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중립적인 학문일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가능성이 크지만, 2008년 미국 대선과 관련한 맨큐의 발언을 곱씹어보고 있노라면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질 수밖에 없다.
맨큐가 공화당 지지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음 칼럼의 내용을 되짚어보자. 2008년 11월 4일, 맨큐는 "Should you vote?"라는 제목의 포스트를 올렸다. "만약 당신이 이 블로그의 독자고, 그래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투표는 시민의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블로그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어떨까? 답은 여기."라는 제목의 짧고 간단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그가 2006년 5월 중간선거 당시에, 2000년 10월 무렵 WSJ에 쓴 기사를 퍼놓은 포스트가 링크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Why Some People Shouldn't Vote?"라는 제목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맨큐는 다른 사람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행위가 '경제학적'으로 현명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2000년 부시와 고어가 맞붙었을 때에도 그랬고, 2008년 오바마와 맥케인이 격돌할 때에도 그랬다.
논리 구성은 이런 식이다. 투표권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판단하기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보다 가령 여행을 가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과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충분한 정보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결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괜히 투표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은, 정치적 의사 표현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이 행사하는 한 표의 가치를 희석시킨다. 타인에게 투표를 권하지 않아야 자신의 한 표가 가지는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말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이명박이 뭔가 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그를 찍은 20대를 보며, 혹자는 '차라리 투표를 하지 말던가'라고 투덜거렸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100만명이 투표할 때보다는 99만 9999명이 투표할 때 내 한 표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투표 독려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맥락을 거의 일부러 도외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를 권할 때 선관위 조직원처럼 '중립적'으로 권하지 않는다. '야, 솔직히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다 그게 그거지 않냐? 어쩌구 저쩌구... 아니 뭐 진보신당 찍으라는 건 아니고, 꼭 투표하라고'라는 식으로 '투표 권유'를 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골방과 광장을 동시에 요구하는 복잡한 정치 체계이기 때문에, 투표 독려를 빙자한 정치적 의견 표명과 토론 등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용납되어야 한다. 특히 정치적 무관심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은 더 많이 토론하고 숙고하여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험을 해야 하기도 하다. 투표율 저하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조용한 파도였고, 오바마의 출현은 그것을 반전시켰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는 사건이다.
맨큐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읽기 쉬운 경제학 원론 교과서를 쓴 저자답게, 그 '복심'마저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미국 내에서 25세의 공화당 지지율은 30%를 간신히 웃도는 수준이다. 젊은이들이 서로 투표를 독려하면 독려할수록 공화당에는 손해다. 그는 11월 5일에 올린 포스트에서 아예 이런 표까지 보여준다. 사람이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건가 싶다.
경제학적 지식 그 자체는 정치적으로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떤 맥락에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정치적으로 큰 차이를 갖는다. 미네르바라는 다음 아고라 이용자를 둘러싼 소동을 보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 잠깐 적어 보았다.
야. 이정도면 가히 퇴폐 경제학이라고 불러도 좋을것 같은데요.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을 요소로 가져와 양(量)화 시키고 함수를 만들어 멋대로 결론을 내리는거.
답글삭제'퇴폐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좋은 민주주의다'라는 정치철학적 입장과, '사람들의 의사가 정확하게 반영되어야 좋은 민주주의다'라는 또 다른 정치철학적 입장이 충돌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겠죠. 맨큐는 자신의 경제학적 지식을 이용해 후자를 옹호하고 있는 거고요. 감사합니다.
답글삭제말씀하신대로 맨큐는 후자를 옹호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스스로 그렇게 착각하고 있겠지만..
답글삭제'의사가 정확하게 반영된다'는 것은 informed and delibreated decision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맨큐의 논리에서 숨은 전제는 '투표를 하고 싶은 욕구 높다'를 곧바로 '비용을 들여 정보를 수집하고 충분히 추론하였다'와 동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농촌의 투표율이 도시에 비해 높다거나 교육수준이 낮은 나이든 사람들이 교육수준이 높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투표율이 높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맨큐의 숨은 전제는 오류인 것 같습니다.
결국 대의민주주의에 오래된 고민 중 하나는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의사결정능력에 있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인데, 이것을 공평하면서도 제대로 걸러낼 기준이 간단하게 제시될 수는 없다는 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교육받은 사람에게' 투표권을 2배 준다는 등의 생각을 하기도 했고, 예전 일본의 중견 배우는 '50대 이상은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독설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종의 문제제기로는 유의미하지만 제도로 실현되기에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공화당을 지지하는 텍사스의 창조과학을 믿고 동성애를 지독히 혐오하면서 투표를 꼬박꼬박하는 농부가 투표일을 애인과 무심하게 흘려버리는 뉴욕의 대학생보다 좀 더 나은 의사결정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큰 의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제학이 분명히 구별되는 여러가지 속성을 '비용'과 '효용'이라는 단 두가지 범주로 환원시켜 버림으로써 분석 자체에 크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자의적으로 무엇은 비용으로 무엇은 효용으로 섞어버리는 데 여기에는 사회적 관점과 개인적 관점이 아무런 원칙도 없이 뒤섞여 버립니다.
위의 예에서 투표의 '효용'은 무엇일까요? 맨큐는 마치 그것이 '정확한 의사의 반영'이라는 공익적인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논의의 어떤 고리에서는 '투표하는 개인이 갖고 있는 투표욕망의 만족'이라는 개인욕망의 충족이라는 뜻을 섞어버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공적 제도에 대한 행위와 소비 행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소비는 (외부효과가 가격으로 내부화되었다고 할 때) 소비자 그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투표는 언제나 항상 올웨이즈 외부효과를 가지는 것으로서 그 본질이 '강제력의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집단적 행위입니다.
맨큐와 같은 지성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자신의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을 평소에 하지 않고 쉽게 기계적으로 다른 영역에 그 방법론을 적용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볍게 문제 제기한 부분에 대해, 치밀한 분석을 덧붙여 주셨네요. 저 또한 방문자께서 말씀하시는 부분들에 대해 공감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허하게만 보이는 '철학적' 논의들을 쉽게 간과할 수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드는군요.
답글삭제방문자께서 남겨주신 리플까지 다른 사람들이 쭉 읽어줬으면 싶을 정도입니다.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