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23

맨큐의 투표경제학

경제학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중립적인 학문일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2008년 미국 대선과 관련한 맨큐의 발언을 곱씹어보고 있노라면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수밖에 없다.

맨큐가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 칼럼의 내용을 되짚어보자. 2008년 11월 4일, 맨큐는 "Should you vote?"라는 제목의 포스트를 올렸다. "만약 당신이 이 블로그의 독자고, 그래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투표는 시민의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블로그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어떨까? 답은 여기."라는 제목의 짧고 간단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가 2006년 5월 중간선거 당시에, 2000년 10월 무렵 WSJ에 쓴 기사를 퍼놓은 포스트가 링크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Why Some People Shouldn't Vote?"라는 제목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맨큐는 다른 사람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행위가 '경제학적'으로 현명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2000년 부시와 고어가 맞붙었을 때에도 그랬고, 2008년 오바마와 맥케인이 격돌할 때에도 그랬다.

논리 구성은 이런 식이다. 투표권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판단하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보다 가령 여행을 가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과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충분한 정보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괜히 투표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은, 정치적 의사 표현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이 행사하는 한 표의 가치를 희석시킨다. 타인에게 투표를 권하지 않아야 자신의 한 표가 가지는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말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이명박이 뭔가 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그를 찍은 20대를 보며, 혹자는 '차라리 투표를 하지 말던가'라고 투덜거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100만명이 투표할 때보다는 99만 9999명이 투표할 때 내 한 표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투표 독려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맥락을 거의 일부러 도외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를 권할 때 선관위 조직원처럼 '중립적'으로 권하지 않는다. '야, 솔직히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다 그게 그거지 않냐? 어쩌구 저쩌구... 아니 뭐 진보신당 찍으라는 건 아니고, 꼭 투표하라고'라는 식으로 '투표 권유'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골방과 광장을 동시에 요구하는 복잡한 정치 체계이기 때문에, 투표 독려를 빙자한 정치적 의견 표명과 토론 등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용납되어야 한다. 특히 정치적 무관심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은 더 많이 토론하고 숙고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험을 해야 하기도 하다. 투표율 저하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조용한 파도였고, 오바마의 출현은 그것을 반전시켰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는 사건이다.

맨큐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읽기 쉬운 경제학 원론 교과서를 쓴 저자답게, 그 '복심'마저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미국 내에서 25세의 공화당 지지율은 30%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다. 젊은이들이 서로 투표를 독려하면 독려할수록 공화당에는 손해다. 그는 11월 5일에 올린 포스트에서 아예 이런 표까지 보여준다. 사람이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건가 싶다.



경제학적 지식 그 자체는 정치적으로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떤 맥락에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정치적으로 큰 차이를 갖는다. 미네르바라는 다음 아고라 이용자를 둘러싼 소동을 보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 잠깐 적어 보았다.

2008-11-20

노무현: 신자유주의자인가 네오콘인가

심상정 진보신당 상임대표와 노무현 전 대통령간의 논쟁이 한창이다. 과연 노무현이 심상정의 재반론에 성의있는 답변을 돌려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만든 정치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에 올려놓은 반론의 내용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이명박이 집권하기 전까지 한국 사회가 어떤 원리에 의해 운영되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11월 20일 현재까지 진행된 토론의 내용은 이 기사와 관련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 유독 눈길을 끄는 지점이 하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핵심 사상이 따로 있고, 개방은 그 내용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라면 FTA나 개방을 추진한다 하여 그 하나 만으로 바로 신자유주의라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신자유주의를 한마디로 말하면, '작은 정부' 사상이라 할 수 있"다고 정의하고는,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가 작은 정부를 지향한 것일까요?"라고 되묻는 노무현의 화법이다.

노무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신자유주의란...'이라고 설명을 다는 심상정의 반론은 그다지 현명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엄연히 개별적인 정책에 대해 묻고 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신자유주의'라는 경제학적, 정치철학적 개념에 대한 토론으로 '철학화' 하는 효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 '나는 시장의 개방에는 찬성하나 작은 정부를 지지하지 않으므로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장의 자유, 기업의 자유와 함께 정부의 역할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네오콘', 즉 신보수주의자들을 고전적 자유주의자, 즉 신자유주의자들과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박성래 기자가 쓴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자유방임주의자인 하이에크에게 국가의 역할 확대는 그 형태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복지국가라 할지라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노예로의 길'일 뿐이다. 이에 반해 신보수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 확대를 걱정하지 않는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오히려 국가의 역할 확대가 자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212쪽)


박성래에 따르면, 네오콘은 사회복지를 확대하는 대신 개인의 일상적 생활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택한다. 따라서 적어도 스스로는 "전반적으로는 복지제도를 정비하고, 지출을 늘리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확대했"다고 주장하는 노무현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에게 '네오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부당한 일로 보일 수 있다.

나 또한 직접적으로 '노무현은 네오콘이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이 보이는 행태에서 일종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있을 따름이다.

첫째. 노무현의 말은 레오 스트라우스의 말처럼 일관성이 없다. 국가의 기능을 강화한다면서 투자자 국가 직접제소제가 포함된 한미 FTA를 밀어붙였고, 서민경제를 살리겠다면서 부동산을 통한 경기 부양에만 골몰했을 뿐 내수침체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 둘째. 그 노무현의 비일관적인 말을 일일이 '좋은 의미'로 해석하려 드는 일군의 '제자 집단'이 있다. 두 번째 항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까지나 '진보가 아니며', 다만 '제대로 된 보수주의를 지향할 뿐'이라고 늘 강변한다. 즉 새로운 보수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입에 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보수주의를 영어로 번역하면 네오콘이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자신들이 '새롭기' 위해, 사실상 '낡은' 보수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본토의 네오콘과 비교하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초라한 집단이지만, 해당 국가에 미치는 정치적 해악의 크기는 만만치 않다.

앞서도 말했지만 노무현의 비일관적인 발언에서 네오콘과의 유사성을 더듬어낸 이 모든 논의는, 굳이 말하자면 '은유'적인 차원에 불과한 것이지 '노무현은 신보수주의자다'라고 직접적인 명제를 구성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이 글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한국의 담론적 수준을 고려할 때, 정치적 토론의 장에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은 그 자체가 패착일 뿐이다. 둘째.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노무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그 외의 '좌파적 경제정책'을 선악 구도로 놓고 파악하는 고질적 이분법 하에서나 성립할 수 있는 논변이다. 그리고 바로 노무현은 그런 이유로 '나는 신자유주의자가 아니오'라고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심상정은 선택을 해야 한다. 노무현이 스스로 신자유주의자라고 인정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명박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제 정책에 대해 토론하는 차원에서 본다면,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일종의 초월적 이념에 불과하다. 한국 경제의 대외 의존도를 계속 높이는 방향으로 국정 운영 방향을 결정했던 그 어리석은 선택에 대해 묻는 방법은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토론이 진정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지난 5년간 한국 사회를 이끌었던 노무현 정부의 진면모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이 미국의 '네오콘'보다 황당하면 황당했지 '상식적'일 리는 없다고 짐작한다.

2008-11-17

레오 스트라우스의 경우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철학 논쟁이 진행되는 한 사례로 레오 스트라우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철학박사 강유원 씨가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 쓴 서평의 내용을 참조하자면, 스트라우스와 그 제자들 즉 스트라우시언들은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비밀스러운 독해에 근거하여 무식한 대중은 그냥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고 똑똑하고 잘난 엘리트가 지배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자들이다. 문제는 고전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들 나름의 독해를 형성하고 그것을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전환시켜 유표하는 집단과 정면 대결을 펼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고 조지 W. 부시를 철학자라고 우기는 것처럼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텍스트의 세밀한 맥락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과 침탈을 통해 그 과정이 수행된다. 2005년 6월 무렵의 독서 기록을 뒤져보니, 레오 스트라우스가 플라톤의 《향연》에 대해 강연한 내용인 《Leo Strauss on Plato's Symposium》(Univ. of Chicago Press, 2001)의 몇몇 구절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한 내용이 나온다. 그것들은 지금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블로그에 공개한다.

And I said, "When we were still children, when Agathon won with his first tragedy, on the day after he and his chorus had offered the sacrifice for victory." "So it was after all," he said, "a very long time ago, it seems. But who narrated it to you? Or did Socrates himself?" "No, by Zeus," I said.(173a5-b1)
20-21p, 《Leo Strauss on Plato's Symposium》.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우리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아가톤이 그의 첫 작품으로 비극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여 합창단원들과 함께 신에게 감사의 제물을 올리며 축하연을 열었던 날 바로 다음 날이었다네!"
"그렇다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일인 것 같구먼! 그러나 누가 그 사실을 자네에게 이야기해준 것인가? 소크라테스님 본인인가?"하고 그가 물었지.
"맙소사, 소크라테스님이 아니라" 나는 말하길,
39쪽, 《향연-사랑에 관하여》, 박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년)


명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레오 스트라우스가 직접 번역한 《향연》의 한 구절과, 국내 연구자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된 같은 구절을 병기해 놓았다. 본격적으로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배경 지식을 조금 알아보자.

《향연》은 액자식 구성 속에서 또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 작품으로, 여기서는 '나'로 지칭되는 아폴로도로스가 익명의 친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향연 참가기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 향연 참가기 또한 소크라테스가 직접 아폴로도로스에게 말해준 것은 아니고, 아리스토데모스라는 소크라테스 추종자를 통해 전해들은 것을 옮기는 것이다(복잡하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향연에서 '사랑'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디오티마라는 여사제의 입을 빌어 전달한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나오지만 본인이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을 살펴보자. 박희영이 그저 '맙소사'라고 옮긴 대목을, 레오 스트라우스는 'No, by Zeus'라고 번역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리스어 읽는 법을 익히지는 않아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혹시 그리스어를 읽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해당 부분의 원문 주소를 링크해 놓기로 한다). 하지만 방금 링크한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영문 번역에서도, 해당 부분을 “Goodness, no!”라고 옮기고 있는 것을 볼 때 스트라우스의 번역은 번역이 아니라 (아마도 직역을 통한) 일종의 창조적 해석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스트라우스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May I say only this: God forbid that Socrates would have told the story." '하느님 맙소사'와 같은 감탄사를, '신'에 의해 소크라테스가 향연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의미로까지 격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한 두 개가 아니다. 네 페이지만 넘겨봐도, 그리스어의 단어 'agathon'을 곧장 beautiful로 번역한 후, 그에 따라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치밀한 과정을 통해 《향연》은 레오 스트라우스가 원하는 '바로 그 텍스트'로 조금씩 변해간다.

사실 나는 당시 그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서, 레오 스트라우스가 《향연》에서 어떤 함의를 이끌어냈는지까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당시 《국가》를 콘포드(F. M. Cornford)와 백종현의 번역을 병행해서 읽고 난 후,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궁금증도 확인할 겸 《향연》도 읽을 겸 그 책을 집어든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처음 인용한 부분에서 의아한 생각이 들어, 대조해서 읽기 위한 한국어판을 구했고, '역시, 뭔가 수상한 게 있다!'는 작은 발견을 했기 때문이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최소한의 성의가, 고전 텍스트 및 철학적 지식의 왜곡을 통한 이데올로기 투쟁에 맞서는 방식도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설명만을 통해 《향연》을 알게 된 시카고 대학교 학생의 플라톤 이해와, 잘 읽히는 한국어 번역본과의 대조를 통해 그 책을 접한 나의 플라톤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어떤 정치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 그리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에 따라 엘리트는 모든 정보를 인민에게 개방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결론에 동의할지 동의하지 않을지도 바로 그 시점에 결정될 수 있다.

물론 나는 고대철학에 대해 그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번역본을 대조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 그리스어 원문에 대한 나의 해석을 제시하지 않는 한 나와 레오 스트라우스는 《향연》의 해석을 놓고 '논쟁'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약간의 의심을 곁들인 관심을 더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비밀스러운 독해에 근거하여 무식한 대중은 그냥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고 똑똑하고 잘난 엘리트가 지배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는 훨씬 더 좁아질 것이다.

올바른 과학적 지식이 미신과 선동에 맞서 싸우는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인문학적 지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자신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철학자의 이름이나 들먹이는 그런 종류의 '관심'이 아니라, 알 수 있는 만큼 알아보고 모르는 것에 대해 겸허해지는 그런 종류의 '지적 탐구'가 일반화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탐구할 수 있을 만큼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 그의 저작을 통해 알아보았고, 뭔가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철학을 구성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니게 되었다.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서는 여기까지 말할 수 있다.

2008-11-12

인문학의 사회적 기능

우리의 문화적 코드 속에는, '공자왈 맹자왈' 하듯 학자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 권위로 찍어누르고자 하는 행동 유형과, 그것에 반발하는 무조건적인 작동 기제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토록 긴 글을 써가며 설명한 내용을 이렇게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칸트를 빌어 창조론을 과학에서 추방할 수 있"는 이유는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가 우리의 경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시 심리학 또한 추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심리학의 대상은 인간의 심리 현상이며 그것은 경험 가능한 대상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인문학과 과학의 역할 분담에 대해 끝없는 혼돈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의 인문학적 상식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문학의 저변을 넓혀서 사이비 지식의 범람을 막는다'라는 말의 뜻도 제대로 이해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추판다님의 계속되는 오해는 인문학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놓고, 그것을 과학과 같은 대립선상에 올려놓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문학은 과학을 '제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놓고 보자면, 정 반대로 과학을 '보조'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창조과학'자들이 곧잘 입증하려 드는 명제 중 하나인 '여호수와 10장에 나오는 태양 멈춤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구가 돌다가 멈추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은 접선 방향으로 날아가게 된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고 그래서 과학도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온갖 이유를 대가며 그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원한 진리인 성경'에 그렇게 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는 것, 창세기부터가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사본이 특정 시기에 결합하여 만들어진 텍스트라는 것은 이미 르네상스 시절부터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교회들은 대체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손을 거쳐 기록되었으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인문학이 과학을 '보조'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과학적으로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적으로도 부인될 수 없는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온갖 '과학적' 증거를 들어 그 사실을 주장할 때, 인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의견에 대해 인문학적 합리성을 통해 논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은 완전히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다. 가령,

또, 인문학으로 창조론에 대응하는 건 현실정치적으로도 별로 바람직한 시도는 아니다. 다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칸트라고 딱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이쪽에서 칸트를 내세우면 저쪽에선 중세철학의 온갖 변신론이나 아니면 다른 상대주의 철학들을 들이댈텐데 이런 끝나지 않을 싸움에 빠져드는 게 과연 '해결책'일까?
"인문학적 제어론 (2)", Null Model, 2008년 11월 11일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이 지닌 다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창조론에 과학으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끝이 나지 않는 싸움으로 이어진다.

창조론을 과학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성경에 '과학적' 권위를 입히고자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경에 대해 과학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성경이 '과학적' 텍스트라는 의미가 된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자들에게 떡밥을 던지는 저질 블로거와 다를 바 없다. 과학자들의 답변을 통해 그 논쟁이 끝날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한다.

이 경우, 비록 '정답'이 없고 '끝나지 않는 논쟁'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문학이야말로 이런 무지와 편견에 맞서는 가장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쓴 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창세기 1장 내에 존재하는 두 텍스트의 차이를 설명해보라고 하는 것, 백제가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에게 굴삭기가 때려부수고 있는 산성의 정체를 물어보는 것, 등등의 반성적 고찰이 사회의 상식으로 통용된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그래도 믿고자 하는 사람은 줄기차게 믿겠지만, 그 발언이 가지는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이고 그로 인해 끼쳐질 사회적 해악의 감소 또한 노려봄직하다.

'제어론자'와 '견제론자'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 과학에 대한 불필요한 '인문학적' 비판이,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인문학적' 논쟁으로 소화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발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황우석이 과학자로서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그들의 잘못된 의견이 생산되고 있다면, 인문학적 논쟁을 통해 그 무지를 깨우치고 올바른 견해를 수립하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문학의 역할이다.

마치 인문학이 '야, 너 철학자 칸트가 한 얘기 아냐? 것도 모르냐? ㅋㅋㅋ'라는 식으로 깝죽거리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선 우리가 속한 문화가 무식한 사람을 천시하는 문화이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덜 된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지 인문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황우석이 포토샵으로 연구 성과를 냈다고 해서 모든 과학도들이 포샵질의 달인인 것처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2008-11-07

과학과 철학은 대립하는가

나는 과학을 좋아한다. 과학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도 나쁘지 않다. 수학은 잘 못했지만, 과학은 잘했다. 비록 문과생이지만 교양과학 서적을 즐겨 읽는 편이고, 구독 블로그 목록에는 과학 종사자들의 블로그가 적잖게 올라와 있다.

또한 소칼이 《지적 사기》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적잖이 공감한다. 은유는 어디까지나 은유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를 따라가면서 전개되어야 한다. 또한 은유는 기본적으로 잘 아는 것을 통해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모르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더 모르는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소칼이 제기한 일부 경향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인문학이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아이추판다님의 발상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저의"라는 글에서 아이추판다님은 문제 의식을 혼동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아마 그는 노예 소유주였을 것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드로스는 재위 기간을 모두 전쟁과 정복으로 보냈다. 카이사르는 당대의 문장가요 교양인이었으나 갈리아에 대해서는 침략자였고 로마 공화정에 대해서는 독재자였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 중 일부는 이단심문관이었으며 또한 마녀재판관이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는 식민 통치를 위해 고전을 가르쳤다. 프랑스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나치였다.

이런데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
"저의", Null Model, 2008년 11월 4일


'인신공격의 오류'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아이추판다님이 인문학의 역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몇몇 '스승'들의 인격을 본받기 위해 하는 학문이 아니다. 개별적인 인문학 분야에는 나름의 연구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대한 연구와 연구자에 대한 인격적 판단은 별개로 취급되어야 한다. 특히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철학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나 또한 그 차원에서 대답해보겠다.

내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철학을 '잘 사는 법'에 대한 연구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크다. 즉, 철학자라면 삶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의 철학은 잘못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짧은 생각이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관통하는 주제를 세 가지의 질문으로 요약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특히 근대 이후의 철학은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그리고 그 지식에 대한 확실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를 꾸준히 질문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 명제도, 그 방법으로 발견된 '확실히 존재하는 나'로부터 세계에 대한 지식을 구성해 나가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 모든 지적 탐구의 역사는 '잘 사는 법'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가령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그 중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문제의식. 철학적 텍스트에서 그동안 덜 중요하다고 여겨진 부분을 잡아내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해석 기법. 독일어와 그리스어의 어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방법론. 이것들은 하이데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철학의 역사에서 이루어낸 큰 성취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의 철학 그 자체로부터 나치즘과의 관련성을 캐내려는 시도가 꾸준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 자체가 철학적 논쟁인 것이지, "프랑스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나치였다. 이런데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라고 제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중반부터 인간에 대한 자연 파괴를 통탄하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켜낸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그렇다면 과연 인문학, 범위를 좁혀 철학이 '현대의 문제'에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저의"에 다음과 같은 리플을 달았다.

'좋은 나라'란 무엇인가요? 이명박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와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가 다를 것 같은데요. 이런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고전에서 다루어진 논제들을 다시 훑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창조과학같은 사이비 과학이 미국에서 판치는 이유는,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단의 '열심'을 제어할만한 인문학적 소양이 그 사회에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창세기의 창조 설화가 '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상식이 되어있습니다만, 그게 진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면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의 유물'로 취급되느냐는 다른 문제죠.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노빠'들이 '상식'을 운운하며 날뛰지만, 대체 그 상식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다운 대답을 듣기란 어렵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노예 소유주와 영국 부르주아들, 그 외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실컷 논의해놓은 바가 있는데, 그 모든 과거의 유산을 도외시하고 현재만을 사는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는 무식한 자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지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판단한다. 미국에서 판을 치고 있는 창조과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지구가 7일만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은 것임을, 또한 생명체가 진화해왔음을 증명하는 '과학적 증거'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창조를 과학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게 과연 '과학'의 부족 때문일까?

하지만 나의 문제제기를 아이추판다님은 영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인문학적 제어론"이라는 새 포스트를 올려, "이와 같이 인문학이 무엇을 제어해야 한다 또는 제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인문학적 제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제어대상으로 손꼽히는 것이 아마 과학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밑에 ....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신 분이 잘 지적해 주셨다시피, 나는 인문학이 과학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없다. 나는 이미 칸트가 1700년대에 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칸트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대상, 가령 신, 자유 등과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우리의 이성이 범주를 적용하려 드는 것에서 오류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자비로운가?', '인간은 기계론적으로 결정된 존재인가, 아니면 자유를 가진 존재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대상은 경험 가능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이런 질문을 한다. 요컨대 사람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들을 그저 헛소리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신은 자비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해 누군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면, '신은 자비롭지 않다'는 상념에 사로잡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신보다 더 잔인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 또한 마찬가지다. 리처드 도킨스가 되도 않는 무신론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칸트가 대답했다. 창조자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우리가 세계를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경험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논할 수는 없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은, 곧 과학적 지식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말과도 같다. 《프롤레고메나》에서 칸트는 '안전한 길에 접어든 학문'의 대표로 수학과 자연과학을 꼽는다. 수학은 경험적 대상을 갖지 않는 순수한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에 형이상학과 같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반면 자연과학은 경험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안전한 길에 접어들었다. '안전한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 회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칸트의 자연과학에 대한 생각에 동의한다. 철학이 해야 할 일은 과학을 '제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지식이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사이비 지식과 사이비 과학이 사람들에게 어설픈 회의주의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 중 하나이다. 이것은 나만 동의하는 발상이 아니다. 최근 과학철학에서 등장한 논의들은 말 그대로 '최근'의 것일 뿐 그것이 철학이나 인문학 전체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

과학이 무색무취하지 않다는 비판,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고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다는 비판을 하는 인문학자들에 대해 나는 그러므로 따로 변호의 말을 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발상이야말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일은 어디까지나 철학 혹은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야만 하므로 백인들의 전유물이다'와 같은 허술한 논변을 내세우는 과학도의 역할이 아니다.

"인문학적 제어론"이라는 포스트를 통해 아이추판다님은, 프랑스 철학의 '스타일'에 정치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어의 섬세한 뉘앙스를 통해 전개되는 논의는 그만큼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그 결과 "철학판이야말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결론에는 귀를 기울일만한 지점이 있다. 철학은 대부분의 학문과 마찬가지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그것과 프랑스 철학의 수사학적 성향을 논하는 것은 별개다.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철학 텍스트는 충분히 번역 가능하고, 또 외국어를 통해서도 교육하거나 토론할 수 있다. 물론 특정 언어의 특성에 기대어 창조된 개념의 경우 전달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하이데거의 Dasein은 독일어의 Da와 Sein을 합성한 것으로, 독일어를 모른다면 즉각적으로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단어를 한국어의 맥락에서 '현존재'라고 번역하고, '현존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이다'라고 서술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서양 철학을 하는 것, 혹은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발간되는 주요 철학 저널에 자신의 논문을 등재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철학이 문화적 맥락 속에서 논의되는 학문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황인종이고 저들은 백인종이고 그래서가 아니다. 가령 분석철학의 경우 김재권 교수가, 정치철학의 경우 승계호 교수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한국계 미국 철학자'이지 '한국 철학자'는 아닐 것이다. 아이추판다님이 논적으로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은 상당히 문화 중립적이고 철학은 그렇지 않다. 중국인이 한국 사학계의 논문집에 자기 논문을 올리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가 프랑스 철학계의 일원이 되기 어려운 것을, 지나치게 해석하면 곤란할 듯 싶다.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은 자신이 아는 극히 몇 가지의 사례만을 놓고, 인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비하를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문학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는 도리어 반지성주의의 토대가 될 뿐이며, 과학을 우롱하는 비과학적인 목소리에 대한 사회의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낳는다. 한참 전에 언급한 창조과학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흔히 쓰는 논법은 이런 것이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을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100% 부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100% 부정할 수야 없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들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면 창조과학자는 '거봐라, 아무리 현대과학이 발전해도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라고 논리적 비약을 할 것인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선량한 과학자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를 뜨거나 화를 내게 된다. 혹은 리처드 도킨스처럼 책을 쓰거나.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종류의 지적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의 몫이었고, 나는 그 사례를 칸트를 통해 제시한 바 있다. 오히려 그동안 진행되어온 철학적 논의에 무지한 상태로, 다만 잠시 기승을 부리고 있을 뿐인 주장들에 반박하기 시작하면, 담론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자신이 뭘 반박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화부터 내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줄창 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적 제어론"의 리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고래를 관찰하는 것과 별로 상관없어도 그의 정치철학하고는 심각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요?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폴리스가 아니었다면 과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설마 알렉산더 대왕이 아테네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교육한 것은 마케도니아가 제국으로 본격적인 발을 내딛기 전의 일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을 쓴 것은 그가 알렉산더의 교육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뤼케이온을 설립한 뒤 한참 후의 일이며,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에 입각한 도시국가를 논하고 있을 뿐 알렉산더가 만드는 제국의 논리를 찬양하고 있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알렉산더의 제국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 본질적 연관이 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입증할 수 있다면 그는 인문학계의 스타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판하다가 못된 것만 배웠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일단 써놓은 후 질문으로 바꿔서 그 입증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있다.

기초적인 오류는 계속 발견된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폴리스'였던' 것은 맞는데, 플라톤이 살던 시대는 이미 아테네가 한물 간 다음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로 넘어가면 거의 망해가고 있었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태어나, 페리클레스의 후계자 알키비아데스의 죽음을 목격했고,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권을 빼앗기고 위축되는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국가》에서 수호자 계급을 칭송하는 것은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심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데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물론 아테네 사람이니까 다른 도시국가에서 온 유학생을 가르치고, 시라쿠사로 망명해서 자신의 이상국가를 건설해보고자 시도했을 수 있었겠지만, 그게 플라톤 철학의 본질적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아이추판다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파피루스가 중세에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의미 없는 소리를 뭐하러 하는 걸까?

홍준기를 포함한 일부 인문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에 무지하고, 과학에 대해 불필요한 '견제론' 따위를 들먹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는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적 상식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있는대로 다 드러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서평에서 테리 이글턴은, '영국의 새들'이라는 책 한 권 달랑 읽고 조류학에 대해 떠드는 녀석을 보는 기분이라고 실소를 터뜨렸다. 내 소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과학을 '까고' 있지 않다. 다만 과학을 수호하기 위해, 얼척없이 철학을 '까는' 방향을 택한 이를 책망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과 철학을 대립하는 것으로 놓는 것은, 결국 반지성주의와 지적 회의주의의 득세만을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좀 더 신중하게, 과학도로서 인문학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