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1

폭발물, 터지지 않은

12월 10일 밤에는 '폭탄 테러'로 보도가 되었지만, 다음날인 11일이 되자 "폭죽용 고체연료" 같은 창의적 표현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고등학생이 다양한 인화성 물질을 모아 도시락통에 넣어, 전북 익산 신동성당 예배실에서 진행중이던 '전국 순회 토크 문화 콘서트' 현장에서, 불을 붙인 후 투척한 사건에 대해 지금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사고 당시에는 '폭탄 테러'였는데, 어느새 "폭죽용 고체연료" 투척 사건으로, 슬쩍 표현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사안의 중요성을 은폐하고, 명백한 폭탄 테러를 마치 불장난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효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저러한 보도 경향 이면에는, '폭발물'에 대한 대법원의 납득하기 어려운 판례가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법원 2012.4.26, 선고, 2011도17254판결을 살펴보자. 피고인은 "①유리꽃병 내부에 휴대용 부탄가스통을 넣고 ②유리꽃병과 부탄가스 용기 사이의 두께 약 1㎝의 공간에 폭죽에서 분리한 화약을 채운 후, ③발열체인 니크롬선이 연결된 전선을 유리꽃병 안의 화약에 꽂은 다음 ④전선을 유리꽃병 밖으로 연결하여 타이머와 배터리를 연결하고, ⑤유리꽃병의 입구를 청테이프로 막은 상태에서, ⑥타이머에 설정된 시각에 배터리의 전원이 연결되면 발열체의 발열에 의해 화약이 점화되는 구조"(원문자는 인용자)의 물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집어넣었다.

①에서 ⑥까지의 과정을 쭉 읽어보자. 이건 누가 봐도 시한폭탄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피고인은 재주가 좋지 않았고, 그래서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들어 있던 것은 연소될 당시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물품보관함의 열쇠구멍으로 잠시 불꽃과 연기가 나왔으나, 물품보관함 자체는 내부에 그을음이 생겼을 뿐 찌그러지거나 손상되지 않았고 그 내부에 압력이 가해진 흔적도 식별할 수 없"는, 시시한 결과가 발생하고 말았다. 제대로 터지지도 않고 피식~ 했다는 뜻이다.

자, 이런 걸 만들고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설치까지 한 이 행위는, 형법상 무슨 범죄에 해당하는가?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

제119조(폭발물사용) ①폭발물을 사용하여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을 해하거나 기타 공안을 문란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172조(폭발성물건파열) ①보일러, 고압가스 기타 폭발성있는 물건을 파열시켜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에 대하여 위험을 발생시킨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1심은 그 '물건'을 형법 제119조 제1항의 "폭발물"로 보지 않고, 대신 제172조 제1항의 "폭발성있는 물건"으로 보았다. 검찰은 항소하였고, 상고하였지만, 대법원은 원심의 손을 들어주었다. 유리꽃병 속에 부탄가스 통을 넣고 그 사이의 공간에 화약을 채워넣은 후 제 나름대로 도화선이라고 할 것도 꽂아넣고 시한장치까지 부착했는데도, 그것은 "폭발물"이 아닌 "폭발성있는 물건"이라고 본 것이다. 제119조 제3항은 "③전 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폭발물을 만들어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의 미수범으로 처벌할 수 있음에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시 이유는 이런 것이다. 형법 제172조가 이미 있기 때문에, 제119조에 해당하는 "폭발물"은 아주 엄격하게 해석되어야 하며, "떠한 물건이 형법 제119조에 규정된 폭발물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그 폭발작용 자체의 위력이 공안을 문란하게 할 수 있는 정도로 고도의 폭발성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폭발물'과 '폭발성있는 물질'의 구분은 폭발력, 즉 "폭발성능"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폭발시켜서 일부러 사람과 재산을 손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통상적인 목적에 따라 사용되는 인화성 물질이냐에 따라 그 구분선이 그어져야 마땅하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자동차의 연료통에 담배꽁초를 일부러 집어넣는다고 가정해보자. 휘발유는 만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경우, 한꺼번에 수십 리터의 휘발유가 폭발하므로, "폭발성능"은 굉장할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나 자동차의 연료통 그 자체는 폭발물이 아니다. 그것은 폭발할 수도 있는 물건이다. 형법 제172조 제1항에서 "보일러, 고압가스"로 '폭발성있는 물건'의 예시를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뜻한다. 어지간한 기름 보일러나 가스 보일러가 폭발하면, 어설픈 사제폭탄을 가볍게 뛰어넘는 폭발성능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보일러나 고압가스 등도 그 자체가 폭발물인 것은 아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사제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말해 "고도의 폭발성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폭발물'이 아니라 '폭발성있는 물건'으로 바라보는 대법원의 판례는, 대단히 위험하다. 사제 폭탄을 만들고 테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만으로는 형법 제119조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론이 불러오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자.

첫째. (<마스터 키튼> 같은 몇몇 귀중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전문적인 사제폭탄 제조자라고 해도 불발탄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 그런 경우, 그가 만든 폭탄은, "고도의 폭발성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폭발물'이 아니게 되는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느냐가 '폭발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폭탄 테러범의 터지지 않은 폭탄도 형법 제119조에 의해 처벌 가능해진다.

둘째. 이러한 법 해석론은 총포·도검·화약류등단속법의 제2조 제3항에서 다음과 같이 "화약류"를 규정한 것과도 매끄럽게 상응하지 못한다. 우리의 법 체계는 이렇게 엄격하게 화약류를 규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모으거나, 만들어낸 폭발물을 왜 '폭발물'로 규정하고 처벌하지 않는가?

     1. 화약

        가. 흑색화약 또는 질산염을 주성분으로 하는 화약
        나. 무연화약 또는 질산에스테르를 주성분으로 하는 화약
        다. 그 밖에 "가"목 및 "나"목의 화약과 비슷한 추진적 폭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것

    2. 폭약

        가. 뇌홍·아지화연·로단염류·테트라센등의 기폭제
        나. 초안폭약·염소산칼리폭약·카리트 그 밖의 질산염·염소산염 또는 과염소산염을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다. 니트로글리세린·니트로글리콜 그 밖의 폭약으로 사용되는 질산에스테르
        라. 다이나마이트 그 밖의 질산에스테르를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마. 폭발에 쓰이는 트리니트로벤젠·트리니트로토루엔·피크린산·트리니트로클로로벤젠·테트릴·트리니트로아니졸·핵사니트로디페닐아민·트리메틸렌트리니트라민·펜트리트 및 니트로기 3 이상이 들어 있는 그 밖의 니트로화합물과 이들을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바. 액체산소폭약 그 밖의 액체폭약
        사. 그밖의 "가"목 내지 "바"목의 폭약과 비슷한 파괴적 폭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것

    3. 화공품

        가. 공업용뇌관·전기뇌관·총용뇌관 및 신호뇌관
        나. 실탄(실탄;산탄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 및 공포탄(공포탄)
        다. 신관 및 화관
        라. 도폭선·미진동파쇄기·도화선 및 전기도화선
        마. 신호염관·신호화전 및 신호용화공품
        바. 시동약(시동약)
        사. 꽃불 그 밖의 화약이나 폭약을 사용한 화공품
        아. 장난감용 꽃불등으로서 행정자치부령이 정하는 것
        자. 자동차 긴급신호용 불꽃신호기
        차. 자동차에어백용 가스발생기

2012년에 나온 대법원의 이 판결은 매우 실망스럽고 또 우려스럽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전 세계의 양식 있는 시민들은 테러의 공포와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 미국에서 누군가가 압력밥솥을 이용해 사제폭탄을 만들어 보스톤 마라톤 대회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것을 기억해보라. 그때도 일부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럼 그건 '폭발물'이 아니라 '폭발성있는 물건'인가? 멀쩡히 테러범에 의해 제작되고 현장에 배치되었음에도?

하지만 일부러 폭탄을 만드는 자를 강하게 처벌하겠다는 입법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법문 해석상 그 의도는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대법원은 '폭탄은 터져야 폭탄'이라는, 법적 논리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상식에도 어긋나는 판례를 내놓고 있다.

폭발물은 터뜨리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제작된 물건이다. 그래야 한다. 제대로 터졌냐 안 터졌냐는 '폭발물'을 판단하는 기준일 수 없다. 그래야 이른바 '백색 테러'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발로 발생하게 될 '적색 테러'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안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책임 있는 수사와, 검찰의 뚝심 있는 공소가 이루어지기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추가)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12일 오군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폭발성물건파열치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공범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옳지 않은 판례가 미치는 영향이 바로 이런 것이다.

2014-12-09

[북리뷰]20세기 말에 예견한 21세기 모습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이희재 옮김·김영사·1만7900원

당대에 아무리 큰 논란을 낳은 책일지라도 그 책의 예견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제대로 기억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작품을 ‘발견’ 혹은 ‘재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어깨 위에 온전히 놓이는 짐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2014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문명의 충돌>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게 될 21세기의 모습을 20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냉철하게 예측해냈기 때문이다.

‘문명’들이 ‘충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개별적인 ‘문명’들을 묶어주던 ‘이념’의 틀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세계 정치는 문화와 문명의 괘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전파력이 크며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갈등은 사회적 계급, 빈부, 경제적으로 정의되는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지 않고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21쪽) 헌팅턴은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중화, 힌두, 그리스정교, 불교, 일본을 그러한 ‘문명’들로 보았다. 1990년대까지는 서구와 비서구, 즉 공산권이 대립하였지만, 이제는 다른 세상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 중 이슬람 문명에 대한 평가와 예측이 당시 불러일으켜진 논란의 핵심이었다. “이슬람의 경계선은 피에 젖어 있으며 그 내부 역시 그렇다”(350쪽)는 헌팅턴의 말은 <포린 어페어스>에 논문의 형태로 처음 실렸을 때부터 극단적인 반발과 호응을 동시에 불러왔던 것이다. 1996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후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2대의 여객기가 날아오면서 헌팅턴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현실 속에서 실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2014년, 이른바 ‘이슬람 국가’로 스스로를 표방하는 ISIL이 미국인 저널리스트 제임스 폴리를 참수하면서 ‘문명의 충돌’ 이론은 구태여 반박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상식’의 범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미국은 ‘이슬람 국가’와 싸우고, 중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며, 우크라이나는 유럽에 가까운 서쪽과 러시아에 가까운 동쪽으로 사실상 양분된 상태다. ‘문명의 충돌’ 그 자체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면모는 단지 문명들끼리의 충돌을 예견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소련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문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혀 다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이념분쟁이었으며, 판이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근대적이고 세속적이며 자유, 평등, 물질적 복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하여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188쪽) 반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전통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배들의 린치를 경찰이 묵인하고 방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문명’끼리 충돌하는 세계는 그 ‘문명’ 속의 야만이 ‘이념’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문명의 충돌>은 세월의 검증을 이겨낸 당당한 현대의 고전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21세기의 국제정치적 변화를 예측했고, 그 중 많은 수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문제는 그 속에 묘사된 세계와 한반도의 모습이 결코 밝지 않다는 데 있다. 차분한 마음으로 이 책을 다시 읽고, 다가올 새해와 새로운 세계 속의 우리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2021053111&code=116

2014-11-30

[별별시선]최장집, 김상률, 통합진보당

“김일성은 국내의 민중적 지지 기반,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대남한 강경 정책에 대한 정치적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지원,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자신감 등 모든 대내외적 조건들이 압도적 우세에 있었다. 그의 우세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그를 전쟁을 통한 총체적 승리라는 유혹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하였고, 결국 그는 전면전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1998년, 국민의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최장집의 책에서 인용된 문구다. 당시 ‘월간조선’은 이 ‘발견’을 대서특필하며 최장집을 청와대에서 쫓아냈다. 뒤이어지는 문장이 “무엇보다도 김일성의 오판을 유도하였던 요소는 한반도의 국내 정치적 조건이라기보다는 국제 정치적 조건, 즉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던 냉전 체제의 성격과 그곳에서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국의 힘이었다”라는 것은 그 시점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문장 하나, 표현 하나를 꼬투리 잡아 ‘빨갱이 사냥’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 소유는 열강에 에워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민족 생존권과 자립을 위해 약소국이 당연히 추구할 수밖에 없는 비장의 무기일 수 있다.” 현재 정당해산심판 선고를 앞두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핵심 인사가 내뱉은 말이 아니다. 김상률 신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의 2005년 저서 <차이를 넘어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적어도 인용된 문장의 ‘수위’만 놓고 보면, 1998년의 최장집이나 2005년의 김상률이나, 비슷한 말을 했다. 오히려 김상률의 경우가 더 심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지나간 일이지만 북한의 핵무장은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니 말이다. 이에 고무된 보수 언론들은 앞다투어 <차이를 넘어서>를 입수한 후 ‘문제 발언’들을 더욱 캐내기 시작했다. 최장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후 맥락 없이 툭툭 잘려나간 문장들이, 신문 지면을 수놓고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주적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더욱 잘 이해해야 한다. 전략적 판단에는 역지사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북한 입장에서야 당연히 생존을 추구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하려 들 테니 말이다. 문제는 저 인용된 문장이 과연 북한의 뜻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의 정치적 입장은 다르다’는 것인지, 언론 보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1998년과 거의 유사한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서술인지, 비판하기 위해 남의 말을 적어둔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실제로 동의하는 정치적 주장인지 아무런 구분도 없이 마구잡이로 인용된 문구가 언론 지면을 장식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니 어떻게 저런 빨갱이가 청와대에 들어가나’라는 대중의 비난 어린 손가락질이, 이번 경우에는 대통령 쪽으로는 결코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의 선고를 앞두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그 선고를 앞두고 있다. 나 너 우리가 ‘종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선고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인지, 아니면 북한이라는 ‘적’을 상정해야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허약한 군사독재 국가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것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국면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된다면 우리는 1998년 이전으로 후퇴한다.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비로소, 청와대에 ‘종북’ 의혹을 받는 수석이 임명될 수도 있는, 2014년 이후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최장집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설명하며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김상률은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의 책에 적힌 내용은 에드워드 사이드 및 미국 좌파 지식인들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니 말이다. 통합진보당 역시 그들 스스로가 아닌 대한민국의 명예를 위해, 존속되어야 한다. 그들의 시대착오적 대북관을 심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권자이며 유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302100215&code=990100&s_code=ao122

2014-11-25

[북리뷰]모멸, 수치심 자극하는 최악의 방아쇠

모멸감
김찬호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500원

“박정희가 왜 죽었는지 아냐? 김재규한테는 술 안 따라주고 차지철한테만 따라줘서 총 맞아 죽은 거다.” 이런 이야기를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로부터 듣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기억이 있다. 세상에 자기한테 술을 안 따라준다고 사람을 죽일 수가 있을까? 일국의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그렇게 하잘것없는 개인적 감정 때문에 역사의 방향을 바꾸게 될 거사를 저질렀단 말인가?

<모멸감>을 쓴 사회학자 김찬호에 따르면 저러한 ‘민담’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작동하며, 때로는 개인의 감정이 사회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회학은 인간의 감정을 중요한 변수로 다루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감정은 이성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렬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29쪽) 그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저자는 ‘감정사회학’이라는, 기존의 연구 문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아주 무서운 감정인 ‘모멸감’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은 바로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모욕은 누군가의 자기존재감을 해치는 행위라고 정의한 그는 그 모욕 중에서도 ‘경멸’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는 ‘모멸감’에 주목한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67쪽)

이렇게 구분짓긴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는 모욕과 모멸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가족처럼’ 생각해서 여직원의 엉덩이를 더듬었다고 주장하는 중년 남성 관리자와 ‘친하니까’ 함부로 말하고 다소 괄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은 풍토 속에서, 내가 남에게 모욕을 가했다, 혹은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는 인식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최근 우리 사회의 양심을 울리고 있는 이른바 ‘압구정동 ㅅ아파트 경비원 분신 사건’의 경우도 그렇다. ‘사모님’으로 흔히 지칭되는 70대의 ㄱ씨는 경비노동자 고 이만수씨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모멸감을 선사했다. 분류된 재활용 쓰레기를 놓고 트집을 잡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5층 높이에서 그에게 음식을 던지며 “슛, 골인”이라고 외쳤다는 증언도 있다. 자기 나름대로는 모욕을 주기는커녕 ‘친하니까’, ‘가족같으니까’, 혹은 ‘우리 아파트에서 일하는 머슴 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대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작은 모욕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내면이 폭발한다.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사회 전체가 터져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모멸감을 선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두고 있는 한, 이 구조 속의 우리는 그 누구도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없다. 젠더 감수성, 인권 감수성과 같은 맥락에서 ‘모욕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사회적 인식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이대로 모멸의 왕국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 사회에는 지속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1181102071&code=116

2014-11-11

[북리뷰]전염병, 올바른 공공정책 방향

[북리뷰]전염병, 올바른 공공정책 방향
2014.11.11ㅣ주간경향 1100호

바이러스 도시
스티븐 존슨 지음·김명남 옮김·김영사·1만4500원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유행은, WHO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월 1일 현재 1만여명에 가까운 감염자를 발생시켰고 그 중 절반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1974년에 확인된 에볼라 바이러스가 이렇게 많은 감염자를 낳은 것은 처음이다. 그 전에도 몇 차례 유행이 있었지만, 워낙 치사율이 높았을 뿐더러 발병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도시로의 인구 밀집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위기를 안겨준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조건이 맞는다는 전제 하에, 더욱 쉽게 숙주를 찾을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면 그만큼 유전적 변이가 발생하고, 그래서 더욱 그 질병을 퇴치하기 어려워진다. 전 세계적으로 에볼라 바이러스의 대도시 상륙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머전스>로 잘 알려진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은 <바이러스 도시>에서, 19세기 런던을 강타했던 콜레라 유행과 그에 대한 공공의학적 대응에 주목한다. 당시 세계의 수도 노릇을 했던 런던은 무려 300만명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대소변과 기타 오물을 적당히 모아서 집 근처의 오물 웅덩이에 퍼부었다. 그 오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정화되기도 했지만, 도시의 거주민들이 이용하는 우물에 녹아들어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바로 그렇게 런던 소호의 브로도 거리에서 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자는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마취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적으로 개량해낸 것으로 명성을 얻은 의사 존 스노와 브로도 거리를 담당하는 세인트제임스 교구의 목사인 헨리 화이트헤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빅토리아 여왕 재임 시기, 19세기 중반은 의학이 과학으로서 갓 걸음마를 내디딘 시점이었다. 콜레라는 오물의 악취를 맡으면 발생하는 질병인지, 아니면 그것을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게 하는 요소, 즉 ‘감염’의 원인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학적 논쟁이 한창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 즉 ‘독기설’을 취한 반면 존 스노는 후자인 ‘감염설’을 지지했다.

<바이러스 도시>는 존 스노가 10여년에 걸쳐 감염설을 연구하고 있던 중, 자신이 살던 지역의 콜레라 발병을 목격하고, 본인의 연구를 현실에 적용시켜 군집생활을 하는 인류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를 막아낸 영웅담이다. 그는 사람들이 오염된 물을 마셔서 콜레라에 걸린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확인한 후, 화이트헤드 목사를 설득해 오염된 물이 나오는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했다. 과학으로서의 의학이 공공정책의 영역에 개입한 최초의 사례이자, 명백한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런던은 상하수도를 갖췄고 콜레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올바른 공공정책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국제적·인도적 차원에서 의료진을 에볼라 발병 지역에 파견하되, 병에 걸릴 경우 제3국에서 치료를 받고 오게 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야만과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에볼라에 걸린 후 완치된 간호사 니나 팸에게 따뜻한 포옹을 선사했다. 우리는 미지의 질병 그 자체보다는 그 질병에 대한 공포심을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1041406261&code=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