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20

한국, 한국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번 호 FP 한국어판은 "세계 100대 지성"을 커버스토리로 앞에 올렸습니다. 영어판의 커버스토리는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한다"입니다만, 한국어판 편집부는 장시간의 토론 끝에 "세계 100대 지성"을 커버스토리로 선택했습니다. "세계 100대 지성"은 원래 FP Index용 기사였습니다. 이 기사의 원문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저희 편집부원들은 FP가 선정한 세계 100대 지성인으로 한국인 중에서는 누가 뽑혔을까 궁금했습니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눈에 불을 켜고 한국인 이름을 뒤져보았습니다. 한국 사람 이름은 없었습니다. 실망스러웠습니다. 사실입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이 100대 지성인의 명단 속에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이 여럿 들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00대 지성 명단이 절대적인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한국인은 단 한 사람도 이 명단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아직 한국이 세계적 지성을 배출시키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의미 있게 다루어지는 지식인 가운데 처음 그 이름을 대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고 맙니다.

이번 호에는 "중국의 아프리카 ‘대공습’"이 실렸습니다. 필자 세르쥬 미쉘은 1년 반이 넘는 취재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한 중국의 성공담, 아프리카 현지에서 겪는 어려움과 그 까닭에 대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랜 세월 세계 강대국의 착취 대상이었던 아프리카, 세계의 공장으로 탈바꿈하며 막대한 외화를 손에 거머쥐었지만 국제 사회로부터 존중받지는 못하고 있는 중국,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을 바라보며 아프리카 재진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유럽, 이 삼각축의 각축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저널리즘의 수작을 꼭 한번 일독하시길 권합니다. 국제 문제에 단지 ‘관심’을 갖는 차원을 넘어, 국제 문제를 ‘국제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한국의 ‘롤 모델’로 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 다음으로 한국 사람들이 머리가 좋다’는 식의 말들이 숱하게 떠돌았습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한 우리는 어렴풋한 기대의 ‘막’을 한꺼풀 씌워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신화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추적하는 것은 이 지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은 우리가 아는 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게르솜 고렌버그는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이스라엘을 현실 속의 이스라엘로 대체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그러한 시각 전환에 동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펀드 시대’가 개막하면서 해외 주식에 투자하시는 분들이 늘었고, 따라서 국제 정세 관련 정보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늘 어렵고, 어쩌면 정확한 예측이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도도한 물결에 휩쓸리게 되면 국제 정세에 대한 제대로 된 시각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호 "독자 편지"를 정독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지난 호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던 미국의 경제 위기에 대해, 각국의 석학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심도 깊은 토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FP 한국어판을 읽는 맛이 어떤 것인지 새삼 느끼시리라 확신합니다.

-한국어판 편집부



* Foreign Policy 5/6월호 한국어판 편집자 서문. 오늘 서점 배본 들어갔습니다. 서울 시내 큰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개별판매나 정기구독 문의는 02-713-0143. 담당자 김신영씨에게 문의하세요. 내가 만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좋은 매체입니다.

* 매체 홍보를 위해 올려놓는 것이니 퍼가지 말아주세요.

2008-05-19

오바마와 한미 FTA의 미래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에 따르면, 어떤 헛간에서 한 무리의 농부들을 향해 연설하면서, 오바마는 일본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아무리 높은 수준의 고기를 수출하려 한다 해도 일본에서 수입하지 않는 바와 같이, 자유무역으로 인해 미국 내 일자리가 잠식될 가능성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광우병 정국을 통해 모든 한국인이 알게 된 사실이 있으니, 일본은 20개월 미만의 뼈없는 살코기를 수입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수입 제제 처분으로 인해 미국산 쇠고기의 값이 비싸진 덕에, 호주산 쇠고기가 시장에서 더욱 잘 팔리게 되었다는 것이다(물론 호주산이 더 비싸긴 하다). "미국산 쇠고기가 사라지자, 그 자리를 호주산 쇠고기가 채웠다"고 일본 통상부의 육류 통상 담당자 시로우 이누카이는 말한다. 게다가 일본 내에서 수요가 전체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의 판매량이 예전, 즉 2003년에 비해 신통치 않다는 것이 WSJ의 기사 내용이다.

문제는 오바마가 지독한 보호무역주의자, 혹은 포퓰리스트라는 데 있다. '외국과 무역을 터서 좋을 것 없다'는 사례 중 하나로 한국과 미국의 자동차 교역을 짚어낸 것만 봐도 그렇다. 원문을 인용해보자. "Obama also cited the small number of American cars sold in Korea versus the booming sales of Korean models in America." 한국에서는 미국차가 많이 안 팔리는데, 미국에서는 한국차가 판을 친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한미 FTA의 앞날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는 것이라 하겠다. 미국에 현대차를 팔기 위해 이것도 내주고 저것도 내준다던 한국 정부의 협상 방침이 얼마나 투박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이쯤 되면 쇠고기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서 FTA 체결에 지장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어차피 미국 내 분위기가 보호주의로 급선회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바락 오바마의 '경제 공약'은 바로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안티조선'은 끝났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는 그 단어에 너무도 많은 정치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지금은 그저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을 비아냥거리는 것 외의 어떤 정치적인 함의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안티조선'이라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키워드의 생명력은 이 시점에서 다 한 것이다. 광우병 파동을 둘러싼 언론들의 보도 태도와,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들의 자세를 동시에 관찰해 본다면, 분명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안티조선은 끝났다.

잠시 기억을 돌이켜, 안티조선 운동이 한창 뜨겁던 당시 가장 후끈했던 이슈 중 하나를 떠올려보자. 그때 안티조선에 참가하던 이들은, '조선일보는 나쁜 신문이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조선일보를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를 놓고 일종의 철학적 논쟁을 펼쳤다. 홍세화씨는 '지식인'의 특수한 지위를 암암리에 전제하고(그것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을 터이다) 조선일보를 볼 수도 있다고 한 반면, 고종석씨의 경우 조선일보를 아예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안티조선의 이념에 충실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논쟁에서 전자의 입장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천적으로 더 큰 성과를 거둔 것은 후자의 입장이다. 안티조선 논쟁을 통해 특히 조선일보는 대중들로부터 언론의 공신력을 상실하였다. 동시에 사람들은 신문, 더 나아가 활자 매체 자체를 경원시하고 있다.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안티조선을 슬그머니 이끌어가려던 시도가 눈에 띄던 당시의 '안티조선'이 일종의 정치 과잉, 혹은 의미 과잉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애초에 신문 따위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책이나 잡지 또한 절대 제 돈 주고 사보지 않는 이들이 '나는 조선일보, 아니 좃선 찌라시를 보지 않습니다'라고 떠벌이는 현재의 '안티조선'은 정치의 부재와 의미의 결핍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 터이다. 조선일보를 보면서 조선일보를 비판하고, 그 외의 다른 시각을 얻기 위해 여타의 언론 매체에 촉각을 기울이던 최초의 열정은, 그 내용이 옳건 그르건 일단 조선일보의 기사라면 비웃고 보는, 사회적 관심의 나태를 무마하기 위한 일종의 면죄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선일보 보지 않습니다'라는 표현은 이제 더이상 적합하지 않다. 현재 네티즌들이 표명하고 있는 안티조선이란, 사실 '나는 조선일보 보지 않습니다'라고 기술되어야 마땅한 현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네티즌이라 불리는 인터넷 사용층의 이른바 '난독증'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혹자는 네티즌들이 '어렵고 딱딱한' 글이 아닌 '쉽고 재미있는' 웹툰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고 칭송하지만, 굽시니스트의 블로그에서 발생한 리플 파동을 보고 있노라면 난독증의 대상은 단지 텍스트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시위에 참석한 여고생에게 과외 선생이 보내는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는 "민희에게"(Homa Comics, 2008년 5월 13일)라는 웹툰에 달린 리플들을 보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내용의 만화에 '이명박 앞잡이'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이유를 전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안티조선'이라는 의제가 기존 매체, 혹은 존재하는 모든 텍스트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정당화하는 테제로 이해된 것은 아닌지, 그리하여 문맹률은 낮지만 읽고 쓰는 능력(literacy)은 형편 없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든다.

나는 긍정적인 사회 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차원으로 흡수된 언론 운동이 지니고 있던 한계가, '정치성'에 언어가 휩쓸려 들어가는 형태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어의 현주소일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한 움직임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자신이 하나의 언론을 운영하는 것이다. 경향신문처럼 비판적인 논조를 견지하고 있는 훌륭한 언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블로그에 쓰는 한 편의 글에서도 정확한 사실관계와 치밀한 논리 구조를 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작은 실천의 일부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지 않은 언론'에 대한 냉소만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점이 이미 지났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일이다.

2008-05-13

1968년 5월에 대한 회고들

그 많던 '신좌파'들은 다들 어디 갔을까? 한국의 '좌파'들은 놀라울 정도로 잠잠하기만 하다. 광우병 정국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나보다. 아무튼 올해는 68혁명 40주년이다. 그에 따라 다양한 기사들이 외신에 올라왔는데, 기록을 남기는 겸 해서 적어놓을까 한다.

뉴욕타임즈에서는 폴 오스터가 68년 5월 1일에 발생했던 대학가 점령을 회고한 기사가 올라왔고, 그에 따라 독자들의 반발 혹은 호응이 이어졌다. 폴 오스터는 다소 후일담 소설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그 당시 '우리는 미쳐 있었다'고 읊조리지만, 독자 중 일부는 '우리'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까지 한다. 두 기사 모두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The Accidental Rebel", Paul Auster, The New York Times, 2008년 4월 23일.
""In '68, Our Protest Made a Difference", LETTERS, The New York Times, 2008년 4월 30일.

이번주 New Stateman의 주제 또한 1968년이다. 노암 촘스키, 에릭 홉스봄 등의 기고문과 함께 노동당의 노장 정치인 토니 벤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기사 목록을 보고 싶으면 여기로.

BBC World Service에서는 지젝과 바디우 등을 불러놓고 당시 부흥한 철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지젝의 지독한 동유럽식 영어 발음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면서 귀에 꽂아놓고 있어서 별로 집중하지 않았는데, 당연한 일이지만 참여자들은 대체로 68 혁명과 정치, 철학의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마땅한 논거를 충실히 제시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러한 해석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다. 직접 들을 수도 있고, mp3 파일을 다운받을 수도 있으니 꼭 한 번씩 방문해보는 것을 권한다.
"Philosophy in the Streets", BBC World Service, 2008년 5월 13일.

목숨 걸고 먹는 음식

아까 GQ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기사 한 편을 보냈다. "미친 소와 감기 걸린 닭에 대한 전 지구적 고찰"이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편집부에서 더 좋은 것을 붙여준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GQ 6월호에 실릴 예정인데, 그 기사에서 다소 논의가 미흡했던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이 포스트를 쓴다.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과 관련해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지점 중 하나는, '우리가 100만 분의 1 확률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냐'라는 것이다. 이 질문의 전제가 되는 것은 '목숨을 걸고 음식을 먹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가정인데, 안타깝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일본에서 설날마다 먹는 끈적끈적한 떡국 오죠니(お雑煮)를 예로 들어보자.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서는 매년 몇 분의 어르신들이 이것을 드시다가 지상에서 영원으로 향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이미 2006년 초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이는 총 인구중 65세 이상인 사람이 20% 이상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일본의 노년 인구수는 전체 인구를 1억 4000만으로 잡았을 때 대략 2800만 정도가 될 것이다.

이들 중 계산의 편의를 위해, 매년 7명 정도가 매년 설날에 오죠니를 드시다가 돌아가신다고 해보자. 그러면 사망률은 0.5/100만이 되므로, 200만 분의 1이다. 전체적인 사망 원인과의 비교 등을 하지 않고 그냥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더라도, 일본의 노인 200만명 중 한 사람은 오죠니를 먹다가 목에 걸려 죽는다. 이것은, 정부에서 말하는 바를 네티즌들이 요약하는대로, 미국산 쇠고기를 먹다 사망할 확률이 100만분의 1이라고 할 때, 그것의 절반 정도 되는 수치이다. 결코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각심을 잃을 수도 없는 숫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이런 살인적인 풍습을 대체 왜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걸까?

이 풍습이 살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들 알 수 있다시피 넌센스이다. 떡을 먹다가 목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그 음식이 살인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인간 광우병으로 사망한 환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미국산 쇠고기의 위생 상태를 붙잡고 논란을 벌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위험'한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어폐가 있다.

광우병 논란의 쟁점은 광우병 자체가 아니다. 그런 논점을 잡고 있을 때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측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정부가 국민을 기망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이다. 거리로 뛰쳐나온 10대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간만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젊은 새댁들의 지속적인 호응을 얻기 위해 대중적 패닉을 계속 이용하려 드는 것은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다는 생각을 하면 나도 불쾌하다. 하지만 그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리고 현재 촛불집회 등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바로 그 지점을 혼동하고 있다. 그런 식이라면 일본 정부는 진작에 설날에 오죠니 먹는 것을 금지했어야 한다.

광우병 정국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 미국산 쇠고기가 악마의 음식이어서가 아니다. 설날에 떡국을 먹으려고 하는데, 모든 국민들이 일본산 오죠니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대중적인 반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중들의 인식은 이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호도된 진실에 편승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며, 그에 기반하여 정치적인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뿐 아니라, 찾아보면 목숨 걸고 음식을 먹는 사례는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고기 한 점을 먹기 위해 극미한 위험을 감소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했던 적이 없다. 바로 그것이 쟁점이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는 순간 한국이 좀비의 왕국이 된다는 식의 선동을 함부로 구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