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30

구경꾼의 구성

"구경꾼의 역할"(sonnet)에 트랙백


sonnet 님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 세웠던 전략을 '구경꾼 끼워들이기'라는 큰 틀에서 설명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모든 갈등의 결과는 이에 관여하는 구경꾼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며, 또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위 두 가지 명제는 모두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강한 경쟁자는 자신이 상대방을 구경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므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 주저할 수 있다"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은 매우 타당하다. 용산 철거민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농성전을 시작한 것은 '구경꾼'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반면 경찰은 구경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새벽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해산 작전에 돌입했다.

이 지점까지는 sonnet님의 분석에 나 또한 무리 없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sonnet님은 "사적인 갈등에서 경쟁자들 간 힘의 관계는 언제나 불평등하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가장 강력한 특수이익은 사적인 해결을 원한다" 는 사실에 주목하여, "보상금의 액수와 보상 방식 등은, 개발 조합과 세입자들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어야 할 사항"이라는 내 주장을 검토한다.

내가 말한 대로 보상금 문제를 당사자간의 문제로 취급한다면, '용산구청의 수수방관'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되며, 구경꾼을 더 확보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했던 철거민들의 전략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문단을 길게 인용해보자.

이 문제가 개발조합과 세입자들의 사적 협상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용산구청에 저런 강력한 비난과 책임을 묻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대로 구청이 세입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적 협상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빛을 잃게 된다. 사실 사적 협상에서 한 쪽의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쪽만 잘 정의된 재산권을 갖고 있는데, 양 쪽의 협상력이 대등하다면 그게 신기한 일이 아닐까?


여기서 sonnet님은 두 가지 요소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구경꾼'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용산 철거민의 보상금 문제 중 실질적인 부분, 즉 권리금과 기타등등 금전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용산구청 또는 전철연처럼 협상 당사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실제 협상 과정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법정 객석에 앉아있는 방청객과도 같고, 후자는 원고나 피고의 옆에 앉아있는 변호사와 마찬가지이다. 내 글 "당신들의 인민재판" 의 취지는 '거기, 방청석 좀 조용히 합시다'였지, '변호사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가 아닌 것이다. 가령 "철거 문제 자체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언급이나, "정작 문제가 터지고 나면 이런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신문 몇 줄 찾아 읽은 고시생들이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인민재판을 주도하기에 바쁜 듯하다"는 비아냥을 통해 의도한 바도 그런 것이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팩트'를 운운하는 인민재판을 멈추어라'는 주장은, '용산구청은 세입자들의 편에서 개입했어야 한다'는 주장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는 구경꾼들의 입장과 관련된 정치적 발화인 반면, 다른 하나는 공권력의 작동에 대한 시민적 발화에 더욱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지점에서 이상적인 '구경꾼 만들기'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샤츠슈나이더의 말처럼,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가장 이상적인 구경꾼을 구성할 수 있을까?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위 표를 통해 1월 20일 화재 발생 이후 이 사건의 구경꾼들을 분류해보도록 하자. 경찰의 공권력 남용, 또는 공공의 선, 넓게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 표현 등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가로축에 놓는다. 철거민들이 받은 보상액의 크기, 전철연의 폭력성, 용산구청 공무원들의 짜증 등에 대한 관심 여부를 세로축에 놓는다. 이 경우 우리는 2*2짜리 표를 하나 얻을 수 있다.

두 가지 사항에 모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A에 해당한다. 우리는 그들을 '적극 참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열성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한편 경찰이 컨테이너로 망루를 흔들어서 불이 났건 말건,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3000만원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권리금이란 무엇인가?' '적절한 보상 액수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등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B에 속한다. 나는 그들을 편의상 '오지라퍼'라고 부르겠다.

반면 철거 대상 지역의 세입자들이 받았어야 할 보상금의 액수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고, 경찰이 사람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좌파'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능하다. 철거 문제는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며, 이명박 정부만 사람 잡은 것도 아니다, 이런 비판 말이다. 그 모든 의미를 종합하여, C에 속하는 사람들을 '민주 시민'이라고 해보자.

마지막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에 용산역 부근 지나갈 때 차가 막혀서 짜증이 났을 뿐,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D라고 하고, 그냥 '방관자'라고 이름을 붙여 놓는다.

이 경우 조선일보를 포함하여 '팩트'를 유포하는 신문들이 구성하고자 하는 구경꾼은 B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신문들은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론되지 않거나, 거론되더라도 철거민의 보상금이 애초부터 넉넉했는데 더 달라고 지랄하다가 죽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sonnet 님의 표현대로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구경꾼의 수를 그냥 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구경꾼인 B를 형성하는데 주력할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당신들이 '팩트'에 집착하는 것은 인민재판과 다를 바 없다,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주목하라'는 주장은,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A에 속하는 구경꾼과 B에 속하는 구경꾼 사이에서 벌어지던 논쟁, 이른바 '진실 게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구경꾼에 속하지 않고 있었던 이들을 추가적으로 C로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내 포스트가 올라온 후, 기존에는 다소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던 블로거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들이 C의 구경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갈등의 축이 계속 A-B에 머물러 있다면,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있다 해도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 B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꾸 다른 '팩트'를 들이대며 '진실 게임'을 하자고 나서기 때문이다.

'전철연, 과연 6000만원으로 무엇을 했는가?' 이따위 질문이 날아오면 '6, 70먹은 노인들이 골프공 좀 던진다고 그렇게 나와야 하냐?'라는 대답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면 아마 B에 속하는 사람들은 '전철연이 투석전 훈련도 시켰다'느니 운운할테고, 논쟁은 바로 이 수준에서 벌어진다. 이건 참 피곤한 일이다.

sonnet님이 인용하는 맥락을 보면, 샤츠슈나이더는 '구경꾼이 더 많이 참여할수록 사회적 약자의 협상력 강화에는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비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A-B의 갈등 구조, 즉 '진실 게임'은 본질상 쉽사리 식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B에 속하는 구경꾼들은 잠깐 머릿수를 불려주는 것 같지만 금방 분위기를 깨뜨리고 판을 망가뜨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식의 '사회적 관심'이 냄비처럼 끓어올랐다가 식어버린 사례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반면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하고 C에 새로운 구경꾼을 집어넣는다면, A-C에서 갈등의 축이 형성될 수 있다. A에 속하는 이들은 C에 속하는 '민주 시민'들을 바라보며, '너희들은 이명박을 까기 위해 철거민 문제에 관심있는 척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반면 C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이 싫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라고 말하다가, '민노당 진보신당 이래서 안 돼, 쯧쯧'하고 혀를 찰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없이 접해온 '진짜 진보', 또는 '개혁세력'에 대한 논쟁의 틀과 일치한다.

재미삼아 우리는 C-D의 갈등축, 그리고 B-D의 갈등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C에 속하는 '민주 시민'은 D에 속하는 '방관자'에게 '그러니까 다음번 선거는 잘 하자, 그런데 당신은 XXX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운을 띄울 것이다. 노골적으로 한 후보만 지지하면 너무 속이 뻔히 보이니까 '꼭 투표하자 씨발' 이러면서 문장을 마무리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B-D의 갈등축은, 과연 그게 생기긴 할지 잘 모르겠다. D에 속하는 사람이 B를 보고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돈이나 벌어'라고 하지 않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미 용산 철거민 문제가 사회화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볼 때, A-B의 갈등 구조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해산하고, 대신 A-C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 철거 피해자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A나 C에 속하는 사람들이 '철거민 편'에 속할 가능성은, B나 D에 속하는 사람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게다가 공권력과 공공성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내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점에서, 이후 구경꾼을 더 끌어들이는데에도 훨씬 유리하다.

내가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그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른 층위를 구성한다. A-C의 갈등 라인으로 구경꾼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후자의 가능성을 모든 이에게 개방함으로써 한층 폭넓은 구경꾼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길게 표를 그리면서 설명하였지만, 이것은 간단하게 보자면 한없이 간단한 문제이다. 철거 문제에 대한 '본질적 해결' 여부와는 무관하게, 일단 이 사건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라면, 경찰의 폭력에 분노하고 용산구청의 '생떼거리' 간판에 치를 떠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더 확고한 구경꾼으로 붙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B에 속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과연 손실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 … 갈등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에 구경꾼을 끌어들이거나 배제하는 데 성공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방향으로 논점을 정리하는 것을 "갈등을 사회화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 왔던 세입자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닌 것 같다. 시위 참가자들이 구속, 연행되는 지금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더 많은 보상금의 확보'에 머물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에게 유리한 구경꾼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더욱 사회화해야 하고, 또 그 갈등의 축은 공권력의 집행을 중심으로 삼고 있어야 한다.

2009-01-29

어떤 일

25일 밤부터 가을이가 화장실에 너무 자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26일, 27일 이틀동안 엄청난 양의 모래를 방바닥에 흩뿌리며, 5분에 한 번 꼴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찔끔 소변을 보고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혹시나 싶어서 수요일 오전에 병원에 데려갔다. 역시나 방광에 결석이 생겨 있었다.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팔 수 있는 사료를 먹이고 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말을 할 수 없다(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개에 비해 현격하게 좁기 때문에, 아파도 제대로 낑낑거리지 못하고 이상한 행동만 하기 일쑤다. 가을이도 그랬다. 방광이 쓰라렸을 텐데, 칭얼거리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

병원에 갔다 오고 나니 사태가 호전되고 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어제 아침에 비해 훨씬 화장실에 덜 들락거렸고, 편안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행이다.

2009-01-23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경향신문, 2009년 1월 22일)


1월 20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인해 용산구 철거민 여섯 명이 사망했다. 이런 세상이다. 20대가 '왜' 보수화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참사를 겪고 난 다음에도,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현판을 떼지 않고 있다.[1] 돈 없으면 구청에서 민원을 해도 '생떼거리' 취급을 당하고,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한겨울에 철거당하고 빈 건물로 내몰린 다음 목숨을 잃게 된다. 순우리말 '생떼거리'의 어감이 이토록 징그러울 수가 없다.

20대 문제에 대해 올바른 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고쳐 물어야 한다.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고 있는가? 지금의 20대는 투쟁의 주역에서 '투정'의 주역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용한 것이 바로 현 정부의 대선 캠프였다. 부산 사는 청년 백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영민씨. 그는 이명박 후보 지지 연설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직장을 잃었고,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서 반찬을 파는 것으로 가정의 생계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며 울먹였다.[2]

이명박 후보에 대한 이영민씨의 지지 연설은, 청년 실업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포괄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는 "어서 정권이 바뀌어서, 누가 어머니께 '당신 아들 어디 다니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3]는 소망을 피력했다.

대기업 또는 공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이 되지 않는 한 이 소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컨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소개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반면 '삼성전자'나 '조선일보'에 다닌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당하고 말고는 개인의 태도 문제겠지만, 사회적인 대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연봉으로 환산해보면 1125만원이 나온다. 종업원 300인 미만의 536개 중소기업에 들어간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초봉 평균은 1977만원이지만, 500대 기업에 들어갈 경우 평균 연봉은 3102만원으로 뛰어오르기 때문이다.[4] 처음에는 1125만원으로 시작하지만 소득 격차는 연차가 쌓일수록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주상복합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기 싫어서 '생떼거리'를 부리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의 차이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사람을 뽑는 방식이다. 공직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역사는 고려 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왕조 600년을 거쳐 일제시대를 통해 현대 한국에까지 고스란히 승계되고 있다. 사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중소기업에서 유능한 경력사원을 선발하는 것보다는, 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을 뽑는 것을 선호한다. 이 시험들의 공통점은 응시자의 이력서를 꼼꼼하게 본다는 것과, 최후의 관문인 면접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20대는 바로 그 면접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사법시험의 경우 올해는 10명, 작년에는 11명이 심층 면접에서 떨어졌다.[5]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자기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경찰 기록이 남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불이익이 돌아올 테니까. 대기업 입사시험을 준비하고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재벌 그룹들은 나름의 인성 평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같은 질문 앞에서, 젊은이는 소신대로 답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회사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통박'을 굴려야만 한다.[6]

20대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지 않다. 20대는 비굴해지고 있다. 한 손에는 월급 통장을, 한 손에는 물대포와 곤봉을 들고, 우리 사회는 20대를 '꺼삐딴 리'로 만들어가고 있다.





1. 안수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민원인은 생떼쟁이?." 한겨레21, November 28, 2008.
2. 3. 변진경. "'청년 백수' MB맨 어디서 뭐하나 ." 시사IN, January 12, 2009.
4. "대졸자 초임 양극화 심화…대기업이 중소기업 1.5배 |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5115453§ion=02.
5. 서동욱. "사법시험 3차 심층면접, 10명 탈락." 머니투데이, November 25, 2008.
6. 송형석. "[취업! 길은 있다] 인성·적성검사‥회사와 궁합맞는 인재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한국경제, September 16, 2008.

2009-01-20

서울 속 팔레스타인


1월 20일 새벽, 용산 현장 (서울=연합뉴스)


이스라엘은 탱크와 헬리콥터와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발사하는 로켓을 단순한 '폭력'으로 치부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경찰은 방패와 물대포와 최루탄과 몽둥이를 가지고 있으며, 최후의 경우 총을 쏠 수도 있다. 경찰은 시민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 없는 집단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 없듯이, 경찰도 시민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가 없다.

화염병을 썼으니까 죽어도 싸다는 사람들, 정말 역겹다. 이스라엘 쪽으로 로켓을 쏘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어도 좋다는 말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습격은 미국의 정권 교체와 맞물려 책임 추궁이 늦어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경찰청장 교체기에 벌어진 이 사건의 책임 추궁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폭력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이 현존하는 폭력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의 비폭력에 반대한다.

2009-01-18

소액금융, 한국에서 성공하기 힘든 이유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에 트랙백

그라민 은행의 성공 사례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국내에서도 소액금융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 각각은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원인은 간단하다.

소액대출은 그 성질상 신용대출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신체포기각서라도 받지 않는 한) 채무액에 상당하는 담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대출로 향할 수밖에 없는데, 그라민 은행이 취한 것 같은 구조는 현재 한국 및 기존 개발국가에서 성립하기 어렵다.

그라민 은행의 신용대출 방식은, 굳이 말하자면 '오가작통법'에 의거하고 있다. 다섯 명의 대출자가 서로 연대보증을 서주는 방식이다. sonnet님이 요약한 내용에 따르면,

그라민은행은 기본적으로 대출 희망자가 나타나면 다섯 명의 대출희망자를 모아 그룹을 조직할 것을 요구한다. 일단 그룹이 결성되면 이들에게 그라민 은행과 그들이 받는 대출에 대해 교육시킨다. 그리고 그룹원 다섯 명을 개별적으로 면접하고 구두 시험을 통해 이들이 내용을 숙지했는지를 평가하여 합격했을 경우에만 대출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은행 측은 개개인의 가난 극복과 자립에 대한 의지를 면밀히 관찰한다. 대출 과정 또한 독특하다. 그라민 은행은 일단 다섯 명 중 한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어 두 사람에게 융자를 준다. 6주 동안 원리금 상환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이 확인되면 마지막 두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 그룹 멤버 전원에 대해 대출이 중단된다.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a quarantine station, 2009년 1월 18일)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그룹은 십중팔구 같은 마을에 살거나, 친척이거나, 두 집합의 교집합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혈족의 유대감, 지역 공동체 거주민들끼리의 유대감이 모두 사라져버린 현대 한국에서 위와 같은 구조는 성립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친척이라고 해서 특별히 가까운 거리에 살거나 하지 않는다. '친척에게 연대보증 서주었다가 쫄딱 망하는' 괴담이 횡횡하고 있는 사회가 현대 한국 사회인 것도 사실이다. 친척이란 한 해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만나는 사람들이지, 경제적인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가 아니다.

덧붙여 한국의 산업 구조가 이미 고도화되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유누스가 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가 지금 내 손에 없어서 정확한 인용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책에 등장하는 성공 사례들은 대부분, 한 마리의 암소를 사서 잘 기르거나, 몇 마리의 암탉을 사서 알을 뽑아내거나, 또띠아 포장마차를 열어서 장사를 하는 등, 소농을 포함한 소액 사업들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이미 발전한 산업사회의 경우, 그런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굳이 친척들의 도움과 감시를 필요로 할만한 일이 아니다. 가령 붕어빵틀을 빌리는 것. 수십만원이면 가능하고 그것은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인보증을 요하지 않는 신용대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미 '마이크로 크레딧'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작은 규모의 사업을 해서 그 돈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산업이 고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사업의 수익성은 날로 약화되고 있다. 그것은 자본 투입으로부터 회수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동네 구멍가게라도 하나 차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한데, 그것은 소액금융에서 염두에 두는 그런 작은 빚의 범주를 넘어선다. 사업을 할만한 돈을 빌리는 것은 이미 소액금융의 범주를 넘어서는 액수에 해당한다.

최근 시작된 '인터넷 대안금융'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것은 확실해진다. 이 기사("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금융'이 떴다", 한겨레)에서 인용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소액금융은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외면하는 이들에게 급한 돈을 빌려주는 ‘현대판 품앗이’"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 인용된 사례는 이런 것이다. 오빠의 수술비를 대야 하는데, 자신이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있어서 사채를 빌렸다. 그 사람이 사채빚을 갚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신이 올린 사연을 보고 평가할 다수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빌린다.
김씨는 이런 사연과 함께 가계 수입·지출 내역, 자신이 부담할 이자율과 몇 달에 나누어 갚을 것인지를 올렸다.

글을 본 회원들은 김씨가 돈을 제대로 갚을지를 두고 사이버 투표를 벌이고, 게시판을 통해 당사자에게 질문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회원 38명이 2만~4만원씩 모아 100만원을 빌려줬다. 이 사이트에선 한 사람이 보통 100만~200만원을 빌리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30~50명이다. 돈을 갚을 능력이나 의지가 의심돼 대출자들을 못 모으면 빌릴 수 없다. 김씨가 다달이 내는 원리금은 사이트를 통해 대출자들에게 분배된다.
"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대출’ 떴다", 한겨레

기사에서 인용된 것 같은 사례에서, 대출자가 그 돈을 갚을 수 있을만한 여력이 있는 경우, 혹은 고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라민 은행이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사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라민 은행의 소액금융은 '급전을 막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의 첫 단계를 시작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한국에서 방글라데시와 같은 그런 소액금융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국 뿐 아니라 여타 산업적으로 이미 발전한 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친 고액의 부채를 갚기 위한 소액금융인데, 그것 또한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성공적인 소액금융의 구조는, 전통적인 사회 구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