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9

왕중왕, king of kings, 諸王の王

C. S. 루이스의 책에서 봤던가? 기억으로 하는 이야기다. 틀릴 수도 있고, 틀렸다는 걸 지적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아무튼.

고대 히브리어에는 최상급을 한 단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야훼는 자신을 '왕들의 왕들의 왕'이라고 칭했다.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이었다.

그 아들인 예수 역시 평범한 왕보다 더 높은 왕인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예수는 자신이 '가장 높은 왕'이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왕중왕'이라는 표현을 써야 했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리스어 화자들에게 '왕들의 왕들의 왕' 같은 표현은 생경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어 화자였던 신약성서의 기록자들은 그 표현을 직역했다. 자기 언어의 표현을 쓰지 않고, 어색하게 보이는 그 '왕들의 왕'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겼다.

라틴어를 지나 유럽 각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시대에 도달했다. 직역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영어는 최상급 표현이 있는 언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정역의 번역자들은 그 표현을 있는 그대로 옮겨서, 'king of kings'라는 어구를 만들어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루이스가 저 말을 한 이유는 따로 있다. 성경의 언어가 번역하기 좋다는 것이다. 도치 병치 등이 주로 사용되어 있다. 특정 언어의 음성과 운율에 좌우되지 않는다.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루이스는 그렇게 보았다.

그래서 루이스는 '왕중왕'도 참 좋다고 했다(고 기억한다). 실로 간단한 언어적 장치를 통해 이전에 없던 심상을 전달하지 않았느냐고. 그 어구를 직역함으로써 영어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언어가 풍성해지지 않았느냐고.

한국어 성경은 어떨까. '왕들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는 '왕중왕'이다.

과연 '왕중왕'이라는 표현에 한국어 성경 번역자들은 어떻게 도달했을까? 중국어로 성경을 옮긴 예수회 신부들이 먼저 만들었을까? 일본어 번역의 영향인가? 기독교의 전파와 도래에서는 한반도가 일본 열도보다 더 빠르지 않았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나는 대답할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검색을 해보니 '諸王の王'이라는, 한국어와는 사뭇 다른 표현이 나온다는 것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뿐.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직역'은 나쁘고 '의역'은 좋다느니, 반대로 '딱딱한 번역투'에서 벗어나 '생생한 우리 입말'을 되찾자느니, 그런 추상적인 논의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식의 강퍅한 담론이, 특히 민족주의적 정념과 뒤엉키기 시작하면, 안그래도 얕은 우리말의 물줄기는 더욱 쉽게 말라 비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수를 '왕들의 왕'이 아닌 '왕중왕'으로 번역한 덕분에, 우리는 '프로권투 헤비급 왕중왕전'도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는 몸 좋은 남자 배우를 보고 즐기는 여성들이 '역시 맨 중의 맨은 휴 잭맨' 같은 농담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의 국적을 논하며 무언가를 솎아내자는 이야기나 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다.

댓글 7개:

  1. 가뜩이나 콘텐츠가 빈약한 한국어에서 번역투와 관련된 추상적인 논의에 집착하면 참 우리말이 풍성해지겠지요.

    팔구십년대에 번역된 서양 문학・철학책들을 보면 저 諸 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제 학문, 제 사물... 대부분 일본어 번역판을 참조하여 번역했다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죠.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모든, 여러가지' 란 의미로 쓰는데, 그럼 한국어로 옮기면 되지 굳이 한자까지 빌려와 어색하게 쓸 필요가 있을까 란 생각을 자주 했지요.

    동아시아에서 어찌 됐든 우리가 근대화의 후발주자인 이상 일본이나 중국의 콘텐츠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인정해야 더 건실한 앞날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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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첨언.
      요즘 나오는 판본(새번역, 회복역 등)에선 '만왕의 왕'이란 표현을 쓰더라고요.
      어느 쪽이든 귀에 쏙 박히는 번역이죠.

      개인적인 생각인데 kings는 단순히 왕들을 넘어 kingdom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왕이 마땅히 가진 권능과 권위', 이 위에 있는 왕이란 의미로요.
      최초 저자들만이 알 테니 후대의 번역가들이 함부로 침범하기 힘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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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말씀하신 추측이 옳은 듯도 합니다. 한편 페르시아어로 '샤한샤'라는 말이 정확히 'king of kings'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중동과 소아시아 일대의 특유한 화법이라고 볼 수 있을 테고요.

      제 생각에는 왕중왕의 '중'은 한자/중국어권 특유의 '중' 어법, 즉 가운데 중 자에 우월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서 나온 의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의역이 실로 적절했던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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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리고 위에 댓글, 데톱으로 작성했다가 오류로 날려먹었습니다. 이후 재차 시도해도 댓이 안 올라가서 폰으로..
    보드 문제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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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편 그 문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제 블로그에 답글을 달 때 어지간하면 PC를 이용하는 편이거든요. 구글 블로거가 정말 낡은(2001년인가에 서비스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입형 블로그의 실러캔스 같은 존재인데, 그래도 국내의 네이버나 테터로 가기는 싫고 워드프레스는 어딘가 마음에 안 들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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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테터 아직 서비스하나요?
      다른 블로그 서비스와 달리 유저 커스터마이징의 범위가 넓고 업로드 파일에 대한 터치가 없어서 야겜 리뷰용으로 잘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4~5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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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 티스토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테터라고 했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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