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16

라캉적 임상 진단 및 치료

"논쟁의 효과, 그리고 인문학과 과학"(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5일)에 달린 리플을 통해 이루어진 언어적 임상 진단과 치료 가능성에의 타진을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라캉은 의도적으로 글을 어렵게 썼습니다. 또 그 스스로 그걸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가는 과학이라는 개념에 안주해서는 안되며, 어떤 차원의 지식도 쉽게 진실의 차원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해야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스스로 잘 잡히지 않는, 미끄러지는 전략을 취한 겁니다."라고 레비나스라는 아이디를 쓰는 환자 A가 말했다. 나는 그가 진보누리에서 한윤형과 벌이던 논쟁을 통해, 그에게 일종의 언어 장애가 존재한다는 혐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경우에도 그러한 증상은 어김없이 드러났다. 가령 그 전 리플에서, 환자 A는 "라캉이 기본적으로 대수학을 인용, 차용했던 것은 자신의 이론을 R 도식과 L 도식을 이용해서 보다 간소화하고 보기 편리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였"다고 주장했다(띄어쓰기와 맞춤법 등은 환자 자신의 것을 그대로 살렸다). "의도적으로 글을 어렵게" 쓰는 사람이, "보다 간소화하고 보다 편리하게 가르치"기 위해 대수학의 도식을 차용했다는 모순을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저지르고 있다.

인식의 지체 현상 또한 그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심각한 징후 중 하나이다. "라캉은 1000명 이상의 환자를 상대한 최고의 임상의였습니다. 또 그 권위는 적어도 한다락 글로서 정리되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에는, 이미 플라톤이 제시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경험(empeiria)과 기술/학문적 인식(techne/eposteme)의 차이가 태연하게 무시되고 있다. 라캉이 1000명 이상의 환자를 상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경험 차원에 머물 뿐이다. 라캉의 방법론이 보편적 사태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라캉 본인도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아직도 전기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정신분석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령 제너의 종두법 같은 경우, 종두법을 발견하기 전 단계인 '전기 제너'가 남겨놓은 연구 방법론에 대한 연구, 아니 차라리 탐닉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지난 글에 달린 리플에서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없더라도 무엇이 과학이 아닌지에 대해 알 수 있고 그에 대한 일정한 합의를 이루어낼 수도 있다. 과학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라캉의 정신분석이 과학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같은 입장이다.

만약 라캉의 정신분석이 의학에 범주에 속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의학으로서 합당한 자격을 지니고 있음을 이론과 실천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가들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매일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으며,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적어도 미국에서는, 브루스 핑크에 따르면) 점점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만약 정신분석이 의학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한 나는 더이상 그에 대해 품평을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환자 A와 같은 이들은 정신분석이 의학으로서의 권위를 갖추면서도, 동시에 의학이 아닌 그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는 개념 착란을 보인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징후가 의학적 증상과 확연히 다른 그 무엇이라고 쳐보자. 그렇다면 환자 A는 '라캉은 의사가 아니다'라는 명제에 굳이 반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사가 아닌 사람을 의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1000명과 임상을 진행한 라캉의 권위를 내세운다. 이러한 심리의 이면에는 매우 원시적인 인정 욕구가 존재한다. "예전에 어느 뇌과학 연구 분야에서 상당한 권위에 있는 어느 학자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자연 과학은 물론 인문학에 대한 다랑의 독서를 하고 있는데, 이 분이 하는 말씀이 현대 뇌과학에서 연구하는 자아는 주체는 無라는 라캉의 주체 이론과 밀접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생산적인 대화의 예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묻는 모습을 보면 그 점은 매우 확연해진다. 그 대화를 통해 생산된 지식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라캉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과학자가 인정해 주었다'라는 작은 위안이 선사되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단순히 증상을 약화 시킨다는 의미에서 약물 치료와 행동 심리학이 임상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면, 이런 의미의 임상에서 정신분석은 당연히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의 임상은 특히 라캉의 임상은 차라리 그런 지위를 거부하"고 있다면, "단순히 증상을 약화시킬 뿐"인 의사들이 정신분석가들을 인정해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지젝-라캉주의자들이 라캉적인 의미에서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들은 라캉의 권위를 곧추세우면서도 라캉의 언어를 자신들의 상징계 속으로 포섭하지는 못한다. 세미나, 에크리, 알렝 밀레의 논문을 읽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환자 A이다. 자신이 먼저 라캉을 읽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나의 오해를 교정하는 것이 순서에 부합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그 언어를 소화하려 들지 않고, 도리어 상대방에게 그것을 읽으라고 강요한다. 그는 라캉의 언어와 직접 대면해야 하는 순간을 계속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와 라캉의 의견이 일치하는 단 하나의 지점이 도출된다. 이 환자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2008-03-15

3월 15일 경향신문 만평들


김용민의 그림마당




장도리



내가 이래서 경향신문을 본다니까.

2008-03-13

라캉과 정신의학, 그리고 관념론

하룻밤 사이에 논쟁이 정리되었고, 특히 아이추판다 님이 "라캉 위에 그어진 선"이라는 포스트를 통해 자신의 논지를 명확히 밝혀버린 덕에, 내가 이 논쟁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가 대단히 협소해진 것이 사실이다. 우선 입장을 밝히자면, 나 또한 라캉의, 혹은 넓은 의미에서의 정신분석학이 의학으로서의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프로이트와 융이 정신분석을 하던 시절의 의학과 현대의 의학은 완전히 다르다. 당시는 의학의 여명기였다. 크루그먼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 의학 교수들은 인간의 신체 기관과 작용에 관하여 수많은 정보를 축적해 왔으며, 이를 토대로 질병 예방법에 대해 극히 유용한 충고를 해 줄 수 있었"지만, "그러나 막상 병에 걸리면 대개는 치료할 줄 몰랐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행위를 의학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은, 환자가 치료되고 말고를 떠나서 당시 의학의 연구 방식 자체가 체계화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사가 하는 행동이 곧 의학이며 치료였던 것이다.

문제는 정신분석학이 바로 그 당시의, 굳이 명명하자면 '원시 의학'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 등의 텍스트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실천적인 차원에서 수행하는 독특한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만약 정신분석학이 의학이라면 우리는 전기 라캉의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없다. 실재계를 도입한 정신분석이 상상계와 상징계만을 이용하는 정신분석보다 낫다는 의학적, 통계적 결론이 이미 나와 있다면, 사실 전기 라캉 뿐 아니라 프로이트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이건 마치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인간의 정신, 마음 일반에 대한 연구이기 이전에 프로이트와 융, 라캉 등의 텍스트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와의 직접적인 대면 및 임상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인 인문학과의 차이일 뿐이다.

물론 정신분석학자들은 자신들이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임상'의 과정을 거친다는 이유로 스스로의 위치를 인문학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모든 인문학이 오직 텍스트만을 분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령 인류학의 경우 필드워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역사학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그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에 직접 가보는 일이 대체로 권장되는 편이다. 단지 임상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정신분석을 의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인류학과 사회학을 혼동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정신분석에는 의학에 요구되는 과학적 방법론과 객관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비판을 위해 그동안 벼르고 있었던 《라캉과 정신의학》을 읽었으니, 그것의 구절을 인용하며 정신분석이 '정신의학'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보자. 정신분석에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과, 정신분석가의 권위를 인정하는 프랑스의 경우를 비교하며 핑크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어떤 효과를 낳을까? 우선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가령 프랑스인들은 처음부터 분석의 효과에 훨씬 더 개방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의사에게 지식이나 권력을 부여한다면, 이는 그들이 의사의 암시suggestion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메스머Mesmer와 샤르코charcot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환자들은 <기적의 치료사>라는 명성 때문에 쉽게 그들의 암시에 말려들 수 있었다. 샤르코는 걷지 못하던 환자도 최면을 통해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프로이트는 자신이 최면을 사용했을 때엔 다른 의사들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적이 있다. 이는 아마 환자들이 프로이트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이트에게는 치료의 <아우라aura>가 없어서 환자들이 쉽게 암시에 빠져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가 유명해지자 당연히 상황은 바뀌었다. 환자들은 그를 쉽게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만큼 암시 효과도 증가했다. 그러나 대개 암시 효과는 수명이 짧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동일한 암시를 계속 반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점차 암시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갔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의 신뢰가 없이도 점차 치료를 잘 해낼 수 있었다. 암시에 매우 쉽게 빠져드는 환자라면 단지 분석가와 분석 일정을 잡는 것만으로도(단지 그것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잠재울 수 있겠지만, 이런 효과는 사실 <위약 효과Placebo effect>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분석의 효과라기보다는 환자가 처음부터 갖고 있던 자기 최면의 결과인 것이다.
62, 브루스 핑크, 맹정현 옮김, 《라캉과 정신의학》(서울: 민음사 2002)

아무리 너그러운 기준을 세우려고 해도, 치료자 개인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에 따라 다른 결과가 도출되는 행위를 과학적인 의료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일반적인 의학적 치료의 경우에도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에 따라 치료 효과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는 투여한 약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사례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상황일 뿐이다. 반면 정신분석의 경우 분석가의 개인적인 능력과 카리스마, 혹은 '치료자로서의 아우라'에 따라 분석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그러한 행위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이다.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정신분석이 '치료'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핑크의 책에 따르면, 정신병의 증상으로 환각, 언어 장애, 질문 부재 등이 나열되는데, 그 각각에 대해서 "사실상 <치료>라는 것이 불가능하다"(144-145, 같은 책)고 한다. 라캉이 말하는 정신병이 우리가 아는 정신병과 다른, 특수한 좁은 범주의 무언가를 지칭한다고 해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샤르코나 그 외 19세기 말에 활동한 의사들이 최면 요법 등을 통해 치료하고자 했던 정신질환 중 상당수는, 정신분석이나 최면요법 등이 아닌 일반적인 의학적 방법론을 통해 적절하게 치료되고 있다. 간질, 발작, 수면 장애, 그 외 수많은 정신질환에 대해 의사들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진지한 접근을 지속했고, 결국 그러한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밝혀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뇌의 이상으로 인한 간질의 경우 현재의 의학적 기술로써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말은 '정신병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라는 라캉의 말과 정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다. 간질을 치료하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말대로라면 (그가 말하는) 정신병은 치료가 아예 불가능하다. 이렇게 무기력한 의학을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만나본 적이 없다.

심지어 한 발 더 나아가면, 지젝처럼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만날 수 있다. 정신분석이 진지한 의학이라면, 설령 비유라고 해도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당신의 폐암을 즐겨라", 내지는 "당신의 편두통을 즐겨라"라고 환자에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는 (라캉이 말하는) 정신병을 '치료 불가능'이라고 도려내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정신분석이 다루는 대상이 극히 한정적이며, 긴박한 치료를 요하지 않는 시점에만 효용성이 있는 일종의 지적 여가 활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결국 이 논의는 핑크에서 시작하여 슬그머니 지젝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미 한윤형과 아이추판다 님이 나눈 논쟁을 통해 잘 드러난 바와 같이, 라캉을 통해 치료를 (한다고 주장)하는 핑크와 라캉을 해석하여 문화비평을 하는 지젝 사이에는 사실상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라캉의 글이 직접 번역되어 수입된 바 없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들은 두 명의 해설자를 통해 라캉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라캉을 임상의로 파악하는 일군의 무리와 철학자로 보는 또 다른 무리의 구분은 희미해진다. 이러한 논의의 지형도를 그림으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문제는, 라캉의 텍스트 자체가 번역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특성상, 프랑스어 혹은 영어를 수월하게 읽을 수 있고 또한 원서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라캉을 옹호하는 자신의 주장을 라캉 그 자체를 통해 지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지젝을 통해 라캉을 알게 되었을 때 지젝만으로는 자신의 말에 더 이상 논거를 댈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고 가정해보자. 프랑스어권의 독자라면 라캉의 《세미나》따위를 직접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게 안 된다. 따라서 그는 슬그머니 핑크의 책을 집어든 다음, '라캉은 임상의거든요! 이걸로 정말 환자 치료 할 수 있거든요!'라고 주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라캉의 용어를 빌자면, 라캉은 그저 상상계에 머물러있을 뿐 그 주장을 하는 이의 상징계속에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다. 도표를 보자. F와 Z가 있고, 위에 L이 있다. 그 사이에 그어져있는 직선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을 뜻한다.

한국의 '라캉쟁이'들이 오직 지젝과 핑크의 책만을 읽는다는 것, 라캉의 텍스트에 직접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캉에 대해 그렇게 논의하면서도, 정작 라캉 그 자신은 '라캉쟁이'들의 상징계에 포섭되지 않았다. 상징계에서 특정 요소가 폐제됨으로써 라캉이 규정하는 정신병이 발생하듯이, '라캉쟁이'들의 상징계에는 정작 라캉이 폐제되어 있다. 그들은 라캉을 이야기하지만 라캉이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부권적 기능이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학자인 핑크로 돌아가보자. 한국의 '라캉쟁이'들의 상징계에서 라캉은 폐제되어 있다. 그 결과 그들은 환각, 언어 장애, 은유 생산 능력의 결여, 통제되지 않는 충동들, 질문 부재, 심지어 여성화 등의 증상을 겪게 된다. 진정으로 슬픈 것은, 이들의 증상은 그 개념상 라캉이 말하는 정신병이기에, 정신분석을 통해 치료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캉쟁이'들을 치료하겠다는 발상은 과감히 접고, 라캉을 구원할 수 있는 해법에 대해서 고민해보도록 하자. 지젝이 설명하는 형이상학자로서의 라캉의 위상은 현대 프랑스 철학의 맥락상 무시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으므로, 라캉을 유사 과학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일종의 관념론으로 재가공하는 것이다. 나는 지젝이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라고 추측한다. 철학사적 맥락에서 볼 때, 라캉은 프로이트적인 관심사와 방법론을 헤겔적인 구상으로 실현한 관념론의 대가 중 한 사람이다. 나는 그와 그의 학파가 진행하고 있는 작업을 '프랑스 관념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브루스 핑크가 말하는 바와 같이 프랑스에서는 학교에서도 정신분석을 가르치며, 분석자의 권위가 살아있고 그에 따라 그것이 치료 효과를 거두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해도, 그 자체의 개념 정의상 정신분석은 도저히 과학일 수가 없다. 프로이트가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은 당시의 정황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캉과 그 후대의 사람들도 끝까지 자신들의 작업을 과학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과학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수학소' 등의 용어를 도입하였다가 소칼의 빈축을 사는 것 등은 '프랑스 관념론'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상담과 임상 사례 등의 연구를 통해 발전해온 인문학의 한 분야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예 임상을 없애라는 요구 또한 가혹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해법은 '과학'에 대한 페티쉬를 버리는 것이다. 용법에 맞지 않는 과학과 수학의 언어를 도입하면서 스스로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것은 일종의 자기 패러디가 될 수밖에 없다. 이미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나름의 방법론을 갖추고 전문적인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이 심리학보다는 차라리 인류학에 더욱 가까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레비-스트로스 이후 인류학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은 사회학자들이 쓰는 통계 프로그램을 억지춘향이격으로 가져다 쓰면서 자신들이 '과학'을 하고 있다고 우기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분석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추측한다. 소칼 논쟁을 통해 드러난 프랑스 철학자들의 모습은, 비유하자면 과학이라는 유방을 욕망하지만 미국이라는 엄마는 부정하고 싶어하는 도착증 환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1학문의 위상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긴 논의를 요약해보자. 정신분석은 의학으로서 갖춰야 할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지젝이 해설하는 철학자 라캉은 큰 의의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런데 라캉의 심리학과 정신분석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철학자로서의 라캉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은 심리학이 아닌 인류학적인 방법론과 자세를 받아들여,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치료가 아닌 인문학적 탐색과 통찰을 얻어내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라캉 이후 태동하고 있는 '프랑스 관념론'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한편 한국의 경우 라캉의 텍스트가 직접 유입되지 않음으로써 라캉주의자들에게는 라캉이 그들의 상징계에서 폐제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래서 그들은 라캉의 임상의로서의 권위를 빌어 그의 철학을 옹호하다가, 혹자가 라캉의 심리학이 지닌 약점을 지적하면 지젝 등의 문화비평의 성공 사례를 들어 라캉이 과학자임을 역설하는 등의 언어 장애를 보이는데, 이는 라캉이 말하는 바 정신병이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하고, 그냥 "징후를 즐기"는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렇듯 라캉을 폐제해버린 '라캉주의자'들이 라캉을 직접 번역하여 소개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라캉의 철학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들의 증상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2008-03-12

라캉 논쟁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라캉에 대한 글의 리플을 지금 봤는데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그래서 한국에서 라캉의 수용을 놓고 벌어지는 풍경이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네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캉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포지션이 너무 이상해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응 번역서도 없는 인간들 두고 싸우고 있다는 아이추판다 님의 의견은 올바르지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귤처럼 그냥 싸가지없이 '나는 과학자, 쟤는 사이비' 이러면 쌈박한 맛이라도 있는데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지젝을 통해 라캉을 배운 사람들도 '라캉은 임상의거든요!' 뭐 이러거든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라캉을 인문학자 내지는 프로이트 해석가로 옹호하지도 않는단 말야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그리고 차라리 레비나스처럼 지젝의 광신도면 또 별상관없고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홍준기나 택형 처럼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으면 별 상관없지만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요상한 라캉빠들은 정말 요상하지.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대체 라캉의 옹호자들에게 라캉이 뭘까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이런 질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네 그려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바로 그 지점까지도 라캉의 공식으로 까발리고 싶지만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용어를 배우지 못해서 지금은 그렇게까지 나쁜 짓을 할 수가 없네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근데 난 직접 못 만나봐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인터넷에서도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지젝빠는 오히려 봤는데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지젝과 라캉의 연결고리도 따지고 보면 그리 강한 것 같지가 않고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그러니까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라캉은 임상의고 지젝은 문화비평가야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임상에 쓰이는 정신분석의 기법이 문화비평에 쓰일 수 있는 연결고리를 제시하지 않는 한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지젝의 문화비평은 유추에서 출발한 곡예일 수밖에 없지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레비나스에서 봤듯이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라캉빠에게 라캉은 희미한 실재계의 사람이고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임상은 핑크로, 문화평론은 지젝으로 옹호하는 곡예를 벌이거든.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정말 답답한 풍경이로다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좀 더 부연하자면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가령 이제는 거의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에리히 프롬 같은 경우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그놈의 '사랑'이 너무 달착지근해서 짜증난다는 점을 빼고 보면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원시 프로이트 심리학 비슷한 것을 사회적인 문제에 적응시켜서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지금 봐도 말이 되는 것 같은 사회심리 이론을 제시한단 말이지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하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가 개인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가설 하에 출발하는데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그걸 입증할 방법이 없어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응 말은 될 것 같지. 많이 프로이트적이진 않지만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라캉을 통한 지젝의 문화비평도 마찬가지 오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말야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풀러의 경우 지젝을, 프로이트의 언어에 익숙한 이들에게, "와, 프로이트로 영화평론도 할 수 있어!!"라는 쾌감을 선사해주면서 지지세력을 획득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인으로 보더군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미국은 실재계를 보지 못한다' 뭐 이런 언술은 일상언어의 오류에 빠지는 거 아냐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비트겐슈타인이 봤다면 그냥 두지 않았을 그런 오류지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그래서 오히려 라캉의 토마스 아퀴나스를 의도한다, 는 지젝의 말을 솔직하다고 보고, 주디스 버틀러 등 보다는 위에 있다고 말하는 거지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비트겐슈타인까지 안 가고 러셀식의 단순성의 원리로 봐도 그렇지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주디스 버틀러는 뭐라고 하는데?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뭐 물론 실재계란 말의 유의미한 맥락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주디스 버틀러는 프로이트-라캉의 언어로 호모 섹슈얼이나 그런 사람들을 옹호하는, 페미니즘 문화평론가야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라캉으로 호모섹슈얼을!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세상에 안 되는 게 없구만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라캉으로 페미니즘을 해서 서울대에 주이상스라는 선본을 탄생시킨 서구 지식인들 중 대표자가 바로 주디스 버틀러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난 그때 그녀의 존재를 모르고 주이상스를 마구 조소했던 건데, 뭐 따지고보면 맥락은 있었던 거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하지만 이때 라캉의 세미나 등을 직접 읽은 일군의 꼴통들이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우리는 팔루스다 이렇게 나오면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택선배 말마따나

Plato scribens mortuus.님의 말:
그쪽에서는 진짜 면구스러워지긴 하겠다

[윤형] 플토빠는 대동단결-님의 말:
ㅋㅋㅋㅋ

The Guardian Profile - High priest of lit crit

The Guardian Profile

High priest of lit crit


A Catholic turned Marxist from a working-class background, Terry Eagleton was an influential English don - and active militant - at the heart of the establishment in Oxford. Now based in Dublin, he finds himself a 'semi-outsider' once more. Nicholas Wroe reports

Saturday February 2, 2002
The Guardian

It was no surprise that Terry Eagleton's memoir, The Gatekeeper, received both widespread and occasionally hostile press coverage when it was published last month. As Britain's best-known academic rebel and literary critic, and as a prominent and unrepentant Marxist revolutionary, Eagleton has a history of placing himself above the parapet and is well used to the abuse that is periodically heaped upon him. But this time he found himself disconcerted not by an attack, but by a generally favourable review of his book in, of all places, the Daily Mail. "In my defence, I should say it was reviewed by one of the first students I taught when I was a young Fellow at Cambridge in the mid-60s," Eagleton explains. "But when the Mail says nice things about you, it makes you think."

The review opened with the chilling claim that Eagleton was in danger "of becoming a national institution, like John Betjeman or Arthur Scargill". Eagleton has said that the "sheer horror of cliché, if nothing else," has helped preserve him from the stereotypical rightward drift of the militant young leftist. But perhaps more importantly, as is made clear in The Gatekeeper, he has never allowed himself to be fully embraced by any of the different worlds in which he has operated, so the chance of the establishment, or indeed anyone else, exerting an exclusive claim on him now seems reassuringly remote.

The title of his memoir comes from his time as a 10-year-old altar server in a Carmelite convent chapel in 1950s Salford. After initiation services in which novices renounced the world for the veil and a life of prayer, Eagleton would take part in an invariably distressing little ceremony where weeping parents said a final goodbye to their daughters. He has never been subjected to such gothic grotesquerie since. But this notion of negotiating a life lived on the cusp of different worlds is one that echoes through the rest of his story. He is a Catholic of Irish descent in Protestant England, a working-class boy whose professional life was spent at the heart of a ruling-class institution, a Marxist revolutionary who was not only tolerated, but rewarded by the liberal establishment.

John Sutherland, professor of English at London University, says Eagleton has been a recipient, "of what you might call repressive tolerance. In Argentina he'd have been one of los desaparecidos [the disappeared], in eastern Europe he'd probably be in prison, but what does Oxford do? Make him Warton professor of English literature in succession to John Bayley. And what does Terry do? In his inaugural lecture, slag off John Bayley."

Tariq Ali has known Eagleton for more than 30 years and says he has always had a sort of double existence. "He was one of the lads in the pub with the comrades and was wonderfully good at singing and writing songs. I remember a very good one in defence of the striking firemen. But then he'd go off and be a cult literary theorist. To his credit, he has always tried to bring his worlds together."

One reason Eagleton has been so successful as an academic is that he has also acted as gatekeeper to ideas. "In the 70s he took some incredibly complex stuff from continental Marxists like Althusser, Lacan and Macherey and explained what they were on about," says Sutherland. Professor Peter Widdowson founded the influential academic journal Literature and History after hearing Eagleton speak at a conference in the mid-70s. "It really was mind-expanding stuff and extremely influential. He's sort of the grand old man of British literary theory now and the way in which the syllabus has changed in higher education has had a lot of Terry behind it."

The increased prominence of largely forgotten texts by women writers, working-class writers or black writers, in part came from work undertaken by Eagleton. "But, interestingly, Terry himself hasn't really gone down that route," says Widdowson. "His criticism had been largely based on canonical authors, but his approach to Hardy or Lawrence or the Brontës - dealt with in the light of new theories - suggested new ways of looking at canonical texts, which have been followed through by other people. For instance, he'll take marginalised figures from books, push them to the foreground and re-shape the way in which we look at them. He takes very familiar texts and roughs them up. He calls it 'reading against the grain'."

This approach has been, according to some, a mixed blessing. In reviewing Eagleton's best-selling 1983 book Literary Theory for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the critic Denis Donoghue complained that the net effect of Eagleton's approach was to transform great writers from masters of their art into victims of their times. They become of interest, he wrote, only as "extreme instances of contradiction, and their value is merely symptomatic. If we read these writers, it can only be to see what it means to fail, to be in error or in bad faith."

One of Eagleton's responses to Donoghue was to include him in a list of hostile critics in his song, The Ballad of Marxist Criticism. The opening lines, to be sung to Something Stupid, are: "The day I found my tutor was a popular reformist sentimentalist/ Nostalgic petty-bourgeois social democrat subjectivist empiricist..."

Eagleton will be 60 next year, which on the face of it seems an appropriate time for him to take stock of his life and career. Other critics and writers of his generation, such as Sheila Rowbotham and the late Lorna Sage, recently published well-received autobiographies. But for Eagleton the form itself presents a difficulty. In a 1978 essay attacking the "discredited theoretical doctrine" of John Bayley, Eagleton asserted that "the whole body of his work is caught within a spurious belief that the truth of a text resides in the consciousness of its author". Something to ponder when writing a book about yourself.

"I do dislike the genre," Eagleton says. "Autobiography is enormously popular in Britain, where they love a character, but I do find it all rather predictable." So he has called his book a memoir, which is "a way of writing about ideas which can be weaved in and out of a life."

The book is a captivating read while remaining tantalisingly non-disclosive. Of the few names mentioned several have been changed. As one exasperated reader put it, "it doesn't help in telling us who he is. Five years ago he moved to Dublin but we still don't know whether he has gone home or is in exile. Is he a refugee from Oxford or an Irishman gone back to the ould sod?"

In fact Eagleton, born in Salford in 1943, is a third-generation Irish immigrant. He has one older and one younger sister, both of whom teach English. Two younger brothers died in infancy; one after his skull was damaged at birth, and the other when a nurse applied an ointment that had just been smeared on another child with an infection. His father had won a grammar-school place but didn't take it up because of the expense, and the family were both poor and "socially sophisticated enough to be conscious of their inferiority".

At primary school Eagleton remembers being the only boy to wear a coat. He was further distanced from his classmates by often being absent with asthma and by being a budding intellectual. He went on to a casually sadistic grammar school run by the De La Salle brotherhood. Among a large hinterland of cousins only his strand of the family had children who went on to higher education. "So for me it wasn't the usual story of being in the tribe and then being kicked out," he explains. "I was always on the periphery. When I was 28 at Oxford, relatives would ask my mother 'what is Terry going to be?' They obviously didn't regard being an academic as a job and were mystified why I was still an overgrown schoolboy."

He says he used to worry about his receding relationship with his own roots "but then I became rather stoical about it. It was foolish to believe this was a divide that could be simply crossed. I had no illusion that I could turn the clock back, and anyway that world is all gone now. But instead what I tried to do was write on behalf of my father's people."

Some of the most affecting and personal passages from The Gatekeeper concern Eagleton writing about his father, whose death he was told about as a 17-year-old sitting the Cambridge entrance exams. He says he felt anaesthetised when he received the news and recently noticed, after finishing The Gatekeeper, that when writing the scene he had focussed on his tutor's behaviour and not his own. "It was about how he coped with telling me, not with how I coped with being told."

At Cambridge, a fellow student says, "we all expected him to get a starred first and he did. I should also say that Trinity was a rather rich and grand college and Terry fitted it like a glove. There was none of the iconoclasm that came later." As an undergraduate Eagleton came into the orbit of the great critic Raymond Williams, and following his degree in 1964 was offered a research fellowship at Jesus College. Eagleton was still a member of the Catholic church and was enthused by the air of liberalisation following Pope John XXIII's ecumenical council, Vatican II, in 1962. He helped to found the leftist Catholic journal Slant and came under the influence of the radical Dominican Friar Laurence Bright who, Eagleton admiringly notes, could "give people a nasty knee in the ideology while seeming only to pass the time of day, from which it would take them weeks to recover". Slant died in 1970 and Eagleton left the church soon after, reasoning that its obdurate power structures were not going to be overthrown.

But although his Marxism had supplanted his Christianity, he acknowledges "there is still the old Joycean question of how far you can walk away from something culturally imprinted on you so deeply. And I still enormously value much of the culture that I inherited, and many of the people." As a young teacher at Cambridge - one of his first students was the playwright David Hare - Eagleton was turned down for a job as an assistant lecturer partly, he thinks, because people were gunning for Williams through him.

By now Eagleton had a family to support. He had met Rosemary Galpin, a state registered nurse working as a health visitor, while on a visit to Manchester during his first year as an undergraduate at Cambridge. They married in 1966 and had two children, Dominic and Daniel. Neither son opted to go into higher education. Dominic now works for the Oxfam research department and Daniel is a chef. Eagleton and Galpin divorced in 1976. He then had a 10-year relationship with the Norwegian feminist critic Toril Moi. In 1997 he married the American academic Willa Murphy. They have a four-year-old son, Oliver, and Eagleton confesses to having the obligatory cricked back of the middle-aged father. "I've met a few other middle-aged fathers who all seem to have a wonky muscle somewhere." They moved to Ireland to live on neutral territory and friends say he is delighted to be a father again. Eagleton laughs that Oliver has even started to learn some Irish at school, "but he thinks it's French".

As a young academic Eagleton says he never suffered any lack of intellectual confidence, but claimed his social background had severely disabled him. "So my intellectual ability shot me into situations where I wasn't equipped to cope. It was very uncomfortable." He was a heavy drinker for many years before stopping eight years ago. "I decided I couldn't take it any more and luckily discovered that I didn't need it. Giving up smoking was far more difficult."

At Cambridge, he says, "the double-think was that I didn't really want a job but Raymond wanted one for me and I wasn't really old enough to stand up to that. I became increasingly unhappy." So he took a job at Oxford which, he recalls in The Gatekeeper, was "rather like taking refuge from insincerity in Hollywood". The liberal Wadham College let him pretty much do as he liked, even if within the English faculty there was hostility to his politics and approach to literature. He was turned down for a professorship at a time when he was not only published but also translated. "My strategy for survival was to put distance between myself and the Oxford establishment," he says. "I wasn't a good college man in that I didn't dine too often and that sort thing. But I survived and Oxford provided me with a base."

Eagleton began a weekly seminar that became a focus for other dissidents, as he calls them, many now teaching at universities around the country. Two former attendees, Tony Crowley and Ken Hirschkop, are professors at Manchester University, and "in a way they hired me," he laughs referring to his move last year to Manchester to take up a specially created post of professor of Cultural Theory. "Ruling-class institutions pull in a lot of very intelligent people and some of these are going to spin off in a more non-conformist direction. I didn't set out to create this role but in the end I created a temporary home for these people at a time in the mid- and late-70s when that made a lot of sense politically."

Eagleton was also involved with the Irish community in Oxford. He founded in a pub a weekly Irish music session which ran for 15 years and later became an Irish cultural festival. "That was tremendously important to me as it gave me a life outside the university. It was very wearing that there were people in the faculty who hardly ever talked to me, although I do think that was ideological not personal." It says something about him that even his intellectual opponents are generally united in praising his essential warmth and wit as a man.

But he says he can understand why his colleagues responded as they did to his promotion of literary theory, as it came to be called. "They thought it was a threat to all they held precious. But I think they were wrong and the students I taught found it enormously enriching. It is sometimes presented as anaemic and deadening and cerebral. But for a lot of students it was a liberation that deepened their appreciation of literature."

Dr Stephen Regan has edited an anthology of Eagleton's writings, The Eagleton Reader (Blackwell), and recalls seeing him lecture in the late 70s. "One of the criticisms is that he is a kind of meta-theorist, in that he theorises about theory," says Regan. "But he has written wonderfully on the likes of Tennyson, Hardy, Dickens and the Brontës. He has taken the best of that old Cambridge tradition of close reading of the text, but made it socially and politically relevant. I saw him lecture on Wuthering Heights and he was very much on the side of Heathcliff. But mostly he showed that you could take a text that a whole generation of critics had abstracted from the social history of which it was part, and talk about it in terms of the tensions and conflicts which were still going on in the 1970s."

Eagleton said he pushed hard for changes in the way English was taught at Oxford throughout the 1980s, "and then, like a lot of ruling-class institutions, when they opened the door you fell flat on your face. There are still some people who still wish it would all go away, but for me it is deeply gratifying to see those changes. Whatever personal difficulties I had at Oxford I did manage to make some sort of a mark there."

A student from that time says Eagleton's position at the university was problematic. "While he was very popular as the Marxist at Oxford, he was very clearly also the token Marxist. In some ways he was a hero, but in other ways he was in a very programmed position. Oxford needed an Eagleton figure to soak up any radical subversive energy. I'm not really sure if he tried to negotiate that intellectually and think through the double bind he was in."

Duke Maskell earlier this year co-edited a book called A New Idea Of A University (Black Spring Press). He says not only has the school of thought Eagleton represents displaced the one represented by the leading British post-war critic FR Leavis - that literature plays an essential role in shaping the values of a culture and should be sustained by a body of highly trained, university based critics - but that Eagleton himself has also replaced Leavis as the best known and most influential academic critic in Britain. "His practical success could hardly have been greater," says Maskell. "But what all this adds up to is a rather interesting reversal. The left-wing rebel is now not just mainstream and respectable, but he is the pillar of the establishment."

If that is a contradiction, it was one Eagleton seemed to take in his stride and he happily sold revolutionary newspapers in Oxford shopping centres while holding one of the university's most prestigious chairs. He says his political development was gradual. As a child he was aware of his father's deep frustrations and the potentially tragic collision between aspiration and achievement. By the age of 15 he had been "fingered by the De La Salle brothers as a bit truculent and I tried to grow a beard. I joined CND and arrived at Cambridge as a conscious socialist, although not knowing a great deal about it."

He joined the International Socialists party, which later became the Socialist Workers Party. At Oxford he moved on to a smaller grouping, the Workers' Socialist League, after disagreeing with the SWP about liaison between local academia and industry. In The Gatekeeper, Eagleton is sharply aware of, and very funny about, the sexual and psycho-pathology of small left wing groups, but Alan Thornett, then a leading militant shop steward at the Cowley car plant and leader of the Workers' Socialist League, remembers Eagleton as a good comrade. "When Terry became a member it helped connect the struggles in the factories with the student movement. While he was a very valuable comrade, in formal meetings some of his language was a bit impenetrable. But people very much appreciated his contribution."

Criticism And Ideology (New Left Books), published in 1976, confirmed Eagleton's status as star left-wing academic. In it he appraises the ideological factors that had hitherto shaped literary theory before proposing a Marxist criticism that could encompass both economic and literary modes of production. "The left was in the ascendant and there was a sense we might break through. It was absolutely a book of its moment," he says. "All those ideas came out of that exciting period of the late 60s and early 70s and it was almost a matter of who was going to crystallise them."

The publication of Literary Theory (Blackwell) in 1983 put him on the world stage. His précis and critique of ideas like reception theory (an examination of the reader's role in literature), hermeneutics (a search for interpretation based on scriptural study), structuralism and post-structuralism (a focus on the linguistic structures that generate meaning, and the way the texts themselves can subvert this meaning) has now sold close to 1m copies.

Eagleton is unsparing of the inadequacies of these various forms of theory and the book ends with another call for a more practical political criticism. But for all that its success is still thought to be one of the reasons he was offered the Warton professorship in 1991, as in marketing terms he was the inter national brand leader. At the time he was appointed he was mulling over another far more lucrative offer from an American university.

One critic, an admirer of Eagleton's "bread and butter" literary criticism but not convinced by his theorising, says, "in a way he was rewarded beyond his desserts, but not beyond his potential. He is extremely clever and he can very quickly skim a book and get out of it everything that re-enforces opinions he already holds. And he can do this for a mass audience."

Whatever the carping, Eagleton entered the stellar world of the global academic, although such fame does not always guarantee academic dignity. A few years ago he was lecturing at an American university on Samuel Richardson's 18th-century novel Clarissa, about which he had written an acclaimed book in 1982. As he spoke, it slowly dawned on him why some of the "less intellectually athletic" students were so entranced. They thought he actually was Samuel Richardson.

Since the mid-80s he had been writing creatively as well as critically. His novel about Wittgenstein in Ireland, Saints And Scholars, was published in 1985, and in 1989 the Field Day theatre company produced Saint Oscar, his play about Wilde. "Some people did say how brave/foolish it was for an academic to write a novel because now you had to play with the ball," he says, "but for me it didn't feel too different from my other writing and Saint Oscar was a wonderful experience." As he wrote in the preface "an academic who turns to so-called creative writing should always choose drama because, like bingo or bowling, it gets you out of the house."

The acclaimed radical playwright Trevor Griffiths directed the play and describes Eagleton as "a very fecund and gifted man who can erase that line between criticism and creativity. They are all the same bucket of whelks for Terry." Griffiths says he was initially wary of working with such a renowned intellectual. "But in practice it was like working with my cousin from Salford. You might assume that this is a man who lives life through abstractions, but in his social living he is warm and expansive and there is always a song just below the lip."

Eagleton acknowledges it is intriguing that he began to write about Ireland creatively before publishing three theoretical, critical and cultural books about the country in the 90s. "When I was a child, Ireland was in the background, but wasn't prominent," he says. "It was at Oxford that I became interested in Irish music and through that Irish culture." His move to Dublin was probably the beginning of him putting daylight between himself and Oxford. He now lives 200 yards from Seamus Heaney on one side and Yeats's birthplace on the other. "One thing you can say about Irish Catholicism is that it has spread a certain moral concern to ground level. And I like living in a culture where the chemist has a view on mercy killing or contraception."

And he, rightly, has no illusions that his interest in the subject will be universally welcomed. In the preface to his 1995 book Heathcliff And The Great Hunger; Studies In Irish Culture (Verso), he says, "for an Irish writer to intervene these days in debates over Irish culture and history is always a risky business; for a semi-outsider it is well-nigh suicidal. 'Brits Out', it would seem, is no longer a slogan confined to republican quarters." These reservations were probably confirmed in a review of The Gatekeeper in an Irish newspaper, which picked up Eagleton's remark that no one in Ireland is called Nigel or Mark unless they are Anglo-Irish. "News I'm sure," hissed the reviewer, "to the two Nigels who played on that bastion of the ascendancy, the Meath football team, in this year's All-Ireland final. Is it perhaps Iceland he's talking about?"

Another apparent return to his roots came with his move to Manchester University. He pronounces himself "slightly alarmed" that leaving Oxford after more than 30 years was so emotionally easy, although "there were certainly some people I will miss". He is currently working on a theoretical book about the nature and role of tragedy in life and in art and says it is, in a sense, him carrying on a debate on the subject begun with his late Cambridge tutor begun nearly 40 years ago. "He used to wipe the floor with me then," Eagleton says, "but now I think I've got him. One of the criticisms made of me is that I've been a bit of bandwagon-jumper. But if someone really wanted to make a criticism it is that I am too consistent, and consistency isn't always a virtue. Strangely, what I believe now is pretty much what I believed when I was 20. I might have worked in different forms, but in my view they all work towards the same kind of end."

Stephen Regan says that, ultimately, Eagleton's relationship to critical theory is the same as Marx's relationship to philosophy. "Marx said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the point is to change it.' As Marx is the great anti-philosopher, there is a sense that Terry is the great anti-theorist. What he works towards is a political criticism that exposes the hollowness and irrelevancy of a lot of critical theory."

Eagleton notes that his cradle Catholicism made him well suited to this role. "Catholicism was a world which combined rigorous thought with sensuous symbolism, the analytic with the aesthetic, so it was probably no accident that I was to later become a literary theorist." He goes on to observe that "one can move fairly freely, then, from Catholicism to Marxism without having to pass through liberalism. The path from the tridentine creed to Trotskyism is shorter than it seems.

"You could say that that sense of rather alarming, gothic other-worldliness back in the convent was politicised. As a radical the thing I still can't get over is that there are people who think this is all there is. There is some impulse in me which is always rejecting the set up. I sometimes try a thought experiment to imagine my way into the mind of someone who is quite content, with perhaps a reform or two, about the world as it stands. I always find that very hard. You can call it an otherworldliness, but not in the usual sense. It is more a belief in change and in the possibility of something quite different."



Life at a glance: Terence Francis Eagleton

Born: 22 February 1943, Salford.

Education: De La Salle College, Manchester; Trinity College, Cambridge 1961-64.

Married: Elizabeth Galpin 1966, divorced '76, two sons; Willa Murphy '97, one son.

Career: Fellow in English, Jesus College, Cambridge 1964-69; tutorial fellow, Wadham College, Oxford '69-89; lecturer in critical theory, Linacre College, Oxford '89-92; Thomas Warton professor of English Literature, Oxford '92-2001; professor of cultural theory, Manchester University 2001-.

Some criticism: Shakespeare And Society 1967; The New Left Church '68; Exiles And Emigrés '70; Myths Of Power: A Marxist Study Of The Brontës '75; Marxism And Literary Criticism '76; Walter Benjamin '81; The Rape Of Clarissa '83; Literary Theory: An Introduction '83; The Function Of Criticism '84; The Ideology Of The Aesthetic '90; Heathcliff And The Great Hunger '95; Crazy John And The Bishop '98; The Idea Of Culture 2000.

Novel: Saints And Scholars 1987.

Plays: Saint Oscar 1989; The White, The Gold And The Gangrene '93.

Memoir: The Gatekeeper 2001.

· The Gatekeeper is published by Penguin, price £9.99

원문 링크는 여기. 잘 읽히도록 재미있게 썼으니, 이글턴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꼭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