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9

'과거를 청산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독일 재벌 가문 중 ⅓ 가량은 자손이 성년(16세-18세)이 될 무렵 서약서를 쓰게 한다. 지분 소유와 경영 개입이 주된 골자지만, 종교적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산다거나, 공적으로 사진 찍혀 노출되지 않는다거나, SNS를 안 한다거나,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사실 독일은 미국 중국 다음으로 슈퍼리치가 많은 나라다. 하지만 이렇듯 부자들이 극히 몸을 사리는 문화로 인해 존재감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독일이 잘 사는 나라니 부자가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짜 질문'은, 대체 왜 독일 부자들은 미국 부자들과 달리 자기현시욕을 억누르며 살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만 간단하다. 1세대 부호들이 탑 랭커인 미국과 달리 독일 부자들은 대부분 기존 자동차/부품/유통업체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기업들은 직간접적으로 나치 시대에 협력자였다.

독일 (특히 북부) 특유의 경건한 개신교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나치 시대부터 재벌이었던 가문의 자손들이 바로 독일의 현재 상위 부호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 가능한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독일을 '나치/과거 청산'의 모범적인 사례인 양 떠들어대는 국내의 분위기는 사실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 구체제에 협력하거나 그 일부였던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가 전쟁 이후에도 거의 같거나 비슷한 지위를 차지하고 살았던 것은 독일, 일본, 그 외 모든 전범국에서 마찬가지였다.

둘째, 돈의 역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적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사업 영역이 생겨나고 자본주의가 역동적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보다 낫다고 볼 여지가 있다.

IPO로 한탕 하고 '엑싯'하는데 혈안이 된 젊은 사업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본주의 소굴 미국을 고까워하는 이들은 유럽, 독일을 어떤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처럼 칭송하곤 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은 모두 자신이 창업자로서 부를 쌓은 1세대 슈퍼 리치이며, 이런 이들이 큰 부와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한 나라가 미국이기도 하다. 이는 남의 눈을 피해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나치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내려온 부를 간직하며 암암리에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일식 부자 모델보다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를 정답으로 이끌어주는 원칙은 있을 거라 믿는다. 사람이 노력한만큼 벌어서 먹고 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다. 물려받은 부가 대대로 이어져 사실상 신분제로 고착되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 혹은, 나쁜 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과거를 '청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의 역동적 힘이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대를 이어 내려오는 '묵은 돈'이 젊은 창의력과 에너지를 짓누르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참고 기사: “Germany’s business barons are finding it harder to keep a low profile”. The Economist, 2019년 6월 15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