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14

철학을 공부하는 남학생들에게

--한 가지 금언.

자신의 성욕을 인간 보편의 욕망으로 치환하여 드러내지 말라. 그것은 잘생긴 프랑스 철학자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다.

2007-11-09

조선일보의 [88만원 세대] 언급, 과연 부정적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책이 조선일보에 언급되면서, 정작 중요한 내용은 쏙 빠진채 386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조선일보 편집진에게 왜곡된 형태로 인용되고 있다는 지적들은 다 옳다. 하지만 바로 그 왜곡된 인용이야말로 [88만원 세대]가 한국 사회의 맥락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책이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우선 조선일보가 [88만원 세대]를 자기들 입맛대로 인용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 잠시만 기억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조선일보의 입장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울 뿐더러 일관성 있는 정치적 행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86의 정치적 봉기를 막기 위해 부모들이 '용돈권력'을 통해 20대 표를 제어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들이다. 그 책을 세대간 갈등을 조장하자는 내용으로 읽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요컨대 이 칼럼의 논조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에 대해 새삼스럽게 '왜 책 인용을 그따위로 하는가'라고 분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큰 실익은 없다. 조선일보는 텍스트를 멋대로 해석하고 인용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경지를 획득하고 있는 독특한 글쟁이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일보가 어떤 책의 논지를 있는 그대로, 정치적 차원에서 왜곡하지 않고 인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조선일보가 아닐 터이다.자신들만의 독특한 영문법과 영어사전을 이미 내부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그래서 뉴욕 타임즈에서도 디워에 대한 찬사를 추출해낼 수 있는 것이 그들이다. 뭘 더 바래?


여기서 문제는 조선일보라는 한 신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저서가 그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어 인용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일종의 철학적 차원으로 승화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왜곡된 형태로나마 인용되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책은, 경제학자가 쓴 사회 경제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또 한국 사회의 지적인 미성숙으로 인하여 정치적인 책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88만원 세대]의 내용을, 그것이 한국 사회의 '밝은 음지'를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다는 것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지만, 정작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옳고 그름을 놓고 토론이 벌어지는 것을 나는 목격한 바 없다. 청년실업이 턱도 없이 심각하다는 것, 그것이 전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구성되어 있지 않은 한국에서는 청년들의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런 불편한 진실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석훈은 20대 왕자님 공주님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경제학적 용어를 통해 서술했다. 그 진실은, 막상 폭로되고 나니 너무도 명확한 것이어서, 그 누구도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할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폭로된 진실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혹은 당사자이며 피해자인 88만원 세대들에게 다른 이들이 어떤 자세를 요구할 것인지 등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 내지는 세계관의 문제가 된다. 조선일보는 88만원 세대를 '한 표 가지고 있는 얼간이들'로 바라볼 뿐이기 때문에 떡하니 저따위 칼럼을 써놓고,이영하의 이름을 들먹이면 젊은 층이 좋아라 하겠거니 착각의 댄스를 추고 있는 것일 뿐이다. 웹 서핑을 이상하게 해놓고서, 혹은 이상하게 하는 후배 기자의 덜떨어진 요약을 전해듣고서, 이렇게 하면 떡밥을 뿌릴 수 있겠거니 야무진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일보의 [88만원 세대] 인용은 지적 무능과 부정직을 드러내는 현상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입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식의 이간질이 그다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글에서 검색한 결과 붙잡힌 이따위 포스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시피, 88만원 세대 중 제대로 머리가 썩은 것들은 심지어는 조선일보의 칼럼조차 존중하지 않는다. 386과 정면대결을 펼친다고? 천만에. "귀는 솔깃하나 자세히 하나하나 따져 읽으면 괴리가 큼. 우석훈씨 다른 책을 안 읽어봐서 모르겠는데, 이 책만 가지고 판단하자면... 툭하면 프랑스, 프랑스 타령 하는 홍세화씨와 동급이라고 봄. 그 사람 말대로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트를 치느니(저자 역시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얘기했지만)', 차라리 그 시간에 한자라도 더 공부해서 요 아수라장을 헤치며 박차고 올라가는 길을 모색하는 게 훨씬 낫겠다."고 쨍알거리는 것이 바로 88만원 세대의 진면목임을 조선일보는 아직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

하지만 정 반대 방향에서 보자면, 조선일보의 왜곡된 정치적 인용은 [88만원 세대]를 읽고도 무기력하게 주저앉기만 하는 88만원 세대들에게 일종의 자극이 될 수도 있다. 그 책의 특정 어구가 등장하는 조선일보의 칼럼에는 어김없이 '이 책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는 논지의 리플이 올라온다. 조선일보의 말이라면 일단 믿지 않고 보는 것, 그리하여 그 어떤 언론도 믿지 않게 되어버린 것은 분명 안티조선 운동의 부작용이지만, 이 경우 그러한 사고방식은 오답의 오답을 통해 20대들에게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정답에 다소 근접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게끔 하는 효과를 낳는다.

[88만원 세대]는 태생적으로 정치적인 책이었고, 앞으로도 꾸준히 정치적인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는 올바르지 않은 정치적 지향을 위해 텍스트마저도 곡해하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를 가지고 있는데, 대중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선일보가 그 책을 다소 왜곡된 시각으로 읽는다고 해서 특별히 한국 사회의 담론적 수준이 더 저하되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는 '결국 [88만원 세대] 같은 책을 써도 조선일보에 인용되고 곡해될 뿐이다'라는 식의 회의주의에 빠짐으로써, 지금 이 시대를 지적으로 조망하려는 노력 자체를 허망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만연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신을 신고 걷다보면 꽃밭도 통과하고 똥도 밟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발을 버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2007-11-08

영국에서는 이래도 되나?

BBC Learning English에서 갓 나온 꼭지를 듣다가 오밤중에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실의에 빠져있는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다른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위로해주는 방법, 그럴때 요긴한 몇 가지 표현을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 중 첫번째와 두번째 예시가 매우 부적절하다.

Language for pointing out the positive side of a situation Examples
At least...

My flatmate, Sue, is always borrowing my CDs and she only gives them back when I go and ask her for them!
Well, at least she returns them to you.

But... My mum always calls me in the evenings when I'm trying to study.
Yeah, but she does call you! My family never call me. I have to call them!


이 페이지에서 직접 녹음된 목소리를 들어보면 화자가 빈정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내용을 함부로 가르치는 BBC의 반성을 촉구한다.

2007-11-06

최근 가장 큰 분노를 불러일으킨 게시물

허지웅 기자는 자신이 쓴 [88만원 세대]에 대한 기사를 블로그에 올려놓았고, 거기에는 득달같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리플과 트랙백을 달아놓았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나의 눈길을 끌었고 분노를 자아냈다. "20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20대의 침묵이 문제다"라는 제목의 포스트에서, 화자는 "정치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가능하면 오프모임에 많이 참석하려 노력한다. 최근에는 문국현 지지자 모임에 거의 매일 참석하고 있다. 그런데, 39살인 내가 막내인 경우가 많다. 도대체 나보다 젊은 친구들은 다 어디에 있는걸까?"라고 탄식을 한다. 바로 이렇게, 사회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를 한 정치인에 대한 지지로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이 대한민국의 5년을 '희망고문' 속에서 잘게 찢어버렸다는 사실을 저 글의 화자는 절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기껏 내놓는 결론이라고는 값싼 훈계일 뿐. '88만원 세대는 문국현을 지지하라'는 식의 레토릭이 횡횡하기 전에 그 후보의 빈약한 체급이 드러나버려서 참으로 다행이다.

제왕병 환자들

'희망'을 부르짖는 문국현 지지자들에게서 나는 [눈물을 마시는 새]에 나오는 제왕병 환자들의 육체적 현현을 본다. 혹자는 그들의 행태를 '의장님 문화'의 연속으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문국현 지지자들이 오직 386에 국한되어 있을 것이라는 단견에서 비롯한 착각일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00분 토론 출연을 계기로 문국현이라는 후보가 과거의 박찬종만도 못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이 일찌감치 폭로되었다는 것이다. 이명박과 이회창이 격돌하는 시점에, 엉뚱한 사람을 '희망'으로 모셔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주문을 외치던 문국현 지지자들은 닭 쫓던 개 꼴이 되었다. 대선을 40여일 앞둔 시점에서, 후보자 본인이 어떤 바람을 불러일으킬만한 파괴력을 갖추고 있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은 그런 제3후보와는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만 집중되고 있다. 잔치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