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도 지난 마당에 굳이 한마디 덧붙여본다. 꼭 한글날이 되면 ‘한글과 한국어는 다른데, 이런 날만 되면 방송에서 ‘한글 파괴’라고 떠들어댄다’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직 그 표현만을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하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차피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자다. 그리고 찌아찌아족인지 뭔지 하는, 이제 정신 차리고 한글을 버린 어딘가의 소수민족을 빼고 나면, 한글을 자국어의 표기 체계로 쓰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사적인 맥락을 제거하고 보더라도, 한국어 외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것은 그리 효율적인 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글과 한국어는 1:1 대응 관계를 이룬다. 세종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혹은 한자를 한국인들이 정확하게 발성하게 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당연히 한글로 창작된 문헌이 없었으므로, 한자 발음 표기를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 한들 어쨌건 그것은 ‘한국어 전용 문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글과 한국어는 별개의 객체지만, 한국어가 없는 한글은 우리가 아는 ‘한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글이 없는 한국어는 어떨까? 한글은 직접적으로 한국어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온, 사실상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다. 한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현대 한국어가 발전했다면, 그것 역시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바로 이 언어일 수는 없다. 한글과 한국어를 떼어서 생각하는 것은, 한글날을 전후로 많은 이들이 목놓아 외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글과 한국어를 억지로 분리시켜서 사고하고, 그 이면에 제국주의적 욕망을 깔면, 오히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앞서 말한 찌아찌아족에 대한 ‘한글 전파’라던가, 한국에서 주최하고 한국인이 심사하는 ‘세계 문자 올림픽’인지 뭔지 하는 병신같은 이벤트 따위가 다 그렇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 사용자에게도 한글이 ‘과학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한글이 한국어를, 한국어만을 위한 문자 체계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은 발상이다.
물론 매체들이 ‘한글 파괴’라고 거들먹거리는 현상 중 대부분은 ‘한국어의 비관습적 사용 양태’이며, 그런 호들갑에는 좋게 이해해줄 구석이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대 논리가 ‘한글과 한국어는 다르다고요’에서 하염없이 맴돌 뿐이라면,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담론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불공평한 일이지만, 이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더 깨어있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노력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