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7

힐러리 퍼트남과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

몇 살 때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기억하는 한, 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없다'고 말하는 주장에 대해 반대해왔다. 이것은 사실 철학적 회의주의의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무언가가 옳은지 그른지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동시에 상대적인 가치 판단의 척도로부터 벗어난 초월적 진리가 있다면, '네가 옳은지 내가 옳은지 어찌 알겠는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과연 그런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을까? 많은 철학자들에게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미국 철학자 콰인은 인식론 전체를 자연화하겠다는 기획을 내놓으며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선험적인 지식, 선험적인 인식, 선험적인 그 무언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파악해낼 따름이다. 따라서 인식론은 인지과학의 발전에 기대야 마땅하고, 인식론 자체가 '자연과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1969년작 "Epistemology Naturalized"의 내용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철학자들이 반발했는데, 오늘은 그 중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이 내놓은 희한한 논증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퍼트남은 "There is at Least One A Priori Truth"라는 독특한 논문을 통해 콰인의 과격한 주장에 반대했다가, 출간 전에 덧붙인 노트에서 자신의 생각을 뒤집었다가,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래도 이런 정도까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묘한 논의를 전개했다.

최초의 논증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렵다. 그는 모순률을 이렇게 저렇게 잘 다듬어 그가 '모순의 최소 법칙'(Minimal Principle of Contradiction)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낸다. "모든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not every statement is both true and false)"는 것이 그 내용이다.

헤겔식의 단순한 모순률 대신 이렇게 복잡하게 최소화된 요건을 적용해야 하는 이유는 빌어먹을 양자역학 때문이다.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죽은 것이기도 하고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빛은 파동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 될 수 있다. 퍼트남은 논리적 트릭을 통해 이 함정을 피한다. 양자역학적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 대한 명제들, 뭐 그 외에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는 명제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적어도 '모순의 최소 법칙'은 그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경험적 대상과 맞닥뜨리더라도, 다시 말해 선험적으로 참이다.

여기까지 초고를 써놓고 좋아하던 퍼트남은, 그러나 (나는 그 내용을 잘 모르겠지만 논문에 써 있는 바에 따르면) 수학적 직관주의(mathematical intuitionism)가 있기 때문에 '모순의 최소 법칙'이 절대적으로 선험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그 경우에도 "그 어떤 명제도 증명되면서 동시에 증명되지 않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새로운 '모순의 최소 법칙'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최초에 제시된 '모순의 최소 법칙(1)'이 모든 경우에 선험적으로 참인 명제라는 것은 이제 틀린 말이 되어버렸다.

그 노트에 대한 새로운 노트에서 퍼트남은 자신이 순순히 콰인의 과격한 주장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새로운 변명을 늘어놓는다. 콰인주의에는 온건한 입장도 있는데, 대체로 추종자들이 본래의 사상가보다 더 목소리를 드높이는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콰인주의자들 중에서는 콰인이 제일 과격하다. 콰인은 그 어떤 명제도 선험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선험적으로 어떤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순의 최소 법칙'은 그런 과격한 콰인의 입장에 대해서라면 하나의 답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참'과 '거짓'이라는 개념들의 사용과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붙인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경험적 차원으로 치환될 수 없는 명제를 하나 만들 수 있다. "고전적인 참과 거짓 개념이 포기될 필요가 없다면, 모든 명제들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지는 않다."

퍼트남은 이 지점부터 슬그머니 논쟁에서 이탈한다. 자신의 논증은 콰인이 논박하고자 한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이성 규칙의 이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어떤 명제가 절대적으로 선험적이라는 주장이나, 그 어떤 명제도 절대적으로 선험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나, 모두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간략한 스케치를 제시했다는 것이 그의 최종적인 결론이다. 실컷 잘 싸우다가 이게 무슨 소리냐 싶지만, 이 논문 자체가 초고에 스스로 반박을 하고 또 반박을 해서 나온 것이니만큼 이 이상의 논의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식론의 자연화에 맞서는 하나의 논증 방식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그 스스로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적지만, 퍼트남의 논증 방식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의주의에 대항하여 내놓은 논증과 구조적으로 대단히 유사하다. 안타깝게도 학교 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므로, 여기서는 코플스턴 철학사에 등장하는 내용을 통해 그 논증을 짐작해보는 수준에서 만족하도록 하자.

그[아우구스티누 스]는 또, 회의주의자일지라도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 예컨대 상반하는 두 개의 명제 가운데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것은 허위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하고 있다. "하나의 세계가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여럿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만약 여럿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세계의 수가 유한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무한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세계에는 시작도 끝도 없든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든가, 시작은 없으나 끝은 있든가, 시작도 있고 끝도 있든가 그 중 어느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언제나 모순률을 확신하고 있다.


퍼트남이 두 번의 퇴행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어떤 층위에서건 모순률을 발견해낼 수 있고, 그 모순률의 존재만큼은 확신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과 '거짓'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증명된다'와 '증명되지 않는다'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하나의 명제로 만들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내가 아는 바가 없으므로 일단 여기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자.



참고문헌

Willard Van Orman Quine, “Epistemology Naturalized,” in 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9), 69-90., Reprinted in Sosa et. al., Epistemology: An Anthology(Wiley-Blackwell, 2008), pp.528-537

Hilary Putnam, “There is at Least One A Priori Truth,” Erkenntnis 13 (1978): 153-170. Reprinted in ed. Sosa et. al. Epistemology: An Anthology(Willey-Blackwell, 2008)

82p. 프레드릭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trans. 박영도, 코플스톤 서양철학사 2권 (서울: 서광사, 1988)

2009-09-1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강만수 특보의 이중국적 발언 – 마붑 알엄 씨의 경우

가령 내가 이 코너에서 ‘나는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정부의 기조에 동의한다’라고 선언한다고 해보자. 사람들은 미쳤구나, 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치 대운하, 혹은 4대강 정비 사업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과 같이 이미 성장할대로 성장해버린 경제 체계가 발전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업 기조를 변화하는 일이 꼭 필요하며,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가 엄습해오는 21세기 초반의 현실을 놓고 볼 때 그 방향은 결국 ‘저탄소 녹색성장’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4대강 정비는 전혀 저탄소도 아니고 녹색도 아니지만, 그 고탄소 회색성장에 걸려있는 깃발은 분명 ‘저탄소 녹색성장’인 것이다.

이처럼 문제는 정부가 전혀 엉뚱한 방향에 올바른 단어를 가져다가 써먹고 있다는 데 있다. 현 정부에서 발표하고 있는 정책 기조들 중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할만한 것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친 서민 경제정책’, 얼마나 좋은가. ‘중도 실용주의’도 말은 좋지 않은가.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고, 실제로 진행되는 바를 살펴보면 본래의 이상이 실현되기는 커녕 그와 정반대되는 방향으로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 한국경제 온라인 기사 화면 ⓒwww.hankyung.com  
 
오늘 다루게 될 ‘이중국적’도 마찬가지이다.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보는 9월 7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중국적 허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돈을 지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해외 우수 인재를 받아들이는 이민정책도 검토해야 한다. 나도 백인 조카 며느리가 둘이다”고 말했다. 강 특보가 ‘백인 조카 며느리’를 언급하는 것만 봐도 우리는 이미 그가 생각하는 ‘이중국적’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중국적 허용 그 자체는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저출산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법은 이민자들에 대한 문호를 넓히는 것이다. 인간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는 한, 떨어지는 출산률을 직접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출산 보조금 지급, 육아 환경 개선 등 간접적인 일들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산률이 떨어지면 전체 인구의 노령화가 진행되고, 경제적 요소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사회의 활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출산률 저하와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제시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강만수, '저출산 해결하기 위해 해외 우수인재 받아들여야'

인구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이민 수용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미 경제적으로 충분한 성장을 이룩한 나라에서는 출산률이 저하되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의 경우 아직도 인구증가율이 너무 가파르다. 이런 경우 이민은 해당 국가의 국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그로 인해 국내의 인구 저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이중국적 문제에 접근해보자. 2009년 5월 현재 국내에는 45만 명의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가 거주하고 있다.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불법체류자만 해도 20만 명에 이른다.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의 60% 이상은 방문취업자이다. 방문취업자에게는 최장 3년의 체류가 허용되며, 요식업이나 건설업 생산직 등 일부 제한된 업종에 한하여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3년 이상 체류할 경우이다. 현행법은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에 자신의 국적을 보유한 채 머무르는 것, 즉 간이귀화를 허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한국 국적을 얻거나 한국에서 떠나야 한다.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의 인권 신장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국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경우 사람은 자신의 국적에서 정체성을 확인하곤 한다. 따라서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 않는 한, 원래의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한국에서 이른바 ‘후진국’ 국민들에게 국적의 문호를 쉽게 열어주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 문제까지 다루지는 않기로 하자). 문제는 그 국적이 없으면, 유학생이나 어딘가에 고용된 누군가가 아닌 다음에야, 3년 이상 체류하면서 경제 활동을 하는 일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혹자는 이런 사안을 논하면 ‘거지 나라에서 온 거지들이 우리나라에서 돈 벌어서 나가려는 걸 우리가 왜 보장해줘야 하냐’는 볼멘소리를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다 자기네 나라로 송금해버릴텐데, 그러면 국부가 유출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반박했던 중상주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가치는 화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한국에 와서 노동을 하고 소비를 한다면 그는 그 활동을 통해 그만큼 한국의 GDP를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동시에 외국인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제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버는 액수 중 일부가 국외로 유출된다 해도, 한 사람이 한국에 들어와서 노동하고 소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순전히 대한민국의 GDP를 증가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대세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돈을 벌어서 들고 나간다 한들, 이미 그동안 먹고 마시고 생활하면서 쓰는 돈이 있고 그것이 한국 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혹은 들어와도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일을 할 수 없다면, 그들은 모두 지하경제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강만수의 발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이중국적’은 이렇듯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저소득층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듯하다. 강만수 특보가 과연 영화 <반두비>의 주인공을 맡은 마붑 알엄 펄럽 씨와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 말을 했을까? 마붑 알엄 씨는 방글라데시의 두라람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인재다. 영어는 당연히 잘하고 한국어도 한국인처럼 하며, 그 외에도 뱅골어, 우르드어, 힌두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런 그도 한국에 와서 염색공장, 플라스틱 공장 등 3D업체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지금도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과연 강만수가 말하는 “해외 우수 인재”에 마붑 알엄 씨 같은 사람이 포함될 수 있을까? “백인 며느리 두 명”을 운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절망감이 앞선다. 인종주의라는 게 별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짓이 바로 인종주의이다. 이중국적 허용 논의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이주민들의,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논의여야지, 인종주의에 찌든 ‘해외 우수 인재’ 타령이나 부유층의 탈세와 병역 회피 논란으로만 치달아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제발 우리와 이미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노정태/전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09-09-04

우리 안의 먹고사니즘

최장집 학파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갈등은 정치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개념이다. 특히 그 갈등의 크기가 중요하다. 일전에 sonnet님과의 논쟁에서도 잠시 언급된 바 있듯이, 하나의 정치적 투쟁 속에서 약자는 대체로 갈등의 범위를 넓히려고 하고, 강자는 그 범위를 좁히려고 한다.

그 갈등의 범위를 단지 '숫자'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츠슈나이더가 보기에 기득권층은 갈등을 사사화(私事化)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약자들은 문제를 사회화(社會化)함으로써 갈등 내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한다. 샤츠슈나이더는 우리가 흔히 '보수적'이라고 부르는 정치적 기동들을 한데 묶어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매우 중요한 문단이므로 길게 인용해보자.

정치에 관한 문헌들을 훑어보면, 정말이지 갈등의 사사화와 갈등의 사회화를 지향하는 상반된 경향들 간의 오랜 투쟁을 목격할 수 있다. 한편으로, 갈등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공적 영역에서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일련의 이념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개인주의, 기업 활동의 자유, 지방주의, 사생활 보호, 재정 지출의 축소와 관련된 이념들의 긴 목록은 갈등을 사사화하거나 그 범위를 제한하기 위해, 혹은 공적 권위를 사용해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를 막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당수의 갈등은 사적인 영역 내에 묶어 두는 방식으로 통제되었고, 그래서 갈등이 가시화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치를 다룬 문헌에서 이런 전략에 대한 언급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어떤 이론적 설명도 이런 이념들과 갈등의 범위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 적이 없다. 갈등의 사사화는 이와는 다른 근거에서 정당화되었다.[48-49쪽](굵은 글씨는 원저자, 밑줄은 인용자 강조)
E.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반면 우리가 '진보적'이라고 알고 있는 정치적 주제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뒤이어지는 문단을 살펴보자.

다른 한편, 갈등의 사회화에 기여하는 일련의 이념들 또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생활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 이념들뿐만 아니라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은 갈등을 사회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들 이념은 갈등을 전염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외부자들을 갈등에 참여시킴으로써 그 이전까지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공적 권위에 호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49쪽](밑줄은 인용자)


이슈가 터질 때마다 우르르 달려드는 이른바 '팩트 골룸'들에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로 설명된다. 팩트 골룸들은 당장 '구경꾼'의 숫자를 늘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엄연히 '사회적'으로 소화되어야 할 이슈를 '사사화'하는 것이다.

가령 쌍용자동차 공장 농성자들이 며칠 더 먹고 마실 수 있는 식량과 음용수를 비축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 사건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팩트'를 좋아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이슈에 반응하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다. '알고 보면 먹을 거 많았대요~!' '노조 지도부는 먹을 것을 안 나눠주고 있었대요~!' 이런 떡밥에 반응하는 '구경꾼'들은 갈등을 사회화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쇄말한 팩트의 차원으로 끌어내려버리기 때문이다. 샤츠슈나이더는 그런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먹고사니즘'은 갈등을 사회화하는데 기여할까, 아니면 사사화하는데 기여할까? (나는 그것을 '매 사안마다 '먹고 산다'는 말로 지칭되는 막연한 생계 혹은 소득의 문제를 들먹이는 담론 구조'로 이해하고 있지만) 아직 '먹고사니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제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으므로, 이 사안에 한정지어서 물어보자. 진중권의 중앙대 해임 사건을 놓고 '그래도 먹고 살만 하대요...'라고 말하는 것은 진중권과 중앙대의 갈등, 혹은 진중권과 정부의 갈등이 사회화되는데 과연 눈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될까?

다들 짐작하다시피, 전혀 그렇지 않다. 이 문제를 사회화하고 싶다면, 샤츠슈나이더의 말마따나 평등과 공존, 모두에게 동등한 법의 보호, 정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이주의 자유, 언론 및 결사의 자유, 시민권과 관련된 이념들을 언급해야 한다. 설령 진중권이 겸임교수 및 시간강사 자리에서 모두 잘려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해도, 이 이슈를 사회화함으로써 '해결'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면 '진중권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같은 식으로 가닥을 잡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중앙대는 '대학(=기업) 활동의 자유'를 근거로 들어 그를 해임했을 뿐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갈등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진중권 본인이 겸임교수로 버는 돈이 얼마 안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토대로 '어차피 먹고 사는 문제에 지장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 오히려 진중권의 그 발언을 통해 이 사건을 '경제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지게 된 것 아닐까? 다시 말해, 순수하게 '부당한 해임', '정치적 외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침 진중권의 당당한 수입 공개를 통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러 인터넷 논자들은 도리어 그 발언을 토대로 이 사건을 사사로운 일로 언급하기에 급급했다.

이명박을 싫어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해석' 대신 '진중권은 먹고사는 일에 문제 없다 오바' 같은 소리가 난무한 이유 또한 역시 '사사화'에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저는 진중권에 대한 정보를 당신보다 조금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에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진사마 끄떡 없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욕망이 이 갈등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당위와 충돌하였는데, 적지 않은 인터넷의 논자들은 그 욕망에 굴복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덕분에 진중권이라는 거물이 정말 시덥잖은 일을 당하는 지경에 몰렸지만 아무도 그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 좆같은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정작 총대를 매고 나선 것은 그의 수업을 듣던 중앙대 학생들이었다. 비겁하다고 나약하다고 손가락질이나 당하던 20대가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중앙대는 문자메시지로 학생들에게 징계 사실을 통보했다. 학부생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엄연한 대학의 일원이다. '돈줄'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고 '애새끼들'도 아니란 말이다. 이 문제 역시 일종의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는 학습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여기서 혹자는 '진중권 본인이 괜찮다더라. 화는 안 나고 짜증만 난다더라' 같은 소리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떤 별로 재미 없는 농담이 떠오른다. 한국인이 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에 갔다. 피가 철철 흐르는 그를 보고 의사가 물었다. "Oh, my god. It's serious. How are you?" 그러자 한국인은 조건반사적으로 대답했다. "I'm fine. Thank you. And you?"

진중권 본인이 괜찮다더라, 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진중권이 다른 누구처럼 아이고 데이고 나 죽네 생계가 어려워서 미치겠지만 웃음으로 참아야겠네 동네 사람들 나 좀 보소~ 이러고 있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모든 갈등이 사사화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한국인들은, 그 결과 가장 오버스럽게 고통을 호소하고 난리를 쳐야만 슬쩍 관심을 보이는 식으로 길들여져 있다. 그럼 '유쾌한 미학자 CJK'가 블로그에서 오열하고 삭발식이라도 하리? 본인이 괜찮다고 하면 그냥 괜찮은 거야? 당신들 바보인가?

밖에서 큰아들이 맞고 돌아왔다. 그 큰아들은 속내가 깊어서 웃는 얼굴로 '괜찮아요. 병신같은 애들이 병신짓 하는 건데요 뭐. 삥도 별로 안 뜯겼어요'라고 말했다. 세상에 그 어떤 미친 부모가 '아, 우리 애가 정말 생각보다 괜찮나 보다. 과자 사먹을 돈 아직 남았다니까 다행이다'라고 생각할까? 더군다나 그 큰아들을 때린 깡패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닐 것이 불보듯 훤한 시점에, '우리 애는 문제 없어요. 자기가 괜찮다는데 뭐'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먹고사니즘'이 정말 무섭긴 무서운가보다. 사람들이 뭐에 홀린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진중권은 먹고살만하다고 한다'는 말을 옮기고 있고,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같은 단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설령 잠시 염두에 두었더라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하등의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우석훈의 주도 하에 두 번째 서명판이 돌고 있다고 하지만, 이미 '먹고사니즘'은 이 갈등을 진중권의 '밥줄'에 대한 것으로 전락시켜버렸다.

그 결과 가장 피해를 보게 된 것은 결국, 20대들이다. 진중권을 위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가 징계를 당한 그 학생들 말이다. 참을 수 없이 부조리한 상황이다. 사태를 파악해보기 위해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실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용기를 낸 의로운 학생들이 결국 '우리 안의 먹고사니즘'의 희생자로 전락하게 될 위험에 놓인 것이다. 화는 안 나고 짜증만 난다는 진중권과 달리, 나는 이 일에 정말 화가 난다.

2009-08-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 중도주의의 덫

오바마 미 대통령이 ‘중도주의의 덫’에 걸렸다. 의료보험 개혁과 관련하여 보수층과 진보층 양쪽으로부터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전 세계인의 대통령으로 환영받았던 그의 지지율은 현재 50% 선에서 오가고 있다(국내 상황 때문에 이게 ‘높은’ 지지율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초기임을 감안했을 때 유례가 없이 낮은 수준이다). 대선과 총선 모두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공히 다수당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오바마의 개혁은 시작부터 높은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카리스마와 연설 능력 및 매력을 지닌 정치인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드라마틱한 경선을 통해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높은 기대를 받으며 대권을 탈환해낸 모습은 여러 모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케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측면이 적지 않다. 오바마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미국을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노무현은 영남과 호남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양자 모두 기존의 ‘정치권’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고,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노무현과 오바마 모두 사회적으로 볼 때 비주류 출신이며 그들의 당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차별 구조가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의미를 지닌다.

   
  ▲ 경향신문 8월 18일자 9면.  
 
노무현과 오바마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난맥상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장점이나 특징 뿐 아니라 단점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중도주의’라는 막연한 이상에 대한 집착이 그 단점으로 꼽힐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노 정부에 온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주요 개혁 법안들을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변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마찬가지 현상이 오바마의 민주당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 민주당은 현재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며,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열성적인 지지자 그룹을 일구어낸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의료보험 개혁 법안의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국내 매체에서는 이 사안을 두고 ‘세금 내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정서’ 등을 이유로 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바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태 자체를 이해하는데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미국인들은 원래부터 세금 내기를 싫어했지만, 강력한 국세청 덕분에 성실한 납세가 몸에 베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극성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정부에서 추진하는 ‘타운홀 미팅’을 방해하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지만, 애초에 이런 법안을 처리하고자 했다면 그정도 저항은 예상했어야 하는 것이었지 그것 ‘때문에’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개혁을 추진하고 성사시킬만한 오바마측의 동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바마가 ‘초당적 협력’, ‘중도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을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의료보험 개혁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몰아붙이는 보수진영의 공세에 맞서 굳건한 신념을 보여주지 못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내 보수파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다. 적어도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 본인이 빌 클린턴처럼 탁월한 사교술을 바탕으로 의원 개개인에게 접근하여 세부적인 주고받기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화당의 이탈표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중도주의’의 이상을 빨리 포기해야 한다.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의원과 민주당 의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중도주의는 없다

여러 진영의 눈치만 살피며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풀뿌리 자원봉사자들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버락’이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운동원들 사이에서는 선명성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대통령이 된 그에게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런 이들의 목소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남으로써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힘을 모아야 할 시점에 내부의 정치 투쟁이 불거지는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우리는 이미 지난 정부 기간 동안 충분히 보아 왔다.

그렇게 해서는 소수파 출신 정치인이 살아날 수가 없다. 자신보다 강한 세력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하나의 생존술이 될 수 있겠지만, 이미 대통령이라는 자리까지 얻어내었다면 자신의 지지층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는 내 진정성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야 할 때이다. ‘중도주의’를 외치며 이쪽의 정책과 저쪽의 정책을 절충하겠다는 발상은 양쪽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본거지 역할을 해야 할 기존 지지자들마저 이탈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 『프레임 전쟁』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그가 만든 로크리지연구소의 정치 전략 제언에서 따온 것이다. ‘중도주의’는 없다.

가령 낙태에 대해 정치적 논쟁이 발생했다고 해보자. 한 아기를 ‘중간 정도’만 낙태할 수는 없다. 결국 모든 해답은 0 아니면 1, 도 아니면 모로 나누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진보진영에 속한 누군가가 ‘중도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어중간한 합의책을 도출하거나 그런 제안을 어물쩍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견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보수층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미 노무현 정부의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시피, 기존의 지지층이 대폭 이탈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중도주의 덫에는 미래가 없다

레이코프 교수와 로크리지연구소는 ‘중도주의’를 추구하지 말고, 대신 지지층과 반대자에게 강력한 ‘진정성’을 보여줄 것을 권한다. 사람들이 정치인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특정 정책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믿고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의료개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것 저것을 뒤섞는 것보다, 현재 추진되는 의료보험 개혁이 어떻게 ‘미국적 가치’와 부합하는 것인지를 진정성 있게 설득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에게는 탁월한 대중 설득력과 카리스마가 있지만 그것을 얼마나 활용해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에서도 우리는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를 평생 빨갱이라는 족쇄에 묶어놓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중도적’으로 뒤섞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로, 국민들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진정성’을 갖고 때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갔다. 70년대의 김대중과 2000년대의 김대중은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취할지 모르지만, 통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초지일관 같은 편에 선다. 그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연이어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영원히 떠나보내며, 그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키워나갈 것인지를 놓고 이른바 ‘진보 진영’ 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진정성’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중도주의자’로 포장하려고 하며, 계파 내의 이합집산에만 집중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잡탕밥같은 정책을 내놓는 일에만 골몰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중도주의는 덫이다. 그것은 권력을 이미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이 여타의 정치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은 워낙 중간을 좋아한다고?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외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중도주의의 덫에 빠져 있는 한, 미래는 없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와 안식을 이루게 하소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