
●잘 활용하면 사회통합 주춧돌
●파벌·정당 싸움 도구면 존재이유 상실
●지금이 美남북전쟁 직후와 견줄 때인가
●주머니 속 볼펜처럼 사용해서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가 1월 3일 비공개 최고위원회 간담회를 마친 뒤 국회 의원회관을 나서고 있다. 그는 이날도 전직 대통령 사면과 관련해 “진영 정치를 뛰어넘어서 국민통합을 이루는 정치로 발전해가야 한다”고 밝혔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해야 한다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으로 인해 새해 초부터 정국이 떠들썩하다. 보수 진영에서는 내분을 노린 정치적 꼼수라고 비난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이러려고 촛불 들었나’라는 분노와 탄식이 쏟아져 나온다. 

그 모든 정치적 셈법과 이해관계를 잠시 접어두고, 여기서는 사면권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사면권은 대통령이 지니는 고유한 권한이다. 동시에 논란의 여지가 없이 삼권분립 원칙을 훼손하는 권한이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사법부 판결을 뒤엎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면은 법이 아니라 사람을 지정해 내리는 특별사면이다. 같은 죄를 지었지만 다른 처벌을 받는 경우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허무는 행위다. 

그럼에도 대부분 국가의 법체계 속에는 사면 제도가 있다.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는 여러 국가뿐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같은 민주주의 선진국에도 사면권이 존재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실상 사문화돼 있는 반면 다른 나라, 특히 미국의 경우 사면권의 행사가 비교적 잦다. 그로 인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대체 이런 제도가 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걸까.

헨리 8세의 큰 그림
왕의 말이 곧 법이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를 재판하고 처벌하는 것은 왕의 고유한 권한이었다. 따라서 왕이라면 재판 결과를 뒤집고 처벌하지 않을 권리도 있었다. 왕에게 주어진 사면권은 처벌권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뿐이었다. 

문제는 영국에서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며 입헌군주제가 시작됐다는 것이었다.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이후 왕의 권리는 지속적으로 줄었다.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으면 자유인, 즉 귀족을 재판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게 됐다. 

국왕이라고 해서 자신의 권한을 앉아서 뺏기고만 있지는 않았다. 때는 1535년, 헨리 8세 시절. 국왕은 사면권을 요구했다. 의회가 관여할 수 없는 국왕의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귀족 처지에서는 양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범죄자를 사면할 권리가 국왕에게 생긴다고 해서 귀족의 권리가 제약될 일은 없다고 본 것이다. 

이후 헨리 8세의 큰 그림이 드러났다. 의회에는 누군가를 감옥에 보낼 권리는 없었지만 국왕이 임명한 관리나 공직자를 탄핵할 권리는 있었다. 귀족들은 국왕이 임명한 관리나 공직자를 탄핵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키워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사면권은 범죄뿐 아니라 탄핵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했다. 의회가 가진 아주 중요한 권리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사면권인 셈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귀족들은 1628년 권리청원, 1689년 권리장전에서 사면권의 문제를 지적한다. 결국 1701년 왕위계승법에서 사면권에 대해서도 제약이 가해진다. 탄핵 중인 정부 인사에 대해서는 사면을 불가능하게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사면권은 폭넓게 인정하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후 영국으로부터 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했다. 미국인들은 영국과 달리 입헌군주제가 아닌 대통령제를 만들었다. 각 주가 기본적인 입법·사법·행정의 권리를 모두 갖되, 연방 단위의 대응이 필요한 사안에 있어서는 연방 정부와 의회 및 대법원이 권한을 행사하는 식이었다. 연방의 대통령은 나라 전체를 대표하는 군주의 지위를,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상징적으로 보유하게 됐다. 

그리하여 미국의 대통령은 사면권을 갖는다. 미국 연방헌법 제2조 2항은 이렇다. “대통령은 탄핵의 경우를 제외하고 연방 법을 어기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형의 집행 정지 및 사면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여기서 ‘탄핵의 경우를 제외’한다는 저 구절이 왜 들어가 있는지, 이제 독자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 그간 진행돼온 사면권에 대한 논의를 미국 헌법 제정 과정에서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법학계의 용어로는 계수(繼受)라고 부른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국가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세워진 대통령제 민주주의 국가다. 그 후로 세워진 다양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사실상 전 세계 모든 국가에 대통령 혹은 국가수반의 사면권이 법제화됐다. 군주제의 잔재, 혹은 흔적이 남게 된 것이다.

링컨은 왜 강경론을 버렸나
동물의 기관이 어떤 기능을 지니기까지 진화하지 못했거나 혹은 기능을 상실할 정도로 퇴화해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를 흔적기관(vestigial organ)이라고 부른다. 흔히 ‘맹장’이라고 하는 충수돌기, 꼬리뼈, 귀를 움직이는 이개근 또는 동이근, 사랑니 등이 잘 알려진 흔적기관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표적 흔적기관인 충수돌기에 대해 쓸모가 없고 있어 봐야 문제만 일으킨다고 여겼다. 소화에 직접적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간혹 염증을 일으켜 심한 복통을 불러일으키고, 때에 따라서는 사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최근의 의학적 연구에 따르면 충수돌기는 장내 미생물의 서식을 돕고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모든 흔적기관이 쓸모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는 의미다. 

사면권 역시 마찬가지다. 사면권은 군주제의 왕이 가졌던 ‘절대 권력의 흔적기관’이다. 그럼에도 근대 이후 이따금씩 그 나름의 긍정적 기능을 발휘했다. 특히 한 사회가 극도의 혼란과 갈등을 경험한 후 막 빠져나올 때, 국가 지도자는 기꺼이 사면권을 행사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할 수도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그의 뒤를 이은 앤드류 존슨의 사면권 행사는 좋은 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미국은 자국 역사상 최초로 군인을 징집했다. 당연히 그 수행 과정에서 오류와 잡음이 빈발했다. 미성년자가 군에 끌려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군역을 대신해 군대에 가는 이도 있었다. 탈영병을 붙잡아 조사해보면 그런 사례가 적지 않았다. 링컨은 틈날 때마다 그런 이들을 사면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도 기조는 계속됐다. 링컨은 전쟁을 통해 남부연합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지만, 전쟁이 끝나가자 견해를 바꿨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하나의 미국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벌어진 일의 처벌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남북전쟁 종전 직후 5일 만에 포드 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 일당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앤드류 존슨은 링컨의 유지를 계승했다. 18681225일 크리스마스. 존슨은 미합중국에 대항해 반군을 결성했던 이들에 대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사면을 받은 사람 중에는 남부연합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도 포함돼 있었다. 

6·25전쟁이 대한민국과 유엔의 승리로 끝난 후 김일성을 사면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면, 아찔하다. 미국인에게 이 결정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자. 남북전쟁은 군인만 62만 명이 죽었고 민간인 사망자 및 피해자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온 참혹한 전쟁이었다. 승기를 잡자 북부에서는 온갖 과격한 보복과 복수의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링컨은 패자를 용서하는 쪽을 택했다. 그의 죽음 후에도 뜻은 이어졌다. 그리하여 미국은 지금도, 물론 내부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하나의 연방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전을 겪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딛고 일어선 그 남아공 말이다. 1994년 넬슨 만델라는 흑인 최초로 남아공의 대통령이 됐다. 그는 199512월 진실화해위원회를 설립해 1998년 7월까지 과거에 벌어졌던 인권 침해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 대상자는 7112명이었다. 그 중 849명이 사면을 받았다. 양심을 통해 진실을 고백한다면 사면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즉 만델라는 조사 대상자의 9분의 1 가량에게 일찌감치 공민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를 용서할 때 진정한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만델라의 뜻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朴, 정치적으로 부활해 야당 표 깎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월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국무위원들과 인사하고 있다. 문 대통령 뒤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초상화가 보인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합리성과 법치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거대한 ‘정치’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국민 전체가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용서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국가 전체의 미래를 고민하는 역사적 결정이 요구되는 시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군주제의 흔적기관인 사면권은 긍정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법적 시시비비와 판결의 정당성을 떠나 화해와 용서를 통해 새 장을 열어야 하는 역사의 전환점이 있게 마련이다. 어쨌건 공동체가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가장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표자인 대통령이 그 결정권을 갖는 게 그나마 가장 합리적일 테니 말이다. 

요컨대 사면권이란 가장 크고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가 필요한 순간을 위한 것이다. 특정 정당의 후보로서 당선된 정치인이 아닌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첫 번째 시민으로서 대통령이 갖는 고유한 권한이라고 해석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국민국가 체제를 이루고 사는 한 사면권이라는 절대왕정 시대의 유산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과연 지금의 사면 논의가 ‘가장 넓은 정치’에 부합하느냐다. 우리가 특정한 사안을 해결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다. 두 전직 대통령이 유죄 판결을 받아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죄책 여부, 공과 과를 떠나 두 사람 모두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국민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현재의 맥락이 가령 남북전쟁 직후의 미국이나 인종 분리 정책 철폐 이후의 남아공과 견줄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 수 있다. 삼권분립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달성해야 할 국민 통합의 명분이 있는가. 꼭 그래야만 할 시대적·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는가. 이에 대해 국민 전반의 공론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게 현실 아닌가. 

지금의 사면 논의가 ‘가장 좁은 정치’에 부합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면론이 나온 시점, 맥락, 의도하는 효과 등에서 얕은 정치공학의 함의가 너무도 뻔히 보이니 말이다. 

철옹성 같던 ‘대통령 지지율 40%’가 깨졌다. 중도층의 민심 이반도 도드라지는 모양새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지난해 1228일부터 31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2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1월 4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문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못하고 있다’라는 부정평가는 59.9%로 집계됐다. 문 대통령이 한 발 빼고 있었지만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추인해주었던 ‘윤석열 쫓아내기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살아난 윤석열은 여론조사에 따라 대선후보 선호도 1위와 2위를 오간다. 여당이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서울시장 자리 역시 지킬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현 정권의 주요 관계자라면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면을 받아 정치적으로 부활해 야당 표를 깎아주기를 기대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낙연 대표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해 사면 논의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물밑에서 어떤 ‘교감’이 있었다 한들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략의 도구냐 민주주의 유산이냐
지난해 1229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2021년 신년 특별사면 발표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뉴스1]
가장 좁은 의미의 정치, 즉 파벌과 정당의 싸움 도구로 악용되기 시작하면 사면권은 존재 이유를 잃고 만다. 앞서 살펴보았듯 사면권은 군주제의 잔재다. 동시에 사면권은 절대군주가 갖고 있던 권력을 법치주의의 일부로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민주주의의 훈장이기도 하다. 군주의 권리를 법제화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법 위에 선 왕’은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면권은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가장 넓은 의미의 정치와 사회 통합을 위해서만 사용돼야 한다. 

필요하다면 링컨처럼 사면권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주머니 속 볼펜처럼 취급할 물건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지니고 있는, 가장 민주적이지 않으며 법치주의와 거리가 먼 제도가 바로 사면권이기 때문이다. 

여권에서 정략의 도구로 사면권을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유감스럽다. 야당 시절, 입만 열면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판해왔던 그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면권은 대통령제 가 전제군주정을 어느 정도 모방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유물이다. 제왕적 대통령을 상징하는 제도를 딱 하나만 대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사면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이 ‘탈정치 선언’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진위야 어찌됐건 대통령은 ‘탈정치’를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좁은 의미의 정치만을 해서도 안 되는 자리다. 행정수반이자 국가 원수로서 필요하다면 자신을 뽑아준 국민뿐 아니라 뽑지 않은 국민까지도 대표해 가장 넓고 큰 정치를 해야만 한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하는 것이 과연 그런 과업에 해당할까. 사면권은 대통령의 전속권한이다. 어떤 판단을 하건 최종적인 책임은 문 대통령 스스로 질 수밖에 없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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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4

조국에는 ‘조란다 원칙’, 구치소선 인권 참사

 [노정태의 뷰파인더⑮] 박범계 첫 임무, 尹 향한 공세 아닌 방역

●세기의 피고인 에르네스토 미란다
●인권의 역사는 범죄자 인권 보호의 역사
●경멸할만한 자의 인권도 똑같이 보호
●現정권 고위층 권리만 보호하나
●秋, 尹 공격할 사이 교정시설 난장판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대규모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가운데, 지난해 1229일 한 수용자가 “살려주세요”라고 쓴 문구를 취재진에게 보여주고 있다. [뉴스1]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장면. 범인과 경찰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마주 선다. 총격전이 오가고 범인을 체포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경찰이 범인을 향해 뭔가 읊어준다. 너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고, 어쩌고저쩌고…. 

그 유명한 ‘미란다 원칙’이다. 경찰이 범인을 체포할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야 하고,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 등을 알려줘야 한다. 

‘미란다’는 누구일까. 때는 1963년 3월. 당시 21세이던 에르네스토 미란다(Ernesto Miranda)는 18세 소녀를 납치하고 강간한 혐의로 체포돼 있었다. 2시간여 심문을 거친 끝에 죄를 자백했다. 그는 “자백이 임의로 위협이나 면책의 약속 없이 내가 하는 진술이 나에게 불리하게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의 법적 권리들을 충분히 알고서 취해졌다”는 내용이 담긴 진술서에 서명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미란다의 태도가 달라졌다. 미국 연방수정헌법에 규정된 피의자의 권리를 제대로 고지 받지 못한 채 체포되고 심문받아 자백했으니 무효라고 주장했다. 사실이었다. 경찰은 미란다에게 연방수정헌법 제6조에 따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미란다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진술서에 서명했다. 

애리조나 주법원은 진술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절차상 하자가 있었지만 내용은 사실에 부합하며, 진술서에 적힌 내용을 보고 최종적으로 서명했으니 결국 동의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렇게 내려진 단기 20년 장기 30년의 징역형을 애리조나 주 대법원도 확정지었다.

미란다 원칙의 탄생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1966년 6월 13일, 5대 4로 미란다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되는 자백이 불법 증거이며, 따라서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연방대법원은 미란다가 피고인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할 권리를 고지 받지 못했고, “이러한 피고인의 권리를 고지하지 않은 경우에 그 진술은 증거로 허용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미란다 원칙이 탄생한 순간이다. 

적잖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실 이야기다. 미란다는 결백한 양심수도, 존경받을만한 인권변호사나 법조인도 아니었다. 그 혐의가 명백한 강력범죄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미란다 원칙은 인권 보호의 역사에 빛나는 한 이정표가 됐다. ‘나쁜 놈’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현대 문명의 상징이 됐다. 

우리는 흔히 ‘인권 보호’라는 말을 들으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인권의 보호를 떠올린다. 착한 사람, 선량한 시민을 지키는 게 인권 보호라고 말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인권의 역사는 언제나 범죄자 인권 보호의 역사였다. 

1215년, 영국 귀족들은 존 왕에게 흔히 ‘마그나 카르타’라고 부르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국왕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했고, 국왕이 귀족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귀족을 처벌하려 할 때 여러 제약을 부과하는 게 골자였다. 귀족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받아야 할 상황이 왔을 때도 대비했다. 마그나 카르타 제39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자유민은 같은 신분의 사람들에 의한 적법한 판결이나 법의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아니하며, 재산과 법익을 박탈당하지 아니하고, 추방되지 아니하며, 또한 기타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왕은 이에 뜻을 두지 아니하며, 이를 명하지도 아니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민’은 지체 높은 귀족이나 왕족만을 뜻하는 표현이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정당한’ 절차에 따라 스스로를 재판하겠다는 이야기다. 애초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만을 지킬 생각이었다. 이에 왕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귀족뿐 아니라 중산층의 힘도 커졌다. 귀족들이 왕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법으로 요구할 수 있다면, 중산층과 평민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1628년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을 들이밀었다. 신체의 자유, 조세법률주의 등 중요한 인권 개념이 더욱 넓게 확장됐다. 이후 168912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제정됐다. 영국은 사상 최초의 입헌군주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중산층과 시민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바탕이 됐다. 영국은 이렇게 근대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한국식 민주주의’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늘어나면서 방역 및 교정당국이 서울동부구치소 직원과 수용자를 대상으로 4차 전수조사를 하기로 한 지난해 1230일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직원들이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지난번 ‘뷰파인더’ 지면에서 다뤘던 내용을 떠올려보자. 소설가 이인화는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대왕이 노론으로 대표되는 양반들을 꺾지 못해 조선이 스스로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이덕일 역시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같은 이는 문재인 대통령을 정조에 빗대면서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세력을 노론에 대입한다.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공통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왕권이 강화되고 신하, 귀족 등의 권리는 축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범죄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법과 제도 및 관습은 개혁의 걸림돌이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인권 타령은 잠시 접어두고 더 중요하고 숭고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온 나라가 힘을 모아야 한다.’ 박정희가 주창한 ‘한국식 민주주의’에 가까운 세계관이다. 

실제 역사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인권의 토대에는 영국의 귀족들이 왕을 협박해 서명하도록 만든 문서가 자리 잡고 있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당할 그날에 대비해, 왕이 자신들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온갖 법적 장치들을 넣었다. 

그런 것들이 정교화 되고, 축적되며, 중산층과 일반 시민에게까지 확산된 과정이 인권의 역사다. 인권의 보호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지체 높은 귀족, 존경할만한 중산층뿐 아니라, 미란다처럼 여성을 납치하고 강간한 강력범죄자까지 법에 의해 엄격한 보호를 받게 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란다의 범죄를 옹호하지 않았다.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체포, 수사, 재판받을 권리’라는 추상적 가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을 수호했다. 사회가 가장 경멸할만한 자의 인권마저도,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의 인권과 같은 기준에서 보호받아야 한다. 실로 당연해 보이지만 준수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현대 법치국가의 근본 원리다. 

한국 역시 미흡하게나마 같은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경찰이 피의자를 때리고 윽박지르며 수사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 게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묘사된 ‘가학수사’는 희화화된 측면이 있을지언정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수위를 낮추었다고 봐야 한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경찰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사로 인해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사망했다. 그 후 경찰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피의자를 심문하지 못하게 됐다. 세상이 뒤집히면서 얻어낸 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뿐만이 아니었다. 

구치소와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 역시 점차 개선됐다. 신영복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잘 묘사돼 있다시피 한국의 수용 시설은 인격적 대우와는 무관한 곳이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에서야 재소자의 인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교도관이 재소자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오늘날의 기준이 확립됐다. 

대한민국은 분명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보수 정권과 진보 정권이 손바꿈을 하면서도 그와 같은 경향은 꾸준히 유지됐다. 하지만 최근의 몇몇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우려스럽다. 가장 취약한 계층과 계급, 비록 범죄를 저질렀지만 보호받아야 할 인간의 권리가 아닌, 오직 현 정권 고위층의 권리만을 보호하는 듯한 경향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서울 동부구치소’라는 난장판
지난해 1231일 이용구 법무부 차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교정시설 코로나19 집단감염 현황 및 대책 브리핑’을 열고 “서울동부구치소 코로나19 확진자 집단감염 발생과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뉴스1]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쏟아져 나왔다. 형이 확정된 후에도 구치소에 수감되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기본적으로 구치소는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가 갇혀 있는 곳이다. 우리와 동등한 시민적 권리를 지닌 사람들이다. 대단히 온정적인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겠으나, 적어도 생명과 안전, 건강이라는 기본적 요소는 지켜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공격하는 일에만 혈안이 돼 있었을 뿐, 본인이 책임진 시설에서 어떤 난장판이 벌어지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조국·정경심 부부의 재판 과정 또한 우리가 민주화 이후 경험해온 현실과는 사뭇 달랐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이른바 ‘잡범’들의 인권은 보호하되 ‘범털’들은 검찰 수사 및 언론 취재 등을 통해 그 치부를 밝혀 여론의 심판을 받게 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잡음이 터져 나오고 때로는 비극적 결말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민사회가 정치 권력을 통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달랐다. 피의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지 않았고 비공개로 출석해 8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으면서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 진술거부권은 헌법으로 보장된 피의자의 권리지만 대부분의 경우 잘 사용하지 않는다. 형량이 높아질 수도 있고 구속영장 청구 사유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2017년 3월 22일 오전 9시 7분, 조국이 쓴 트윗에서 잘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다. “피의자 박근혜, 첩첩히 쌓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모른다’와 ‘아니다’로 일관했다. 구속영장 청구할 수밖에 없다. 검찰, 정무적 판단하지 마라.” 

피의자의 진술거부권은 정상적인 법치국가라면 보장되는 권리다.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란다 원칙’이 그러한 권리를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계층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과 달리, ‘조란다 원칙’은 그저 조국 본인 및 현 정권 관계자들의 인권만을 챙기는 얌체 짓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1966년으로 되돌아가보자. 미란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다시 재판정에 섰다. 저지른 범죄가 엄연히 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자백을 증거로 쓸 수는 없게 됐지만, 많은 범죄자가 그렇듯 그는 자신의 범행을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녔다. 미란다와 동거하던 여성이 증인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유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후 1972년 가석방된 미란다는 1976년 칼에 찔려 죽었다. 술집에서 카드놀이를 하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사태가 커졌다. 미란다를 살해한 혐의를 받은 용의자는 미란다 원칙을 내세워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은 그의 범행을 입증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석방됐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형사 피의자, 수형시설 수감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죄를 눈감아준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정확하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범죄를 수사하고 재판해 처벌해야 사회의 정의가 바로 선다. 

드러날 범죄는 드러나고, 처벌받을 자는 처벌받게 돼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란다 원칙에 의해 풀려났다 해서 미란다의 범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새로운 증거를 통해 결국은 처벌받았으니 말이다.

진보 정권 시절의 인권
20201223일 법원은 자녀 입시 비리 등 의혹을 받고 있는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정 교수는 총 14명에 달하는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 남편은 형사소송법 교수였다. 그럼에도 결국 법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500쪽이 넘는 판결문이 그의 범죄를 자세히 보여준다. 조 전 장관에 대한 재판 역시 비슷한 경로로 진행될 전망이다. 

경찰은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주취 폭행,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범죄 의혹 등의 사안에서 여당 및 집권 세력에 대한 봐주기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앞서 검토했듯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하며 수사하는 것과, 피의자의 범죄를 덮어주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미 현 정권에서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데, 더 이상의 퇴행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다. 

인권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가장 약한 자들, 더 나아가 다른 이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의 인권 역시 우리의 인권과 동등한 잣대로 보호받아야 한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윤석열 총장에 대한 부질없는 정치적 공세를 삼가고, 동부구치소를 비롯한 수형 시설의 코로나19 방역 상황부터 먼저 챙겨야 한다. 진보가 정권을 잡았는데 사회 전체의 인권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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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어쩌다보니 2009년 10월에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을 찾았습니다. 당시 맥락은 이렇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미디어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는데, 합법적인 투표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습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그 법을 헌재에 제소했는데 헌재는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법학을 배웠던 사람으로서 의문을 품었습니다. 절차적 흠결이 명백함에도 왜 이런 법을 합헌이라고 결정하는가?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았다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소위 '민주적 정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헌재는 '헌법적 정당성'을 따져야 하는 기구 아닌가?

제가 여기서 제시한 논제는 이후, 2020년 말 '검찰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검찰농단 검찰장악 시도를 했던 문재인 정권에 의해 반복됩니다. 문재인 정권 및 그 지지자들은 '민주적 통제'라는 말로 자신들의 법치주의 파괴를 정당화합니다만, 과연 그게 '민주적'이냐, 이 질문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쓴 글을 찾아서 공개하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연찮게 발견한 것을 혼자 보고 묵히기 아까워 이곳에 올립니다.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노정태/칼럼니스트 | 승인 2009.10.31 12:07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45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뜻’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이 대표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적절한 민주주의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개별적인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뜻에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승인을 받은 헌법 기관이지만, 국회의원은 기껏해야 지역구 주민 수십만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이정희 의원보다 곱절로, 아니 따따블로 ‘대표성’을 지니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그의 말은 더 많은 국민의 의지를 담아낼 것이며, 정당하다. 이런 결론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단일한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즉 본래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분열성으로 인해, 한 사람이므로 단일한 대통령보다 ‘국민의 뜻’을 덜 반영하게 된다. ‘대표성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그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당연히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에 필요한 모든 정당성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내 맘대로 산다, 그것이 나다’라는 식의 단순한 주장만을 반복하며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듯, 민주주의 또한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통치한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일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헌법의 수호자였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칭하곤 한다. 대통령도 선거로 뽑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지만, 판사는 임명되고 승진하는 별개의 직급 구조를 가진 집단이다. 반면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왔다. 헌법재판소가 의회의 결정을 함부로 뒤엎는 것은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옳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법에 대해 절차는 위법하지만 무효로 선언할 수 없다고 판시한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런 입장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고전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가 갓 시작할 무렵, 그리고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을 지배했던 헌법관이었다. 당시에는 행정권을 ‘왕’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왕이 뽑은 상원은 귀족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결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만한 집단은 하원 뿐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해보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더 이상 헌법 이론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부 내의 특별한 대행 기관인 하원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이제 정부 전반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염두에 두지, 그 한 부분에 대한 권리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조는 인용자. 189쪽, 『절반의 인민주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던 국민들은 그가 한나라당에 의해 탄핵당할 때 ‘아, 우리 국민들을 대변하는 헌법기관인 국회가 권력자인 대통령을 끌어내었구나, 나의 일반 의지가 실현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와 정 반대였다. ‘내가 뽑은 대통령한테 네깐 놈들이 뭐하는 짓이냐’는 분노의 파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러한 헌법적 인식이 타당하냐 그르냐를 떠나서, 국회나 대통령이 그들이 지닌 대표성만으로 모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미디어법과 관련한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헌재가 인정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대리투표를 했고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으며 입법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특히 대리투표의 경우,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명백한 대리투표 현장이 발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므로 그들이 만든 법은 정당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국회 격투기를 더 봐야만 하게 생겼다. 문을 뜯어 부수고 야당 의원들을 패대기치는 것도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니만큼, 절차적으로 타당하지 않더라도 무효화할 수 없는 입법 행위의 일부가 된다고 추인해버렸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누구인가? 어떤 헌법기관이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로 작동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도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인 헌법 수호 기관으로 활동해야 하며 그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나는 칼 슈미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수호 기관으로서의 헌재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