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는 실증주의적인 책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 혹은 그와 뜻을 함께하여 <반일 종족주의>라는 단행본 및 그 단행본의 토대가 된 연속강연에 참여한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책은 대단히 이념적이다.
여기서 나는 '이념적'을 '나쁘다'의 동의어로, '실증적'을 '좋다'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반일 종족주의>가 이념적인 책이라는 내 주장은, 말 그대로 이 책이 사실관계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이념적 차원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이영훈 본인 스스로가 경제적 사료를 통해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인물이다. 책에 참여한 다른 학자들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쟁쟁한 입지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런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반일 민족주의>는 오직 사실만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온갖 '거짓말'과 싸우는 책일 뿐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 참여한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대표 저자인 이영훈은 조선왕조의 몰락부터 대한민국의 건국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종의 거대 서사를 기획하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그 거대 서사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음험한 적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공들여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영훈의 이러한 기획이 드러나는 것은 1부를 지나 2부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20장에 이르러서이다. 그곳에서 그는 서구의 민족주의가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바를 되짚으며, 따라서 서구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달리 개인주의의 자양분일 수 있다는 논변을 편다.
이영훈의 구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과 '심성'을 경유하여, 한반도 거주민은 단 한 번도 철저히 뿌리뽑히지 않은 '장기지속의 심성'인 샤머니즘에 사로잡혀 있다는 아주 강한 주장을 펼친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은 그러한 샤머니즘의 원인이며 동시에 그 샤머니즘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의 저변에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서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단上段에 놓인 종족 또는 부족의 종교로서 샤머니즘입니다. 그것이 문명시대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립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특질을 강하게 띱니다. 한국의 민족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와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신학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 권위이자 폭력입니다. 종족주의 세계는 외부에 비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입니다.[251쪽]
물론 이정도의 주장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건 좌우를 넘어서는 문제다. 우파 버전이 '반일 종족주의'라면, 좌파 버전은 '한국은 아직 탈근대를 거론할 수 있을만큼 근대화하지 못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주장은 사실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이영훈이 그 '반일 종족주의'의 사례로 위안부와 징용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갔기에 논란이 커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친숙한 주장을 편다 해서 친숙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어찌됐건, '한반도의 전근대성'에 대해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인상비평을 내놓은 후 그냥 까먹어버린다. 반면 이영훈은 나름의 (실증적?) 근거와 (페르낭 브로델이라는 빅 네임을 경유한)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러한 논의 전개를 좀 더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조합이 아니라, 그 사실을 모으고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내는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 특히 2010년대 말부터 2020년대 지금까지의 정치적 과정의 전개에 있어서 일본을 적개시하는 민족주의가 정부에 의해 증폭되는 과정은 크게 우려스럽다. 이영훈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중 국군위안부는 완전히 잊혀지고 오직 일본군 위안부만 거론되는 상황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비 NL 계열의 여성운동가들도 자주 해왔던 것으로서 유의미하다. 즉, 구체적인 사실관계만 놓고 볼 때 <반일 종족주의>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차원에서 나름 유의미한 점이 없지 않다.
문제는 <반일 종족주의>가 다소, 혹은 상당히, 정직하지 못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이영훈은 자신이 오직 사료에 입각해 사료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특정한, 그리고 저자가 좀 뚝딱 만들어낸 듯한 인상을 주는 역사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철학은 일종의 뒤틀린 자학사관이며, 전도된 탈식민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은 한국에 근대성을 이식한 일본의 영향, 미국의 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견하고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며 독립국가를 만들어내신 이승만 대통령의 찬란한 능력을 예찬하고자, 그 반대편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 거주민들의 토속성을 물신화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물신화인가? 왜냐하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보더라도, 모든 인간 사회는 이영훈이 지적하는 정도의 야만성, 원시성, 주술성, 토속성을 두루 가지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는 배울만큼 배운 고학력 리버럴들이 자식들에게 백신 접종을 하지 않겠다며 시위를 하고, 스위스에서는 모스크를 폐쇄하는 '민주적 주민투표'를 거행한다. 우리가 잘 모르면서 모범국가의 사례로 꼽는 북유럽 국가들 또한 그 내막을 보면 비슷하다.
모든 국가는 각자 물려받은 '장기지속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SNS를 통해 포퓰리스트들이 활개치는 시절이 오면 그것은 다양한 외양을 띠고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더욱 심각한 모습을 종종 드러내는 듯 보인다.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영훈은 그러한 '장기지속의 심성'을, 마치 환빠들이 단군의 후예를 몰아낸 중국 한족 묘사하듯 바라본다. 이는 그다지 학문적으로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역사철학으로 수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토론해야 할 여지는 바로 그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훈과 그의 동료들이 지적하는 내용 중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전반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관, 특히 이승만이 저지른 공과 중 과오를 굳이 덮어놓거나 축소하려 하는 경향 등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이영훈이 말하는 '반일 종족주의' 내지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올바르면서도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