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는 일종의 교통사고인가?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에 이어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 역시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및 피해자들의 편에 서고자 하는 언론, 정치인, 시민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발언에 대해 격렬한 반대의 뜻을 표하고 나섰다.
물론 그러한 발언이 나온 맥락과 시점을 고려해보면 두 사람의 여권 인사는 정부와 여당으로 향하는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 같다. 내게 쏟아질 수 있는 비난을 무릅쓰고, 감히 물어보겠다. 세월호 참사는, 그렇다면, 교통사고가 아닌가?
경향신문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김혜진 국민대책위 집행위원장은 “많은 이들이 분노한 건 사고 자체가 아니라 사고가 참사로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속에서, ‘교통사고’는 ‘구조 실패’보다 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선행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우리가 향후 방지해야 할 것은 사고 그 자체다.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이미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망자와 생존자, 실종자와 그 모든 이들의 가족 및 친지들이 겪었고 앞으로도 겪게 될 고통을 그냥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에 잔인한 현실이 존재한다. 이미 벌어진 비극으로서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동정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저질러진 일, 이미 벌어진 비극 앞에서, 우리의 감정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세월호의 침몰과 그로 인한 대량의 인명 손실을 그저 ‘세월호의 아이들’에게만 국한된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그런 위험을 끌어안고 있다.
‘세월호는 일종의 해상 교통사고’라는 발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반발한 것은 그런 면에서 최선의 대응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교통사고’처럼,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 우리가 살다 보면 우연히 겪기도 하는 일이, 이렇듯 참사로 비화될 수 있다고 응수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월호 참사’는 과거의 사고이며, 희생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이 겪은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교통사고’는 확률적으로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일이며, 현재와 미래의 사고이다.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누가 놀러 가라고 했냐, 누가 죽으라고 했냐’고 막말을 퍼붓는 어르신들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확률상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즉 ‘교통사고’라는 프레임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것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논의의 폭을 사회 전체로 끌어올릴 수 있는 한 방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교통사고’라고 누군가가 어떤 맥락 속에서 ‘막말’을 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에게 ‘너는 교통사고 안 당할 것 같냐’고 ‘막말’을 되돌려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럼 그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정부가 뭘 했냐’고 쏘아붙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미 벌어진 비극을 놓고 더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끌어올리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지 모르는 또 다른 사고의 가능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국의 시민운동가 랄프 네이더는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를 통해, 충분히 안전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은 자동차가 교통사고의 위험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입증하고, 그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광범위하게 규합해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움직임이다. 누군가가 이미 겪은 ‘참사’에서, 너와 내가 당할지 모르는 ‘사고’로, 논의의 초점을 옮기는 것 말이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 부른다 해도 정부의 잘못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프레임 속에서 해야 할 이야기가 적지 않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가 겪었고, 겪을 수도 있으며, 최선을 다해 예방해야만 하는, 그런 비극적인 교통사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