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

EU가 원자력을 친환경에너지로 인정했다

EU 정상들은 원자력 에너지를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해달라는 일부 회원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부 국가에 한해 에너지 믹스(전력 발생원의 구성)에 원자력을 포함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헝가리와 체코는 EU가 원자력을 환경친화적인 에너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룩셈부르크를 비롯해 단계적인 원자력 발전소 폐쇄를 추진하고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은 여기에 반대해왔다.

김정은, 현혜란, "EU, 2050년까지 '탄소중립' 목표 합의…폴란드는 일단 유예(종합)", 연합뉴스, 2019년 12월 13일. 기사 원문 링크.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모두 질 좋은 갈탄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다. 뿌리 깊은 석탄 산업의 힘이 정치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자력발전이 늘어나면 석탄화력발전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독일의 '탈원전'은 석탄화력의 사용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석탄화력은 원자력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석탄이라는 연료를 공급하고, 석탄을 태우면서 나오는 재를 치우는 등의 온갖 과정에 사람이 개입해야 하므로 당연히 사고의 위험이 확률적으로 높아진다. 반면 원자력은 거의 모든 과정이 기계로 제어되며 자동화되어 있다. 나는 2017년에 이런 글을 썼다.

반면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는 특별한 지진이나 지진해일 등의 재난이 없더라도 꾸준히 사망자가 발생한다. 계속해서 연료를 투입하고 폐기물을 제거하는 등 사람이 개입해야 할 작업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2월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의 경우 2011년부터 5년간 각종 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화력발전소의 환경적 위험 뿐 아니라 작업자들의 위험 역시 모른다. 환경주의의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노정태,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 가이아 이론과 홀 어스 카탈로그", 노정태의 블로그, 2017년 7월 28일. 원문 링크.

그리고 2018년 12월 10일, 24세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그 역시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물론 2인 1조 작업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측의 무리한 경비 절감이 그의 죽음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석탄화력발전소의 구조 자체가 이와 같은 산업 재해에 취약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나는 원자력이 기후변화의 대응책으로서 유의미하고, 특히 석탄화력발전에 비해 노동자에게도 안전한 에너지원임을 줄곧 역설해왔다. 하지만 소위 '진보'는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나는 입을 열었고, 2017년 7월, 약 10여년을 칼럼니스트로서 함께해온 언론사에서 잘려나갔다.

존경하던 사람들을 존경하지 못하게 되었고,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고 있던 이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당신들보다 좀 더 깨어있는 정신으로, 좀 더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진보 '세력'이 한꺼번에 퇴보하고 있을 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진보'는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019-12-14

박하사탕(1999)

나는 이 영화가 개봉 후 한창 화제를 끌 때에도, 이창동이 영화감독을 넘어 문화부장관으로 승승장구할 때에도 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KBS에서 매주 금요일 방송하는 '한국영화 100년 더 클래식'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돌아가고 싶다. 내가 <박하사탕>을 안 봤던 그 시절로.

<박하사탕>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줌의 윤리적 자의식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오프닝 크레딧이 뜰 때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시간의 역순이라는 핑계를 대고 서사적 구성이 전혀 맞지 않는 '억울한 나님'들의 현란한 전시로 꽉 채워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남들 때문이고, 여기서 그 '남들'은 대부분의 경우 여자이며, 여자 중에서도 특히 첫사랑인 순임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죽어라고, 정말이지 죽어라고, 여자 탓을 한다. 그가 80년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후 트라우마에 빠진 건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 여고생 때문이다. 때문인가? 물론 영호의 자기 서사 속에서는 본인은 착하게 여고생을 집에 보내주고 싶었지만 뒤에 다른 군인들이 다가와서 쫓아내기 위해 허공에 총을 쏘다가 잘못 맞았다. 그러므로 영호는 피해자다. 영호가 피해자면 누가 가해자인가? '비극적인 현대사' 탓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 그 자리에 나타났던 그 여자 탓이 없다고도 하지 않는다. 허공에 대고 총을 쏘는 그 쉬운 일조차 제대로 못 해놓고서(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사실, 순임이 겹쳐보이는 그 여고생을 영호가 일부러, 혹은 미필적 고의로 쏘아 죽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나?) 세상 모든 고통과 아픔을 짊어진다.

그의 인생에 나타나는 회상과 반추가 모두 이딴 식이다. 1984년, 신참 형사가 된 그가 본격적으로 타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또 어떤가. 고참들이 강요해서 고문을 하다 손에 똥이 묻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첫사랑 순임이 자신을 찾아와, 영호에게 '착한 손을 가졌다'는 둥 그의 상처받은 마음을 들쑤시는 소리를 한다. 그래서 평소에 본척만척하던 식당 종업원 홍자의 엉덩이를 더듬는다. 순수한 영혼이 상처를 받아 일부러 위악적 행동을 하며 순수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한 행동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이창동이 만든 영호의 서사란 '나는 울고 싶은데 네가 나타나서 내 뺨을 때려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호가 삐뚤어진 것에는 순임의 탓이 있다.

잘 따지고 보면 영호는 죽을 때까지 순임 탓을 한다. 혹은, 영호가 죽은 것에는 순임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짜여져 있다. 대체 어떻게, 마치 고르고13처럼 생긴 순임의 남편은 영호가 인생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는 그 시점에 영호를 찾아낸 것인가? 전날 밤까지 의식이 있었다던 순임은 대체 왜 영호가 자신을 찾아오자 의식을 잃었나?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영호는 이해받지 못한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억울억울 열매의 재료일 뿐이다. 그래서 영호는 죽는다. 순임과의 추억이 어린 그곳에서.

이렇게까지 순수하게, 100%의 네 탓으로, 100%의 억울함만으로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창동은 그걸 해냈고, 특히 남자 관객들은 이 영화를 '크 캬 커' 소리를 내며 보았을뿐더러,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영화라는 둥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2000년대 초에 이런 영화를 보며 엄지척 눈물 주르륵 하던 남자들이 지금 한국 영화계의 어엿한 중견들이다. 한국 영화판에 온통 억울한 남자들이 가득하고, 다들 '씨-발'이나 외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시발점이 바로 <박하사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나는 돌아가고 싶다. 이 영화를 모르던 그 순수의 시대로. 하지만 이미 봐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영호라던가, 영호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1999년 무렵의 이창동과 달리, 나와 이 글을 읽을 당신은 스스로의 행위와 그 행위가 낳은 결과에 대해,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몫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며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윤리적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박하사탕>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보고, 읽고, 만들어가며 살아갈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19-11-30

김재권(1934-2019)

김재권 교수가 세상을 뜨셨다. 현대 영미 철학계에서는 드물게도, 섬세하고 명료한 문체를 구사하던 분. 고인의 책 <심리철학>을 도서관에서 빌려 걸어다니며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은 아직도 책꽂이에 잘 꽂혀 있다.

그분의 초기 이론인 수반론에 따르면 김재권이라는 사람의 육체가 소멸하였으니 그에 수반하던 정신도 사라졌을 것이다. 후기에는 물리주의로 기울었고, 그 경우에도 그의 정신은 사망 후 존속할 근거가 없다. 하지만 그의 저서와 논문들은 철학을 공부했고, 공부하고 있으며, 공부할 모든 이들에게 좋은 지표와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부고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9-11-07

세대의 이름: 88만원 세대, 혹은 김지영 세대?

1.

1983년생인 나와 내 또래들이 속한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름을 붙이기 위한 시도는 숱하게 있었다. 88만원 세대, 에코 세대, G세대, 기타등등. 88만원 세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들으면 헛웃음이 난다. 내 세대를 규정짓기 위한 수많은 실패작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88만원 세대>의 성공으로 우리 세대는 그 책의 제목을 고스란히 이름으로 가질 뻔했고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의 제목을 4년제 대학에 다니거나 졸업할 예정인 우리가 감히 가져다 쓸 수 있느냐'는 반성과 회의 때문에 우리 세대는 스스로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지 못했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2000년대 후반부터 소위 '젊은 논객', '청년 논객'등의 이름으로 공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는 영광을 누려왔기에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 세대는 스스로에게 이름 붙이는 행위 자체를 꺼려왔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은 사고방식 때문인데, 이는 좋게 말하자면 윤리의식이나 염치라고 볼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배짱과 자신감 혹은 대표의식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의 구조와 변화를 설명하는데 가장 많이 동원되고 있는 수사법이다. 너무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익숙하며, 익숙한만큼 당연히 옳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 산업화 세대만 산업화를 한 것도 아니고, 민주화 세대만 민주화에 기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산업화 세대'라는 말부터 따져보자. 1950년 이후에 태어난 1차 베이비부머를 산업화 세대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은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 태어나 극빈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60년 어린이로서 4.19를 겪었고, 철 들 무렵부터 그들의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동시에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졸업하지 않거나, 대학에 진학한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이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며 뼈가 부서져라 일해서 오늘날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된 세대라는 것이 사회 일반의 관념이다.

얼핏 보면 산업화 세대의 성장 과정과 민주화 과정의 변곡점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4.19가 일어날 당시 그들은 10대 초반 혹은 열 살도 안 된 나이였다.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다. 반면 1980년 광주항쟁이 벌어지고 이후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한 투쟁이 벌어지던 무렵 그들은 이미 사회에 자리를 잡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생활인이었기에 '제대로 된 투쟁'을 하지 않은 세대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시각은 특히 386세대 내에 만연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해는 386세대의 자부심 혹은 오만에 의한 왜곡일 가능성이 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6.29 선언이 이루어진 것은 오직 386세대의 투쟁만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시민들을 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미국은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우려하여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젊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미감정이 확산되었다. 그래서인지 87년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미국은 전방위적으로 전두환 정권에게 군 동원을 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일설에 따르면 CIA는 미8군의 탱크를 빌려와 수도방위사령부 앞에 세워두고 무력 시위를 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6월항쟁의 성공 과정에 미국이 우호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광주학살 미국 방조설'에 비하면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수준이다. 이는 역시 미국측에서 내정간섭 논란 우려로 인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6월 항쟁의 과정에서 '산업역군'들의 역할을 도외시하는 것 또한 부당한 일이다.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5공 세력의 정책결정권자들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반발이었다. 시위가 단지 대학생이나 사회소외계층 뿐 아니라 중산층 전반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신군부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넥타이 부대'란 누구인가? 대학생, 혹은 갓 대학을 졸업한 386세대, 즉 '민주화 세대'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그들보다 윗세대인 산업화 세대의 다른 이름이 바로 '넥타이 부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6월 항쟁이 386세대 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의 승리이기도 하다면, 386세대가 민주화 세대라는 이름을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3.

1990년대 당시 30대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난 그들. 이른바 386세대 중 엘리트에 속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기에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가 1987년 이루어진 직선제 개헌의 산물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는 것은 두 가지 맥락을 지니게 된다. 첫째, 그들은 50대 중후반을 넘어서는 지금까지도 스스로를 '민주투사', 다시 말해 저항과 변혁의 주체로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을 체제를 유지하며 보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구성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둘째,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1987년 체제의 출발과 함께하는 기본 세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기꺼이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87년 체제의 출발에 대해 386세대가 '민주화 세대'를 참칭함으로써 자신들이, 혹은 자신들만이 현 민주 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양 이야기하는 것은 부당하다. 마치 1960년의 4.19가 '4.19 세대'만이 아닌, 당시 사회를 구성하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의지가 모였기에 벌어진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세력화한 특정 세대, 연령 집단 중 같거나 유사한 사회적 단위 속에서 동질적인 세대 경험을 한 이들이 거대한 사회 변화에 큰 기여를 할 수는 있으나, 어떤 집단만이 전반적 사회 변화를 대변하거나 그것을 자신들의 것인 양 포장하는 일은 옳지 않다.

소위 '산업화 세대'가 민주화에 기여한만큼, '민주화 세대' 혹은 그 세대에 속하는 이들 역시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기여한 바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안철수, 이재웅, 이찬진 등 소위 '벤처 1세대' 역시 모두 80년대 학번이다. 그들은 현재 정치권에 포진하고 있는 386세대와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민주화 투쟁, 반미투쟁, 혹은 통일운동 등에 투신하는 대신, 그들이 청년기를 보내던 당시 막 움트기 시작한 IT 산업의 태동과 변화에 주목하고 그 흐름에 탑승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그리고 현대자동차그룹의 자동차를 수출해 우리에게 필요한 석유 등 천연자원을 수입하여 먹고 사는 나라가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아직 실리콘벨리에 명함을 내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세계 어느 나라를 비교 대상으로 놓고 보더라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IT 선진국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운동권은 아니었던 그들, 말하자면 '386 우파'들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김대중 정권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벤처 창업 열풍에 탑승하여 새로운 산업 영역을 창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 면에서 월등하고 인프라 또한 비교할 수 없이 튼튼한 일본에서도 이런 식의 대대적인 산업 변화를 이끌지는 못했다.

삼성전자와 소니의 위상이 변화하게 된 것은 단지 두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가전제품'이라는 영역이 위축되고 'IT'가 떠오르게 되었던 거대한 산업적 변화 및 그에 대해 양국이 산업정책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여부와 맞물려 있다. 일본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한국은 성공했다. 그리고 한국의 성공에는, 90년대에 30대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1960년대생이지만 '민주화 세대'는 아닌, '386 우파'의 역할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요컨대 386세대라고 해서 모두 민주화 세대는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무렵 대학에 다닌 이들이 자신들을 민주화 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 전체가 나름의 기여를 해서 이루어낸 87년 민주 체제에 대해 자신들의 몫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비판은 산업화 세대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의 노고와 헌신이 2차 산업 중심의 산업화에 큰 기여를 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3차 산업, 4차 산업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변하고 있는 지금, 1950년대생만을 일컬어 산업화 세대라 부르는 것은 역사적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것이다.


4.

다시 우리 세대로 돌아가보자.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은, 그 개념이 등장했던 노무현 정권 무렵부터 가시화된 비정규직의 일상화를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시의적절했고 유의미했다. 지금도 우리 세대 뿐 아니라 더 젊은 세대 역시 마찬가지로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 그러면서도 장래를 보장하기 어려운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담고 있기에 그것을 한 세대가 자신의 것으로 삼아 깃발처럼 휘두르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내가 속한 세대의 구성원들은 오래도록 고심해왔다. 그와 같은 토론들은 대부분 인터넷 게시판이나 사석에서 이루어졌기에 쉽게 인용 가능한 출판물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많은 논의에 참여해온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1980년대생들은, 특히 1960년대생들이 자신들을 대뜸 '민주화 세대'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대범함 혹은 뻔뻔함을 갖지 못했다. 물론 그러한 고민과 주저함에는 윤리적 근거가 없지 않다. 대학생 혹은 사회적 발언권을 인정받는 고학력층으로서 스스로가 특권 계층임을 자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는 88만원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러한 '윤리적' 판단이 꼭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힘을 갖지 않는 것, 권력을 쥐지 않고 공백을 창출하는 것은, 과연 그 자체만으로도 윤리적인가. 2019년의 나는 회의적이다. 가령 미국이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병력을 축소하고 철군시키자 그 힘의 공백을 타고 러시아의 개입이 커졌으며, 희대의 학살자이며 독재자인 아사드 정권의 폭정이 심해졌고, 내전이 심화되면서 대대적인 난민이 발생한 최근의 국제 정세를 떠올려 보더라도 그렇다. 어떤 힘의 존재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힘, 권력의 오용과 남용이 문제이고, 그 오남용 중 가장 나쁜 형태의 오남용은 바로 권력의 공백이다. 진보적인 지향을 잃지 않고 있지만 현실주의자이기도 한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88만원 세대'의 대표 주자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 부르지 않기로 하였다. 이는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이고 세력화함으로써 권력을 갖게 되는 과정을 전반적으로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니 그렇기도 하거니와 당시로서도 그와 같은 전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세대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들은, 권력을 포기하고 대신 한 줌의 도덕을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담론의 주도권은 정작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할 세대의 손에서 벗어나버렸다. 대신 그것은 이미 자신들이 세상의 모든 선과 도덕을 독점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들, 즉 자칭 민주화 세대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 광주항쟁을 자신들의 세대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그들에게 비정규직 및 국내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볼 때, 미국에 대한 분노와 저항보다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 시절에 두루 사용되었던 용어를 빌리자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충돌할 때, 자칭 민주화 세대는 늘 민족모순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개성공단은 올곧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찬성이 아니라 반대의 대상이어야 한다. 외국의 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이용, 혹은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여건 속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칭 민주화 세대 및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 현재의 진보 담론 구조 속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찾기 어렵다. '계급모순'이 '민족모순' 앞에 입을 다물고 마는 형국인 것이다.

'88만원 세대'가 자체적인 의제 생산 구조를 갖추고 진보의 갱신에 나서서 성공했다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약간의 사회적 인지도 외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 사회적 인지도라는 것 역시 자칭 민주화 세대의 세계관 속에서 작동하는 무언가였으니, 88만원 세대가 가진 운신의 폭은 지금 회고조로 짚어보는 것보다 훨씬 좁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세대가 스스로에게 이름 붙이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권력을 갖기 위한, 혹은 권력 투쟁에 나서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주체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5.

201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역사는 다시 한 번 1980년대생을 호명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지금 모두가 아는 그 책,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주의에 입각해 쓰여진 소설이지만 동시에 8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의 집단적인 경험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80년대생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아아 우리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88년 올림픽부터 1997년 IMF까지 약 10여년의 기간은 한반도의 역사상 가장 역동적으로 경제적 힘이 용솟음치고 문화적으로 다방면에 걸쳐 '기성세대'의 자리를 '신세대'가 빼앗아가던 무렵이기도 하다.

이런 세상을 보며 자랐기에 80년대생들은 자신들이 성인이 된 후에 살아갈 사회도 똑같은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어느 정도의 민주적 구조와 평등은 당연히 주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삶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투쟁하되 자칭 민주화 세대처럼 싸우지 않는다. 일하되 타칭 산업화 세대처럼 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풍요와 어느 정도의 제도적 민주화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모순'은 물론이거니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경제적 목표 의식 따위가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으로 와닿을 리 없다.

반면 <82년생 김지영>이 제공하는 문제의식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싱싱한 지금의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동시에 김지영은 소위 명문대에서 교육받은 고학력자이기도 하다. 높은 학력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쌓아온, 혹은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온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임신, 출산, 육아 그 자체의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고통을 생생하게 드러낸 것만큼이나, 그러한 과정에 거의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 혹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경력 단절이 문제인 것은 사람이 스스로의 가치를 노동과 노동에 따른 보상을 통해 찾는 선순환의 과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여성들은 전적으로 어머니와 주양육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모든 여성에게 그러한 역할이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것은 큰 문제다. 하물며 '아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80년대생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는 <밀레니얼 선언>에서 이야기하는 바, 인적자본으로 길러졌지만 노동시장에 속하지 못하는 밀레니얼들의 사정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그 위에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문제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사회학적인 용어를 사용해보자. 한국의 노동시장을 정규직, 공무원으로 구성된 1차 노동시장과 비정규직 및 불안정노동으로 이루어진 2차 노동시장으로 나누어보면, <88만원 세대>는 후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반면 <82년생 김지영>은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려 하거나, 진입했거나,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 출산, 육아 등으로 인해 다시 배제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두 책이 다루는 대상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같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경제적, 사회적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는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두 책 모두, 약 10여년의 시차를 두고, 베스트셀러를 넘어 한 시대를 규정짓는 책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6.

<82년생 김지영>은 <88만원 세대>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80년대생들을 사회적 맥락에서 호출하고 있다. 이는 그 세대 집단의 주체화를 요청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질문은 주체화의 요청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과연 그 부름에 응할 것인가, 응한다면 이제 80년대생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기 시작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세대가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는가, 스스로에게 어떤 이름을 허락하는가의 문제는, 해당 세대 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행보를 좌우하는 사안이다. 잠시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라는 구분으로 돌아가보자. 저 수사법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히 자칭 민주화 세대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현행 민주주의 체제에 상당히 많은, 혹은 대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양 주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호칭이 옳지 않고, 역사적 맥락을 왜곡시킨다는 것을 앞서 우리는 확인했다. (개인적으로는 50년대생과 그 앞뒤의 세대를 '도쿄올림픽 세대', 60년대생부터 70년대 초반생까지를 '서울올림픽 세대'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30대인 80년대생들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한일월드컵 세대'가 되겠다. 이 호명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2000년대 말, 당시 20대였던 우리 세대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는 이름 하에 주체화했다면 어땠을까. 비정규직 저소득층 청년의 문제를 고학력 4년제 대학생들이 대리하는 문제가 발생했으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비정규직과 노동시장의 이분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동력을 우리 세대가 잠시라도 손에 넣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었을테지만,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대담한 가정을 해볼 수 있다. 80년대생 여성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치의 재구성은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와 같은 정체성의 구성과 주체화가 이루어진다면, 80년대생 여성들은 스스로를 '김지영 세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중년 남성으로 이루어진 정치권은 자신들을 지지하지도 않는 냉소적인 젊은 남자들을 끌어안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젊은 여성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청년들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김지영 세대'라고 부른다면, 그 세대 혹은 우리 세대는 자체적인 의제를 찾고 확보하는 일, 특히 386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며 자신들의 활동 반경을 확보하는 일에 과연 관심이 있는가?

<밀레니얼 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미국 뿐 아니라 한국처럼 산업화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고, 경제 개발의 풍요를 누리며 성장한 중년층이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 나라의 청년들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젊은 노인들'은 당장 취직을 걱정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사이, 체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마저도 '늙은 청년들'의 전유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맬컴 해리스는 이런 상황 속에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책을 마무리지었다. 번역자로서 나 또한 과도하게 정치적인, 혹은 모종의 정치적 결집과 실천을 요구하는 말을 역자 후기에 담지는 않았다. 저자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 책은 출간된 후 몇 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별도의 자리가 마련되고 나니, 한때의 '청년 논객'으로서 다양한 술회가 떠오른다. 그 회한의 폭풍 속에서,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최악의 위기와 갈등이야말로 다시금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여본다.

2019년 11월 6일
서울, 팟빵홀




일러두기: 이 글은 2019년 11월 6일 서울 팟빵홀에서 있었던 <밀레니얼 선언> 북토크 발제용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2019-09-29

'과거를 청산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독일 재벌 가문 중 ⅓ 가량은 자손이 성년(16세-18세)이 될 무렵 서약서를 쓰게 한다. 지분 소유와 경영 개입이 주된 골자지만, 종교적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산다거나, 공적으로 사진 찍혀 노출되지 않는다거나, SNS를 안 한다거나,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사실 독일은 미국 중국 다음으로 슈퍼리치가 많은 나라다. 하지만 이렇듯 부자들이 극히 몸을 사리는 문화로 인해 존재감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독일이 잘 사는 나라니 부자가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짜 질문'은, 대체 왜 독일 부자들은 미국 부자들과 달리 자기현시욕을 억누르며 살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만 간단하다. 1세대 부호들이 탑 랭커인 미국과 달리 독일 부자들은 대부분 기존 자동차/부품/유통업체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기업들은 직간접적으로 나치 시대에 협력자였다.

독일 (특히 북부) 특유의 경건한 개신교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나치 시대부터 재벌이었던 가문의 자손들이 바로 독일의 현재 상위 부호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 가능한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독일을 '나치/과거 청산'의 모범적인 사례인 양 떠들어대는 국내의 분위기는 사실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 구체제에 협력하거나 그 일부였던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가 전쟁 이후에도 거의 같거나 비슷한 지위를 차지하고 살았던 것은 독일, 일본, 그 외 모든 전범국에서 마찬가지였다.

둘째, 돈의 역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적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사업 영역이 생겨나고 자본주의가 역동적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보다 낫다고 볼 여지가 있다.

IPO로 한탕 하고 '엑싯'하는데 혈안이 된 젊은 사업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본주의 소굴 미국을 고까워하는 이들은 유럽, 독일을 어떤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처럼 칭송하곤 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은 모두 자신이 창업자로서 부를 쌓은 1세대 슈퍼 리치이며, 이런 이들이 큰 부와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한 나라가 미국이기도 하다. 이는 남의 눈을 피해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나치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내려온 부를 간직하며 암암리에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일식 부자 모델보다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를 정답으로 이끌어주는 원칙은 있을 거라 믿는다. 사람이 노력한만큼 벌어서 먹고 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다. 물려받은 부가 대대로 이어져 사실상 신분제로 고착되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 혹은, 나쁜 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과거를 '청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의 역동적 힘이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대를 이어 내려오는 '묵은 돈'이 젊은 창의력과 에너지를 짓누르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참고 기사: “Germany’s business barons are finding it harder to keep a low profile”. The Economist, 2019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